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한백교회 2012년 4월 1일자 설교로 처음 쓰였고
이것을 수정 보완하여 [공동선] 2012년 5-6월호에 게재되었으며
이를 다시 재수정하여 나의 책 [산당들을 폐하라 - 극우적 대중정치의 장소들에 대한 정치비평]에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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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 없는 주검들
가이사랴에서 강정까지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였다.
“나는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가리지 아니하시는 분이시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가 어느 민족에 속하여 있든지,
다 받아 주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도행전〉 10,34~35
통치가 절정에 이르던 기원전 22년 헤롯 왕은 항구도시를 대대적으로 짓기 시작했다. 이곳은 본래 항구가 있던 자리가 아니다. 항구로 사용하기엔 해안이 너무 깊었다. 그럼에도 굳이 이곳을 선정한 이유는 아우구스투스가 선물한 땅이었기 때문이다.
10년쯤 전 옥타비아누스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전쟁을 벌이고 있을 때 그는 안토니우스의 지지자였다. 그런데 옥타비아누스가 악티움 해전(기원전 31년)에서 승리하고 안토니우스는 자결했다. 이로써 제2차 삼두정치의 시대(옥타비아누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는 종식됐고 로마는 사실상 공화정에서 제정 시대로 이행했다.
정치적 후견인이 사라진 상황에서 헤롯의 통치는 최고의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는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에서 승전 퍼레이드를 할 때 그이를 보좌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다시 10년쯤 전에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시이저)를 암살한 공화파의 일원인 카시우스가 헤롯의 정치적 후견자였다. 하지만 안토니우스가 카시우스를 격퇴하고 제국의 동방지역을 장악하였을 때 헤롯은 안토니우스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어 있었다. 정치적 위기를 맞을 때마다 그는 항상 제국의 강자 편으로 옮겨 다님으로써 성공한 자의 대열에 설 수 있었고, 제국의 강자들은 언제나 (헤롯의 경쟁자를 택한 것이 아니라) 헤롯을 선택했다. 아무튼 그의 새 후견인이 된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원로원에 의해 아우구스투스(전능자) 칭호를 받았고, 아우구스투스는 그를 팔레스티나 지역의 왕으로 임명했다.
하여 그는 로마의 새 통치자에게 충성스런 봉신국 왕임을 입증할 필요가 있었다. 그가 새로 건립한 이 도시는 이런 이유로 건설된 것이다. 과거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의 양자로 입적되었을 때 그의 이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추가되었다. 이 이름을 따서 항구도시는 ‘가이사랴(카이사리아)’로 명명되었다. 요컨대 이 도시 건설은 헤롯 정부의 안보를 위해 필요한 조치였다.
그러나 이 항구도시는 ‘단지 충성심’ 때문에 지어진 것만은 아니다. 그는 지중해 동부에 위치한 최대의 무역항을 꿈꾸었다. 몇 백 년 전 페니키아 인들이 건설했던 작은 도시는 이제 지중해 동부를 대표하는 거대도시로 탈바꿈을 시작했다.
그는 국제무역항이 필요했다. 소아시아와 시리아에서 이집트를 잇는 남북간 뱃길의 중간 기착지 말이다. 거센 바람 때문에 뱃길의 중간 지점에서 쉬지 않으면 안전한 운행이 어려웠기에 중간 기착지를 이곳에 만든다면 국제무역항으로 빠르게 안착할 수 있었다. 또한 로마와 아라비아반도를 잇는 동서간 국제무역에서도 지중해 동단에 위치한 항구의 필요성은 매우 중요했다.
남쪽으로 50여 킬로 정도 떨어진 곳에 욥바라는 오래된 항구도시가 있었다. 과거 솔로몬이 레바논의 백향목을 수입해 들여왔다던 전설을 가진 유구한 역사의 항구다. 하지만 이 도시는 국제무역항으로 발전시키기엔 너무 작았고, 이스라엘 성향이 강해서 가이사랴 같은 이름을 사용하기도 쉽지 않았으며, 국제도시로서 잡다한 인구가 평온하게 거주하기에도 부적합했다.
한데 문제는 가이사랴 역시 항구가 들어서기엔 적합한 곳이 아니었다는 데 있다. 수심이 너무 깊은데다 파도가 거센 탓에 선착장을 만들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거기에 기어이 항구도시를 건설하고야 말았다.
