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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지구화 시대 보편적 복지동맹의 가능성과 ‘작은교회’

2012년 7월 17일 5~7시, <생명평화를 지향하는 개신교운동의 비전공유를 위한 연속토론회 5: 보편적인 복지제도 마련을 위한 조건과 방향>이 열렸습니다. 전국목회자정의평화협의회, 예수살기, 성서한국, 생명평화마당, 에큐메니컬그룹과 에반젤리컬그룹을 막라하는 비판적 단체가 넷이 공동주관하고, 한국기독교사회문화연구원이 주회하는 행사입니다. 다섯 주제 모두 두 명의 발제자가 발표를 하고 대표논평자 없이 모두가 토론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지요. 발표1은 사회과학자가, 발표2는 신학자가 맡았고요. 한데 실은 저는 마지막 토론회에만 참석했습니다. 제가 그날 발표자였기 때문입니다. 위의 제목에서 보듯 보편적 복지에 관한 신학적 코멘트가 제가 해야했던 주제이고요.

저보다 앞서 발표한 분은 신광영 교수(중앙대 사회학과)인데, 주로 정책으로서의 보편적 복지에 초점을 두고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저는 정치로서의 보편적 복지를 이야기하려 했고, 구체적으로는 보편적 복지 동맹과 기독교를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현재 실재하고 있는 여러 교회들을 모범형 삼아 성공주의를 지양 내지 폐기한 교회 모델인 '작은교회'라는 아이디얼타입을 정의내리고, 작은교회적 주체를 통해 개신교가 보편적 복지동맹의 파트너가 될 가능성에 대해 논했습니다. 실은 아직 작은교회는 작은교회적 주체가 형성되지 않은 상태였고 그런 점에서 향후 주체형성을 위한 노력이 특별이 필요함을 주장했습니다. 한국적인 공공신학이 해야 할 핵심 과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주장했고요. 

토론 과정에서 저는 작은교회적 목회자들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아야 했습니다. 제가 작은교회라는 아이디얼 타입을 얘기하는 과정에서 복지의 민간위탁제도와 사회적 기업을 얘기했는데, 많은 이들은 제가 현실을 너무 낭만적으로 보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현장의 경험을 냉정하게 이야기하는 비판들이 하나하나 소중하지만, 그 지적들 하나하나에 대해 다 동의할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면 작은교회적 목회를 하면서 고군분투했던 목회자들 만큼의 마음은 아니지만, 제가 그렇게 정보 없이 이야기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현장 활동가가 경험을 증언하는 것과 연구자가 해석하는 것 사이에는 연관성이 있어야 하지만 동일할 수는 없지요. 아마도 비판하신 분들은 저의 주장이 연관성이 너무 적은 얘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 듯 하지만, 저는 활동가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지적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아무튼 저는 그 간격을 얼마나 좁힐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언제나처럼 이번에도 저의 글은 사람들로 하여금 생경함을 체감하게 해야할듯 합니다.

글을 첨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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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보편적 복지동맹의 가능성과 작은교회

 

 

 

 

 

제도 중심에서 의제 중심의 복지연합으로

 

한국전쟁 직후나 1997년 외환위기 때처럼 국가 차원의 보호망 구축이 절실했던 상황에도 복지에 대한 사회적 요구는 거의 제기되기 않았고, 1980년대 중반의 ‘3저 호황기1990년대 초 외환시장의 개방으로 시장에 돈이 넘쳐나던 때처럼 복지재원에 대한 심리적 압박이 상대적으로 적었을 때도 복지는 중요한 의제가 되지 못했다. 이제까지 한국에서 복지의 제도화는 국가도 시민사회도 그다지 큰 관심거리가 아니었다.

한국에서 보편적 복지에 대한 요구가 처음으로 본격화된 것은 지난 2010년 무상급식 논쟁에서였다.[각주:1] 그것은 학교에서의 무상급식이 다른 어떤 영역보다 더 절실했기 때문은 아니다. 그보다는 사회적 양극화가 극심해지고 중산층의 하향화가 현저히 진행됨으로써 중산층 몰락에 대한 위기의식이 전 시민사회로 일상화된 상황에서 가장 논점화되기 용이한, 또한 의제를 둘러싼 합의가 상대적으로 쉬운 것이 학교의 무상급식 문제였기 때문일 것이다.

