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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작은교회와 경제민주화-복지 동맹

NCCK 정의평화위원회 기회토론회 '한국사회의 변화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2차 모임(2013.3.14(목) 오후 2:00~5:00)에서 발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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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교회와 경제민주화-복지 동맹

 

 

 

 

 

무엇을 해야 하는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올해 한국의 경제성장률을 3.1%라고 예측했다. 이것은 OECD가 예측한 세계 경제성장율 평균치인 3.4%보다 낮다. 한국개발연구원(KDI)과 한국경제연구원(한경연)은 더 낮은 예측치인 3.0%2.9%로 보았다. MB 정부 시절의 평균 성장률인 2.9%와 거의 같은 수준이다. 미국의 경제조사기관인 콘퍼런스보드(Conference Board)는 지난해(2.7%)보다 낮은 2.4%로 가장 비관적인 예측치를 내놓았다. 심지어 2019년 이후에는 0%대로 추락할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보았다.

미국 경제가 지난해 말을 기점으로 호전될 것으로 예측되기는 하지만, 그것이 한국 경제에 희소식이 될지는 의문의 여지가 많다. 무엇보다도 달러에 대한 원화 강세가 향후 지속될 것을 감안하면, FTA 체결로 기대했던 수출 기업들의 경쟁력과 수익성은 상당히 악화될 가능성이 크다. 또한 제2기에 들어선 오바마 정부의 정책이 내수산업을 장려하고 있어 미국 수출에 기대를 걸고 있는 한국 정부의 경제 성장 프로젝트는 쉽지 않은 난관을 헤쳐야 하는 상황에 있다. 게다가 향후 세계 에너지 지리학의 판도를 뒤흔들 것이라고까지 평가되는 셰일가스(Shale Gas) 현상은 그 단기적 효과의 하나로 미국 석유화학산업의 가격경쟁력을 아시아국가보다 우위에 있게 하였다. 하여 미국 경제의 회복이 기대했던 것보다 한국 경제에 희소식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특히 박근혜 정부가 강조하는 창조경제론이 정보통신기술(IT)을 기반으로 하는 융합산업에 초점이 있다는 점에서, 셰일가스 효과는 치명적이다. 세일가스에서 추출한 에탄을 주원료로 사용하는 미국의 기업들이 값비싼 나프타를 사용하는 한국 기업들보다 훨씬 유리한 조건을 창출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석유화학산업이 IT기술과 융합되어 첨단지식기반산업을 창출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는 박근혜식 창조경제론은 시작부터 험난한 도정을 예상하게 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달러에 대한 원화 강세가 한동안 계속될 것으로 보이고, 일본의 아베 정부가 취하는 무차별적 양적완화 정책으로 엔화 또한 약세 추세여서 한국 기업의 수출경쟁력은 더욱 어려워질 것이 예상된다.

이런 난관을 수출 기업은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 지금까지의 선례를 통해 예측할 수 있는 가장 개연성이 큰 방안은 수익성 하락을 보전하기 위해 납품업체에게 그 부담을 전가하는 것과 인건비 절약을 위해 값싼 노동력을 활용할 수 있는 외국으로 공장을 이전하거나 비정규직 고용을 늘리는 것이다. 그 결과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양극화가 심화되었으나, 대기업의 고용율은 훨씬 줄었고 비정규직 노동자의 수는 2011년 현재 600만 명에 이르게 되었다. 이것은 기업이 영업활동을 통해 벌어들인 이익을 임금으로 분배하는 비율인 노동소득분배율을 현저히 하락시키는 결과를 초래했고, 임금노동자 평균소득의 2/3 미만의 노동자를 말하는 저임금계층의 비율이 25.4%나 되어, OECD 국가 중 최악의 빈곤화 상황을 나타내게 되었다. 이것은 다시 내수경제를 바닥까지 추락시켜 수출 주도적 기업 이외의 산업을 아사 직전까지 몰아가는 상황을 초래했다. 바로 이런 경제적 악화가 지난해 총선과 대선에서 경제민주화와 복지를 가장 커다란 정책 이슈가 되게 했다. 그리고 성장과 복지의 선순환 체제를 주장한 박근혜 정부는 총선과 대선에서 모두 압승하게 되었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는 경제민주화 공약사항의 하나로 납품 단가 후려치기같은 대기업의 공정거래 위반에 대해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도입하겠다고 했다. 그래야만 전체 고용의 86% 이상을 차지하는 중소기업이 살아날 것이고, 그래야만 정부가 국정지표로 내세운 고용율 70%, 중산층 70% 복원 공약이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한데 IT 융합산업 중심의 창조경제 프로젝트는 지식기반산업 육성 프로젝트여서 생산성의 향상이 고용을 추가로 발생시키지 않고 오히려 적게 유지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 일반적 관점이다. 그러니 IT 융합산업을 추동하는 대기업은 여전히 고용율을 높이기 어렵다. 더구나 IT 융합 청년창업을 육성한다는 계획도 쉽지 않다. 경제민주화가 훨씬 잘 제도화되어 있고 실리콘밸리 같은 IT 인프라가 잘 갖추어진 미국도 자영업 성공률이 고작 7%에 불과한 현실이다. 더욱이 앞서 말한 것처럼 미국 경제가 호조기에 들어섰다고 해도 한국의 수출 기업이 성장하기에 결코 좋은 상황이 아니다.

