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탈그리스도교적 정체성의 신앙/삶 ― 신자유주의적 지구화 시대의 그리스도교 민중운동 모색>이라는 제목으로 '기독여민회 제7회 종교개혁 토론회'의 발제글(2000)로 발표된 것을 수정보완하여 나의 책 [반신학의 미소]에 <신자유주의적 지구화 시대의 그리스도교 민중운동 모색>의 제목으로 재수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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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적 지구화 시대의 그리스도교 민중운동 모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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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문명의 미덕 가운데 하나는 관계의 공간적 한계를 규정짓던 경계들의 ‘더 나은’ 돌파 능력을 인류에게 선사해주었다는 데 있다. 그러한 능력은 점점 가속화되어, 정보통신기술과 멀티미디어의 발전에 힘입어 오늘날의 세계는 어느 곳이든 ‘동시문화권’ 속에 편입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요컨대 이제 지구의 모든 곳은 인간들 사이의 직접적인 관계 맺음의 무대, 즉 ‘지구촌화’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인류 기술문명의 문제는 관계 맺기 능력의 향상 속도를 그것에 대한 성찰 속도가 거의 언제나 따라잡지 못해 왔다는 데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역사적으로 자본주의 시대의 관계맺기 양상을 주도해 간 것은 바로 ‘자본’이었다는 사실이다. 자본은 이윤의 극대화를 추구한다. 그러므로 자본이 주도하는 관계맺기의 양상은 이윤의 극대화를 저해하는 장벽을 제거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진다. 거칠게 말하면, 이러한 양상의 자본 운동을 유토피즘적으로 미학화한 것이 바로 자유주의라는 이데올로기다. 그러나 그것이 고양됨에 따라 도래한 결과는 (유토피아적 이상의 구현이 아니라) 전쟁이요 생태환경의 황폐화였다. 그러므로 발터 벤야민이 경고한 바, 기술문명의 급가속화 양상은 마치 파국을 향해 ‘일방통행로’(one-way street)를 질주하는 것과 같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이후 국가적이거나 국제적인 정치경제적 기구(UN; 브레튼우즈 체제하의 국제기구들, 가령, IMF, GATT 등)의 관리 아래 자본의 이윤 추구 행위는 정치경제적으로 일정한 조절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 정보통신기술을 비롯한 기술문명의 급속한 발전에 힘입어 정치경제적 기구가 관여할 수 없을 만큼 경제적 유동성이 놀라운 수준으로 향상됨에 따라, 자본은 국경의 장벽을 뛰어 넘어 전 지구적 통합을 향해 질주를 가속화하고 있다. 오늘날 세계 많은 곳에서 정치적 구호로서 외쳐지고 있는 ‘신자유주의’라는 이데올로기는 바로 전 지구화한 자본 운동을 가로막는 일체의 장애물이 제거되어야만 진정한 번영과 행복이 이룩될 것임을 주장한다. 이에 따르면 모든 것은 ‘시장’의 가치 속에 용해되어야 하며, 이윤 창출을 위한 공헌에 따라 일체의 존재의 가치가 평가되어야 한다. 심지어 시장의 후방 개념으로 발생한 복지조차 유실된 노동력의 시장 재편입에 초점을 둔 이른바 ‘일하는 복지’(welfare-to-work)로 재개념화된다.
1995년 공식 출범한 국제무역기구WTO는 국제통화기금(IMF)과의 연계를 통해서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의 추진을 사실상 총괄하는 국제적 기구다. 그리하여, IMF-GATT를 대체한, IMF-WTO 체제는 자본의 무제약적 운동을 보장하려는 제도들의 출현을 전 지구적으로 강제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제도적 기반을 확고히 하면서 확산되고 있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그 ‘장밋빛’ 유토피즘과는 달리, 인류에게 전대미문의 심각한 ‘위험사회’를 선사해주었을 뿐 아니라, 그러한 위험에 직면한 인류의 자기 조절 능력을 잠식해버렸다. 그리하여 고삐 풀린 자본이 활개치고 다니는 곳에서 무수한 고통이 양산되고 있다. 빈익빈 부익부의 현상이 현저히 심화되고 있을 뿐 아니라, 저변층의 보호 시스템을 최소한에서라도 운용해오던 주체인 정치적 기구들(특히 정부 또는 지방정부)이 앞다투어 민주적 제도들을 제한하면서 자본 유인을 위해 경합하는 이른바 ‘바닥을 향한 경쟁’race to the bottom에 열을 올리는 형편이다. 그리하여 보다 가시적 현실로서 죄어오고 있는 존재 유실의 위협 아래 놓인 무수한 개인들의 자기 파괴 행위(자살, 범죄화, 노숙화, 질병, 마약중독 등등)가 속출하고 있다. 또한 가족과 공동체의 붕괴로 인한 문화적 정체성이 교란되었고, 대안적 공동체들이 친밀성의 교감보다는 경쟁사회적 치열성을 따라 재편됨으로써 문화적 황무지화의 위험성을 야기시키고 있다. 이러한 가족과 공동체 붕괴의 위협 아래서 타자에 대한 배타주의가 고조되어 사회문화적 공격성이 강화되기도 한다(우익테러리즘, 신종족주의, 근본주의적 종교운동 등등).