하여 처음으로 복지가 중요한 사회적 의제로 떠올랐다. 문제는 강력한 좌파정당도, 강력한 노동조합도 부재한 한국에서 누가그것을 추동할 것인가에 있다. 대통령 선거를 코앞에 둔 상황에서 시민사회의 거센 요구를 직감한 정치세력은 여야 할 것 없이 복지를 핵심 당론으로 내걸었다. 그러나 새누리당의 생애주기별 복지론은 중요한 사회적 의제로 떠오른 복지 문제를 정책화할 하나의 가능한 대안의 성격을 갖지만, 중산층의 위기감을 최소수준으로만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람들의 절실한 위기감에 다가가기가 쉽지 않다. 오히려 새누리당의 복지론이 반영하고 있는 것은 복지를 위해 가장 큰 조세부담을 져야 하는 중상위 계층의 이해다. 그러므로 시민사회에서 복지 의제의 화력이 무뎌지는 상황이 되면 최소화된 복지정책으로 전락하게 될 우려가 제기되었다. 실제로 집권에 성공한 새누리당과 박근혜정부는 끊임없이 정부 내외부의 보수세력이 제기하는 복지 후퇴론에 직면하고 있고, 그것은 경제민주화와 복지에 관한 공약들을 조금씩 후퇴시키는 방식으로 구현되고 있다.[각주:2]

한편 민주당이 집권했다고 해도 크게 보아 사정은 비슷하다. 현재 새누리당이 그렇듯이, 민주당의 보편적 복지론은 재원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봉착하게 된다. 정부의 사회적 자원 동원 능력이 크게 약화된 현재의 상황에서, 그리고 국가의 경제성장 추세가 크게 둔화되었고 그것이 반전될 가능성이 별로 없는 상황에서, 조세에 대한 시민사회의 부담이 복지에 대한 요구를 압도하는 반대여론에 부딪치게 된다면, 정부주도의 보편적 복지정책은 후퇴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결국 시민사회적 복지 의제가 그때마다의 상황에 동요하지 않는 일상화된 의제로 자리잡게 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하여 정치사회적 복지 의지로 압력을 가할 시민사회적 복지동맹을 어떻게 견고히 할 것인가의 문제로 직결된다. 한데 앞서도 말했듯이, 한국에는 서구사회를 복지국가로 이끌어낸 주역들인 강력한 좌파정당이나 활성화된 노동조합이 없다. 그렇다면 유의미한 복지동맹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정당정치나 노동조합이 그 역할을 할 수 없다면 도대체 누가 어떤 매체를 통해 그것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인가? 바로 이 문제가 오늘 우리가 직면한 복지문제의 핵심 현안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복지동맹은 진보와 보수를 아우르는 중산층의 참여를 필수요건으로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복지담론이 중산층의 이해와 맞닿는 보편적 복지를 추구할 필요가 있다. 새누리당의 생애주기별 복지론과 같은 선별적 복지는 중산층의 반대 혹은 심지어는 무관심의 상황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추진할 수 있는 정부의 강력한 의지와 자원동원능력이 선결조건이다. 물론 이념적으로 극우적이고 사회경제적으로 자본친화적 성격이 강한 새누리당과 현 정부가 그렇게 하리라고 믿는 이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 그보다는 총선과 대선용 공약인 탓에 쉽게 물러설 수 없는, 시민사회의 지지를 유지할 명분이 설만큼은 해야 한다는 생각이 비틀거리면서라도 복지를 정책화하는 지배적 동기가 되는 상황이라고 보는 게 더 적절한 분석인 것 같다. 요컨대, 앞서 말한 것처럼, 비록 정부와 새누리당은 결과적으로 자신의 생애주기별 복지론을 최소화 정책으로 추진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렇다면 보편적 복지를 추동하는 복지동맹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여기서 내가 주목하는 것은 네트워크의 상황에 대한 구조적인 변화다. 20세기 초, 중반의 서구사회에서는 정당이나 산별노조 같은 국가 차원의 광역 의제집단이 복지동맹의 축이었다. 그것은 당시 서구사회의 네크워크 상황이 국가 차원의 의제집단 외에는 어느 누구도 복지의 유의미한 행위자가 될 수 없었던 사정과 맞물린다. 이 시기 정치는 국가를 중심으로 하고 국제정치와 국내정치라는 두 범주만이 유효했던 탓이다.

반면 인터넷 미디어가 현저하게 발전한 오늘날 의제를 둘러싼 공론의 장은 상상할 수 없이 광역적이고 미시적으로 확장되었다. 또한 그것의 실행 단위도 국가 차원으로 획일화되지 않고 광역, 협역으로 다층화되었다. 그것은 오늘의 시대에는 복지동맹이 단일대오의 정치연합 형식이 아니라, 다중 주체적(polyplicity)이고 다성적(polyphonic)인 탈중심화된 네트워크 형식의 의제연합으로 형성될 때 더 유의미해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물론 아직 그러한 탈중심적 네트워크 시대의 복지동맹의 선례는 없다.

아무튼 이러한 변화된 네트워크 상황은, 전통적인 방식으로는 불가능해 보이는 오늘 한국의 복지동맹이 가능할 수 있다는 하나의 징후다. 왜냐면 한국은 전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변화된 인터넷 네트워크 사회의 활성화로 인한 유의미한 사회적 동원이 가능했던 선례들을 많이 가진 사회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이러한 다중 주체적이고 다성적인 탈중심화된 보편적 복지동맹의 가능성을 한국교회의 역할과 연관시켜 이야기하는 데 초점이 있다.