그럼에도 고용율 70%, 중산층 70% 복원이 가능하려면 성장률이 4.5%는 되어야 한다는 것이 많은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한데 IT 융합 창조경제 프로젝트가 추구하는 수출 주도적 경쟁력은 3%도 예측하기 어렵다는 것이 많은 경제기관들의 판단이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 5년 만에 정부는 과연 4.5%대의 성장을 실현해 낼 수 있을 것인가? 박정희 체제 때와 같은 성장 중심적 발전동원체제를 가동시키면 된다는 생각은 너무나 안이하다. 그러기엔 사회는 훨씬 복잡해졌고, 박근혜 정부가 상상하는 산업 시스템도 고용을 창출할 수 있는 근력기반산업 중심이 아니다. IT 융합산업이 성장동력이 된다고 해도 내수시장은 그다지 활성화되지 않을 수 있다.

결국 단기간에 성장률을 반전시키기 위해 다시 정부는 대기업 중심의 수출주도형 성장모델을 활용할 가능성이 높고, 그것은 경제민주화와 복지 공약을 유보시키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하여 잠시 반짝하는 경제민주화 이행 노력도 흐지부지될 수 있고, 복지도 허울만 멀쩡한, 유효한 삶의 안전망이 못 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장의 기조가 되는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가장 직접적인 과제는 박근혜 정부가 주장한 경제민주화와 복지 공약이 유보되거나 후퇴하지 않도록 하는 게 필요하다. 한데 앞서 보았듯이 경제민주화와 복지 공약이 후퇴하지 않으려면 성장률이 4.5%는 되어야 한다. 하여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어떻게 성장률을 높일 수 있는가?

박근혜 정부의 성장 프로젝트인 수출 주도적 대기업 중심의 이윤주도형 성장모델(Profit-led Growth Model)이 성장과 복지 사이에서 선순환이 어려울 때 성장에 방점을 찍고 복지를 미래의 과제로 돌리게 될 수 있다면, 그렇지 않을 수 있는 대안은 있는가? 이미 많은 이들이 얘기했듯이 임금주도형 성장모델(Wage-led Growth Model)이 그 대안이다.

이것은 성장을 위해 임금노동자의 소득을 안정화시키는 것이 선행되는 발전모델이다. 좀더 구체화하면 앞서 말한 노동소득분배율을 높이고 저임금계층을 줄임으로써 내수시장을 활성화시키는 것을 뜻한다. 그러려면 대기업의 납품단가 후려치기 같은 불공정 하청 관행을 억제하고, 대기업이 중소기업의 시장을 잠식하는 것 또한 억제하며,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등의 고용의 질을 보장하는 조치가 필요하다. 또한 그런 기회를 보장하기 위해 다양한 사회 안전망이 구비되어야 한다. 이것은 바로 경제민주화와 복지를 적극적으로 추진함으로써 실현될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내수시장이 활기를 띠게 되고, 이것이 성장을 추동하는 모델이 바로 임금주도형 성장 모델의 요체다.

