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2년 11월호에 게재된 글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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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 없는 열광의 정치
메시아 정치를 우려한다
촛불의 종교성
2002년 이른 겨울, ‘효순이 미순이를 살려내라’, ‘소파 개정하라’ 등을 외치며 거리 촛불 시위가 한창이던 때, “깃발 치워라”라는 외침으로 시작된 이른바 ‘깃발 논쟁’이 있었다. 이후 이것은 단지 시야를 가로막는 ‘깃발들’에 대한 항의를 넘어서, ‘위대한 1980년대’의 종말을 고하는 하나의 상징적 사건이 되었다. ‘깃발’과 ‘촛불’이 논쟁점을 차별화시키는 상징적 대응물로 부상했고, ‘촛불’은 이후 우리 사회를 읽는 하나의 징후적 이미지가 된 것이다.
여기서 ‘깃발’은 동지들을 결속시키는 기호다. 또한 그것에는 대중의 동원을 조직해내는 사회운동기관들의 인문적 미래기획이 담겨 있다. 반면 ‘촛불’은 이 거대한 집회에 참여한 이들의 의지를 공유하는 상징물이지만, ‘깃발’과는 달리 개개인이 저마다 하나씩 들고 있는 사적 성물(聖物)이다. 하여 ‘촛불’을 들고 있는 이들은, ‘깃발’들에 표상된 조직들의 구호가 아닌, 자기의 염원을 촛불 속에 담고 있는 개인들이기도 하다. 하여, ‘깃발’ 속에는 개개인의 욕망들을 흡수하는 역사 긍정적 미래 비전이 담겨 있지만, ‘촛불’에는 어떠한 역사적 비전으로도 수렴되지 못한 개개인의 좌절된 불안이 촛농처럼 흘러내리고 있다.
과거 ‘깃발들의 시간’에는 그 속에 함축된 미래가, 곧 민주주의가 사적인 불안들을 해소시켜줄 것이라는 믿음이 깔려 있었다. 그러나 그 민주주의가 실행되어도 행복은커녕 더 심한 불행이 엄습했다는 것에서 오는 좌절감이 촛불을 든 개개인들의 불안과 뒤엉켜 있다.
촛불은 오래 전부터 많은 종교들의 염원의 상징물이다. 그 염원은 세속의 질서 속에서 불안과 좌절을 헤쳐 나갈 이치를 발견할 수 없는 이들의 구원에 대한 갈망을 담고 있었다. 바로 그런 종교적 상징물을 2천 년대에 광장에 모여든 대중이 들고 있다. 촛불, 그것은 자신들에게 덮쳐온 삶의 위기를 헤쳐 나갈 계산 가능한 출구를 발견하지 못한 이들이 선택한 종교였다.
정치의 팬덤화, 정치의 종교화, 그리고 예언자와 사도
2012년 대선을 앞두고 벌어지고 있는 대중현상의 배후에도 나는 이러한 종교성이 꽤 의미 있는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것이 긍정적이든 아니든.
근거 없는 폭로전이 난무한데, 심지어 수년 전에 했던 말들, 남의 말이지만 공감을 표하는 제스처를 취했던 말들, 나아가 확실하지 않지만 했을 것 같다고 추정되는 말들까지 ‘정치적 사실’의 공간 속으로 난폭하게 호출되었다. 한데 흥미롭게도 세 명의 주요 후보들의 지지율은 별다른 변화가 없다. 이렇게 확고한 지지자 층이 형성된 이유는 무엇일까?
합리적 유권자가 늘어난 탓도 분명 있다. 하지만 이것이 큰 이유일 것 같지 않은 것은 진정 합리적 유권자라면 자기가 지지했던 후보의 생트집이 너무 지나칠 때 지지를 철회할 수도 있어야 한다. 한데 그럴 만한 사건이 충분히 있음에도 지지율은 요동하지 않았다. 또 경제민주화나 복지, 정치개혁에 대한 공약이 큰 틀에서 유사함에도 그것을 구체화하는 데 있어 세 캠프의 수준 차이가 뚜렷했다. 그럼에도 지지율은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고질적인 지역주의는 여전히 유의미하지만 상대적으로 약해졌고, 정당 중심의 진영주의도 강력하기는 하지만 그 힘이 약화된 것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여기서 내가 강조하고자 하는 주요 변수는 ‘팬덤’이다. ‘대중문화의 팬덤화’ 현상이 1990년대 초, 이른바 서태지 현상과 더불어 나타났다면, 2천 년대에는 ‘정치의 팬덤화’ 현상이 나타났다. 과거에도 유사한 현상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과거에는 지역주의와 결합된 팬덤이 과도하게 활성화됐다면, 2천 년대, 특히 2012년 대선 정국은 지역주의를 매개로 하지 않는, 지리적이고 사회적으로 분산된 이들이 특정인을 중심으로 결속하는 팬덤 현상이 대두한 것이다.