 

성서 속의 복지연합건강한 -아브(가족)를 수호하라


먼저 사회적 복지에 관한 두 가지 성서 이야기를 해보자. 첫째는 이스라엘 부족동맹체의 얘기다. 이스라엘 족이 역사 속에서 태동하던 시기는 기원전 13세기경이다. 팔레스티나의 평야지대에서 원시국가 형태의 소국들이 한 부족 혹은 다부족 연합체로서 할거하던 때에 중부산악지대로 이주한 떠돌이 집단들이 점차 결속하여 부족을 이루고 부족간 연합체를 형성하여 일종의 안보동맹을 맺었는데, 그 동맹체의 이름이 이스라엘이었다. 대략 두 세기 동안 지속되었던 이스라엘 부족동맹은 군주제를 발전시키지 않았고, 그 중심부족인 에브라임 족은 다분히 의도적인반군주제적 결속체를 추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안보동맹으로서의 이스라엘은 그리 효과적이지 못했다. 위기 시에 겨우 몇 개의 씨족 혹은 부족 정도가 결속한 몇 번의 사례가 있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이 두 세기 동안이나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모든 부족들이 하부단위의 집안들이 몰락하지 않고 탄탄하게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 사회의 기초단위인 -아브(beth-'av, 아비의 집. 2대 이상의 확대가족)들의 몰락을 억제하는 사회적 안전망을 전통으로 갖고 있었고, 특히 이 동맹체의 신은 벧-아브들을 보호하는 데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점과 밀접히 관련된다. 창세기38장의 유다와 그의 며느리 다말의 이야기나 룻기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몰락에 처한 벧-아브의 보호를 위해서는 다른 어떤 관습도 유보할 수 있다는 설화가 이 시기에 널리 유포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곧 벧-아브의 보호가 공동체의 최상위의 가치라는 것이다.

둘째는 유다국의 요시야 개혁에 관한 얘기다. 이스라엘 부족동맹이 몰락한 이후 두 번째 이스라엘이 등장하는데, 이 이스라엘은 군주국 이스라엘이다. 부족동맹의 중심지였던 에브라임 부족과 벤야민 부족의 땅을 중심으로 건국된 국가이니 만큼 두 이스라엘은 신화, 전설, 민담을 공유하고 있다. 또한 인적 연계성이 있다는 점에서도 학계의 이의가 없다.

실제로 이스라엘국에도 이스라엘 부족동맹처럼 군주가 벧-아브들의 재산을 강탈하고 그들을 예속농으로 전락시키려는 시도들을 견제하는 강력한 종교적 사회적 전통이 뿌리 깊게 형성되어 있었다. 하여 이스라엘국은 군주들이 유력한 예언자들(여로보암 1세와 예언자 아히야, 예후와 예언자 엘리사 등)을 국사로 위촉함으로써 벧-아브들을 통합해낼 수 있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강력한 군주제가 구축될 수 있었다.

한편 남부에는 유다국이 건국하였는데, 이 나라는 부족동맹의 영향이 매우 약했던 부족()에서 유래한 국가다. 하여 유다국은 초기부터 탄탄한 벧-아브들을 갖고 있지 못했다. -아브들은 일찍부터 몰락하여 지방의 호족들에게 예속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유다국이 강력한 군주제를 발전시키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 된 것 같다.

히스기야 왕은 유다국이 강력한 국가로 발돋음하는 계기를 만든 군주인데, 그것은 그가 독립적인 벧-아브들을 성공적으로 정착하게 함으로써 가능했다. 강대국인 북쪽의 이스라엘국이 아시리아 제국에 의해 멸망했을 때 그 유민들이 대거 남하하였다. 왕은 그들의 정착을 도왔고 결과적으로 무수한, 건강한 벧-아브들이 생겨났다. 더욱이 그들 중 다수는 이스라엘국 출신으로 이스라엘의 독립적 벧-아브 전통을 유다국에 전수시켰다. 히스기야의 개혁은 바로 이스라엘에서 유래한 벧-아브 전통을 제도화하여 건강한 벧-아브들의 국가를 만들려는 데 있었다. 이러한 개혁이 그에게 절실했던 것은, 아하시야 아달리야 요아스 아마샤 등에 이르기까지 유다국의 네 명의 통치자가 연거푸 피살되었고, 아마샤를 이은 웃시야 왕도 재위 후반기를 궁중에 유폐된 채 보내야 했던 왕권의 극도의 불안정 때문이다. 강력한 귀족세력을 견제하지 않으면 유다국의 왕실은 결코 안정을 유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

히스기야 개혁의 내용을 우리는 그의 손자로서 할아버지를 이어 개혁을 재개했던 요시야 왕의 문서들에서 발견하게 된다. 가장 대표적인 개혁 문서가 신명기. 여기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14,22~29의 십일조 규정이다. 당시 십일조는, 크리제만(Frank Crüsemann)이 말하고 있듯이, 중앙성소에 내는 일종의 조세였다. 십일조에 관한 언급들이 예루살렘(말라기3,6~11 참조)이나 베델(창세기28,22; 아모스서4,4) , 유다국과 이스라엘국 왕실에 부속된 중앙성소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은 이것을 입증한다.