이렇게 세계 곳곳에서 신음하는 아벨의 곡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음에도 우리는 아직 신의 개입을 체험하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의 세계는 지독한 무신적 세계이며, 오늘날의 종교, 특히 그리스도교는 철저한 무신론자들의 종교가 되어버렸다. 신 부재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고통의 현실에 개입하기는커녕, 그러한 절규를 가슴 아파하며 간구할 만한 신앙심도 잃어버린 상태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은 ‘윤리적 해이’ 상태에 빠져 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교는 보다 적극적으로 자기 권위 확대에 몰두하고 있으며, 세계의 곳곳에서 권력 게임을 벌이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성공주의에 취한 상태에서 주류 교회는 낙관론에 도취된 채, 자본세력 만큼이나 열렬한 신자유주의의 포교사가 되어버렸다.
물론 세계의 고통의 소리에 귀를 열어둔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그들은 이 고통의 원인이 자본인 것도 알고 있으며,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실천에 참여하고 있다. 이 글은 그리스도교의 이러한 민중적 역사 개입의 당위성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런데 어떤 실천이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것이 되려면 실천적 개입의 시대적 적합성을 동시에 구비해야 하며, 그것은 시대에 대한 그리스도교적인 참여의 이론을 요청한다. 여기서는 그리스도교적인 ‘민중적/반권력적 개입’으로서의 실천에 관한 신학 이론적인 문제를 다룰 것이다.
2
주지하듯이 한국의 민주화 운동에서 그리스도교 사회운동의 역할은 지대했다. 그것은 한편으로 강압적인 권위주의 정권에 의해 도전세력의 형성이 억제된 상황에서 종교 부문의 비판적 개입의 입지가 비교적 넓었고, 그 중에서도 특히 그리스도교가 타종교들에 비해 훨씬 다양한 영역에 걸쳐 조직집단이 이미 잘 짜여져 있던 때문이기도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타종교들에 비해 그리스도교적 사유 체계가 ‘민주 대 반민주’라는 이원대립적 의제와 보다 잘 부합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전자와 관련하여, 진보적 교회뿐 아니라 연령별(청년학생 단체 등), 직업별(성직자 결사체, 교수 결사체 등), 직능별(인권단체, 도시산업선교회, 기독교농민회 등), 지역별(전국조직의 지역 결사체 등), 성별 결사체들(기독여민회 등) 등이 조직적 인적 차원에서 저항의 주된 미시동원적 토대를 구축하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후자와 관련해서는 민중신학의 역할에 주목하게 된다. 보다 성찰적인 신학적 성과물들이 없었던 것은 아님에도, 대중은 일반적으로 민중신학이 지배-피지배의 단순 이분법에 기초해서 그것을 매개하는 억압의 메커니즘으로부터의 해방을 향한 사회적 개입을 강조하는 형식을 띠고 있다고 보았다. 이는 주류적 신학의 지배의 정치학을 저항의 정치학으로 단순 전도시킨 것인데, 이와 같은 그리스도교적 사유의 단순 이분법적 사유는 지배담론과 신앙을 결탁시키는 것의 용이함만큼이나 저항담론과 신앙간의 조화 또한 그리 어렵지 않게 구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그리스도교 사회운동의 가능성은 동시에 제약성이기도 한데, 특히 1980년대 들어서면서 그것이 한계요소로서 뚜렷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우선 권위주의 정권의 폭압성이 다소 이완되면서 저항의 사회적 거점들이 다양화됨에 따라 그리스도교 사회운동의 파급력이 뚜렷하게 저하되었다. 첫째로, 그리스도교 단체들은 사회운동에서의 특별한 입지를 상실하였다. 둘째로, 저항방식에 있어서도 각 미시동원적 결사체들의 게릴라식 저항보다는 훨씬 광범위한 대중운동의 공간을 확보하려는 노력이 활발해짐에 따라 미시동원적 결사체들 간의 공식 비공식 연결망이 복잡하게 구축되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의 입장에서는 정체성의 혼란을 야기했다. 왜냐하면 대중이 일반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민중신학은 여전히 그리스도교 중심주의를 극복하지 못했고, ‘안과 밖’이라는 이분법을 성찰적으로 사유하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가령, 노동운동과 민중교회간의 갈등에서 그 한 실례를 볼 수 있는데, 성직자들이나 기타 교회 지도자들의 개인적 신앙이나 인격과는 관계없이 교회적 신앙이 담고 있는 리더십의 성직자 중심주의와 활동공간의 교회 중심주의는 공장과 교회를 조화로운 저항의 거점으로 발전시키는 데 저해 요소로 작동했던 것이다.
한편 1980년대 갑자기 불어 닥친 마르크스주의의 태풍은 사회체계에 대한 분석에 소홀했던 민중신학의 입지를 크게 위축시켰다. 그것은 근대 이후 사회적 개입에 소극적이었던 신학전통을 민중신학이 철저히 반성하지 못한 데 주된 이유가 있다. 위기이론이 부재하던 1970년대 시대에는 수사적이고 가치전복적인 게릴라식 언술이 유용했다면, 1980년대의 사상적 지평은 근대 자본주의 발전에 대한 보다 체계적인 이론을 요청하였던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와의 학제적 연계를 시도하는 민중신학 내의 소수의 흐름은 그러한 위기에 대한 하나의 적절한 대응일 수 있었으나, 오히려 교회로부터의 강한 문제제기에 직면하여 미완의 시도로만 그 잔영을 남기고 말았다.
