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11일(목) 7:00~10:00 명동의 청어람 소강당에서 열린 심포지엄 <탈성장주의 시대, 교회를 말하다>의 발제 원고.
이 심포지엄은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생명평화마당, 청어람아카데미가 공동추최하였고, 인터넷매체인 뉴스앤조이와 에큐메니안이 후원했으며,
발제나는 (발제 순서대로)
김진호(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
정재영(실천신학대학 교수)
양희송(청어람아카데미 대표)
이원돈(부천 새롬교회 목사)
이고
사회는 김영철(생명평화마당 집행위원장)이 맡았다.
다른 원고들은 [뉴스앤조이]나 [에큐메니안]에서 확인하길.
-----------------------------------
탈성장주의 시대 ‘작은교회’에 대해 말하다
복지동맹과 신앙의 공공성 문제를 중심으로
대성장 시대
1960~1990년은 한국 개신교회의 역사에서 ‘대성장의 시대’였다. 1960년에 한국 개신교 신자의 수는 전 인구의 2% 내외인 62만 명 정도였으나, 1995년에는 전체 인구의 19.7%인 876만 명으로, 무려 14배 이상 증가했다. 하지만 1990년 이전까지 급격하게 증가하던 개신교 신자 수가 1990년대 이후에는 성장세가 크게 둔화되었고, 1996~2005년 사이에는 1.4% 감소했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정체 및 감소 추세는 여전할 것으로 추정된다.
한데 이 대성장기에 무엇보다도 주목할 것은 대형교회가 그 성장을 주도했다는 점이다. 유럽과 비교하여 미국 개신교의 두드러진 특징은 대형교회가 성장을 주도했다는 사실이다. 한데 미국 기독교의 경우 전 인구의 무려 55%(약 1억7천만 명)가 개신교 신자로 추정되는데, 1 그중 성인교인 2천 명 이상의 교회를 가리키는 대형교회(mega-church) 수는 1200~1500개 정도다. 2 반면 한국의 개신교 신자 비율은 인구대비 18.3%(2005년 통계. 8,616,438명)인데, 그중 대형교회의 수는 거의 1천 개에 육박한다. 3 한편 1만 명 이상의 교회를 초대형교회(giga-church)라고 부르는데, 2012년 churchrelevance.com이 발표한 미국 초대형교회 리스트에 따르면 70개 정도의 교회가 여기에 속하며, 이중 2만 명 이상의 교회는 7개다. 4 그런데 교회성장연구소 홍영기 소장이 저술한 《한국 초대형교회와 카리스마 리더십》 5은 13개 교회를 한국의 초대형교회로 분류하고 있고, 이 책에 준해서 《복음과 상황》이 추산한 초대형교회는 14개다. 6 이 중 성인 출석교인 2만 명 이상의 교회는 7~8개나 된다. 요컨대 한국에서 교회 대형화 현상은 미국보다도 더 뚜렷하다.
반면 위의 2008년도 교회성장연구소의 조사에서 100명 미만의 교회는 52.3%, 연간 재정규모 5천만 원 이하의 교회가 31.0%다. 7 한데 이 조사결과는 과소 추산치로 보인다. 그 이유는 첫째로, 설문대상인 11개 교단들은 한국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안정된 교단들인 반면, 조사에서 배제된 군소교단들은 상대적으로 미자립교회의 수가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둘째 이유는 설문에 응답한 864개 교회의 평균치가 설립연수 27년, 남성 전임교역자 2명, 여성 전임교역자 2명, 남성 집사 34명, 여성 집사 60명, 남성 장로 5명, 여성 권사 17명, 성인남성 출석자 74명, 성인여성 출석자 103명의 평균치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아, 8 설문에 응답한 교회들은 응답하지 않은 교회들보다 비교적 안정된 교회들일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한국 