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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이 되다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몸이지만,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 19절
그날은 빌라의 주인이고 부자인 이스라엘계 그리스 사람인 그리스보(Crispus)의 거실에서 모였습니다. 그 자리에는 존경받는 가이오(Gaius)도 있었고, 스데바나(Stephanas)와 그의 식솔들도 함께 했습니다. 도시 재무관으로 일하고 있는 에라스도(Eraetus, 「로마서」 16,23)가 조금 늦게 허겁지겁 당도하자 그리스보가 일어나 집회의 시작을 선언하고, 요즘 공동체 내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걱정이지만 오늘 특별히 주요한 사람들이 많이 모였으니 공동체가 화합할 좋은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합니다.
이어서 가이오가 일어서서 에베소에 체류하고 있는 바울 사도가 여러 사람들에게 복음의 감동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며, 아울러 교회 내의 분파가 바람직하지 않다는 사도의 가르침을 전합니다. 바울보다 더 위대한 사도들의 가르침이 바울과 다르다는 주장을 폈던 몇몇 사람들은 그 말이 마뜩치 않았지만 모처럼 많은 이들이 모여 화합을 논하는 데 찬물을 끼얹지 않으려 자제하고 있었습니다.
실은 그들이 분파를 만들고 서로 상대의 도덕적 흠집들을 들춰내며 헐뜯는 동안 방언하는 여자들이 들고 일어나 머리에 쓴 수건을 벗어던지고 남편과의 성관계도 거부하면서 사도처럼 말하고 예언을 했습니다. 이에 놀란 남편들과 분파 지도자들은 저 시끄러운 여자들을 제어하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그녀들은 더욱 큰소리로 방언과 예언을 쏟아냈습니다.
모든 질서가 뒤집어져도 마지막까지 흔들리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가정의 질서가 교란되자 남자 지도자들은 위기의식에 빠집니다. 이것이 이날의 화합을 위한 회합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지요.
가이오의 연설이 끝나자 그들은 서로 악수를 하고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식사가 시작됩니다. 관행에 따라 모임 장소를 제공한 그리스보가 마련한 식사였습니다.
그런데 식사가 끝나고 얼마 지나 브리스가(Prisca/Priscilla)와 아굴라(Aquila) 부부가 당도하였습니다. 비교적 부유한 사람이었지만 유난히 많은 천막 주문 탓에 하루 종일 고된 노동에 시달리다 지친 몸이었습니다. 그이들의 공장의 노동자들 몇도 함께 당도했고, 그 뒤를 이어 같은 빌라와 옆의 빌라에 있는 상점 노동자들도 도착했습니다. 모두들 땀에 절어 있었지요.
거실을 가득 채웠던 식후의 향긋한 음식 냄새가 그들의 땀 냄새와 섞이면서 공기가 역겨워집니다. 이에 몇몇 사람들이 인상을 찌푸리며 늦은 사람들에게 이제야 왔느냐고 역성을 냅니다. 상점과 공장의 하인들과 노동자들인 그들은 아무 말도 못하고 엉거주춤 서 있습니다. 그러자 공동체 지도자의 한 사람이자 바울의 가장 절친한 동료이며 고린도의 그리스도 공동체를 만드는 데 혁혁한 공로가 있는 여성 브리스가가 ‘집주인’들의 태도에 버럭 화를 내며 반론을 폅니다. 주 안에서 주인과 종이 차별이 없다는 가르침은 무어냐고, 어떻게 자기들끼리만 식사를 하고 배고픔과 노동에 지친 사람들을 이렇게 홀대할 수 있느냐고 말입니다.
다시 큰소리가 나고 언쟁이 벌어집니다. 갈등을 조정하고 화해의 자리를 만들고자 했던 주의 만찬 자리는 이렇게 또 다시 싸움판이 되었습니다.
고린도 시의 그리스도 공동체 내에서 일어난 갈등을 보여주는 한 편의 가상의 이야기입니다. 이 갈등은 크게 세 층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공동체 지도자들 사이에서 벌어진 주도권 갈등입니다. 그들은 바울파, 베드로파, 아볼로파, 그리스도파 등의 분파로 나뉘어 서로를 헐뜯고 상대방의 도덕적 흠집들을 폭로하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 갈등의 층위는 남편의 아내이기를 포기 혹은 유보하고 발언의 주체로 등장한 여성들로 인해 야기된 갈등입니다. 여기서 그녀들은 방언하는 여성들입니다. 방언은 낯선 신적 소리를 상징하는 것으로, 남성과 지배층의 언어질서에서 배제된 이들이 공동체에 영향을 미치는 전형적인 대안언어 현상입니다.
