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생활] 45(2013 봄)에 실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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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나쁜 자본주의 스타일
반품당한 복음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의 질서로부터 자유로운 교회가 있을까? 교회당은 어디에 있든 자본주의적 토지 시스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하늘의 직분을 위임받은 이라고 자부한다 해도 어떤 신부나 목사든 음식과 옷에 관한 자본주의적 시장 체계를 무시한 채 일상을 보낼 수 없다. 하늘의 백성임을 자부한다 해도 신도들은 자본주의적 노동 체계에서 벗어나 살 길이 없다. 교회당 구석구석을 채우고 있는 비품, 촛대, 주보, 봉투, 그리고 여러 악기, 곳곳에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노동 질서에 속한 저임금 생산직 노동자의 주름진 손길이 담겨 있으며, 얼마 안 되는 화폐가치로 환산된 운반 노동자의 땀이 배어 있다.
하여, 교회는 자본주의의 일부이다. 나아가 베드로는 할례받은 이에게, 바오로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위임받았다고 이야기하는 갈라디아서 2장 7절의 말씀처럼, 오늘의 교회는 자본주의에 속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더 근원적으로 그 사회를 조금이라도 하느님 나라를 닮은 곳이 되도록 ‘더 좋은’ 세상을 만들라는 소명을 위임받은 공동체이기도 하다. 요컨대 교회는 자본주의 체계의 일원이며, 자본주의 체계의 일원인 이들에게 파견된 주님의 사도들이어야 한다.
한데 이는 입에 발린 말에 지나지 않다. 많은 사람의 눈에 비친 교회는 세상을 더 아름답게 개혁해 나갈 주역이라기보다 세상의 추함과 야박함에 공조하고 심하게는 선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사람들은 교회가, 교회의 복음이 “나빠도 너무 나쁘다”고 불평하며 반품을 요청하기 시작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문제를 점검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특히 자본주의와 교회에 관하여 말이다. 이 글은 바로 이런 우리의 점검 작업에 관한 기록이다. 단 내가 목사인 탓에 개신교 교회만을 이야기하겠다.
개그콘서트의 〈정여사〉는 기업을 향해 “~해도 너무 ~해”라며 “바꿔줘”라고 강하게 주장한다. 터무니없는 억지주장처럼 보이지만, 여기에는 과대, 허위 광고가 판치는 우리의 시장 상황이 전재되어 있다. 한데 이런 주장 강한 시민으로부터 “바꿔줘”라는 요구에 직면한 것은 기업만이 아니다. 교회 또한 그간 팔아왔던 복음에 대한 쇄도하는 반품 요청을 맞닥뜨리고 있다.
교회의 ‘나쁜’ 자본주의 스타일
교회 밖 사람들에게 들킨 교회의 추한 자본주의적 모습 가운데 첫째는 아마도 담임목사의 교회세습에 관한 것이겠다. 세습이 과연 자본주의적인가에 의문을 품는 이도 있을 것이다. 오히려 세습은 전근대적 폐습이 아니냐는 얘기다. 사회주의국가이면서도 3대째 권력 세습을 단행한 북한체제나 한국 자본주의의 첨병임에도 2,3대의 권력 세습을 시행하고 있는 재벌기업은 근대 시대를 살고 있는 전근대적 체제라고 할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주장에 공감할 수 없다. 전근대든 근대든 권력은 마땅한 견제세력이 없으면 독점체제를 구축하려는 경향이 있고, 그중의 한 방법이 세습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즉 세습은 전근대적 현상만이 아니라 근대 자본주의적 현상이기도 한 것이다. 단지 양상이 다소 다를 뿐이다.
근대 자본주의적 현상으로서의 세습의 특징은 이것이다. 전근대적 권력 세습은 소수의 특권계층의 동의를 통해 실행되었다면, 오늘날의 세습은 다수의 시민계층의 동의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형식적이더라도 말이다.