여기서 국제경쟁력을 필요로 하는 IT 융합형 지식기반산업은 여전히 중요하지만, 성장의 핵심 동력은 내수시장을 주요 무대로 하는 산업이다. 물론 지식기반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사회 인프라를 구축해야 할 것이고 훌륭한 IT 융합 기술이 개발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소수의 성공을 위해 지금처럼 사회의 인적 물적 자원을 지나치게 쏟아 붓는 전략은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보다 효율적인 IT 융합 산업 성장 전략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은 비효율적인 대기업군 시스템의 개선을 필요로 한다. 여기서 다시 경제민주화를 보다 철저히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가 부각된다.

이와 함께 보다 근원적인 기획 또한 요청된다. 나는 여기서 최근 제기되고 있는 경제적 사회 비전인 포스트성장사회론을 주목한다. 이것은 생태계를 파괴하는 자본주의적 성장모델을 지양하고, ‘성장 없는 자본주의를 상상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지역화폐 운동, 아름다운 마을 만들기 운동, 생태도시/마을 운동, 반소비(Freegan=free+vegan) 운동 등, 무수한 풀뿌리 운동 등에서 실험되고 있는 것이고, 많은 대안사회연구 기관들(: 캐나다의 정상상태경제발전연구소. Center for the Advancement of the Steady State Economy)에서 그것의 미시적, 거시적 체계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다시 처음의 물음으로 돌아가 보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글에서 내가 말하는 것은 다음 두 가지다. 경제민주화와 복지를 보다 우선시하는 발전 모델로의 전환이 요청된다. 보다 근원적으로는 성장 없는 자본주의로의 전환 가능성을 실험하고 연구하는 일이 필요하다.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해야 할 것에 대한 물음이 실천 가능한 것이 되려면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져야 할 것이다. 이 물음은 많은 점을 고려해야 하지만, 이 글에서는 우리의 가능성에 초점을 두고자 한다. 나는 여기서 우리를 개신교 신자들의 공동체, 좀 더 제한하면 (개신교) 교회와 관련 기독교 기구들로 한정할 것이다.

지난 1차 토론회에서 발제자인 김동춘 선생은 ‘87년 체제 넘어서기를 논점으로 제기했다. 그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지난 발제글과 논평글을 참조하면 될 것이고, 다만 여기서 짚어둘 것은 87년 체제는 그 체제의 이데올로기가 지향하는 바와는 달리 사회를 심각하게 양극화되게 하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87년 체제가 시장을 성찰하지 못한 결과이고 시장의 탐식성에 빨려 들어간 탓이다.

짚어둘 것은 87년 체제는 참여정부 이후 급격하게 사회 형성적 능력을 상실했고, 이후 새로운 (보수적 혹은 진보적) 상상력이 도처에서 출몰했다는 점이다. 그런 새로운 상상력 가운데 보수주의적 기획의 하나가 교회와 관련되어 있었다. MB 정부는 그러한 교회의 보수주의적 기획을 등에 업고 집권한 기업가 정부이다.

한국의 산업화 과정에서 정부는 (정부 주체의 관점에서 볼 때) 세 단계의 변화를 겪었다고 할 수 있다. ‘군인 정부에서 민주화 운동가 정부, 그리고 기업가 정부로 이어졌다. 이 세 주체는 한국의 산업화를 추동해온 세 주체들이다. 군인 정부 시대는 산업화의 첫 단계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시기에 한국 산업화를 통제하는 기득권 집단이 형성되었다. 둘째 단계는 그런 기득권 집단에 대한 도전세력이 기득권에서 소외된 시민층과 연대하여 일련의 시민적 개혁이 제도화된 시기다. 87년 체제란 바로 이 시기의 개혁적 정치사회 시스템을 지칭한다.

그러나 87년 체제 이후 가장 자율성이 커진 집단의 이해를 대변하는 기업가 정부가 집권했다. 한데 교회는 바로 이 기업가 정부가 형성한 지배연합의 가장 주요한 협력자(collaborators)라고 할 수 있다. 주류 교회는 군인정부 시대에는 소극적 협력자였고, 그 시기에 대형교회가 탄생했다.[각주:1] 한데 교회는 민주화 운동가 정부 시대에는 저항연합의 적극적 행위자로 부상했고, 이 시기에 대형교회는 정치세력화하기 시작했다. 한편 기업가 정부 시대에 대형교회는 지배연합의 적극적 협력자가 되었다. 하여 대형교회는 이 시대를 기업가 정부 시대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 장로 대통령시대로 이해했다.