셋째는 주인 대 종, 부자 대 가난한 자의 갈등입니다. 신분적, 경제적 차별이 엄존하는 사회에서 그러한 계층을 만나게 하고 새로운 공동체를 꿈꾸는 이들이 현실의 차별적 질서와 얽히면서 나타난 갈등이지요.
그런데 이것은 고린도 시에 속해 있는 그리스도 공동체가 겪고 있는 고유한 갈등 양상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금물입니다. 그보다는 이 세 가지는 고린도 시 전체의 갈등을 집약해 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고린도 예수공동체의 문제는 고린도 시가 겪고 있던 문제의 축소판이라는 것입니다.
고린도 시는 기원전 2세기 중반,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이 연합하여 벌인 반로마 항쟁에서 패배한 뒤 로마에 의해 잔혹하게 파괴된 도시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한 세기 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가 이 도시를 재건합니다. 동쪽으로는 소아시아와, 그리고 서쪽으로는 이탈리아와 연결되는 항구가 있는 독특한 지형이 갖는 경제적 가치를 덕입니다. 카이사르는 이곳에 퇴역군인들과 로마시의 하층민을 이주시켰고, 이들에 의해 친 황제적인 새로운 엘리트층이 형성된 도시가 바로 고린도입니다.
하여 다른 오래된 도시들에 비해 이곳은 전통적 권력이 체계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도시 지배층간의 주도권 갈등은 상대적으로 심했습니다. 한편 이러한 불안정성은, 이 도시가 진취적 사상이 넘실거릴 수 있는 기반이기도 했습니다. 여성의 사회적 도전이나 하층민 혹은 노예의 도전도 그래서 활발했습니다.
이와 같이 도시의 갈등의 축소판이 바울이 구축한 고린도의 예수 공동체에서도 벌어졌습니다. 안정된 전통이 터 잡고 있던 다른 도시의 예수 공동체에서는 볼 수 없는 3차원의 복합적 갈등이 이 도시에서, 이 도시의 공동체에서 노정되었던 것입니다.
이 소식에 접한 바울이 공동체에 보낸 장문의 서신이 바로 「고린도전서」입니다. 특히 오늘의 본문이 포함된 단락(9,16~27)은 이 서신 전체에서 제시된 바울식 대안의 응결체입니다. 그 내용인즉슨,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율법주의자든 이스라엘 율법을 모르는 사람이든, 자신은 바로 그 사람이 되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이 단락의 마지막 구절에는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나는 내 몸을 쳐서 굴복시킵니다.”(27절) 이것은 그가 「빌립보서」에서 말한 그리스도의 모습과 겹칩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2,6~8)
타인이 됨으로써 그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었다는 그리스도의 진리, 바로 그것입니다. 즉 이것은 ‘살림의 진리’입니다. 살림, 곧 죽임 반대편의 것은 세상의 모든 것을 압도하는 근본적 진리, 세상의 모든 현상을 압도하는 놀라운 현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비우는 것, 오히려 그런 진리에 대한 확신을 버리고 단지 허망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타자의 모습으로 되는 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지할 것은 이것은 제국의 질서에 정반대에 있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제국’은 타자를 정복하고, 타자를 약탈하여 비워버리고 그 속에 자기를, 자기에 대한 선망을 채워버리는 체제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체제는 ‘타자 살해’의 질서입니다.
하여 제국의 질서 속에서 그 타자는 세상 속에서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으며, 나아가 존재가 박탈됨으로써 존재 자체가 사라지는 자가 됩니다. 민중신학은 이러한 존재가 사라진 자, ‘비존재가 된 존재’, 비존재가 됨으로써 존재라고 인정되는 자를 ‘민중’이라고 불렀습니다. 가령, 땅과 집과 조상을 ‘떠나’ 도시로 이주하여 무허가 주택, 곧 주택으로 ‘인정되지 않는 집에 거주’하는 자가 된 도시 이주자는 ‘기본권을 갈가리 난도질’되면서 극한적 저임금의 노동자인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떠나고’ ‘인정되지 않는 집에 살고’ ‘기본권을 난도질되는’ 자, 곧 존재의 자리를 박탈당하는 자가 됨으로써 그는 그 사회 속에 배치될 곳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민중신학은 민중의 사라진 존재성을 ‘유실된 말’에서 보았습니다. ‘한’은 유실된 말, 곧 말의 성격을 잃어버린 소리 혹은 흔적입니다. 하여 한의 소리, 그 말이 유실된 소리에서 소리의 내력을 발견하는 것, 즉 그것이 바로 민중신학적 살림의 공동체의 과제인 것입니다. □ (올빼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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