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한백교회 담임전도사 시절에(아마도 1995년 8월 13일) 교인들과 함께 예배로 토론했던 것을 토대로 하여 그해 [살림]지(구체적인 호는 미확인)에 기고했던 것이고,
후에 나의 책 [반신학의 미소](2001)에 재수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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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 문제를 보는 한 시각
민주주의의 문제로서의 동성애 문제
1
최근 동성애 문제가 갑작스레 우리들 사이의 대화에 자주 오르내린다. 그것은 몇몇 대학에서 동성애자 동아리들이 결성되는 것을 기점으로, 많은 잡지들이 이에 관한 보도 인터뷰 논쟁 등을 게재하고, 뒤이어 TV와 라디오에서도 이 문제를 다루는 프로들이 속속 방영됨으로써 일순간에 우리의 주의를 끌게 된 탓이리라. 게다가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밝히는 저자의 글들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게 되었다. 심지어 동성애 문제를 직간접으로 표현하는 드라마까지 등장하기에 이르렀으니, 이것을 일종의 위기로 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우리 사회가 갑자기 동성애자로 들끓는 사회가 된 듯이 비추어지기도 했다.
이런 와중에서 내가 속한 교회에서도 이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자는 제안이 있었다. 대략 한 달 정도의 공고를 거치고, 토론을 위한 예비 자료를 미리 나누어 준 뒤, 예배 시간에 ‘신앙윤리로서의 동성애’라는 주제로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이야기 나눔 시간을 가졌다. 그 한 주 전에 토론을 유도하기 위한 예비 질문을 다음 네 가지로 제시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1) 동성애에 관한 직간접적인 경험/지식을 이야기하기 1; (2) 자신의 가족이나 친구가 동성애자라는 가상의 상황을 설정하여 그들에 대해 취할 자신의 태도를 이야기하기; (3) 자신이 하느님이라면(즉 자신이 전능/자비/사랑의 존재라면) 동성애자를 어떻게 대할지 이야기하기; (4) 그리스도인으로서 동성애자 또는 동성애를 평가하는 신앙적/신학적 논거를 이야기하기 등. 이 질문들을 염두에 두면서 세 조로 나누어서 한 시간 정도 자유토론 시간을 가졌다.
그런데 이번 공동설교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토론 과정에서 부딪친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이 주제에 대해 우리가 전혀 준비되어 있지 못하다는 사실이었다. 우선 예비지식이나 사전 경험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특히 여기서 한 가지 집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평소 동성애 문제를 비교적 많이 생각했거나 또는 주변에서 그런 이를 접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서는 상대적으로 적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 대다수는 동성애 현상에 대한 두드러진 이중성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동성애는 부자연스럽다는 생각과, 성애의 또 다른 표현에 불과하다는 생각 사이에서 자신의 견해를 모순적으로 표현하곤 했던 것이다. 2 그런데 동성애를 부자연스러운 것, 비정상적인 것으로 보는 관점은 이에 대한 혐오 정서와 연관되어 있었다.(이것은 동성애를 일종의 정신적 질환으로 보려는 경향과 관련된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이것은 농담거리는 될지언정 신앙이니 민주주의니 해방이니 하는 심각한 토론의 주제는 전혀 아니었다.
2
〈창세기〉 2~3장의 창조-타락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나는 종종 안도의 한숨을 쉬게 된다. 왜냐하면 아담이 선악과실을 따먹을 때, 이른바 이 원죄적 행위를 저지른 손이 어느 편 손인지에 관한 언급이 성서에는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없기 때문이다. 만일 그런 말이 나온다면, 두말 할 여지없이 ‘왼손’에게 그 혐의가 돌아갈 것이다. 이런 피해의식은 ‘왼손잡이’라면 그리 낯설지 않은 생각이다. 단순히 왼손잡이라는 바로 그 사실로 인해, 자신이 의도적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형성된 체질적 특성으로 인해, 자라면서 수없이 받아왔던 크거나 작게 느껴진 배제-편견의 경험 때문이다. 이런 경험들이 대개는 미묘한 것들이어서, 오른손잡이들은 많은 경우 미처 눈치 채지 못할 테지만 말이다.
우리의 일상 언어에서 오른손은 ‘바른’, ‘정당한’, ‘정의로운’ 등의 가치와 결합되어 있다. 반면 왼손은 이런 가치에서 이탈한 비정상적인 그 무엇을 함축한다. 요컨대 ‘오른손-왼손 담론’은 단지 서로 다른 편에 있으면서 한 짝을 이루는 신체 부위를 가리키는데 그치지 않고,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는 사회적 가치와 결합되어, 끊임없이 우리의 삶을 이러한 가치에 근거해서 조율케 하고 타인을 판단케 하는 배제의 담론체계를 이룬다.