개신교 3대 교단의 하나로 비교적 안정된 교회들이 많은 감리교의 경우, ‘미자립교회대책 및 교회실태조사위원회 규정’에서 연말 경상비 결산액이 2,500만 원 미만의 교회를 미자립교회로 규정하고 있는데, 이 기준에 따르면 감리교회 5,591개 중 약 40%에 달하는 2,225개가 미자립교회에 속한다. 9 그렇다면 전체 개신교 교회 중 재정규모가 2,500만 원 미만의 미자립교회 비율은 이보다 더 높을 것임이 분명하며, 아마도 (많은 추정치들이 얘기하고 있는 수치인) 50% 안팎일 가능성이 높다. 요컨대 한국교회의 급격한 성장은 대형교회가 추동한 현상이며, 그 과정은 매우 심한 ‘양극화’ 현상을 동반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대성장 시대 한국교회, 특히 대형교회는 어떤 특징이 있을까? 박종현 박사에 따르면 장로교뿐 아니라, 목회자 파송제도가 비교적 잘 지켜지고 있던 감리교와 성결교에서조차 대형교회들은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장기간 한 교회의 목회를 전담하는 관행이 정착되었고, 10 이는 3선 개헌과 유신체제로 이어지는 박정희 정권과 유사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11
이 점은 매우 주목할 만한 사실인데, 왜냐면 대성장 시대에 한국사회도 급속한 성장기를 맞이하고 있었고, 성장의 주된 양식 또한 병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한국사회가 그랬던 것처럼 교회도 카리스마적인 지도자가 권력 자원을 독점한 상황에서 성장을 위해 가용자원을 총동원(성장주의적 총동원체제)하는 시스템이 작동한 결과 빠른 성장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12 또한 구기득권세력을 상당부분 대체하였고 일부 보완한 ‘신기득권체제’가 이 시기에 정착했다는 점도 유사하다. 교회는 이 시기에 서북지역 장로교, 혹은 월남한 서북 출신 장로교 중심체제의 응집력이 이완되고, 교파와 출신 지역을 망라한 대형교회들 중심의 체제로 재구축되었다. 한데 이 시기에 정착한 기득권 체제는 이후 대성장 시대가 지나고 저성장, 아니 탈성장 시대에 이르면 더욱 강화되는 양상을 지닌다.
이와 같이 대성장 시대 교회와 사회는 ‘성공지상주의적 총동원 체계’라는 유사성을 지니며, 이 유사성이 그 시대를 운용하는 주된 원리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교회는 그 시대 사회와 서로 연동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교회의 빠른 변모는, 그 시대의 지배체제가 갖는 문제점 못지않게 심각한 많은 문제점들을 내장하고 있었음에도, 전체적으로 사회와 불화하기보다는 잘 통합되어 있었고, 또한 사회적 갈등을 야기하기보다는 사회적 통합에 기여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가령 농경사회에서 도시사회로의 이행이 급격하게 진행되던 시절에 아무런 보호망 없이 극한적 야만성의 도시공간으로 내던져진 이농자들의 대대적인 신자화(信者化)는 그들이 사회적 불만세력 내지 전복세력이 되지 않고 이른바 산업역군으로 권위주의적 체제 속에 잘 흡수되는 과정과 병행했다. 또한 이 과정은 그이들 개개인이 성공한 이들에 대한 일탈자가 되기보다는 그들을 선망하며 열렬히 성공을 위해 매진하게 하는 과정과 맞물린다. 이 시기 대형교회 현상을 대표하는 조용기의 3박자 구원론(풍요, 건강, 신앙의 동시적 실현으로서의 구원 담론)은 바로 이러한 사회통합 요소로서의 신앙의 단면을 잘 보여준다. 여기서 부유함은 증오나 질시의 대상이 아니라 도달하려는 목표다. 3박자 구원론은 그 목표를 신앙의 목표와 동심원 속에 포함시킴으로써 사회통합 담론의 특성을 지녔던 것이다.