그러나 기업가 정부도 실패했다. 시장의 탐식성을 가장 노골적으로 향유한 탓에 87년 체제보다 훨씬 더 심각한 양극화와 격차성(格差性)의 위기를 초래한 탓이다. 이것은 동시에 교회의 장로 대통령 기획의 실패를 의미했다.

이상의 모든 정부들은 예외 없이 수출 중심적인 이윤 주도형 성장모델을 추구했다. 어느 정부도 그것 이외의 성장 가능성을 제도화하려 하지 않았다. 결국 사회적 기득권층의 권력은 더욱 확장, 공고화되었고, 배제된 소외층의 권력박탈 현상 또한 더욱 두드러지게 되었다.

교회 또한 그러했다. 성장하는 교회가 정상이며, 성장하지 않는 교회는 (잠재적으로) 실패한 교회라는 인식이 일상화되었고, 동시에 사회적으로 성공한 교인이 교회에서도 존경받는 반면, 사회적 실패자는 교회의 주변부로 밀려났다. 이것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자기계발 담론과 힐링 담론의 진원지이자 가장 활발한 유통망이 대형교회라는 사실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 둘은 신자유주의적 가치체계와 코딩되어 형성, 발전하고 있는 담론들이라는 점에서 그것이 주는 사회적 효과는 경로의존성을 지닌다. 즉 신자유주의적 자본가적 자의식을 사람들 각자에게 내면화시키는 기재로서 작동하며, 그런 점에서 기본적으로 성공지상주의적이고 엘리트주의적인 편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하여 대형교회는 신앙의 엘리트화를 강화시키는 교회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기업가 정부의 가치와 교회의 가치는 서로 성호성을 지녔다.

이러한 인식은 교회가 사회에서 자리 잡으려면 사회적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는 생각과 연계된다. 해서 기독교도인 시장, 군수, 국회의원, 그리고 대통령의 이미지와 역할을 오버랩시키는 방식으로 사회적 엘리트의 이미지와 종교적 엘리트의 이미지를 중첩시키게 되었다. 장로 대통령은 바로 이러한 대형교회적 성공주의 혹은 패권주의를 시사하는 하나의 상징적인 슬로건이었다. 한데 바로 그러한 장로 대통령 기획이, MB 정부를 경유하면서, 사회적인 조롱의 대상이 된 것이다.

아마도 그런 이유로 박근혜 정부의 탄생기에 교회는 다시 소극적 협력자가 된 듯하다. 물론 그것은 장로대통령 기획의 실패 이후 다른 대안이 안 나왔기 때문이겠다.

, 이제 두 번째 장의 질문에로 돌아가자.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장로대통령 프로젝트 좌절 이후 대형교회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는 앞 장의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관한 논점과 연관시키면, 사회적 양극화를 해소하기 위해 대형교회는 장로대통령 프로젝트와는 다른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고 다시 물음을 수 있다. 결론만 얘기하면 대형교회는 자원 독점형 체제인 엘리트 중심적 성공지상주의가 아닌, 경제민주화와 복지 담론이 내포하는 자원 배분형 사회[각주:2]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하여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이야기하기 위한 다른 우리가 모색되어야 한다.[각주:3] 한데 우리는 여기서 목회자 가운데 대형교회적 가치를 추구하지 않고 다르게 인식하고 행동하는 이들이 적지 아니 존재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게 된다. 또한 평신도 차원에서 보면 그런 현상은 더욱 현저하다. 지난 제19대 총선에서 보았듯이 기독교자유민주당을 이끌었던 일부 대형교회 목사들의 기대와는 달리 그 교회들의 신자들조차 적지 않을 수가 기독교자유민주당에 투표하지 않았다. 다만 이들은 한국기독교의 생각과 행동을 표상하는 지배적 제도에서 소외되어 있기 때문에 그 다름이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최근 부상한 성직자 과세 문제에 대해서 찬성하는 개신교 신자들의 수는, 비록 국민 전체의 찬성률(64.9%)보다는 낮지만, 60.4%나 되었다. 또 교회 사역자들의 경우도 과거보다 훨씬 더 많은 이들이 자발적 소득신고 의사를 표명하고 있다. 이것은 개신교 목회자와 신자들 사이에서 기독교도 사회의 일부이며 조세 평등이라는 사회적 공공성의 의무를 져야 한다는 생각이 널리 확산되었음을 시사한다.