그렇다면 십일조세의 납세자는 누구인가? 십일조와 관련된 전승이 소출의 십분의 일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은 십일조가 인구의 절대다수를 점하고 있던 소토지보유농, 곧 벧-아브들이 내는 국세임을 암시한다.

그런데 14,22 이하에 따르면 십일조를 야훼의 성소에서 먹고 마시라고 한다. 만일 십일조가 이렇게 운용된다면, 사실상 조세로서의 성격은 사라진다. 그럼에도 폐지를 명시하는 대신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은 소출의 십분의 일을 야훼께 바치지 말라고 명시적으로 이야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겠다. 결국 농민은 이 과중한 조세의 면세자가 되었다.

그렇다면 국가는 도대체 어떻게 국가운영의 재원을 조달한다는 것인가? 나의 상상은, 그 동안 조세를 포탈해 왔던 대지주 귀족들에게 국세를 징수함으로써 그것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이 시기에 유적지들에서 유다국의 물자 비축성으로 추정되는 지역명(헤브론, , 수꼿, 그리고 mmšt[각주:3])왕에게 속한(lmlk)이라는 히브리어 명문이 새겨진 도기들이 대량 발견되었다. 이것은 히스기야 왕 당시 식량을 포함해서 현물로 징수됐을 조세 등을 비축하는 행정체계가 수립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또한 그 도기들은 조세의 도량형이 표준화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과세의 표준화는 조세 포탈층인 귀족을 겨냥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것은 동시에 귀족 대신 과중한 조세 부담을 져야 했던 평범한 벧-아브들의 조세 경감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요시야 개혁의 조세 정책은 벧-아브들을 예농화 또는 유민화했던 귀족의 토지 겸병(兼倂)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함으로써 대지주 귀족을 견제하는 데 성공하였고, 이것은 국내적으로 다수의 농민층(암하아레츠)이 지지하는 체제적 통합을 가져왔으며, 이것은 강한 국제 경쟁력으로 이어졌다. 실제로 유다국의 역사에서 히스기야, 요시야 왕은 가장 강력한 유다국을 구축한 통치자였다.

그런데 본문에 따르면, 요시야의 조세 개혁은 또 다른 조치와 결합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28~29절에는 또 다른 십일조가 언급되고 있는데, 매년 드리는 십일조가 아니라 3년마다 드리는 십일조에 관한 얘기다. 이것은 거류하는 지역의 성채 안에 비축되어야 한다. 즉 십일조의 조세적 성격을 규정지었던 중앙성소와는 관계가 없다. 이것은 십일조가 비축된 지역의 사회적 약자들의 공공부조 기금이었음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중앙정부가 추진한 지방단위의 복지기금으로 활용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면제년 제도는 몰락한 벧-아브들을 복원시키는(welfare에서 workfare로 전환하게 하는) 재노동화에 초점이 있었다.

요컨대 개혁 주체인 왕실은 소토지보유농민인 벧-아브의 예농화를 억제하기 위해 아래와 같은 정책적 조치를 취하고 있다. 첫째로, 조세를 1/3로 감세하여 농민의 조세부담률을 대폭 낮추었다. 왕실은 국가의 체제 통합의 비용을 농민의 조세로 충당하는 대신 대지주 귀족에게서 충당하고자 했다. 이미 말한 것처럼 이러한 조세 정책은 빈부격차를 완화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한 대지주 귀족 세력을 견제하는 정책효과를 지녔다. 둘째, 몰락한, 또는 몰락하고 있는 농민의 복귀를 위해 일종의 복지세와 면제년이라는 부채탕감 조치를 과감히 도입했다. 여기서 우리는 몰락한 농민의 생계를 위한 공공부조 외에 탈노동화한 대중을 재노동화하는, 이른바 가치창조적 사회 안전망을 구축하려는 정치제도적 시도를 히스기야-요시야 개혁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데 이러한 히스기야-요시야의 개혁 정책은 어떻게 가능했다는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요시야 개혁에 관한 열왕기의 묘사들에서 힌트를 얻는다. ‘암하아레츠(am ha-aretz =“땅에 속한 사람들”)가 어린 요시야를 등극하게 하는 혁명세력의 일원으로 등장한다는 사실을 주목하자.(열왕기상21,24) 암하아레츠는 기원전 841년경 사제 여호야다가 주도한 반아달리야 혁명 때에 처음 등장하였고(열왕기상11,18), 기원전 609년 요시야 왕이 이집트의 느고 2세에 의해 죽임당한 뒤 그의 막내아들 여호아하스를 옹립할 때에도 등장한다.(열왕기상23,30) 역사가 오펜하이머(Aharon Oppenheimer)는 고대 팔레스티나의 여러 문헌들을 검토한 결과 암하아레츠는 농민 일반을 포괄적으로 지칭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열왕기의 암하아레츠는 정치화된 벧-아브를 가리켰다.