교회 세습도 마찬가지다. 일부 교단은 세습을 불법으로 명문화하고 있지만 대개의 교파는 교회 세습에 관한 교회법이 미비하다. 일부 교회의 목사들이 자식에게 교회를 세습하는데 그 경우 세습에 관한 법이 미비함에도 대체로 교인의 동의를 구하는 절차를 거쳐서 시행된다. 물론 이런 동의절차는 형식에 그친다. 왜냐면 세습을 도모하는 목사들은 대개 교회의 권력을 전적으로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일부 교인들은 반대의사를 굽히지 않고 종종 시민사회에 이를 호소한다. 이렇게 되면 교회 세습은 더 이상 교회 내부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가 되고 시민사회에는 교회 세습에 관한 비판 여론이 형성된다. 주된 비판점은 교회는 공공적인 것이어야 하는데, 목사가 그것을 사적으로 전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쁜’ 자본주의 세력은 공공재화를 사적으로 전용하려 한다. 그런 점에서 세습으로 비판받고 있는 교회 역시 ‘나쁜’ 자본주의의 얼굴을 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 조금이라도 더 하느님의 정의가 실현되도록 하는 데 아무것도 기여하지 못하는 잘못된 관행의 상징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런 추한 얼굴은 비단 세습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교회 간 조직체의 단체장 선거에서도 자산을 유용하는 일이 흔히 벌어진다. 2011년의 한 신문기사에 따르면 그해 일부 대형 교단들의 총회장 선거에서 대략 20억 원 정도가 선거위원 매수비용으로 사용되었다. 또 그 해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회장 선거에도 최소 20억 원의 불법선거자금이 살포되었다. 군소 교단이나 그보다 작은 단체장 선거도 금액만 적을 뿐 이런 관행은 별반 차이가 없다. 단체장의 임기가 고작 1년에 불과하고 이렇다 할 권한이 있는 것이 아님에도 이런 추잡한 돈 선거가 벌어지는 이유는 그 직위가 ‘명예’를 보증해주기 때문이다. 퇴임한 이후에도 그 단체의 전임 단체장으로 귀빈대우를 받으며 공적 활동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그 단체장의 직위에 걸맞는 부와 특권이 뒤따른다.
이런 일은 교회 내에서도 곧잘 벌어진다. 장로, 권사, 안수집사 등 교회의 고위직위에 취임하는 이는 적지 않은 특별기부금을 헌납하곤 한다. 그 하한선이 교회마다 관행으로 정해져 있다. 이것이 교회의 고위직위에 취임할 수 있는 이를 계층적으로 제한하는 효과가 있음은 물론이다.
한편 교회간 정치에서 목사가 힘을 발휘하는 주요 조건의 하나는 ‘교회의 양적 성장’의 문제다. 그가 취임한 이후 그 교회가 얼마나 성장했냐는 것이다. 성공한 목사는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는 능력이 그만큼 커진다. 그래서 목사들은 너도나도 교회의 양적 팽창을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한다. 하여 많은 교회는 성장 중심 프로그램으로 가득 차 있다. 이른바 가용 자원을 성장을 위해 총동원하는 체제가 구축되는 것이다.
교회 성장을 위해 흔히 사용되는 방법의 하나가 교회 건축이다. 교회당을 크게 지어 놓으면 그만큼 교인이 늘어난다는 믿지 못할 통념이 목사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어 너도나도 교회 건축에 목을 맨다.
2011년 한 시사주간지가 8개 대형교회의 부채를 조사했는데, 본 예배당 건물과 토지에 설정된 채권 최고액이 무려 1천 3백억 원에 이른다. 일반적으로 근저당권이 대출금의 130%로 잡히는 것을 감안하면, 이들 교회의 부채는 1천억 원쯤 된다는 뜻이다. 이 정도의 근저당이 잡혀 있다면 교회의 다른 부속건물들도 은행담보 대출에 이용되었을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부채 총액은 그보다 훨씬 커진다.
교회 대출을 가장 적극적으로 유취한 금융권은 수협은행인데 그 대출규모가 2006년에 1조 원을 넘어섰다. 모든 금융권의 교회 대출을 합하면 수조 원에 이를 것이다. 그중 반 이상이 교회 건축비를 충당하기 위한 대출로 추정된다. 이와 같이 교회 건축 자체가 교회의 성공주의를 위한 적극적 수단으로 선택된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목사 개인의 성공전략이 포함되어 있다. 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종교적 성공 경제학의 중요한 일부라고 할 수 있다.
무수한 교회의 성공전략인 교회 건축은 그만큼 대대적인 교회 건축 시장을 형성했다. 교회 건축에 참여한 건축업자의 증언에 의하면 많은 경우 거액의 리베이트가 오간다고 한다. 또한 건축 자재 하나하나를 고급화하려는 건축업자의 마케팅이 매우 활발해서, 예상 건축비와 실 건축비 간의 차이가 다른 건축물보다 훨씬 크게 나타난다. 요컨대 교회 건축 시장은 필요를 훨씬 초과하는 과잉 건축 현상을 야기한다. 여기에 하나 더 얘기하면, 서초동 법원 건너편에 건축 중인 사랑의교회의 사례처럼 건설 투기가 억제된 지역에서 국가와 토건세력 사이를 중개하는 돌파구로 교회 건축이 활용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것은 무분별한 부동산 투기를 통해 수십 수백 배의 로또식 이윤을 창출하려는 토건 자본주의의 병폐에 교회가 한몫하는 꼴이 된다. 이쯤 되면 교회 건축은 ‘사회악’이라고까지 할 정도다.