이것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이 시기 교회가 보여준 공공성이라고 할 수 있다. 보호망 없이 진행된 산업화로의 맹렬한 질주 속에 내던져진 도시 주변계층이 절망에 빠지지 않고 자기 발전을 위해 매진할 수 있도록 북돋아주었던 것이다. 이렇게 교회와 사회는 서로 연동되어 있었고, 기독교 편에서 그런 흐름을 주도한 것은 대형교회와 대형교회를 선망한 대다수 ‘짝퉁 대형교회’ 13들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연동성은 사회통합에는 기여했지만, 그러한 교회들은 그 통합이 내포한 무수한 야만성과 폭력성을 방조했다. 그런 점에서 대형교회와 짝퉁 대형교회는 그 야만적인 권위주의적 체제의 공범자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한데 이 시기 교회가 사회적 공공성에 기여하지 않은 혹은 소극적으로만 기여한 것은 아니다. 대형교회가 주도한 성공지상주의와는 다른 흐름이 이 시기 개신교의 공공적 실천을 대표하였다.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던 기독교 사회운동기구들, 대중매체기관, 연구기관, 그리고 도시와 농촌의 중소형교회들은 그 수에 있어서는 개신교의 소수그룹에 속했지만, 그 파급력은 한국 개신교, 아니 더 나아가 시민사회 전체를 대표한다고 해도 부족함이 없을 만큼 공공성의 측면에서 뚜렷한 궤적을 남겼다. 이들은 성공지상주의에 편승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것이 낳은 사회적 부조리, 인권침해 등을 고발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탈성장주의 시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사회는 저성장 시대로 돌입하였고, 2008년 어간부터 마이너스 성장 시대가 도래했다는 불길한 추정이 나돌고 있다. 14 이에 대한 대책으로 신성장동력을 찾아야 한다는 주장이 지배적 견해지만, 성장지상주의를 지양하고 새로운 경제패러다임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폭넓게 제기되고 있다. 15 그런 점에서 최근 독일과 일본 등지에서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탈성장주의’ 담론은 하나의 가능성에 대한 상상이다. 16 이 탈성장주의 담론은 특히 신자유주의적 자본 우위의 시스템이 낳은 중산층의 파괴, 노동계층의 빈곤화, 자연생태계의 파괴로 인한 기후재앙의 심각성 등을 비판하면서 자연생태계 친화적이고 인간 친화적인 의료, 복지, 교육, 신에너지 등을 더욱 활성화하자는 주장과 맞물려 있다.
한국교회도, 앞서 보았듯이, 1990년대를 기점으로 저성장 시대에 돌입했고, 1995년 이후에는 마이너스 성장에 직면하게 됐다. 과거 대성장 시대, 사회와 교회 간의,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상호 연동성이 높던 시대에 교회에 대한 사회적 이미지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심지어 청년계층에서는 선호도가 높은 종교로 개신교가 꼽혔었다. 그때에도 개신교는 일방주의와 배타주의적 성향이 강한 ‘무례한 종교’였지만, 그것에 대한 사회적 저항은 그리 많지 않았다. 오히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대성장 시대 개신교의 성장주의 담론이 이농자 등 사회 주변계층을 대대적으로 포용하였고 능동적인 사회적 생산자층으로 재무장함으로써 사회의 긍정적 시선이 많았었다.
한데 민주화 이후 사회는 권위주의의 청산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의제로 부상했지만, 교회는 여전히 권위주의가 흔들리지 않는 대세를 형성하고 있다. 또한 심한 종미(從美)적 태도, 특히 미국이 이라크, 아프간 등에서 일으킨 전쟁까지도 지지하는 친미 호전적 태도는 개신교가 미국 패권주의의 앞잡이라는 인상을 뚜렷하게 새겨놓는 계기가 되었다. 여기에 대중문화에 대한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태도로 인해 교회는 문화적으로 지체된 낡은 공간으로 지목되었다. 이렇게 교회에 대한 이미지는 부정적으로 바뀌었다. 사람들은 이제 교회가 사회의 공공성 확대를 위해 기여할 것이 별로 없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그것은 사회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교회의 모습, 즉 교회와 사회 간의 연동성의 와해와 깊은 관련이 있다.