하여 나는 다른 우리를 논하기 위해 대형과교와 구별되는 작은교회라는 이념형(ideal type)을 제안하고자 한다. 여기서 작은교회란 단순히 크기가 작은 교회라는 뜻이 아니라, 대형교회적 가치, 곧 성장 지상적이고 권위주의적 신앙 관행을 추구하지 않는 교회와 목회자, 및 신자공동체를 말한다.

내 생각에는 이런 지향의 작은교회들은 1990년 어간 이후에 에큐메니컬 진영에서 급격히 늘어났고, 1990년대 중반 이후에는 에반젤리컬 진영에서도 크게 확산되었다. 그것은 교회개혁담론이 기성교회를 벗어나 새로운 교회 운동으로 확산되는 추세를 반영한다.

아무튼 오랫동안 한국 교회들의 정체성과 운영의 형식을 구성했던 성장주의를 폐기 내지 지양한다는 것은, 의도했든 아니든, 커다란 변화를 수반한다. 우선 이런 교회들은 신앙제도의 많은 부분을 새로운 것으로 채워야 한다. 성장주의적 교회는 성장을 위해 가용자원을 집중 투여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그것은 카리스마적 지도력을 행사하며 교회의 모든 자원을 좌지우지하는 독재자형 목회 유형을 제도화했다. 또한 그것은 카리스마적 목회자가 되지 못하고 교회를 독점적으로 운영하지 못하는 교회 사역자에게 심리적이든 실제적이든 불이익이 가도록 제도화되었고, 신자들에게도 그러한 심리적이고 실제적인 예속을 신앙화하는 방식의 마음의 제도가 형성되었다. 그러므로 성장주의를 지양한다는 것은 목회자와 신자들에게 익숙한 교회적 신앙 양식에서 벗어나는 대안적 실험을 필요로 한다.

하여 작은교회들은, 이념에서나 신앙 양태에 있어서 매우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 탈권위주의적인 목회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탈권위적이라는 것은 첫째로 목회자와 교인 간의 탈권위성을 의미한다. 가령 교회의 공간 배치에서 목회자의 자리와 신자의 자리를 이분화하는 구성을 지양하고, 앞과 뒤가 해체되는 공간 배치를 실험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며, 설교와 예전의 독점성을 해체하고, 교인에게 기회가 배분되는 방식의 새로운 설교와 예전의 양식이 구상되기도 했다. 그것은 규모가 크고 전통적 형식이 강건한 교회에서는 쉽지 않은 변화이다. 하지만 작은교회는 이러한 변화를 자유롭게 실험할 수 있는 존재론적 기회를 누린다. 이것은 획일적 충성심으로 엮인 목회자-교인의 관계를 수평적으로 전화시키며, 교회가 다성적(polyphonic)이고 다중 주체적(multiplic)으로 변화하도록 자극한다.

둘째로, 전통적인 선교 담론은 신자 대 비신자 간의 심리적 위계를 전제하고 있으므로, 신앙의 탈권위성은 교회 안과 밖 사이의 배타적 경계를 약화 내지 해체시켰다. 이것 역시 규모가 작을 때 훨씬 용이한 인식의 변화다. 1990년대 이후 교회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급속하게 매우 부정적으로 바뀌었고, 이것은 교회가 지역사회와의 거리를 좁히지 않으면 안 되는 요소로 작용한다. 큰 교회는 인적 물적 사회적 자원을 많이 갖고 있기 때문에 지역사회의 압박에 덜 민감한 반면, 중소형 교회들은 훨씬 더 큰 압박에 놓이게 된 것이다. 하여 중소형 교회들 가운데 적극적으로 성공지상주의를 지양하려는 많은 작은교회들은 지역사회 친화적인 인식과 활동에 매우 적극적으로 생각하며 행동한다.