대법원과 마주하고 있다는 이유로 고도제한에 걸려 재개발이 오랫동안 지체되고 있던 일명 서초동 꽃마을 지역의 한 부분에 사랑의교회가 예산 2천 100억 원의 건축 계획안을 제출했고, 그 과정에서 교회가 동원할 수 있는 인적풀이 적극 가동되었다. 그리고 곧 서울시의 재가를 받았다. 한데 이것은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수반했다. 교회 건축의 허가 과정에서 고도제한이 일부 완화됨으로써 다른 지역의 재건축의 실마리가 풀리게 된 것이다. 이것은 토건세력과 행정권위주의가 갈등함으로써 지체되고 있던 도심재개발의 물꼬를 튼 계기가 되었다.
교회의 성장전략이 ‘나쁜 자본주의’적 폐습처럼 드러나는 또 다른 대표적 사례가 있다. 이것은 오직 대형교회만이 할 수 있는 것으로 지교회 혹은 지성전 개척이다. ‘지성전’이라는 것은 중앙성전에 대비되는 지역성전이라는 뜻이다. 지교회들은 대개 본교회 이름에 지역명만 붙이는 방식으로 명칭이 붙어 있고, 재정, 인사, 행정 등에서도 사실상 독자성이 없는 일종의 본교회의 분점 교회적 특성을 갖는다. 심지어는 지교회의 주요 예배를 본 교회의 예배를 실시간 중계하는 것으로 대체하곤 한다.
많은 대형교회가 무분별하게 활용하는 지교회 현상은 입지한 지역의 다른 중소형 교회의 교인을 마구잡이로 끌어들였다. 마치 쌍끌이 대형 저인망 어선이 무차별하게 물고기들을 잡아들여 그 일대의 해양 생태계를 무너뜨리는 것처럼, 무차별 물량공세와 유명세를 가지고 지역 기독교 시장을 잠식해버리는 것이 바로 지교회 현상인 것이다. 그래서 이를 문제제기하는 이들은 대형마트의 지역상권 잠식과 비교하곤 했다.
이 현상은 작은 교회를 처절한 생존게임에 돌입하게 하고, 많은 교회가 오직 성장만을 위해, 아니 폐쇄되지 않기 위해 모든 신앙 활동을 수행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의도한 것은 아닐지라도 이런 대형교회의 팽창주의는 많은 교회로 하여금 세계 속의 신앙에 관한 일체의 성찰 가능성을 무력화시키고 오직 나쁜 자본주의의 열렬한 수행자로 전락하게 만든다.
교회의 나쁜 자본주의 스타일에 관한 몇 가지 대표적 사례만을 열거했다. 그밖에도 많은 얘깃거리가 있다. 이런 일들은 교인들의 일상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있고 지역사회, 나아가 사회 전체에까지 영향이 미치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그것을 문제로 여기기 시작했다. 많은 이가 교회를 떠나고 있으며, 또 많은 이가 교회를 비난하고 심지어 공격하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 글의 마지막은 교회가 할 수 있는 좋은 자본주의 스타일에 관한 이야기다.
교회의 ‘좋은’ 자본주의 스타일
요즘 교회를 보는 시민사회의 시선이 너무 따가운 탓에 나쁜 것만 부각시킨 면이 없지 않다. 실은 훌륭한 교회들의 모습이 생각보다 많은데 말이다. 국가가 짊어져야 할 복지의 가장 큰 비중을 감당해온 곳이 다름 아닌 교회였다. 양적 성장에 치중하는 대신 장애인, 노인, 노숙자, 빈곤아동, 이주노동자 등을 돌보는 일에 힘을 쏟는 교회가 굉장히 많다. 어린이방, 지역독서실 등을 운영하고 생활협동조합을 꾸리며, 신용조합 같은 마이크로크레디트 운동을 펼쳐왔다.
또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진 많은 사람들은 다른 이들보다 이웃에게 더 헌신적이다. 심지어 아프리카, 아시아 등에까지 호혜의 손길을 내밀고 있다. 사회부조형 기부금을 내는 이들도 더 많다. 세계화와 더불어 자본주의의 야수 같은 폭력성이 점점 가학적으로 펼쳐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교회와 신자가 있는 한국 그리스도교는 참으로 위대한 자산을 가졌다. 그들은 한국 자본주의와 제3세계 빈곤국에 ‘더 좋은’ 자본주의를 만드는 데 작지만 의미 있는 기여를 하고 있다. 그것은 결국 하느님 나라를 이 세계에 도래하게 하는 데 작은 돌 하나를 쌓는 일이다.
앞서 말했듯이 대형교회를 축으로 하는 일부 교권자와 성장주의에 물든 교회는 이런 한국 그리스도교의 위대한 자산을 잠식하고 있고, 시민사회로부터 ‘나쁜 종교’라는 평판을 자초하고 있다. 하여 그리스도 신앙을 가진 이들은 ‘나쁜’ 자본주의의 선봉에 있는 교회와 그 지도자에 대한 신뢰를 단호하게 철회해야 한다. 그리고 더 나은 자본주의 스타일을 만드는 일에 동참해야 한다. 그것이 이 시대에 하느님이 우리에게 준 소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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