1990년대를 경유하면서 한국 그리스도교 사회운동은 사회적 개입의 지점을 거의 상실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지난 30년간의 실험은 실패임이 판명되었다. 더욱이 우리가 현재 직면하고 있고, 예측할 수 있는 향후 얼마간의 미래는 그리 낙관적이지 않다는 심각한 위기의식이 우리의 실패에 대한 자괴감을 더욱 증폭시킨다. 그러므로 이제 한 세기를 마감하는 시점에서 한국 그리스도교는 문제를 되짚어보고, 민중적 사회 개입의 신학이론을 모색해야 한다. 나는 여기서 ‘오늘 여기’와 ‘발본적 반성’이라는 개념을 이론 모색의 기축으로 삼고자 한다.
첫째로, 이른바 신자유주의적 지구화가 우리의 현재와 근거리 미래를 규정짓는 현실이라고 할 때, 우리의 신학 이론의 모색은 ‘오늘 여기’라는 표현이 상징하는 ‘시대적 적실성’의 문제에 대한 진지한 숙고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이것은 위기 넘어서기를 다루는 신학 ‘외부’의 이론들과의 제휴를 요청하고 있다.
한편 신학 내부의 논의는 시대적 적실성을 충족시킬 만한 요소를 결여하고 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형성되어온 그리스도교적 정체성이 우리의 이러한 이론적 모색에 심각한 장애요인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신학 외부의 이론과의 대화를 가로막고 있기까지 하다. 따라서 주류적인 그리스도교적 정체성에 대해 ‘발본적으로’ 질문을 다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신앙적 정체성에 대한 근본적인 의심은 우리를 역사의 예수에게로 돌아가게 이끌어 간다.
다음에서는 위에서 말한 두 번째 측면인 ‘발본적 반성’의 차원을 먼저 검토해본 뒤에, 오늘 여기에서 시대적 적실성에 맞는 개입의 이론적 모색에 관한 문제를 이야기할 것이다. 그런데 이 두 요소가 서로 연계되어 있음을 주지해야 한다. 신학 이론의 ‘시대적 적실성’ 문제는 그 방해물인 전통을 넘어서야 하고, 그것은 예수의 복원을 요청하지만, 동시에, 예수는 시대적 적실성을 통해 우리에게 유의미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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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말한바 그리스도교의 민중적 사회 개입의 당위성을 우리의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교가 예수사건을 신앙적 원사건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신앙적 원사건’이라 함은 신앙 담론이 역사 속에서 시대의 옷을 입고 계속 새로 태어나야 함에도 불구하고, 예수사건을 준거 삼아 끊임없는 자기검열 과정을 경유하는 가운데서 그리스도교가 형성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예수사건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기억은 ‘신의 육화肉化’라는 고백 속에 포괄되어 있다. 즉 신이 스스로를 낮춤으로써 인간 역사에 개입하여 구원사건/해방사건을 실현했다는 것이다. 자기비하를 통한 ‘낮아짐의 역사 개입’ 속에 ‘높아짐의 구원자 신앙’이 존재하는 것이다. 인류의 주류적 사유 속에서 구원/해방을 향한 메시아니즘이 악을 정복하는 승리의 서사를 통해 간직되어 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리스도교의 원류적 사유는 역설적 메시아니즘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교라는 종교는 역설의 진리에 기초하고 있지 않다. 낮아짐의 역사 개입의 전통은 그리스도교에게 있어서는 매우 낯선 기억이다. 바로 여기에 그리스도교가 오늘날 개혁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바로 이러한 단절의 역사적 계기를 추적해 보고자 한다.
오늘 우리가 문제시하는 그리스도교의 제도사적 출발은 교회의 탄생과 불가불 연관되어 있다. 즉 신앙의 담론적 뿌리는 예수사건이었지만, 실질적 의미에서 제도종교로서의 신앙 형성의 시점은 교회의 등장과 맞물려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제도사적 관점에서 교회를 묻고자 한다.
제도란 집단 내에 반복성과 지속성의 메커니즘으로서, 행위자와 구조를 매개한다. 즉 행위자는 제도를 통해서 구조의 변형에 개입하고, 반대로 구조는 제도를 매개로 해서 행위자의 선택을 강제한다. 그런 점에서 제도사적 연구는 중범위의 변수를 통해 행위자와 구조의 상호 연계 과정을 다루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제도로서의 교회의 구성요소를 ‘예전’(禮典), 정전화, 직제화로 설정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이 요소들로 구성된 교회는 어떠한 과정에서 형성되었으며(제도의 형성 문제), 행위자나 구조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구조의 효과 문제)를 보고자 하는 것이다.