이러한 담론체계는 우리의 일상 언어 거의 모든 부분에 깊이 뿌리내려 있다. 언어는 단순히 말의 세계가 아니다. 거기에는 개인적인 체험, 가족적인 전통, 나아가 종족적 민족적 사회적 관습과 실천이 응축되어 있다. 담론이라는 말은 이와 같이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관행, 실천, 지향 등이 우리의 언어를 통해서 표출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우리의 배제-편견의 담론체계 속에서, (상대적으로 소수인) 어떤 사람들은 정상의 ‘밖’의 영역으로 배제되고, 그밖의 사람들은 그 ‘안’으로 포섭된다. 비정상이라 하여 따가운 눈총 속에서 거부당하는 사람들의 상실감이 있는 바로 그런 세계에서, ‘내부인’은 자신이 ‘정상’이라는 ‘집’에 살고 있다는 사실에 희열과 안위감을 느낀다. 혹 그가 다른 무수한 부분에서 수많은 기회를 박탈당하며 살아야 하는 비특권적 존재라 하더라도 말이다. 우리 대부분의 이른바 ‘보통사람들’처럼. 그럼에도 비정상인 정상인 할 것 없이 모두 이런 담론을 공유한다. 가령 비정상인은 이런 담론체계 속에서 자기비하의 마조키스트적 언어, 행동에 익숙해진다. 3 그런 점에서 배제-편견의 담론체계는 우리의 일상적 삶 속에서 기성의 가치체계를 정당화시켜 주는 사회적 안보의 기재로서의 역할을 한다.
그런데 우리의 일상의 삶 속에서 배제-편견의 관점에서 가장 효과적인 담론이 있다. 그것은 바로 ‘성(에 관한) 담론’이다.
〈창세기〉 2~3장의 이야기는, 선악과실을 따먹은 ‘손’을 언급하는 대신, ‘여성’이라는 유혹(당하는/하는)자를 등장시킨다. 이 본문의 본래적인 의미가 무엇이든, 사람들은 이 이야기에서 남성-여성에 관련된 자신들의 편견을 보증하는 성서적 근거를 발견하게 된다. 여성은 악마적 유혹 앞에 취약하게 노출된 ‘유혹당하는 자’이며, 동시에 인간을 타락하게 할 수 있는 ‘유혹자’라는 것이다. 이것은 한편에서는, 여성이라는 성을 타인에게는 감추게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녀의 가부장(아버지 또는 남편) 앞에서는 예속되어 전적으로 드러나게(폭로되게) 하는 가치와 결합되게 한다. 전자는 노출된 존재와는 정반대의 존재가 되도록 규제하는, ‘가림-숨김의 미덕’이라는 가치와 연결되며, 후자는 오로지 그 여인이 가부장인 한 남성에게만 속하여 그의 유혹(그녀의 유혹이 아니라) 앞에 전적으로 노출되어야 한다는 ‘순종-의탁의 미덕’이라는 가치와 연결된다. 이렇게 남성과 여성이라는 단순한 성적인 차이는 사회적인 배제와 편견의 논리로 확장되어 해석된다.
이러한 기조의 성 담론은 우리의 일상 언어 가운데 가장 자극적이며 그만큼 파급력이 막강하다. 최근 우리 사회의 광고저널리즘의 성화(sexualization) 경향은 이러한 파급력을 시사한다.
‘성 담론’은, 남성-여성의 소재 외에, 성년자-미성년자라는 소재, 그리고 ‘성도착의 소재’ 등을 포함한다. 4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미성년자의 나이답지 않은 ‘행위’ 또는 성적 일탈자들의 ‘도착행위’를 둘러싼 우리의 담론은 단순히 그네들의 그러한 행위가 바르냐 그르냐의 판단 문제에만 연관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한편에선, 이런 담론체제에서 배제된 이들에 대한 사회의 가학성을 정당화해 주는 기능을 하며, 다른 한편에선, 담론체제 내부로 포섭된 이들에게는 상대적으로 너무 관대한 규범을 허용하는 동시에, 5 이러한 관대함에 도취된 이들이 자신들이 당하고 있는 배제의 경험, 충족되지 못한 욕망의 경험에 대해 망각하게 하는 환각제 같은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3
많은 사람들의 경우, 동성애는 스스로의 판단에 의해 선택된 ‘성적 행위특성’이 아니다. 대개 자신도 모르게 그런 성향이 자리 잡는다고 한다. 그것은 모태에서의 특수한 체험 때문일 수도 있고, 유아기 때의 어떤 경험과 관련된 것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어떠한 경험이 동성애를 유발하는지에 관한 정설은 없다. 요컨대 동성애의 원인을 제거할 수 있는 의학적인 대책은 최소한 이론적 수준에서도 없다. 그러니 이런 경우 동성애를 도덕적으로 문제시한다는 것은 “너는 왜 여자로 태어났니?”, “너는 왜 왼손잡이니?”라는 물음과 마찬가지다.