그렇다면 이런 위기에 처한 교회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과거 대성장 시대에 조율된 신학교육체계와 교회운영체계는 거의 개혁되지 않았고, 오히려 미국산 성장주의 신기법들이 신학교와 교회를 휘젓고 있다. 신학교는 변화된 사회와 사람들을 묻는 학제적 기획이 전무한 가운데 신학생 양성제도를 운영하고 있고, 교단본부는 교회의 사회지리학적 변화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채 목회자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대형교회를 제외한 거의 모든 교회들에서 성장의 기획들은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즉 성장주의적 제도는 계속되고 있지만 성장은 멈추거나 퇴보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심포지엄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오늘 우리의 변화된 사회를 읽으면서 교회를 진단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것, 이를 통해 기독교 대중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 그것이 이 심포지엄이 의도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개신교 내부에서 이러한 문제의식을 담은 저서들의 출간이 계속되었다. 우리는 그중 지난 2012년에 출간된 몇몇 주목할 만한 저작들의 문제의식을 화두삼아 대화를 나누고자 한다. 이 저작들은, 그리고 그밖의 많은 저작들은 공히 한국교회의 위기를 성장지상주의, 그리고 이와 연결된 문화적, 성적, 계급적, 종교적 배타주의와 권위주의 등으로 보고 있다. 이 심포지엄은 성장지상주의를 초점으로 삼고 이 모든 문제적 요소들을 아우르는 비판적 관점을 공유한다. 하여 우리는 이 심포지엄의 화두를 ‘탈성장주의’로 삼았다.
우리가 말하는 탈성장주의는 두 가지 층위를 모두 포함하는 용어다. 첫째는 외적(사회적) 변화의 층위이고, 둘째는 내적 요청의 층위다. 전자에는 성장지상주의의 청산을 도모하는 탈성장주의 기획은 교회뿐 아니라 전 지구적인 시대의 요청이 되고 있다는 주장이 함축되어 있다. 후자는 한국교회의 성장지상주의가 너무 지나친 탓에 어떠한 대안적 기획도 불가능하게 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형교회 중심적인 내적 제도의 청산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데 탈성장주의적 신학과 신앙의 기조는 무엇인가? 성장지상주의는 교회의 팽창을 핵심으로 하는 신학적 신앙적 기획이다. 한데 팽창은 언제나 양적 비교를 통해 가치가 평가된다. 하여 더 큰 성장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한다. 역사적으로 한국을 포함한 많은 사회에서 이러한 프로그램은 대형교회를 탄생시켰다.
여기서 우리는 대형교회가 교회들 사이에서 성공한 교회라는 의미에 한정될 수 없음을 유념해야 한다. 2천 명 이상이나 되는 성인이 최소한 한 주에 한번 이상 모이는 사회적 결속체다. 그만한 풍부한 인적, 물적 자원을 갖춘 결속체를 시민사회 속에서 찾기란 쉽지 않다. 게다가 교회는 조직에 대한 충성도가 대단히 높다. 그러므로 대형교회는 시민사회에서 가장 성공한 사회적 결속체에 속한다. 그것은 의지를 실현시킬 수 있는 능력이 그만큼 강하다는 것을 뜻하며, 따라서 대형교회는 강력한 사회적 권력집단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하여 대형교회의 성공주의는 신앙적인 것에 한정되지 않고 세속적인 성공주의의 함의를 포함한다.
이렇게 신앙적이고 세속적인 성공주의가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능력과 결합될 때 그 성장지상주의는 주변으로부터 종종 폭력적인 팽창주의로 받아들여지곤 한다. 더욱이 대형교회가 계층적 성향을 가질 때 그 성장지상주의적 신앙행위는 계급적 배타주의를 공격적으로 표출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오늘 한국의 교회는 이런 점을 점점 더 노골화하고 있다고 시민사회로부터 읽혀지고 있다. 하여 사람들은 오늘의 성공지상주의적 교회를 공공성을 훼손하는 사회적 결속체라고 이해한다.
그러므로 성공지상주의를 청산한다는 것, 탈성장주의적 신학과 신앙을 추구한다는 것은 교회가 사회적 공공성에 더 많은 기여를 하도록 스스로를 개혁하는 것을 뜻한다. 신앙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성서는 말했다. 요컨대 신앙은 (교회의 팽창이 아닌) 이웃의 공공성을 확대하려는 실천을 필요조건으로 한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탈성장주의적 신학과 신학이 추구하는 이웃의 공공성 확대 실천이란 무엇일까?
복지동맹과 ‘작은교회’적 신앙의 공공성
1990년대, 특히 1997년 이후 우리가 직면한 가장 심각한 위기는 중산층의 몰락과 사회적 양극화를 포함하는 사회적 격차성의 심화에 있다. 17 물론 이러한 변화는 전 세계적인 추세이며, 세계의 정치경제 시스템이 내포한 구조화된 위기 양상이다. 하지만 한국사회는 OECD에 속한 다른 국가들보다 좀더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고, 그것을 억제하기보다 심화하는 국가 차원의 행동이 두드러졌다. 여전히 국가는 수출주도형 성장지상주의에 몰입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국가 차원의 행동이란 성장지상주의를 위해 수출 주도형 사회경제 시스템에 몰두하는 것, 그러한 정책과 조치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대기업에게 절대 유리한 사회체제가 점점 더 심화되었음을 뜻한다.