예수운동은 1세기 팔레스틴의 시골 지역에서 대중적 종교사회운동으로 발원하였다. 이 운동의 반도시적이고 반체제적인 기조는 대중적 종말론이라는 사상적 그릇을 통해서 시간적으로 과거 민중운동의 전통을 흡수할 수 있었고, 공간적으로 팔레스틴과 그 너머에까지 이르는 확대된 유다주의 영역과 대화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아직 예수운동은 독자적인 제도적 장치들을 구축하지 못했으며, 단지 유다교 내의 하나의 일탈적 운동의 계보에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운동이 질적 변화의 계기를 맞이한 것은 예루살렘으로의 진군(즉 도시로의 진군)과 깊이 연관된다. 이곳에서 지도자인 예수가 죽임당하고, 살아남은 제자들과 더불어 새로운 지도자들이 등장한다. 여기서 새로이 등장한 지도자들은 대략 다음 두 가지 사회생태학적 요소와 연결됨으로써 리더십의 새로운 유형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 두 요소란, 하나는 시골에 대해서 도시 친화적이라는 점, 그리고 다른 하나는 팔레스틴의 전통적 유다주의에 대해서 지중해 지역의 헬레니즘화된 유다주의에 보다 깊이 연루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예수운동이 박해로 인하여 예루살렘에서 지중해 지역으로 흩어지게 되는 것을 계기로 더욱 현저해진다.
이 새로운 리더십은 흔히 ‘지역공동체 조직가’라고 불리는 지도자 유형이다. 이들은 떠돌이 선교사들과 긴장 관계 속에서 점차 지도력을 확장해간다. 이러한 정주과 유랑이라는 행위 유형의 갈등은 바람직한 리더십이 어떤 것인가에 관한 논쟁을 야기시켰고, 나아가 그리스도인‘다운’ 윤리의 형성을 둘러싼 갈등도 이것과 관련되어 있다.
‘유랑’이라는 행위 유형은 일상적 윤리로부터의 과격한 단절을 감행하는 데 용이한 삶의 양식이다. 이것은 예수운동에서 혁명적 급진주의로 나타나는데, 그 사상적 기초에는 앞서 보았듯이 민중주의적인 급진적 종말론 전통이 있었다. 종말론은 시간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는 경험 양식으로, ‘종말의 때의 임박성’을 공유하는 집단에게서 가장 강렬하게 수용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때의 지연’은 신앙의 위기를 초래하며, 이러한 위기는 신앙 유형의 전환을 통해서 극복되었다. 바로 여기서 ‘정주’ 유형의 신앙이 발전할 계기가 마련된다.
정주의 신앙 양식은 불가불 기성 체제, 기성의 종교 등을 포함한 지역의 제도적 규범 메커니즘과의 긴밀한 관계를 동반하면서 형성된다. 여기에서 우리가 특히 주목할 것은 로마의 지방 행정 당국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사회적 제도, 토착민들의 가족 제도, 도시 디아스포라 유다교 회당의 종교사회적 제도, 그리고 전쟁 등으로 인해 강제 이주된 다종족 집단의 대중적 종교운동 등이다.
지중해 지역 도시로 진출한 예수운동의 떠돌이 선교사들은 처음엔 회당에서 활동공간을 찾았다. 이들은 회당 내에서 비판의 논리를 생산하는 데 주력하였고, 기성의 회당 체제에 대한 도전세력을 결집시키는 데 이들의 비판은 일정한 효력을 발휘했다. 결국 그들은 회당 당국으로부터 축출되기에 이른다. 이제 예수운동은 독자적인 공동체를 형성해야 했고, 이 과정에서 비판담론의 생산자보다는 공동체의 결속을 위한 담론의 생산자의 활동이 중요해지게 되며, 후자를 중심으로 회당 종교의 예전을 모방한 종교의례가 발전하게 된다. 예전은 반복적 수행을 통한 의미의 재현 양식이다. 원사건의 의미는 삶과 직결되어 있었던 데 반해, 예전이 재현하는 의미는 그것을 아이콘화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의미화 실천(의미를 재생산하는 과정으로서 규정되는 실천)에 변수로 작용할 상황을 제거하고 반복적으로 패턴화된 제의 행위 수행 속에 의미를 가두어 둠으로써, 종교적 실천을 점차 삶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삶과 이반된 종교성의 발달이 탈이데올로기적 신앙으로 직결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예전 속에 고정화된 의미가 행위자들의 주체형성에 개입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유념할 것은, 지중해 지역 대도시 회당의 예전이 로마의 지배체제와 타협적인 가치를 재생산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편 초기 그리스도교의 예전에서 이데올로기적 특성을 고려할 때 반드시 유념해야 할 것의 하나가 바로 장소의 문제다. 회당에서 축출된 도시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구성원 중 한 사람의 집에서 모였다. 이런 이유로 모임을 가질 만한 집의 소유자의 영향력이 공동체의 규범 형성에 영향을 미치는데, 여기서 안정된 가족 규범이 신앙 윤리에 관여하게 된다. 요컨대 가부장제가 그리스도교의 윤리적 기반을 구성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압도적으로 기층대중이 많았다. 처음에 유다인 저변층에서 확산되다가, 회당에서 축출된 후에는 비유다인 출신자들이 대거 몰려들게 된다. 로마제국 시대 대도시 지역의 사회적 환경을 고려할 때,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에서 보듯이 매우 중요하다.