그는 조상대대로 살아온 주민들은 강제로 쫓아냈다. 그리고 집을 빼앗긴 그들을 부역에 동원했다. 수심이 깊은 곳에 나무로 거대한 곽을 짠 다음에 콘크리트와 돌을 부어 수심을 낮게 하였다. 그리고 거센 풍랑을 맞으며 60m에 달하는 방파제를 건설했다. 그런 일을 어떻게 해냈는지도 불가사의지만, 그 일에 동원된 사람들이 바로 그곳 주민, 하루아침에 살 곳을 빼앗긴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이 위험하고 고된 노역을 맨몸으로 감당해야 했다. 바닷가에 살지만 바닷사람이 아닌 이들이 바다에서 목숨을 건 난해한 건축에 동원된 것이다.
그런데 이곳은 단지 국제무역항이 아니었다. 정치와 경제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하여 왕궁, 경기장, 원형극장, 수영장, 공중목욕탕 등도 건설되었다. 주민들이 살던 터에 왕족과 귀족들의 공간이 들어섰다. 또 그이들이 마실 식수를 대기 위해 멀리 갈멜 산에서 9km나 이어지는 도수교(aqueduct) 1가 건설되었다.
여기에 건립된 헤롯 왕궁의 면모에 대해서는 당대의 역사가 요세푸스의 찬사에서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헤롯에 대해서 극한 언사로 비난해마지 않았던 그임에도 이 왕궁을 보고는 너무나 아름답다고 내지르고 말았던 것이다. 요컨대 이 왕궁은 동시대 팔레스티나에서 가장 아름답고 웅대한 건조물에 속했다.
이렇게 건립된 가이사랴는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에서 로마로 연결되는 국제적 ‘관문’이었다. 그곳은 제국의 권력이 유입되는 곳이며, 또 팔레스티나 통치자의 권력이 공고히 되는 곳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헤롯이 죽은 직후 팔레스티나에서 권력게임을 벌이던 지도층들이 황제의 재가를 받기 위해 속속 로마로 향할 때 이 도시를 거쳐 나갔고 돌아왔다. 헤롯의 손자였으나 헤롯에 의해 척살당한 집안의 장손인 아그립바 1세는 이곳을 통해 로마로 망명했고, 칼리굴라(서기 37~41 재위)의 죽마고우로서 대권을 손에 쥐고 팔레스티나로 귀환할 때 이 도시를 통해 들어왔다. 또 팔레스티나의 통치자로 들어온 로마의 총독들의 관저도 이곳에 세워졌으며, 헤롯의 증손자인 아그립바 2세의 관저도 여기에 있었다. 이렇게 이 도시는 팔레스티나의 권력의 핵이었고, 그 배후에는 언제나 로마 황제가 있었다. 이곳은 로마의 정치적 식민주의의 관문인 것이다.
또한 이곳은 부의 중심지다. 황제의 재가로 이곳에서 특권을 거머쥔 이들은 국제무역을 장악하며 막대한 부를 축적하게 된다. 이 도시는 곧 동부지중해 전역에서 가장 큰 재화가 형성되는 곳의 하나가 되었다. 그 풍요로움은 이곳을 발판삼아 처세하는 이들에게 중요한 기회가 된다.
이것은 후대에까지 계속되어 비잔틴 시대(동로마 제국 시대, 서기 306~1453년)에는 인구 10만이나 되는 거대도시로 발전하였다. 이런 규모는 당시 로마제국의 도시들 가운데서 가장 큰 도시의 하나였음을 뜻한다. 2 요컨대 이곳은 로마의 경제적 식민주의의 관문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소박한 어촌마을을 거대한 국제무역항으로 만들어낸 원천적 자원은 바로 원주민들의 땀과 피였다. 그들의 노동과 목숨이 기반이 되어 이 도시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집을 빼앗기고 죽거나 빈민지역에 거주하는 하층민이 되거나 떠돌이가 되어야 했다.