전 세계적인 구조화된 위기와 그것을 더욱 심화시켜온 국가, 이것은 성장지상주의에 대한 거대한 사회적 반작용을 낳았고, 그것이 최근 복지담론의 고조로 드러났다. 시민사회는 복지체제에 대한 강력한 요구를 하기 시작했고, 각 정치세력들은 앞 다투어 복지의제를 내세우면서 시민의 지지를 얻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했다. 18 복지는 오늘 우리사회의 가장 중요한 공공성의 의제가 된 것이다.
이러한 정치권의 복지의제 경쟁은 현재 한국사회에서 복지의 제도화를 실행하게 하는 가장 강력한 요소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한국 정치권의 절대다수가 우파적 편향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복지의제를 얼마나 지속적으로 추진할 것인지, 어느 수준의 복지를 추진할 것인지에 대한 진보적 시민사회 진영의 의심이 깊다.
바로 이 점에서 권력자원론(Power Resources Model)적 관점에서 복지동맹(Welfare Coalition)의 요구가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유럽과 같은 좌파정당과 강력한 노동조합이 연대하는 형식의 정치적 동맹은 우리에게 현실적이지 않다. 하여 의제연합 형식의 사회적 동맹론이 제기되었고, 이를 위해 시민사회운동단체의 역할이 강조되었다. 19
이러한 사회적 동맹은 선거연합 때에 거대한 실체적 연대로 작동함으로써 복지의제를 정치화하는 힘을 갖출 수 있다. 하지만 일상적인 때에 복지동맹은 실체적 성격보다는 복지 공론장에서 형성되는 담론적 연대의 형식을 띠며, 간혹 미시적 혹은 중범위적 의제연합 형식으로 실체화되곤 한다.
이 점에서 나는 ‘작은교회’를 주목한다. 앞에서 명명한 ‘짝퉁 대형교회’는 대형교회적 가치에 신앙적 영성이 회수된 중소형 교회로 보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작은교회’는 대형교회적 가치를 추구하지 않는 이념형으로서의 소형교회를 가리킨다. 달리 이야기하면 그것은 성공지상주의적 프로그램을 청산하려는 소형교회라고 할 수 있다.
‘작은교회’는 규모가 작고 자원이 부족하기 때문에 대형교회가 가질 수 없는 요소를 가질 수 있다. 구체적으로 ‘작은교회’는 더 소통적이며 덜 배타적이다.
‘작은교회’는 자기 소유의 공간을 가질 수 없기에 목사의 공간과 평신도의 공간의 이분화를 특징으로 하는 전형적인 교회 공간을 실현시킬 수 없다. 하여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강화하는 데 불리하다. 또한 소형이기에 대면성(faciblity)이 높으므로 목사는 신자에게 타자적인 카리스마적 존재로 부각되기에 불리하다. 이는 반대로 목사와 평신도는 소통적이며 친화적 성격이 더 강하다는 것을 뜻한다. 즉 ‘작은교회’는 내적으로 더 소통적이며 덜 배타적일 가능성에 열려 있다.
또한 ‘작은교회’는 홀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으므로, 이웃과의 연대에 더 절실하다. 게다가 교회의 헌금 규모가 작기 때문에 수익성이 있는 다른 활동을 할 필요에 직면하게 되는데, 많은 ‘작은교회’들은 국가 복지의 민간위탁기관이 되거나 사회적 기업, 기타 사회복지 활동을 하곤 한다. 그러면 교회당은 신앙의 장소일 뿐 아니라 지역적 공공성을 실행하는 장소가 되기도 한다. 즉 교회당은 이웃에 개방된 장소성을 지니게 된다. 그리고 이는 교인들로 하여금 이웃에 대해 개방된 신앙을 갖도록 이끈다. 하여 ‘작은교회’는 외적으로 더 소통적이며 덜 배타적일 가능성에 열려 있다.