요컨대 히스기야-요시야 개혁에는 왕실과 왕실사제 집단 그리고 암하아레츠로 이어지는 복지동맹이 있었다. 그리고 이 복지적 개혁의 주된 수혜자는 바로 평범한 소농인 벧-아브였다. 그들은 반아달리야 혁명이 일어날 때인 기원전 841년경부터 여호아하스가 즉위하던 기원전 609년까지 무려 150년간이나 왕실의 정치사에 개입하면서 정치적 감각을 발전시켜간 주체였고, 기이어 히스기야-요시야 개혁이라는 유다국 역사의 기념비적 사건의 주역이 되었다.

정리하면 이스라엘 지파동맹이 여러 열악한 조건들에도 불구하고 벧-아브들을 위한 사회적 안전망을 갖춤으로 인해 두 세기 동안이나 견고하게 지속될 수 있었고, 국가 이스라엘도 탄탄한 벧-아브를 기반으로 하여 팔레스티나의 강대국으로 존립할 수 있었다. 그리고 독립적인 소농인 벧-아브의 전통이 미약했던 유다국은 오랫동안 약소국일 뿐이었지만, 건강한 벧-아브를 탄생시킨 히스기야와 요시야 개혁으로 인해 이 나라는 팔레스티나의 강대국으로 받돋음했다. 이것은 고대 팔레스티나 판 보편적 복지의 작동을 통해 가능했고, 그 배후에는 벧-아브가 주축이 된 복지동맹이 있었다.

 

작은교회적 주체와 한국형 복지연합의 가능성


 

이러한 성서적 전거들을 통해 우리는 고대 이스라엘 사회의 야훼신앙이 그 사회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평민 계층의 보편적 복지 시스템과 깊은 연관 속에서 형성되어 왔음을 볼 수 있다. 그것은 결코 성서 텍스트를 문서화했던 귀족들만의 신앙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러한 고대 이스라엘적인 보편적 복지 시스템의 근저에는 야훼신앙으로 결속된 민중세력이 있었다. 곧 야훼적 민중연합이 성서적 복지 담론의 숨은 주역이었던 것이다.

이런 신앙 전통의 맥락 위에서 오늘 우리는 기독교 대중으로서 한국사회의 복지를 생각한다. 특히, 강력한 좌파정당이나 노동조합이 부재한 우리의 상황에서 복지동맹이 어떻게 가능할지를 상상한다. 무엇보다도 기독교 대중인 우리는 이러한 사회적 과제 앞에서 어떻게 복지동맹의 일원으로서 창의적으로 우리의 신앙적 과제를 사회 속에서 수행할 수 있을지를 곰곰이 묻고자 한다. 단 여기서는 교회에 한정해서 이야기를 펴겠다.

그런데 복지동맹의 일원으로서 교회를 얘기할 때 먼저 문제가 되는 것은 교회가 한국사회에서 가장 보수적인 행위자의 하나였다는 사실이다. 한국에서 보수는 복지에 반대하거나 선별적 복지를 주장한다.[각주:4] 이러한 일반적 태도는 교회가 최근 복지 논의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지를 시사한다. 그런 점에서 교회는 보편적 복지를 지지하는 복지동맹의 일원이 될 가능성이 적다는 것이 일반적인 추론이다.

하지만 교회가 복지동맹의 일원이 될 가능성이 적다는 추론은 대형교회들이 과점하고 있는 기독교적 주체의 반영이다. 여기에는 실제의 대형교회들 그리고 짝퉁 대형교회[각주:5]인 중소형교회들의 욕망이 담겨 있다. 이들이 한국 기독교의 생각과 행동을 표상하는 제도들을 장악하고 있음으로 해서 한국 기독교는 보수적이고 친미적이며 배타적인 존재로 표상되고 있다. 나는 이 글에서 이러한 주체를 대형교회적 주체라고 부르겠다.

그런데, 교회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과는 달리, 목회자 가운데 이러한 대형교회적 주체와는 다르게 인식하고 행동하는 이들이 생각보다 많다. 또한 평신도 차원에서 보면 그런 현상은 더욱 현저하다. 지난 2012411일에 치러졌던 제19대 총선에서 보았듯이 기독교자유민주당을 추진했던 일부 대형교회 목사들의 기대와는 달리 그 교회들의 신자들조차 적지 않을 수가 기독교자유민주당에 투표하지 않았다.[각주:6] 다만 이들은 한국 기독교의 생각과 행동을 표상하는 지배적 제도에서 소외되어 있기 때문에 그 다름이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최근 부상한 성직자 과세 의제에 대해서 찬성하는 개신교 신자들의 수는, 비록 국민 전체의 찬성률(64.9%)보다는 낮지만, 60.4%나 되었다.[각주:7] 또 교회 사역자들의 경우도 과거보다 훨씬 더 많은 이들이 자발적 소득신고 의사를 표명하고 있다.[각주:8] 이것은 개신교 목회자와 신자들 사이에서 기독교도 사회의 일부이며 조세 평등이라는 사회적 공공성의 의무를 져야 한다는 생각이 널리 확산되었음을 시사한다.