결국 이 도시로 몰려든 사람들, 이 도시에서 성공한 사람들과 실패한 사람들 어느 누구도 그 원주민들의 고통과 죽음을 기억해내지 못하였다. 사람들은 탐욕을 가지고 이 도시로 들어오고 탐욕을 가지고 이 도시에서 살아가며 탐욕을 배우며 이 도시를 떠나간다. 반면 아무도 도시의 제일 밑바닥 층에 화석처럼 묻힌 원주민들의 몸을, 영혼을, 고통을, 삶과 죽음을 발견해내지 못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초기 예수운동이 세계로 전파될 때도 이 도시는 관문이었다. 이방 선교의 선구자인 빌립은 이 도시에 정착했고(8,5; 26,40), 베드로가 이탈리아 부대의 백부장 고넬료(Cornelilus)에게 세례를 베푼 곳도 이 도시였다.(10장) 〈사도행전〉은 그를 최초의 이방인 수세자(受洗者)로 묘사한다. 또 세 차례에 걸친 바울의 선교여정은 언제나 가이사랴를 귀향지로 하고 있었다. 그가 최후로 예루살렘을 방문할 때도 가이사랴를 통해 들어왔고, 예루살렘에서 체포된 이후 구금되어 있던 곳도 이 도시였다. 그리고 여기서 재판을 받은 후 예루살렘 법정으로 이관하려는 총독 베스도(Porcius Festus, 서기 55년 재임)의 판결에 불복하고 황제의 재판정에 서겠다고 주장한 곳도 여기였다. 요컨대 감옥과 법정까지도 선교의 무대로 해석한 〈사도행전〉은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이 도시의 의의를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펼쳐지는, 곧 유대에서 이방으로 가는 선교의 ‘관문’으로만 보려 한다. 즉 초기 그리스도파 운동의 주요 텍스트의 하나인 〈사도행전〉에서도 이 도시는 희생자가 된 원주민의 삶과 영혼이 얽힌 땅이 아니라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선교 거리를 극복하게 하는 관문도시로만 기억되고 있다.
이렇게 헤롯의 탁월한 정치력에 의해 구축된 안보도시는 정치적 관문, 경제적 관문, 선교적 관문으로만 이 도시를 의미 있게 했다. 하여 이 땅에 얽힌 존재들의 얼은, 그 생명성은 망각되었다.
‘안보’는 통치자의 언어다. 통치자는 그 사회와 자신의 안전의 공통분모를 찾아 그것을 안보라고 명명한다. 그리고 그렇게 명명된 안보는 어떤 것과도 거래될 수 없는 절대적 위상을 지닌다. 헤롯에게 로마는 안보의 핵이다. 로마에 적대하는 것은 자신뿐 아니라 전 팔레스티나 사회를 몰락하게 할 것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해서 로마 황제를 기리는 도시를 건립한다.
한데 도시의 건립이 그 나라의 어떤 이들에게는 안보가 아니라 ‘위험’을 뜻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특히 원주민들이 그랬다. 그런 점에서 그 안보는 이들에겐 ‘위험한 안보’였다. 역설이다. 게다가 이 도시는 팔레스티나 전역에서도 가장 커다란 규모의 도시가 아닌가. 그 큰 도시를 위해 가장 작은이들이 자기의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도록 희생해야 했다. 더구나 국제항이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한 노동, 그것은 주민들에겐 위험의 극대화를 의미했다.
안보라는 이름으로 수행된 도시 건설, 거기에 발전에 대한 욕망이 결합되면서 그 안보에 엮인 사람들의 욕구의 크기는 무한히 커졌다. 헤롯이 그랬고, 그 나라의 귀족들이 그랬다. 그리고 그 나라의 발전에서 자기의 성공까지 엮어 상상하고 있던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랬다. 하지만 사실 그 안보를 위한 건설은 다른 이들의 생명을 갈가리 찢어놓는 폭력을 의미했다. 그들의 아무런 동의도 없이 말이다. 또 그런 발전의 체제가 운영되는 과정에서 숱한 희생자들이 끊임없이 나타날 것이었다. 한데 그 발전의 체제와 그것을 지탱하는 안보동맹은 점점 더 큰 탐욕으로 배를 채워갈 것이고 그 과정에서 점점 더 심화된 이익 불균형 상태를 만들어낼 것이다. 나는 이렇게 안보논리가 극단의 비대칭적 이익을 창출하는 것을 ‘탐욕스런 안보’라고 부르고자 한다. 곧 탐욕스런 안보는 불균형을 이루는 이익의 편파적 배분을 정당화하며, 그 희생자들의 고통을 은폐하는 담론적 장치인 것이다.