로마제국의 대도시는 법적 질서의 효력이 그리 크지 않았다. 도시 자체가 식민도시인데다, 빠른 속도로 여러 종족 출신의 사람들이 이주한 탓에, 기존의 가치체계는 토착민의 안정된 가족 규범으로만 한정된 효력을 발휘할 뿐이었고, 대안적 가치체계는 아직 형성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로마 당국은 반란의 혐의가 없는 한 형법의 적용을 최소한으로 사용했다. 그러므로 주민들의 일상생활은 그야말로 정글의 법칙에 의해 운용되었다. 이런 이유로 대도시 지역에는 각종의 결사체들이 형성되었는데, 대부분의 결사조직은 동족 출신들을 중심으로 하는 대중종교와 결부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공동체로 비유다인들이 들어옴으로써 종교 혼합주의는 필연적인 현상이었고, 특히 대중종교와의 접촉은 불가피했다. 이러한 갑작스런 종교간 혼합으로 인해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재질서화의 필요에 직면하게 된다. 여기서 직제화가 가속화된다. 직제화란 공동체의 권위구조가 관례화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엘리트의 충원과정이 관례화되고, 서열화된 직제를 위계화하는 윤리 담론이 정착하는 과정을 수반한다. 그런데 이러한 직제화의 모델은 주로 로마의 지방행정 당국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며, 부분적으로는 안정된 가문의 가부장제적 권위 모델이 여기에 접목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직제화로 인해 일단의 지도력이 공동체 주변부 혹은 외부로 밀려나게 되며, 특히 여성 지도력은 거의 전적으로 배제된다. 이들은 이단적 운동으로 규정되는데, 그 과정에서 정전이 형성된다.
정전화는 대중의 의미 해석 자격을 사실상 박탈하고, 공동체의 엘리트들에게 의미 독점권을 위임하는 효과를 발휘했다. 이제 엘리트들은 정통적 텍스트들인 정전을 전유할 뿐 아니라, 상징을 통한 의미 재현 과정인 예전을 장악하는 종교귀족으로 탄생하게 된다. 그리스도 교회는 이런 과정을 통해 형성된 것이다. 이러한 교회의 탄생에 비판적 요소는 제거되거나 외부로 추방되었으며, 결국 교회 형성 과정에서 ‘유랑하는 카리스마적 지도력’은 배제되고, 기성 문화에 대해 일탈적/해체적인 에토스는 신앙과 무관한 요소로 전락하고 만다. 그리하여 교회는 배타적인 정착 문화를 구현하는 장이 되었고, 성직자 중심주의적인 종교제도로 발전하였다.
그런데 이것은 교회가 강력한 사회적 세력으로 부상하게 되어 사회적 관계의 영역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확대되면서 다른 권력, 즉 교회 외부의 권력과의 관계에 대한 규정을 필요로 하게 된다. 이른바 교권과 속권이라는 두 권력 유형은 배타적이고, 따라서 상대방을 하위에 두어야만 하는 속성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교권이 속권과 수위권을 놓고 경쟁하는 중세기에 이르면 최후의 격전을 벌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과정에서 정복주의적 담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며, 그것은 교회 중심주의적으로 정향된 교리의 형성 과정과 맞물린다. 이것은 두 가지 방식으로 교회의 실천 원칙을 구성하게 되는데, 하나는 교회가 힘의 우위를 점하게 될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교회가 열세일 경우이다. 전자의 경우엔 교회는 강력한 개입주의를 통해 수위권을 한껏 발휘하는 반면, 후자의 경우엔 상호불간섭주의를 취하곤 한다. 하지만 실제로 교회의 실천은 어느 한 편으로 한정되기보다는, 세속 권력과 갈등하는 동시에 다양한 경로로 제휴하는 양상을 띠게 된다. 즉 교회는 기본적으로 속권과 갈등 관계에 있으면서 서로를 배제하지만, 동시에 공동의 적이 등장하면 서로 공조하는 모습을 띠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민중적 사회 개입의 전통을 복원하려면, 다시 예수에게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교회로의 발전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 물론 ‘정주’의 신학 자체를 문제시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유랑이 배제된 정주, 단斷이 배제된 공公의 실천은 신앙의 제도화 과정에서 패권주의, 승리주의 이데올로기와 연계되었음을 역사는 증거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신학/신앙은 ‘차이’를, 낯설음을 포용해야 한다. 바울이 말한 바, 몸과 지체의 레토릭은 차이를 전제로 하는 연대의 에토스를 말하고 있다. 바울의 과제가 외부로부터 분리된 독자적인 예수공동체의 형성에 초점이 있었다면, 지구화 시대를 맞은 오늘 우리는 자본과 주류 교회의 무신성을 극복하고 하느님나라 건설을 위해 서로 격리된 예수공동체와 세계를 다시 연계시켜야 하는 과제를 앞두고 있다. 그런 점에서 바울의 몸-지체 레토릭은 민족공동체 나아가 지구촌공동체에서 차이와 연대의 신학적 레토릭으로 재해석될 필요가 있다. 아래에서는 이러한 관점에서 오늘날 그리스도교의 실천적 개입의 문제를 논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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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신학 이론이 오늘 여기에서 시대적 적실성을 지니기 위해 외부의 이론들과의 제휴를 필요로 한다고 했다. 이런 과정에서 나는 우선 ‘차이’라는 개념에 주목하고자 한다. 그것은 이 용어가 동일성보다는 타자와의 차이를 통해서 의미가 형성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이론사적 함의를 갖고 있기 때문에, 동일자에 탐닉하는 자기 중심주의적 사유를 비판하는 데 적절하며, 정체성의 형성에 관한 물음을 타자와의 끝없는 관계 속에서 제기하는 데 유용하다.