그런데 정치의 팬덤화는 (세속)문화적 현상이지만, 그 중의 일부에는 종교성이 함축되어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왜냐면 정치의 팬덤화 속에는 특정 존재의 숭고함을 추구하고 그이의 숭고함에 힘입어 자신들의 불안으로부터 구원받고 싶은 대중의 욕망이 투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데 앞서 말했듯이 이 불안은 합리적 해결 가능성, 곧 계산 가능한 희망의 조건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 불안이다. 대중은 숭고한 존재들이 이 해결 불가의 불안으로부터 구원해주기를 막연히 바라면서 그들에게 자신의 열망을 쏟아 붓는다. 그런 점에서 최근의 정치의 팬덤화는 종교적이며, 저 숭고한 이들은 세속의 정치로서는 불가능할 것들을 가능하게 해줄 존재, 곧 메시아적 존재다. 요컨대 팬덤의 종교화는 ‘메시아 정치’적 열망을 담고 있다.
물론 한국에서 벌어지는 모든 정치의 팬덤화가 곧 팬덤의 종교화는 아니다. 종교는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신학’이 있어야 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교리 곧 도그마가 구비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도들’이 필요하다. 사도(apostle)는 메시아적 존재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이가 아니라 메시아적 존재 자체를 전파하는 이들이다. 나아가 메시아의 가치나 이념 같은, 현실의 당면 과제를 초월해 있는 이념의 설파자다. 그런 점에서 사도는 예언자(prophets)와 다르다. 예언자는 동시대의 과제를 설파하는 종교적 메신저이고, 대중이 그를 메시아적으로 추앙할 때조차 그는 직면한 과제를 부르짖는 자로서 추앙된다. 반면 사도는 직면한 과제를 외칠 때조차 현실 너머의 메시아적 가치나 이념에 투영된 과제를 설파한다.
2012년 팬덤의 주역인 세 인물 중, 안철수는 예언자에 가깝다. 그는 종교적 메시아라기보다는 유사종교적 메시아, 혹은 예언자 같은 존재다. 반면 다른 두 인물은 본격적인 메시아 정치와 연관해서 해석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들은 메시아 정치의 사도, 특히 예수 제자단에서 베드로 같은, ‘으뜸사도’와 같은 존재이다.
예언자가 부르짖는 개혁의 메시지는 당면한 정치 지형에 결코 작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를 지지하는 대중의 팬덤 현상은 매우 강렬하여, 다른 으뜸사도들의 팬덤 현상을 압도하는 형국이다. 하여 두 으뜸사도들은 자신들이 신봉하는 메시아의 이념에 그의 천둥벼락 같은 당면 개혁의 소리를 반영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했다.
지배적 메시아 vs. 대항 메시아
팬덤은 주류문화에서 상처받은 정체성을 보상받기 위해 벌이는 일종의 대중의 ‘정체성의 정치’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정치의 팬덤화는 경제, 사회, 문화적인 소외감과 고통에 사로잡힌 대중이 그것들로 인해 훼손된 정체성을 보상받기 위해 정치에 주목하여 특정 정치인에게 열광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하여 팬덤으로서의 안철수 현상은 ‘정치개혁’에 방점이 찍혔다. 그는 예언자로서 현재의 당면한 과제는 정치의 구태성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설파했다. 시민의 목소리를 듣기보다는 지배집단의 지대추구적 이해관계의 반영체로서의 대통령의 정치와 정당정치가 이 모든 고통과 소외감의 주요 배경이라는 것이다.
이 예언자적 외침은 다른 대선후보들보다 더 열렬한 대중의 지지를 받았다. 정치 담론을 주도하고 있는 정당의 배경이 없음에도 대중은 이 무소속 후보에게 더 큰 지지와 환호를 보낸 것이다. 하여 두 정당을 대표하는 대선후보 캠프에서도 정치개혁의 밑그림을 그려내도록 이끌었다.
한편 메시아 정치는 말했듯이 고통에서 벗어날 계산 가능한 대안의 부재 위에서 대두한다. 필경 여기에는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의 광풍 속에서 생존을 위해 무한경쟁을 벌여야 하는 대중 모두가 실은 ‘잠재적 실패자’가 되어야 했던 집단적 위기의식이 전제되어 있다. 또한 10년간 지속됐던 민주화가 삶을 위한 안전의 조건을 마련해주지 못했고, 그 대안으로 선택한 MB 정부는 그 위기를 더욱 극대화했다는 좌절감이 깔려 있다. 위기는 심각한데, 대안이 보이지 않는다.