마지막으로 신과 인간 사이의 권위주의적 신앙 양식에서도 변화가 뒤따르기도 한다. -인간의 수직적 연결망이 수평화되면서, 신의 자리를 저 높은 미지의 곳으로 가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 그리고 사람과 자연 환경 사이에서 신을 상상하게 되는 신앙과 신학이 발전하게 된다. 이것은 교회를 사회 속에서, 나아가 자연 환경 속에서 의미 있는 행위자로 배치하는 것에 관한 인식과 실천의 변화를 낳았다.

한데 이 글은 이러한 탈권위적이고 사회 참여적인 태도와 작은교회 간의 상대적 친화성이 민주화-사회복지와 작은교회 사이의 친화성으로 이어진다는 논지를 펴고자 한다(물론 그 역()의 과정도 가능하다). 여기서 먼저 고려할 것은 오랫동안 한국의 정부들은 복지 서비스의 많은 부분을 비영리기관에 위탁하는 민간위탁제도를 운영해왔다는 점이다. 특히 국민의 정부 시기인 1990년대 말 이후 이러한 복지의 민간위탁제도가 크게 활성화되었다. 이때 교회는 가장 대표적인 민간위탁기관에 속한다. 정부는 인건비와 장소사용료 및 운영비 일부를 지원하는 형식으로 복지 서비스를 위탁기관이 대행하도록 했다.

이 복지 서비스의 민간위탁제도에 작은교회들은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작은교회들은 성장지상주의적 교회 프로그램을 지양하자 남는 시간을 활용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했다. 이때 많은 작은교회들은 전도 프로그램이나 교인 관리 및 훈련 프로그램 대신 약한 이웃에게 복지 서비스를 제공하는 활동들을 기획하곤 했다. 그리고 이것은 복지 서비스의 민간위탁기관이 되는 기회로 이어지곤 했다.

그렇게 되면 무엇보다도 최저생계비 이하의 열악한 소득 수준의 교회 사역자들에게 생계비를 획득할 기회를 주었다. 하지만 인적, 물적 자원이 부족한 작은교회들은 혼자서는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해서 주변의 네트워크를 적극 활용하는 것이 절실하다. 이것은 이웃과의 수평적 관계를 확장하며 사회적 공공성에 대한 인식을 심화시키게 하는 사회적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리고 권위주의적 신앙과 신앙의 배타성을 교정하도록 자극한다.

둘째로 최근 중앙정부와 지자체 정부 모두에서 붐을 일으키고 있는 사회적 기업의 육성과 관련해서 이야기해 보자. 여기서 그 사회역사적 배후로 신자유주의적 지구화 현상을 고려해야 한다. 이러한 지구화는 무수한 공공적인 것을 사적인 것으로 전화시키는 폭력적 경향을 낳았다. 그런데 다른 한편 지구화는 사람들의 경험 범주로 국가 차원보다 더 광역화되거나 더 미시화된 무수한 영역들을 창출하였다. 이때 이 광역, 협역의 영역에서 새로운 공공적 범주들이 탄생했다. 정부는 바로 이 공공적 범주들을 활성화시킴으로써 복지를 보다 확대 심화시키는 역할을 사회적 기업에게 부여하고자 하였다.

이렇게 사회적 기업은 거시적, 미시적 범주의 사회적 공공성을 신장시키면서 이윤을 창출하는 새로운 기업 모델이다. 정부는 이러한 사회적 기업의 지원 정책을 통해서 특히 거시, 미시적 범주에서의 공공성을 위한 사회의 수평적 네트워크를 활성화하고자 하며, 동시에 고용의 확대를 기대하고 있다. 아직 초기 단계여서 그 성과와 효과를 단언할 수 없으니 적어도 현재 추세로는 전통적인 국가복지가 하지 못했던 많은 부분의 복지 서비스를 담당할 가능성이 예측된다.

그런데 사회적 기업이 개념화되고 폭넓게 확산되기 훨씬 전부터 많은 작은교회들은 사실상의 사회적 기업을 만들어 운영해왔다. 특히 마을 만들기프로젝트들(: 동네미술과+영화모임+독서모임+Cafe+교회)은 많은 작은교회들의 주요 활동 아이템이었다. 작은교회가 배타적 성장을 추구하지 않고도 교회사역자의 생계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교회모델로서 사회적 기업은 매우 유효한 것임이 확인되었던 것이다. 하여 중앙정부와 지자체 정부가 개설한 사회적 기업 지원 프로그램에 많은 교회사역자들과 신자들이 교회 활동을 매개로 적극 참여하고 있다. 이것은 한국의 국가복지 시스템이 너무 미비한데다 개신교 교회연합체들이 개별교회에 대한 지원 시스템이 미비한 탓에 발전할 수 있었던 일종의 작은교회적 생존프로젝트였다. 그런 점에서 사회적 복지와 관련해서 작은교회는 인식의 차원에서는 많이 결여되어 있지만 경험의 차원에서 복지와 친화적인 측면이 있다.