나는 이 글에서 대형교회적 주체와는 다르게 인식하고 행동하는 교회와 목회자를 작은교회라는 이념형(ideal type)으로 규정하겠다. 그것은 규모가 작기도 하거니와 대형교회를 선망하지도 않으며 성장 중심적 프로그램을 실행하지 않는 교회와 그 목회자 및 신자 공동체를 포함한다. 내 생각에는 이 작은교회들은 1990년 어간 이후에 에큐메니컬 진영에서 급격히 늘어났고, 1990년대 중반 이후에는 에반젤리컬 진영에서도 크게 확산되었다. 그것은 교회개혁담론이 기성교회를 벗어나 새로운 교회 운동으로 확산되는 추세를 반영한다.

아무튼 오랫동안 한국교회들의 정체성과 운영의 형식을 구성했던 성장주의를 폐기 내지 지양한다는 것은, 의도했든 아니든, 커다란 변화를 수반한다. 우선 이런 교회들은 신앙제도의 많은 부분을 새로운 것으로 채워야 한다. 성장주의는 성장을 위해 가용자원을 집중 투여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그것은 카리스마적 지도력을 행사하며 교회의 모든 자원을 좌지우지하는 독재자형 목회 유형을 제도화했다.[각주:9]

이러한 성장주의형 교회가 교회간 정치에서 압도적인 헤게모니를 장악했다. 거의 모든 교회는 대형교회가 되거나 짝퉁 대형교회가 되었다. 그것은 카리스마적 목회자가 되지 못하고 교회를 독점적으로 운영하지 못하는 교회 사역자에게 심리적이든 실제적이든 불이익이 가도록 제도화되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신자들에게도 그러한 심리적이고 실제적인 예속을 신앙화하는 방식의 마음의 제도가 형성되었다. 그러므로 성장주의를 지양한다는 것은 목회자와 신자들에게 익숙한 교회적 신앙 양식에서 벗어나는 대안적 실험을 필요로 한다.

하여 작은교회들은, 이념에서나 신앙 양태에 있어서 매우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 탈권위주의적인 목회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각주:10]탈권위적이라는 것은 첫째로 목회자와 교인 간의 탈권위성을 의미한다. 가령 교회의 공간 배치에서 목회자의 자리와 신자의 자리를 이분화하는 구성을 지양하고, 앞과 뒤가 해체되는 공간 배치를 실험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며, 설교와 예전의 독점성을 해체하고, 교인에게 기회가 배분되는 방식의 새로운 설교와 예전의 양식이 구상되기도 했다. 그것은 규모가 크고 전통적 형식이 강건한 교회에서는 쉽지 않은 변화이다. 하지만 작은교회는 이러한 변화를 자유롭게 실험할 수 있는 존재론적 기회를 누린다. 이것은 획일적 충성심으로 엮인 목회자-교인의 관계를 수평적으로 전화시키며, 교회가 다성적이고 다중 주체적으로 변화하도록 자극한다.

둘째로, 전통적인 선교 담론은 신자 대 비신자 간의 심리적 위계를 전제하고 있으므로, 신앙의 탈권위성은 교회 안과 밖 사이의 배타적 경계를 약화 내지 해체시켰다. 이것 역시 규모가 작을 때 훨씬 용이한 인식의 변화다. 1990년대 이후 교회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급속하게 매우 부정적으로 바뀌었고, 이것은 교회가 지역사회와의 거리를 좁히지 않으면 안 되는 요소로 작용한다. 큰 교회는 인적 물적 사회적 자원을 많이 갖고 있기 때문에 지역사회의 압박에 덜 민감한 반면, 중소형 교회들은 훨씬 더 큰 압박에 놓이게 된 것이다. 하여 중소형 교회들 가운데 적극적으로 성공지상주의를 지양하려는 많은 작은교회들은 지역사회 친화적인 인식과 활동에 매우 적극적으로 생각하며 행동한다.

마지막으로 신과 인간 사이의 권위주의적 신앙 양식에서도 변화가 뒤따르기도 한다. -인간의 수직적 연결망이 수평화되면서, 신의 자리를 저 높은 미지의 곳으로 가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 그리고 사람과 자연 환경 사이에서 신을 상상하게 되는 신앙과 신학이 발전하게 된다. 이것은 교회를 사회 속에서, 나아가 자연 환경 속에서 의미 있는 행위자로 배치하는 것에 관한 인식과 실천의 변화를 낳았다.

한데 이 글은 이러한 탈권위적이고 사회 참여적인 태도와 작은교회 간의 상대적 친화성이 사회복지와 작은교회 사이의 친화성으로 이어진다는 논지를 펴고자 한다. 여기서 먼저 고려할 것은 한국의 정부는 복지가 본격화된 1990년대 말 이후, 복지 서비스의 많은 부분을 비영리기관에 위탁하는 민간위탁제도를 운영해왔다는 점이다.[각주:11] 이때 교회는 가장 대표적인 민간위탁기관에 속한다. 정부는 인건비와 장소사용료 및 운영비 일부를 지원하는 형식으로 복지 서비스를 위탁기관이 대행하도록 했다.