한국의 현대사는 한국전쟁이나, 군부에 의한 획일적인 권위주의적 권력의 장기간의 통치 등을 거치면서 과거 역사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만치 ‘과도하게 동질화된 사회’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1990년대를 경유하면서 급속도로 삶의 구체성을 덮고 있던/은폐하던 동일성의 이데올로기의 옷이 차츰 벗겨져 나갔다. 이것은 특히 한국 자본주의가 이 시기에 지구화의 흐름에 보다 본격적으로 편승하게 된 것과 깊은 관련되어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문화자본주의적 양상을 띠면서 우리에게 다가왔다. 우리는 동질성의 이데올로기라는 획일적인 옷을 벗고, 끊임없이 새로운 취향, 새로운 기호, 새로운 욕망을 창출하도록 요구받는다. 이러한 후기자본주의적 흐름은, 한편으로는 자본의 이윤 극대화 논리에 적합한 인간성에로 우리를 규율하는 효과를 갖지만,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우리에게 사회적 동질성을 갖도록 훈육하는 모든 사회적 가치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하게 하는 효과 또한 갖고 있다. 이러한 자유 추구자는 보편성에 의해 억압된 자신의 구체적인 경험에 직면하려 한다. 바로 이런 후자의 가능성으로부터 삶의 구체성이 억압으로부터의 자유를 향한 정치의 무대임이 분명해졌다.
성별, 연령별, 거주지별, 취향별, 직업별, 종교별 등등, 다성(多聲)적인 미시적 사회운동들은 ‘차이’를 정치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차이의 정치는 외부와의 연결망을 형성하는 데 서로간의 차이가 존중되는 관계 윤리를 지향하는 대안적 제도화를 추구한다. 또한 결사체 내부의 차이에 대해서도 억압적이지 않은 제도적 장치를 구축하도록 문제시하는 관성을 갖는다. 그런 점에서 차이의 정치는 기본적으로 해체주의적이다. 즉 제도가 반복성과 지속성을 속성으로 한다면, 차이의 정치는 바로 이런 정주성을 추구하는 제도적 타성에 대해 비판적이라는 것이다. 물론 실재하는 차이의 정치들은 정주성에 대한 비판에 있어서 다양한 양상을 띤다. 크게 보면 해체의 정치와, 영향의 정치(전자주민카드 운동), 제휴의 정치(노사정위원회)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여기서 전자의 방향으로 갈수록 제도 자체에 대해 더욱 비판적인 경향을 지니는 반면, 후자의 방향은 제도의 개선에 강조점을 두는 입장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전자가 보다 무정형적인 비판의 성향을 보인다면, 후자는 보다 비판을 실용화하는 데 관심을 기울인다. 민중신학은 이를 ‘단’(斷)과 ‘공’(公)의 지향으로 각각 대별한 바 있다. 이는 성서에 함축된 신앙적 실천의 두 유형인 ‘영의 정치’와 ‘몸의 정치’로 각각 대응한다. 몸의 정치는 끊임없이 진리의 역사적 형성체로서의 몸을 추구하는 반면, 영의 정치는 무정형성을 추구하는 운동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양자는 단순히 하나로 뭉뚱그려 이야기할 수는 없다는 것, 즉 하나에 다른 하나를 순응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양자의 관계는 계속 서로를 밀어내기도 하고 서로를 끌어당기기도 하는, 단과 공의 변증법적 관계, 영의 정치와 몸의 정치의 갈등적 공존의 관계를 전제해야 한다.
여기서 그리스도교의 미시동원적 결사체들에 대해 살펴보자. 외형상 이것들은 차이의 정치가 모색되는 공간처럼 보인다. 하지만 잘 들여다보면 많은 의문에 봉착하게 된다. 가령, 교회는 어떤가? 교회는 분명 타종교 혹은 비종교 집단에 대해서 구별되는 ‘다름의 공동체’다. 그러나 교회의 역사는 내적인 차이를 결코 허용하지 않으려 했다. 내부에 연령별 조직이나 지역별 조직, 직능별 조직 등의 하위 조직을 통해 그것을 포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들 조직들은 차이라는 문제설정보다는 전체의 한 부속품이라는 자의식에 둘러싸여 있다. 또한 선교라는 이름으로 실현되는 외부에 대한 개입은 차이보다는 동일성의 강압적 확대에 몰두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외에 대교회주의 혹은 대교단주의에서 보듯 ‘규모의 정치’에 연연하여 권력 게임에 몰두한 나머지 개체적인 차이, 그 차이에 따른 경험의 상이성은 교회의 신앙적 정체성에서 거의 고려되지 않아 왔다.