이렇게 소통적이며 개방적인 종교성을 형성하는 데 친화적인 ‘작은교회’는 사회복지와 관련해서 대형교회나 ‘짝퉁 대형교회’보다 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왜냐면 ‘작은교회’와 그 신자들은 복지 공론장의 일원이 되기에 훨씬 유리하며 미시적이든 거시적이든 의제연합으로서의 복지동맹의 일원으로 활동하기에 더 유리하다.
실제로 수많은 ‘작은교회’들은 종교기관인 동시에 공적부조나 사회복지서비스를 위한 국가복지의 민간위탁기관이거나 혹은 민간 사회사업기관을 겸하는 경우가 대단히 많다. 한국사회에서 교회만큼 사회복지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종교나 사회단체는 없을 것이다. 특히 ‘작은교회’는 성장주의 프로그램을 포기하는 대신 더 적극적으로 이런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또, 앞서 말했듯이, ‘작은교회’가 다른 교회들보다 덜 배타적이고 더 소통적인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단순한 복지기관일 뿐 아니라, 복지제도를 더 확대하기 위한 사회적 동맹의 일원으로서 더 안성맞춤이다.
물론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작은교회’는 재정의 어려움과 기관 운영의 낙후성 때문에 금전으로 인한 교인간 혹은 이웃간 분쟁에 시달릴 가능성이 더 높다. 또한 ‘작은교회’들이 스스로를 주체화하는 신학적 담론을 갖고 있지 못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성장지상주의적 신학이 아닌) 사회적 공공성을 위한 신학적 재무장을 결여하고 있다. 즉 활동은 과잉인데 의식은 결핍인 양상이 ‘작은교회’의 공공신학적 현실이다. 게다가 교단들은 제도적으로 대형교회 중심적 시스템으로 작동되고 있기 때문에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교단 활동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는 ‘작은교회’의 목회자들과 일부 교인들의 주체화는 더욱 방해를 받게 된다.
이런 난관을 헤쳐 나가기 위해 교단들을 가로지르는 ‘작은교회간 연합’이 요청된다. 이때 권위주의적 모델을 지양하는 ‘조합’ 형식의 조직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또한 신학적, 신앙적으로 작은교회적 공공신학의 형성을 위한 활동이 요청된다. 이것은 신학연구자, 목회자들, 교인들이 함께 하는 다각도의 소통공간을 필요로 한다. 이런 노력들을 통해 ‘작은교회’는 오늘 우리사회의 공공성에 기여하는 개신교적 주체가 될 수 있을 것이며, 이것은 개신교 신앙의 위기에 대한 탈성장주의적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 로버트 D. 퍼트넘 & 데이비드 E. 캠벨, 《아메리칸 그레이스》(페이퍼로드, 2013), 31쪽 참조. [본문으로]
- 김영빈, 〈미국교회 출석교인 절반, 상위 10% 메가처치에 집중〉, 《크리스천투데이》(2005.6.1.) [본문으로]
- 교회성장연구소가 2008년도에 설문조사한 바에 따르면 한국의 대형교회는 전체 교회의 1.7%다. 교회성장연구소 교회경쟁력연구센터 엮음, 《한국교회. 경쟁력보고서》(교회성장연구소, 2006), 37쪽. 이 조사는 전국의 11개 개신교 교단 소속 864개 교회를 설문조사한 것으로, 95% 신뢰구간에서 표본오차가 ±3.1%라고 한다. 한편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한국의 종교현황〉에 따르면 2008년도 개신교 교회는 58,612개다(http://www.mcst.go.kr/web/notifyCourt/press/mctPressView.jsp?pSeq=9726) 이를 환산하면 2008년 기준으로 대형교회가 996개라는 놀라운 수치가 나온다. [본문으로]
- http://churchrelevance.com/top-71-largest-gigachurches-in-america-2011-edition/ [본문으로]
- (교회성장연구소, 2001) [본문으로]
- 이승규, 〈한국 대형교회 세대교체 현주소 진단…장년 출석인원 1만명 넘는 교회 기준〉(http://pcouncil.net/jboard/?p=detail&code=ilban-aa002&id=3116&page=3) [본문으로]