이 복지 서비스의 민간위탁제도에 작은교회들은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작은교회들은 성장지상주의적 교회 프로그램을 지양하자 남는 시간을 활용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했다. 이때 많은 작은교회들은 전도 프로그램이나 교인 훈련 프로그램 대신 약한 이웃에게 복지 서비스를 제공하는 활동들을 기획하곤 했다. 그리고 이것은 복지 서비스의 민간위탁기관이 되는 기회로 이어지곤 했다.

그렇게 되면 무엇보다도 최저생계비 이하의 열악한 소득 수준의 교회 사역자들에게 생계비를 획득할 기회를 주었다. 하지만 인적, 물적 자원이 부족한 작은교회들은 혼자서는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해서 주변의 네트워크를 적극 활용하는 것이 절실해진다. 이것은 이웃과의 수평적 관계를 확장하며 사회적 공공성에 대한 인식을 심화시키게 한다. 그리고 권위주의적 신앙과 신앙의 배타성을 교정하도록 자극한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서 작은교회의 목회자들과 신자들은 복지의 확대를 신념화하게 되며, 그러한 신앙을 이웃과 공유하려는 삶의 지향을 갖게 된다. 이 과정에서 작은교회는 복지동맹의 잠재적 일원이 된다. 즉 대형교회는 복지에 반대하거나 제한적 복지에 우호적인 반면, 작은교회는 복지에 적극적인 태도를 가질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것이다.

둘째로 최근 중앙정부와 지자체 정부 모두에서 붐을 일으키고 있는 사회적 기업의 육성과 관련해서 이야기해 보자. 여기서 그 사회역사적 배후로 신자유주의적 지구화 현상을 고려해야 한다. 이러한 지구화는 무수한 공공적인 것을 사적인 것으로 전화시키는 폭력적 경향을 낳았다. 그런데 다른 한편 지구화는 사람들의 경험 범주를 국가 차원보다 더 광역화되거나 더 미시화된 무수한 영역들을 창출하였다. 이때 이 광역, 협역의 영역에서 새로운 공공적 범주들이 탄생했다. 정부는 바로 이 공공적 범주들을 활성화시킴으로써 복지를 보다 확대 심화시키는 역할을 사회적 기업에게 부여하고자 하였다.

이렇게 사회적 기업은 거시적, 미시적 범주의 사회적 공공성을 신장시키면서 이윤을 창출하는 새로운 기업 모델이다. 정부는 이러한 사회적 기업의 지원 정책을 통해서 특히 거시, 미시적 범주에서의 공공성을 위한 사회의 수평적 네트워크를 활성화하고자 하며, 동시에 고용의 확대를 기대하고 있다.

그런데 사회적 기업이 개념화되고 폭넓게 확산되기 훨씬 전부터 많은 작은교회들은 사실상의 사회적 기업을 만들어 운영해왔다. 특히 박원순 시장의 서울시가 적극 추진하는 마을 만들기프로젝트들은 이미 훨씬 이전부터 전국의 많은 작은교회들의 주요 활동 아이템이었다. 작은교회가 배타적 성장을 추구하지 않고도 교회사역자의 생계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교회모델로서 사회적 기업은 매우 유효한 것임이 확인되었던 것이다. 하여 중앙정부와 지자체 정부가 개설한 사회적 기업 지원 프로그램에 많은 교회사역자들과 신자들이 교회 활동을 매개로 적극 참여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주지할 것은 사회적 기업을 운영하거나 조직하는 데 관여한 교회들 가운데 실패 사례와 성공 사례가 적지 아니 있다. 그것은 교회의 선교 프로그램으로 사회적 기업이 자동적인 기회를 보장해주는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하여 교회의 사회적 기업의 성공과 실패의 사례를 매뉴얼화하고 가능성과 한계를, 혹은 가능성을 위한 위험 요인을 점검하고 분석하는 일이 절실하다.

아무튼 작은교회의 신학을 구성함에 있어서 사회적 기업을 담론화하면, 이러한 사회적 기업은 협의적 종교성을 매개로 하지 않은 이웃과의 수평적 네트워크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공공성의 확대와 사회적 복지의 신장을 위한 활동이 바로 선교라는 신앙적 인식을 필요로 한다. 그런 점에서 탈권위주의적이고 탈배타주의적인 신앙을 추구하는 작은교회는 사회적 기업과 친화적이다. 이렇게 작은교회는 복지담론의 적극적인 행위자가 되고 있고, 복지동맹의 실제적인 일원일 수 있다는 것이다.

 

작은교회의 공공신학

 

1960,70년대에는 산업선교운동이 박정희 정부가 추진한 산업화의 비인간화에 저항하는 기독교의 행위자적 주체로서 형성되었고, 여기에는 주로 북미에서 발전한 산업선교신학이 있었다. 1980년대에는 권위주의 체제의 반민중성에 대항하는 교회적 행위자로 민중교회가 있었으며, 민중신학적 담론이 민중교회적 주체의 형성에 일정한 기여를 했다. 하지만 작은교회는, 이상과 같이 오늘 우리사회의 주요 현안인 복지동맹의 잠재적 행위자임에도, 교회적 행위자로서의 주체가 형성되지 않았다.