바로 그런 탐욕스런 안보의 또 다른 예가 강정의 해군기지일지도 모른다. 정부와 군이 발표한 이 해군기지의 명분은 원래 남방 해역 안전과 해저자원 및 해양수송로 보호에 있었다. 한데 그것이 갑자기 대북 안보 문제로 둔갑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 4주기인 2012년 2월22일 기자회견에서 제주강정의 해군기지 건설을 공포하였다. 그 이틀 전에는 백령도와 연평도 해상에서 대규모의 사격훈련이 있었다. 그리고 3월26일에는 천안함 사건 2주기가 된다. 청와대, 정부, 군, 여당, 기독교우파와 극우세력, 그리고 보수언론 등이 일제히 대북 강경발언들을 쏟아냈다. 갑자기 정국은 대북 안보론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2년 전 천안함 사건 때도 6.2 지방선거 직전이었고, 정부는 초고속으로 사건 조사를 마무리했다. 박사학위 논문의 표절 문제도 심의가 두 달이나 걸리는 나라에서 3 전례도 없는 미궁의 사건이 단지 56일 만에 명료한 결과가 발표되었다. 한데 다시 선거 직전, 해군기지 건설이 공포되고 만만치 않은 반대여론에도 불구하고 쏜살같이 공사가 진행되었다. 그리고 지배언론의 맹활약 속에서 순식간에 군사안보가 우선이고, 그것을 반대하는 것은 ‘매국’이라는 이분법이 횡행했다.
사실 이 군사기지는 2007년 참여정부가 기안한 것이다. 여러 군사전문가들은 이것이 미국의 대(對)중국 아시아 방위전략과 결합되어 추진되고 있는 것이라는 논리를 폈다. 미국의 아시아 방위전략이 중국에 대한 광역의 포위망을 형성하는 것으로 전환되면서, 육・공군보다는 해・공군 중심의 전술이 중요해졌고 해군이 주둔하는 영구거점보다는 순환배치의 거점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해졌는데, 그런 점에서 미군이 주둔하지는 않지만 유사시에 중국의 팽창을 막는 요처에 미 해군이 드나들 수 있는 기지를 만든다는 것, 이것이 강정기지의 숨은 함의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미국의 안보 문제가 한국 국민의 안보로 둔갑하여 추진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선정 과정의 문제, 졸속의 환경평가 문제 등이 지적되면서 공사는 사실상 중단 상태에 있었고 찬・반 논의만 무성했다. 그리고 MB 정부는 취임 이후 이 문제에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대통령이 해군기지 건설을 공포한 것이다. 선거와 연계시키지 않는다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보임이 분명했다. 또한 4조 원 이상의 공사비가 드는 거대사업이니만큼 MB 정부가 그토록 목매고 있는 토건자본의 이해와 맞닿으니 이제까지 지난 정부의 사업인 탓에 무관심했던 게 후회스러울 만큼 광속으로 추진되고 있다. 요컨대 통치자와 지배권력의 탐욕이 강정 안보론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즉 미국의 안보 문제였던 것이 최근 한국의 집권세력, 그리고 거대자본의 안보와 결합되었다.
한데 바로 이런 안보론의 제일 큰 문제는 ‘구럼비의 눈물’을 망각하게 한다는 데 있다. 폭파되어 산산조각 나고 있는 구럼비 바위들, 그곳 물과 뭍의 생명체와 비생명체들, 그리고 그곳, 그 땅에 얽힌 주민들의 기억을 산산이 조각내는, 그러한 말살된 기억의 희생이 무시되고, 그것에 대한 항변이 묵살되고 있다. 또한 이 기지가 있음으로 해서 가중된 제주도를 포함한 한반도의 위험과 그로 인한 대중의 불안이 안보의 이름으로 간과되고 있다. 하여 ‘위험한 안보’이자 ‘탐욕스런 안보’가 만들어낸 이 무감각의 체제에서 무덤도 없이 사라진 비존재들은 기억을 상기시킬 아무런 기념비도 없이 망각되어 버릴 위험에 처해 있다. □
- 무려 9km나 되는 길이의 도수교는 지상 5m 정도 높이의 수로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다른 이들이 그 물을 먹을 수 없게 하려는 의도다. 그 물은 단지 귀족들만 독점하는 물인 것이다. [본문으로]
- 서기 11세기 유럽에서 가장 큰 도시들인 피렌체, 베네치아, 밀라노, 제노바 등의 인구가 10만 명 정도였고, 14세기 유럽의 가장 큰 도시의 하나인 파리도 10만 명 정도였다. [본문으로]
- 당시, 2012년 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태권도 선수 출신 한 후보의 박사학위 논문 표절시비가 있었고, 학위를 수여한 대학은 심의 기간이 2개월 정도 걸린다고 발표함으로써, 학위표절 문제 못지않게 2개월 심의 기간이 논란이 되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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