이때 두 메시아적 존재가 다시 역사로 호출되었다. 박정희와 노무현이 그이들이다. 박정희는 1997년 외환위기가 한창일 때 조갑제, 이인화 등에 의해 ‘강력한 지도력을 통한 성공의 아이콘’으로 재해석되었고, 주류미디어에 의해 유포됨으로써 메시아 정치의 주역으로 부상하였다. 하여 박정희 메시아 정치는 자원을 과점하고 있는 지배집단 중심의 체제개혁을 통한 정치적 구원담론의 성격을 지닌다.
반면 노무현은 팬덤의 정치화 현상에 의해 집권하였으나 지배집단의 비협조로 인해 좌절한 영웅이 2009년 죽음과 함께 부활했다는 믿음을 통해 메시아 정치의 주역이 되었다. 그는 지배집단의 권위주의적 권력 과점 체제를 혁신하여 평등한 사회를 이룩하겠다는 민주화의 아이콘인데, 미완에 그쳤다. 이것을 유포한 이들은 주로 인터넷 공간에서 활동하는 비엘리트적 대중이다. 하여 노무현 메시아 정치는 미완에 그친 혁신을 이어가겠다는 도전세력의 ‘대항의 아이콘’이다.
이 두 메시아 정치가 선택한 두 으뜸사제는 알다시피 박근혜와 문재인이다. 한데 흥미로운 것은 이들을 지지하는 대중의 메시아주의적 신앙 양태다. 우선 위에서 말한 지배적 메시아와 대항 메시아가 각각 전자는 초월적 메시아이고 후자는 내재적 메시아라는 점을 주지하자. 초월적 메시아는 강력한 지도력을 통해 위에서 이끄는 존재인 반면, 내재적 메시아는 내면에서 자기를 설득하는 존재다. 이것은 대중의 열광 방식과 관련이 있는데, 전자는 ‘수동적’으로 메시아를, 그 대리인인 으뜸사제 박근혜를 추종하는 반면, 후자는 ‘능동적’으로 대리인 문재인을 지지한다. 여기서 ‘능동적’이라 함은 비엘리트적 대중이 여러 인터넷 카페에서 공론장을 만들어 논쟁을 하면서 노무현의 개혁이 미완에 그쳤던 원인을 분석하고, 전략을 구성하고, 실천을 조직하고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즉 능동적 대중은 ‘해석적 대중’이다.
이런 적극적 해석의 장은 주류 미디어가 아니라 대안 미디어, 특히 인터넷 공론장이다. 거기에서 대중은 무수한 분파적 공동체를 만들어 거기에서 제각기 일종의 노무현 해석 게임을 벌인다. 요컨대 이 메시아 정치의 사도들은 특정 엘리트가 아니라, 다중적 대중(multiful peoples)이다. 그리고 그런 이들이 대선 정국을 맞아 특정 인물을 선택하여 으뜸사도로 위임했다. 대선후보 문재인은 이렇게 부상했다.
가령, NLL 공박담론과 안철수 논문시비 같은 거의 근거 없는 생떼 같은 주장이나 인혁당 논란과 정수장학회 논란에서 보인 심각한 역사와 법률 해석의 몰이해에도 음뜸사도인 박근혜의 지지율은 변함없었다. 또한 NLL 비밀문건 논란에서 보듯 문재인과 그 진영의 사도들을 도전세력임에도 마치 정부가 걱정할 법한 논리로 정상 간의 대화록을 공개하는 것의 부당성을 강변했고, 인혁당 사건이나 정수장학회 사건을 정쟁화할 때도 논리 정연한 화법을 택했다.
이러한 정치의 팬덤화와 정치의 종교화로 특징지울 수 있는 2012년의 대선정국, 과연 시민의 대통령은 선출될 수 있을까? 우선 팬덤과 메시아 정치라는 대중적 열광의 정치학은 절망에 빠지지 않을 수 없는 정치지형을 다시 활기차게 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한 네거티브 선거 전략이 난무함에도 거의 영향을 받지 않는 양상을 보였다.
시민의 삶의 질을 위한 선거, 가능한가
그러나 우려스럽게도 이런 열광의 정치학은 선거에서 정책을 사라지게 했다. 대중이 열광하는 지점을 따라서 모든 후보들은 서로 비슷한 공약의 밑그림을 그렸고, 비록 그 세부 내용이 차별화되기는 하지만 그 차이나 실현 가능성의 문제가 거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어쩌면 아직 시작도 못한 후보간 토론도 별로 당락에 영향을 미치지 못할지도 모른다.
문제는 팬덤적이거나 메시아주의적인 대중의 욕망의 선을 누가 어떻게 자극하는지의 여부가 더 중요해졌다는 점이다. 하여 역대 어느 대선보다도 시민이 존중받는 선거가 되고 있음에도 사실상 시민의 삶의 질을 위한 담론이 홀대되는 선거가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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