한편, 교회 외의 그리스도교 사회운동단체들의 경우도 외형만 ‘다름의 공동체’의 모습을 띠었을 뿐, 차이를 구축하는 데는 실패하였다. 그 구성원들은 자신이 속한 결사체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경험에 기초한 자발성을 갖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교회 이외의 그리스도인의 현존 방식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으려는 교회주의에 질식한 나머지 자신이 속한 결사체의 독자적인 제도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실패하였던 탓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교적 정체성에 친화적일수록 특화된 자신의 결사체적 위상은 교회의 하위단위로 견인되었고, 반면 덜 친화적인 경우에는 교회 외부의 거시적 진리틀에 흡수되어버렸다. 어느 편향을 띠든, 그리스도교적 결사체 나름의 독자적인 정체성이 자리잡을 공간은 없다. 또한 어느 편향이든 ‘전체에 대한 강박증’에 시달린 나머지 내적인 차이가 허용되는 공간을 갖지도 못하였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교가 ‘차이’를 제도화하는 공간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은, 자기 중심주의를 극복할 내적 잠재력이 결여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 실천 과제를 요청하게 된다. 교회 외에도 ‘몸의 정치’가 구현되는 다른 공간(다성적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 그 하나이고, 교회라는 몸의 항구성에 기초한 그리스도교적 정체성의 발본적 해체를 지향하는 영의 정치가 다른 하나이다. 그간 교회주의적인 몸의 정치는 영의 정치를 억압하고 배제하거나, 몸에 순화된 영만을 허용해 왔다면, 그러한 자기 규율 장치인 신학과 신앙을 근본적으로 전도시키며 비판을 가하는 영의 정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차이의 정치학은 현존하는 그리스도교의 미시동원적 결사체들로 하여금 삶의 구체성 속에서 반권력적 실천 지점의 확보를 요청한다. 그런데 차이라는 개념이 끊임없이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의미가 실현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듯이, 각 결사체는 끊임없이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 의미의 서사를 구성해야 한다. 여기서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노숙자의 문제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미시동원적 결사체들이 몇 개 있다. 가령, ‘영등포산업선교회’와 ‘전국실직노숙자대책 종교시민단체 협의회’, 성공회 ‘자유의 집’ 등은 이 문제에 깊이 관여해 왔던 그리스도교 단체들에 속한다. 이들은 각기 특화된 자기들의 노숙자 문제에 관한 개입방식을 가지고 있다. 즉 이들 단체 각각이 노숙자와 만남으로써 나름의 민중적 사회 개입으로서의 의미가 형성되었다. 그런데 이 단체들이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와 사회복지학 전문가 집단과 실천의 네트워크를 형성함으로써 개입의 의미가 재구성되었다. 물론 이때 이들의 실천적 네트워크는 각 단체들을 하위로 포섭하는 상위의 그 무엇을 만듦으로써 미시동원적 하위 단위의 결사체적 특이성을 해체시킨 것이 아니다. 여전히 하위 단위의 결사체적 정체성은 그대로 온존한 채 차이의 공동체들이 연대한 것이다. 이때 차이의 정치는 연대의 정치와 공존하고 있다. 즉 차이를 해체시킨 후 연대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차이를 봉합함으로써 연대가 이루어진 것이다. 한편 개별 결사체 몇이 결합하여 이루어진 연대의 서사(narratives)에 정부가 개입했다. ‘청와대 삶의 질 향상 기획단’이 관여하게 됨으로써 연대의 서사가 재구성되었고, 의미가 재구축되었다. 물론 이 경우에도 다른 결사체들이 해체된 게 아니라, 협력의 네트워크가 형성된 것이다. 이것은 사회운동단체와 정부의 ‘행복한 만남’이 이루어진 몇 안 되는 사례 가운데 하나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 사례에서 우리는 연대의 정치에 관한 하나의 실마리를 발견하게 된다. 각 미시동원적 결사체들이 연대하여 보다 거시적 형태의 동원을 실현하면, 실천을 통한 사회적 파급력이 한층 강화될 뿐 아니라, 보다 거안적이고 성찰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다는 이점도 있다. 그러나 자칫하면 각 구성원들의 경험이 실린 자발적 동원의 양상이 와해될 수 있다. 그런데 위의 사례는 자발성이 해소되지 않으면서도 연대의 정치에 성공한 듯이 보인다. 그것은 크게 세 가지 요소를 통해 가능해졌다고 생각된다. 첫 번째, 각 결사체들이 ‘열린 연대의 신념체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종교나 정부의 패권주의적 의지가 타자를 복속시킨 것도 아니며, 의사나 사회복지 이론가의 전문적 지식이 타자를 질식시킨 것도 아니다. 이들 각자는 각기 보다 열린 자세로 타자와의 연대에 참여했던 것이다. 둘째로, 각 결사체들이 ‘열린 연대의 의제’를 형성하였다. 여기에는 의제를 민주적으로 결의하는 방식 및 그러한 결의 방식에 대한 구성원의 존중 의지가 요청된다. 셋째로, 중위동원자의 열린 태도와 활동이 필요하다. 위의 예에서는 바로 이 점이 가장 결정적인 힘을 발휘했는데, 특히 이들 간의 공식적 활동뿐 아니라 비공식적 활동이 주효했다.