이러한 사회적 기업은 협의적 종교성을 매개로 하지 않은 이웃과의 수평적 네트워크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공공성의 확대와 사회적 복지의 신장을 위한 활동이 바로 선교라는 신앙적 인식을 필요로 한다. 그런 점에서 탈권위주의적이고 탈배타주의적인 신앙을 추구하는 작은교회는 사회적 기업과 친화적이다.

이러한 작은교회를 새로운 우리로서 논할 수 있다면 앞장의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관한 논의에서 제기된 경제민주화와 복지를 추구하는 새로운 발전모델에 교회가 할 수 있는 것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된다. 한데 앞에서 보았듯이 박근혜 정부는 이 새로운 발전모델을 지향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그럼에도 박근혜 정부가 제기한 경제민주화와 복지에 관한 공약들은 새로운 발전모델로의 전환을 지향하는 운동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운동들은 박근혜 정부가 성장과 경제민주화복지 사이에서 동요하고 성장지상주의적으로 우선회할 때 그러한 발전경로에 이의를 제기하고 복지와 경제민주화적 제도화를 촉구하는 사회적 압박을 가할 수 있다. 그러한 운동의 주체를 나는 새로운 발전모델을 위한 사회적 동맹이라고 규정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상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작은교회는 이러한 사회적 경제민주화와 복지 동맹의 잠재적 구성원으로 이미 존재하고 있다고 본다.

물론 여기에는 작은교회가 인식의 차원에서 경제민주화복지 동맹의 일원이라는 자의식이 형성되어야 한다는 전제가 붙는다. 이미 많은 작은교회들이 잠재적인 경제민주화복지 동맹의 일원이지만 그러한 자의식의 신앙화를 방해하는 대형교회적 신앙의 장치가 여전히 작은교회의 목회자와 교인들의 생각에 깊게 새겨져 있어 실천에 비해 인식의 지체 현상이 뚜렷하다. 게다가 많은 작은교회 목회자들과 신자들은 교회연합체의 무관심과 신학적 무관심 속에서 고독한 생존투쟁에 지쳐 있어 자존성이 약하고 패배의식이 너무 깊게 새겨져 있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작은교회를 담론화하고 복지와 경제민주화 의제를 신앙화하는 신학적 프로그램이 필요하며, 상실한 자존감을 회복시키는, 신자유주의와는 다른 경로성을 지니는 힐링 프로그램 또한 필요하다. 그것은 NCC 같은 교회간연합체와 대학이나 재야연구단체 같은 신학 기관들의 과제로 남겨져 있다.

또 하나, 작은교회 목회자들을 대형교회적 연합체인 교단 총회와 분리하는 일 또한 필요하다고 본다. 교단 총회가 형성하는 담론 시스템은 작은교회 목회자들의 목소리를 삭제하는 효과가 있다. 이것은 그들 목회자들을 탈주체화하고, 교단의 대형교회적인 배타주의적이고 자본친화적인 보수주의 신앙체계에 무력한 하위주체로 포섭하는 신앙제도적 장치로 작동된다. 그런 점에서 이런 시스템은 작은교회 목회자의 내면에서 이미 새로운 신앙으로 꿈틀거리는 사회적 공공성의 인식이 정치화되지 못하도록 막는다. 이런 총회적 신앙제도 시스템에서 작은교회 목회자들 개개인은 무력한 제3자의 위치로 전락되어 있다. 하여 작은교회 목회자가 스스로 자기 교회의 프로그램을 이야기하고 지지받을 수 있는 발언의 장이 될 수 있도록, 교단 너머로 인적 네트워크화된 새로운 공론장이 요청된다.