때로 어떤 사람들은 동성애를 자신의 판단에 따라 선택했다고 증언하기도 한다. 이것이 가능한지의 여부는 차치하고, (그 현상 배후의 어떤 심층심리적 배경에 대한 사회심리학적 질문을 유보한 채) 그의 증언을 고지곧대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이 선택 자체로 윤리적 판단을 내리는 것은 신중을 요한다.
교회에서 토론할 때, 동성애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취했던 사람들은 대체로 그 이유로 ‘부자연스럽다’, ‘창조질서에 어긋난다’라고 대답했다. 여기서 이것이 부자연스러운 근거로 그들은, 신체구조상 결혼은 이성간의 관계에서라야 자연스럽도록 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1970년대 유럽의 그리스도교계에서 한창 동성애에 관한 논쟁이 일어날 때, 신교 구교 할 것 없이 교회들의 공식적 입장이 대체로 ‘생식을 전제로 하지 않는 성 관계는 부자연스럽다’는 결론으로 모아지는 것과 유사한 입장이다. 6 여하튼 이러한 입장은 결혼이라는 것을 ‘성행위’에만 집중하여 판단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대답을 한 사람들도 결혼생활을 단순히 성행위로 환원시켜서 이해하지는 않았다. 복합적인 인간적 특성이 교차되는 관계의 한 측면으로 보고 있다. 특히나 폐경기에 도달한 부부간에는 후자의 측면이 더욱 극적으로 강화된다는 것을 인정한다. 요컨대 동성애에 대한 윤리적 비판의 태도에는 모순적인 이중성이 존재한다.
한편 토론 중에 어떤 사람이 이성간의 결혼생활에서도 얼마나 많은 문제가 있는지를 반문했다. 특히 남성의 공격적이고 권위적인 성적 역할론 때문에 생기는 문제들이, 성도착이라는 편견이 존재함으로 말미암아 면죄부를 받는 것은 아니냐고 주장했다. 즉 동성애를 비정상이라고 보는 배제-편견의 담론체계는 ‘권력’의 문제를 은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 담론이라는 배제-편견의 체계를 권력의 문제로서 본다면, 부자연스러움으로 특징지워지는 ‘비정상’과 자연스러움으로 특징지워지는 ‘정상’ 사이에 악과 선이라는 가치판단을 대응시키는 것은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이것은 권력에 의해 자행되는 배제, 억압, 폭력을 은폐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에 대한 윤리적 물음의 핵심은, 정상-비정상 담론 이면의, 권력의 문제에 초점이 놓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영화 ‘폭로’는 재미있는 하나의 시사점을 던져준다. 이 영화의 표면상의 줄거리를 이끌어가고 있는 것은 ‘성폭력’의 문제인데, 여기서는 특이하게도 가해자가 직장 상사인 ‘여성’이었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성폭력의 문제를 단순한 성차(gender)의 문제로 보기보다는 그 이면의 ‘권력’의 문제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영화는 실업이라는 자본주의 특유의 배제의 위협 아래서 정상인으로 남으려는 보통사람들의 안간힘에 의해 구성된 권력적 사회구조 속에 근대적 성폭력이 자리잡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요컨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폭력을 보는 시좌로서 영화는 자본의 권력을 제시한다. 물론 이것은 동성애 문제를 보는 시좌로서 확대해석해도 무방할 것이다.
4
자본주의 이전 사회의 권력은 주로 정치적 군사적 시위와 폭력을 통해 이루어졌다. 예수를 처형한 십자가형은 이런 자본주의 이전 사회의 권력을 전형적으로 나타낸다: 죄수는 십자가에 매달리기 전에 이미 채찍에 의해 무수히 살점이 떨어져나가고 일부 부위는 탈골된 상태에 있다. 못 박힌 부위에서 계속 피가 흐르고, 채찍으로 찢어진 부위는 팔레스틴의 폭염 속에서 썩어간다. 새들이 날아와 살점과 눈알을 파먹는다. 그런 상태로 혼수상태에 떨어졌다 제정신이 들기를 반복하면서 죄수는 극도의 고통을 체험한다. 게다가 울어주는 이 하나 없는 상황에서, 7 대다수의 사람들의 조롱과 비웃음을 받으며 그는 서서히 죽어가는 것이다.