- 《한국교회. 경쟁력보고서》, 36~37쪽. [본문으로]
- 《한국교회. 경쟁력보고서》, 36쪽. [본문으로]
- 정택은, 〈미자립 40%, 가장 시급하고 심각한 과제〉, 《기독교타임즈》(2009.8.13.)(http://www.kmc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29064) [본문으로]
- 이들은 30년 내외의 기간동안 담임목사로 재직했고, 은퇴한 이후에도 ‘원로목사’라는 직함으로 사실상의 최고 권력을 장악하고 있다. [본문으로]
- 박종현, 〈한국 오순절 운동의 영성―여의도순복음교회의 영성과 성장에 대한 시대사적 회고를 중심으로〉,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소식》 82(2008.4), 10~14쪽 [본문으로]
- 공동체의 구성원이 성인 2천명 이상이 되는 공동체는 통합을 위해 매우 복잡한 조직과 운영능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대형교회들은 매우 단순한 조직 시스템을 가지고 있고, 운영도 비교적 간명한 편이다. 이것은 지도자가 권력자원을 독점하고 있는 독재자형의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교회에서 관철시키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동시대 한국사회 일반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반면 민주화 이후 카리스마적 독재자가 퇴거하자 사회는 빠르게 복잡한 커뮤니케이션 시스템과 공론장을 형성하면서 소통을 활성화시키고 있음에도 심각한 통합의 위기를 겪고 있다. [본문으로]
- 대형교회를 갈망한 중소형 교회들은 비록 크기는 대형교회에 못 미치지만 대형교회가 되기를 열망하면서 대형교회적 프로그램을 모방하는 데 열을 올리는 교회라는 점에서 ‘짝퉁 대형교회’라고 불렀다. 반면 이와는 달리 성장에 목표를 두지 않는 새로운 교회 모델을 찾기 위해 다양한 실험을 하는 교회들이 적지 않은데, 특히 크기가 작은 교회들은 훨씬 적극적으로 새로운 실험을 시도하기에 용이한 제도적 형태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대형교회의 이념형적 대립점에 위치시킬 수 있는 교회를 ‘작은 교회’라고 부르고 있다. [본문으로]
- 정남기, 〈‘마이너스 성장’ 시대로〉, 《한겨레신문》(2008.12.12.); 〈삼성경제硏 ”원高-엔低 계속 땐 한국 성장률 마이너스 기록할 수도“〉, 《동아일보》(2013.3.14.) [본문으로]
- 강철규, 〈‘성장지상주의’에서 ‘인간중심주의’로〉, 《Economy Insight》 13호(2011.5), 26~27쪽. [본문으로]
- 페트라 판출러 & 프리츠 포어홀츠, 〈경제성장주의와 결별하라〉, 《Economy Insight》 8호(2010.12), 88~91쪽; 〈탈성장주의 바람, 주류사회로 확산〉(http://blog.daum.net/kgssarang1/8268877) [본문으로]
- 박명림, 〈민주화에서 인간화로: 21세기 한국사회의 현실과 이상〉(제3회 여해평화포럼 대화록: 오래된 새길 인간화, 2011.3.30.); 황규성, 〈한국의 격차 재생산 구조화: 틀과 사회적 성격〉(대화아카데미 포럼: 격차 사회의 그늘, 2012.9.21.). [본문으로]
- 고원은 복지가 새로운 정치균열(political cleavage)의 요소로 부상한 결과 각 정당들이 앞 다투어 복지의제를 제기하고 있다고 본다. 고원, 〈한국에서 복지의제의 지배적 정치담론화 과정 분석〉, 《경제와 사회》 95(2012.9) 참조. [본문으로]
- 김영순, 〈보편적 복지국가를 위한 동맹〉, 《시민과 사회》 19(2001) 참조. [본문으로]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교회의 나쁜 자본주의 스타일 (0) | 2013.05.01 |
---|---|
그들의 기념비를 세우라 - 차별금지법 논란에 즈음하여 (0) | 2013.05.01 |
작은교회와 경제민주화-복지 동맹 (0) | 2013.04.03 |
‘힐링 서울’에서 힐링할 수 있을까 (0) | 2013.03.02 |
순박한 열정, 독재를 품다 - 아하스와 박정희, 므낫세와 박근혜를 상상하다 (0) | 2013.03.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