지금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말했듯이 경제민주화복지를 위한 사회적 동맹의 일원이 되기에 작은교회는 인프라가 잘 갖추어진 신앙제도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인프라가 경제민주화복지 동맹의 적극적 주체로 교회를 재주체화하기에는 신앙적 인식의 부재가 문제다. 하여 작은교회를 재주체화하는 담론적, 제도적 접근이 필요하다. 그렇게 하여 작은교회가 실질적인 경제민주화복지 동맹의 일원이 되게 하는 것, 바로 그것이 오늘 우리가 할 수 있는 신앙적 과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을 버려야 하는가

 


글을 마무리하면서 우리가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들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교회적 신앙의 구석구석까지 끼어들어 있는 성장지상주의적 신앙을 청산하는 일이 필요하다. 엘리트적 성장주의의 주역인 군부 권위주의 정부들을 극복하고자 했던 민주화 담론의 제도화 양식인 87년 체제가 실패했던 것도 결국은 내면까지 들어온 엘리트적 성공지상주의의 잔재를 청산하는 데 실패한 데 기인한 것처럼, 대형교회적 신앙을 청산하려는 오늘의 개혁 담론도 우리 밖의 대형교회를 청산하는 데 치중한 나머지, ‘우리 안의 대형교회적 욕구를 간과함으로써 위기를 자초할 수 있다. 그러므로 대형교회를 극복하기 위한 우리의 노력에는 내면의 전쟁이 수반되어야 한다.

이것은 성공지상주의에 대한 철저한 점검 작업을 필요로 한다. 그러한 작업은 주로 신학자와 신학 사상가의 영역이다. 이것이 깊이 사고하는 일의 전문가들이 필요한 이유다. 그들은 교회의 프로그램에 적극 참여하여 신자대중과 소통하여야 한다. 한데 교회 목회자와 신자들 사이에 깊게 물들어 있는 반지성주의는 이러한 깊게 생각하는 신앙적 태도의 형성을 방해한다. 그런 점에서 가볍게 생각하고 적게 독서하는 교회적 관행은 교회의 내적 성장주의를 성찰하는 잠재력을 저해한다.

성장지상주의를 청산하는 일은 슬로건만으로 되지 않는다. 또한 경제민주화복지에 관한 실천들로 충분하지 않다. 그것은 성찰하는 교회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거의 모든 교회에는 깊게 사고하고 성찰하게 하는 독서, 영화 감상 등의 모임을 이끌만한 유능한 평신도가 있다. 단지 교회가 그들을 반겨하지 않을 뿐이다.) 하여 깊게 읽고 사고하는 신앙적 연습이 필요하다. 더 대중적인 것에 치우치는 신앙적 기획과 프로그램 운영은 성찰하는 교회의 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1. 대형교회(mega-church)는 미국의 기준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주일 예배 출석 성인교인이 2천 명 이상인 교회를 말한다. 최근에는 출석교인이 1만 명이 넘는 초대형교회(giga-church)라고 부른다. 한데 나는 ‘대형교회’를 규모의 관점에서만 규정하지 않는다. 한국에서 대형교회는 성장을 위해 모든 가용자원을 투입하는, 이른바 ‘성장 지향적 총동원 체제’를 통해 형성되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한국의 대형교회들에서는 담임목회자의 압도적 권력화가 수반되었다. 그이는 장기간 한 교회의 담임목사로 재임하면서 모든 자원을 임의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독재자형 목회자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대형교회라는 개념으로 독점적 담임목사와 성장 지상주의적 교회를 추구하는 교회 현상을 지칭하고자 한다. 여기에는 교인수가 수천, 수만의 교회만이 아니라 그러한 대형교회가 되려는 욕망을 제도화하는 교회도 포함된다. 즉 내가 이 글에서 말하는 ‘대형교회’는 교인수가 수천, 수만에 이르는 교회와 그러한 교회가 되기를 꿈꾸며 그렇게 실천하는 교회를 포괄하고 있다. [본문으로]
  2. 이것은 지난 발제에서 김동춘 선생이 제기한 ‘사회국가’론과 유사한 개념이지만 논의의 방점을 여기서는 경제에 두고 있다. [본문으로]
  3. 아래에서 얘기하는 ‘작은교회’에 관하여는 생명평화마당에서 발표했던 나의 미게재 글 〈21세기 보편적 복지동맹의 가능성과 작은교회〉를 인용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