이렇게 자본주의 이전 사회는 ‘잔혹’이라는 기억방법을 통해 사람들에게 권력의 효력을 각인시킨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근대는 ‘잔혹’이라는 방법을 지속적으로 제거한다. 예컨대 한정된 사람들에게만 공개되는 전기충격을 통한 사형방법은 ‘잔혹’이라는 방법이 더 이상 권력의 효과적인 수단이 아님을 시사한다.
자본주의적 근대의 권력은 주로 민주주의라는 토양 위에서 전개된다. 흔히 민주주의는 하나의 (정치) 제도로서 이해된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론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근대라는 역사적 배경과 맞물려 있다. 교통과 통신 기술의 발달, 인쇄술이나 공교육의 발달 등은 보편적인 가치체계가 형성되는 범위를 확대시켰을 뿐 아니라 그것이 미치는 영역을 정교화시켰다. 특히 후자에 있어서 개인의 신체는 보편적인 가치체계를 내면화하는 대표적인 공간이 되었다. 여기서 권력은 자신의 효력을 발휘하려 한다. 가령 망막이나 고막에 비해 특화된 가치를 부여받은 ‘처녀막’은 성 담론이라는 보편적인 가치체계에 의해 인간을 외부로부터 규제되게 할 뿐 아니라 스스로를 규제하게 한다. 여기서 권력은 외부에서 가해지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 내부로부터 가해지는 것이기도 하다. 즉 권력의 주체는 타자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기도 한 것이다. 권력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모호해졌다. 모두가 권력의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가 되었다. 즉 권력은 위에서 아래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그물망처럼 우리 위에 드리워져 있다.
그러므로 권력은 정치적 제도로서 우리에게 그 모습을 나타낼 뿐 아니라 담론으로서도 나타난다. 특히 담론으로 표출되는 권력은 그물망처럼 정교하게 우리 삶 구석구석까지 미친다. 이러한 권력은 민주주의의 해방적 지향을 교묘하게 곡해시킨다. 민주주의는 해방을 지향하는 듯하면서도, 배제와 편견의 가치체계로 정교하게 채색되어 있다.
예수는 유다교의 배제-편견의 장치에 대항하면서 포용과 사랑을 부르짖었다. 그러므로 예수를 따르는/모방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민주주의의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는 문제는 신앙의 문제이기도 하다. 민주주의를 오염시키는 배제와 편견의 권력의 부침물을 제거하기 위해 투쟁하는 것은 신앙인의 끊임없는 과제인 것이다.
동성애는 권장될 사항도 아니고 또 억제할 사항도 아니다. 그리 하려 해도 쉽사리 그렇게 되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동성애는 여전히 존재한다. 그런데 우리는 동성애의 문제가, 즉 동성애를 둘러싼 담론이 단지 성적 선호라는 특성으로 환원될 수 없음을 본다. 거기에는 배제와 편견이라는 권력의 뚜렷한 자취가 서려 있다. 이것은 동성애자를 편견과 배제의 대상으로 소외시킬 뿐 아니라, 이른바 정상인들의 삶을 권력의 그물망 속에서 왜곡된 욕망의 추구자로 만든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그리고 자기 안의 모든 것을 정상과 비정상, 선한 것과 악한 것으로 대응시키려 하면서 그러한 법 안에서 세계와 자신을 규제하는 존재를, 배제와 편견의 법의 노예로서 왜곡된 욕망의 추구자가 되어버린 존재를, 해방의 영 안에서 끊임없이 도살하는 훈련을 하는 것(〈로마서〉 7~8장)은 바로 일상생활 속에서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신앙적 실천인 것이다. □
- 여기서는 이성애와는 어떤 점에서 유사성이 있고 또 어떤 점에서 차이가 있는지에 관한 생각 나눔에 초점을 두었다. [본문으로]
- 이것은 아마도 토론 참가자들의 절대 다수가 대학 이상의 학력 소지자이며, 연령상으로 20대라는 사실과 연관이 있으리라. [본문으로]
- 예컨대, 최근 유행하는 키 작은 사람들의 ‘숏다리’ 운운하는 자기비하의 언어가 그렇다. [본문으로]
- 성도착, 즉 성적 일탈의 문제란 주로 동성애자 문제 같은, 이른바 비정상적인 성의 문제를 말한다. [본문으로]
- 가령, 성 규범은 미성년자에게는 지나치게 엄격한 반면, 성년자에게는 지나치게 관대하다. [본문으로]
- 이것은 생리주기에 의한 피임법을 허용한 피임에 관한 교회의 입장과 모순된다는 점에서 임의적인 교회의 대응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 처형장면을 보고 우는 이는 즉석에서 죄수와 함께 십자가형에 처해지곤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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