이제까지 작은교회는 신학의 주제가 된 적이 없었고, 작은교회에 대한 현황조차도 조사된 적이 거의 없었다. 요컨대 아직 작은교회는 신학적으로 이름을 부여받지 못했고 하나의 행위자적 주체로서의 자의식을 구축하지 못하였다. 단지 교회와 교회사역자-신자 개개인의 활동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하여 작은교회들은 대형교회적 주체를 대체하는 새로운 신앙 모델로서 정착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앞장에서 언급한 것처럼, 작은교회의 신학화가 오늘 우리 시대의 비판적 신학의 주요 과제의 하나라고 본다. 그러한 신학 작업은 기독교가 보편적 복지의 반대 세력이라는 사회적 평판을 반전시킬 수 있는 교회적 주체의 가능성을 제시해야 하며, 신앙의 이유로 방관하고 있는 무수한 교회사역자와 신자 대중을 기독교적 정체성으로 결속시켜 복지동맹의 주요 행위자로 전화시킬 수 신앙적 알리바이를 제시해야 한다.

나는 이러한 신학적 작업을 한국적 공공신학이라고 명명한다. 유럽이나 북미에서 발전한 공공신학은 지구화 시대의 거시적, 미시적 네트워크의 변화를 반영하지 못한 채 신학담론화되었다. 그러므로 서양 연구자들의 공공신학적 접근들은 오늘 우리사회의 공공성 논의에 개입시키기엔 너무 진부하다.

한국의 공공신학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교회들의 공공성을 위한 실천들을 조사하고 신학적으로 의미화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특히 앞에서 보았듯이 사회적 공공성을 기반으로 생각과 행동을 구성하기에 더 적합한 교회 모델인 작은교회의 사례들을 조사 연구하고 신학적으로 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한국적 공공신학의 출발점이다. 교회적 공공성의 사례가 없어서 공공신학이 발전하지 않은 게 아니라, 작은교회들의 훌륭한 사례들을 방관해온 것이 공공신학의 부재를 초래한 것이다. 요컨대 공공신학을 위해서 한국의 비판적 신학계가 먼저 할 일은, 서양의 공공신학 저술들을 독서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에서의 공공성 문제를 분석하고, 한국교회, 특히 작은교회들의 공공성 실천과 신앙을 해석하는 작업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작은교회는 한국적 복지동맹의 기독교 파트너로서 주체화될 수 있을 것이다. □ 

  1. 1977년 제도화된 건강보험은 보편적 복지의 핵심적 요소지만, 이 제도는 한국에서 복지가 중요한 사회적 논점으로 부상하기 이전에 권위주의적 정부에 의해 구축되었기에 보편 대 선별적 복지 논쟁과 별개로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인식되었다. 김창엽, 〈건강과 복지―권리와 사회정의의 관점에서〉, 《경제논집》 50/3(2011), 231~232쪽. [본문으로]
  2. 이왕구 정승임, 〈‘박근혜정부 100일’: 노인 기초연금 등 복지공약 축소ㆍ후퇴〉, 《한국일보》(2013.6.2.) [본문으로]
  3. 학자들은 이 mmšt를 ‘정부’를 가리키는 것, 즉 예루살렘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본문으로]
  4. 선별적 복지를 주장하는 보수주의는 한국사회의 특수한 성격에 속한다. [본문으로]
  5. ‘짝퉁 대형교회’라는 것은 대형교회는 아니지만, 대형교회가 되기를 욕망하며 대형교회를 모방하는 중소형교회를 지칭한다. [본문으로]
  6. 기독교정당이 처음 등장한 17대 총선에서 득표율은 1.1%였지만, 18대 총선에서는 2.6%를 득표함으로써, 비록 원내진입에는 실패하였지만 다음 총선에는 비례대표를 원내진입시킬 수 있는 기준선인 3%를 넘길 것으로 기대되었다. 하지만 19대 4.11총선에서 기독교정당의 득표율은 1.2%로 오히려 크게 지지율이 떨어졌다. [본문으로]
  7. 서화동, 〈"목사·신부·스님 세금 내세요"…'성직자 과세' 국민 65% 찬성〉, 《한국경제》(2012.3.5.)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2030557691 [본문으로]
  8. 장요한, 〈종교계 여론 ‘성직자 납세’가 대세〉, 《뉴스천지》(2012.7.20.) http://www.newscj.com/news/articleView.html?idxno=141306 [본문으로]
  9. 나의 책 《시민K, 교회를 나가다》(현암사, 2012), 77~79쪽. [본문으로]
  10. 같은 책, 209~220쪽 참조. [본문으로]
  11. 김순양, 〈사회복지서비스 공급 민영화의 성공요건 고찰―사회복지관 시설의 민간위탁 과정을 중심으로〉, 《한국정책학회보》 7/3(1998), 87~120쪽 참조.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