물론 이 사례는 매우 국부적이며, 일반화하기에는 연대의 정치가 훨씬 용이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도 있다. 특히 이러한 연대의 정치 또한 지엽적인 공통 과제로 연관되어 있는 국지적 연대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하지만 차이의 정치와 연대의 정치가 상보적인 관계를 맺은 훌륭한 실례에 속한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아무튼 여기에서 강조하고자 한 것은 차이의 정치는 이미 연대의 정치를 요청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차이의 정치가 추구하는 바, 삶의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은 보다 완성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 그러나 연대의 정치는 종종 삶을 억압하는 또 다른 권력으로 작동되곤 했다. 특히 연대의 정치가 항구적 진리를 주장하는 한, 그러한 위험성은 커진다. 여기서 우리는 연대의 정치가 만들어내는 서사는 ‘우발성’을 지니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열린 연대의 신념체계’를 위한 전제조건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 점에서 하느님나라라는 그리스도교적 신념체계가 재고찰될 필요가 있다. 예수의 실천의 궁극적 목적은 하느님나라의 실현에 있었다. 그러나 그의 담론에서 하느님나라는 결코 완성된 서사를 가지고 있지 않다. ‘비유’는 예수가 하느님나라를 설파하는 데 활용한 주된 언술 양식이었다. 그런데 그의 비유의 특징은 ‘은유적’이라는 것이다. 은유는 말이 그 자체로 완성적인 형태를 띠고 있지 않다. 그것은 청중의 개입을 통해서만 비로소 의미가 완성된다. 이때 그 의미를 완성하는 청중은 자신의 구체적인 경험을 토대로 해서 예수의 말에 개입한다. 즉 거기에는 그들의 삶, 억눌림, 소망이 함축되어 있다. 그렇다면 청중이 달라지면 의미도 바뀔 수 있으며, 동일한 청중이라도 그들이 처한 시공간적인 맥락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또한 예수의 비유는 무한정한 해석의 자유를 허용하지는 않는다. 그의 비유는 청중의 삶이 관여되어 있을 뿐 아니라, 예수의 삶과, 억눌림, 그리고 그의 소망이 응축되어 있다. 요컨대 그의 비유는 양자간의 대화적 구조를 띠고 있다. 각자의 차이가 무화되지 않으면서도, 그것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침으로써 의미가 완성되는 구조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하느님나라는 우발성을 지닌다. 그러나 그것의 기조는 민중적/탈권력적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예수의 삶과 실천의 주된 기조가 바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적 지구화가 시대의 대세인 상황에서, 그리스도교의 민중적 사회 개입의 이론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여기서 차이의 정치와 연대의 정치의 상호성을 강조하였다. 그것은 차이 없는 연대가 전략적으로 유용했던 지난 시대의 유산을 비판적으로 승계한 것이기도 하다. 이때 승계의 지점은 민중적, 반권력적이라는 데 있는 것이지, 차이에 대한 배제주의적 실천에 있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한편 여기서 차이의 봉합을 통한 연대의 정치에서 우발성을 언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몸의 정치는 차이의 정치가 담고 있는 가능성 중의 하나인 유랑의 에토스적인 영의 정치를 통해 비판적인 견제를 받지 않을 경우, 또 다른 억압의 제도로 구현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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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글에서 신자유주의적인 지구화 시대를 맞아 그리스도교의 민중적 사회 개입에 관한 이론적 모색을 시도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 글에서 내가 깨달은 것은, 더 많은 능력과 준비가 필요하다는 한계의식뿐이다. 또한 원래 의도했던 그리스도교 사회운동의 실천적 과제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평가와 논의는 준비하느라 분주하기만 했을 뿐, 언급조차 하지 못했다. 특히 ‘주빌리 2,000’과 부채탕감운동에 대한 실천적 가능성과 한계에 대한 민중신학적 평가나, 공기업 민영화나 공공비 지출 삭감 등과 같은 신자유주의적 정책에 대한 민중신학적 비판을 다룰 예정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아직 내겐 능력에 벅차다는 것을 실감해야 했다.
그 모든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글에서 나는 오늘날 그리스도교의 민중운동의 한계는 그리스도교적 정체성의 자페성에 그 주된 원인이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게 주장하고자 했다. 그것은 교회 중심주의와 성직자 중심주의라는,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그리스도교 안팎을 향한 패권적 승리주의에 집착하면서 형성된 전통 때문이다. 예수는 이러한 그리스도교적 전통에 대한 발본적인 단절의 실천을 위한 하나의 토대다. 그러나 예수를 재고찰하는 것의 근저에는 오늘 여기에서 고통당하는 대중에 대한 우리의 회개가 있다. 이러한 회개의 마음에서 시작된 민중적 개입의 노력을 나는 두 방향으로 시도한 것이다. 하나는 그리스도교적 정체성의 해체를 통해 예수의 정체성을 재발견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오늘 우리 시대의 비판적 개입의 이론을 위해 그리스도교 전통 외부에서 이론적 화두를 빌려오는 것이 그것이다. 나는 이러한 주장이 타자와의 연대를 위한 개방된/대화적인 우리의 정체성 재구축에 한 실마리가 되기를 소망했다. 그러므로 새로운 밀레니엄 시대를 맞는 제2의 종교개혁의 과제로서 이것을 제기하고자 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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