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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퇴행적 분노증후군’ - 한국의 극우기독교의 동성애 반대 욕구의 해부

[르몽드디플로마티크] 2013년 6월호에 실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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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행적 분노증후군

한국의 극우기독교의 동성애 반대 욕구의 해부

 

 

 

1980년 로널드 레이건을 대통령에 당선되도록 하는 데 미국의 극우 기독교단체인 도덕적 다수(Moral Majority, 1979~1989)의 역할은 지대했다. 이 단체의 맹활약에 힘입어 기독교는 그 이전까지는 민주당 지지율이 조금 더 높았음에도, 가장 든든한 공화당 지지 세력으로 부상하였다. 2000년과 2004년 조지 워커 부시가 대통령이 되는 데 기독교 연합(Christian Coalition of America, 1989~)의 역할은 가히 결정적이었다. 2000년과 2004년에 미국 기독교도의 부시 지지율은 각각 68%78%나 되었다.

한데 이들 기독교 극우파 단체들의 가장 핵심적인 슬로건의 하나가 바로 동성애 반대이슈다. 즉 동성애 반대론은 미국 기독교를 극우세력 중심으로 결속하게 했고, 나아가 강력한 정치세력으로 부상하게 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2008년과 2012년 대선에서 기독교 표는 결속하지 못했고, 기독교 극우세력이 지지하는 이는 대통령이 되지 못했다. 그 실패의 주된 이유의 하나가 젊은 층의 이탈인데, 그것은 동성애에 대한 찬성 기조가 반대를 월등히 앞서게 된 현상과 병행한다. 30세 이하 유권자 층의 66%가 동성결혼에 찬성했던 것이다. 심지어는 30세 이하 공화당 지지자들 가운데서도 찬성률이 거의 40%에 육박했다. 요컨대 기독교의 우파 중심의 결속이 와해된 것에는 젊은 층의 동성결혼에 대한 비적대적 태도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실재로 오마바는 선거운동 기간 중에 동성결혼에 대해 지지의사를 밝혔고, 동성결혼의 합법화를 방해했던 결혼보호법 폐기를 추진하겠다고 했다. 이런 맥락에서 대통령 취임식 준비위원회는 지난 121일 오바마 대통령 취임식 때에 루이 기글리오(Louie Giglio) 목사에게 축도를 부탁했으나, 그의 동성애 반대 활동 전력이 드러나자 바로 그 계획을 철회했다.

한편 한국에선 일견 정반대의 양상이 전개되고 있다. 지난 4월 초, 차별금지법을 발의했던 민주당 의원들이 입법을 철회했다. 한기총, 국가조찬기도회 등을 축으로 하는 동성애자 차별금지법안 저지 의회선교연합이 주도한 전방위적 반대운동이 주효했던 것이다. 즉 차별금지법안 좌초의 주된 이유가 기독교 극우세력의 동성애 반대운동의 결과였다는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을 당선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던 한국의 극우 기독교 세력이 박근혜 대통령 당선 과정에는 이렇다 할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한데 기독교 극우세력은 동성애 반대운동으로 다시 결속된 힘을 보여주었고, 향후 한국사회의 주요한 정치적 변수로서 활약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과연 그럴지는 의문이다. 이미 청년층과 지식인층에서 동성애에 대한 비적대적 태도가 빠른 속도로 확산되고 있는 추세여서, 낡은 종교라는 이미지가 더욱 심화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미지는 개신교 전체를 낙후된 종교로 간주되게 함으로써 결국 개신교의 위기를 더욱 부추길 수 있다.

아무튼 한국에서 기독교 극우세력은 미국에서처럼 최근 동성애 반대에 사활을 걸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하여는 동성애 논쟁에 주목해온 많은 비판적 신학자들의 주된 관심거리다.

우선 기독교 극우세력의 주장을 살펴보자. 그것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1)하느님의 창조 질서에 어긋나며, (2)성서의 가르침에 위배되고, (3)가정의 질서를 깨뜨리는 주범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앞의 두 가지는 동성애 반대론이 마치 초시간적 이유를 갖고 있는 것처럼 가장한다. 가령, 최초의 인간을 하느님이 남자와 여자로 만들었다는 창세기의 이야기는 가장 강력한 이성애주의의 성서적 근거다. 그러나 현대의 성서학은 성서의 창조 이야기를 과학적 사실관계의 진술이 아니라 신학적이고 역사철학적인 해석적 진술이라고 본다. 더욱이 1장과 2~3장의 이야기가 서로 다른 시기, 서로 다른 장소에서 해석된 창조 이야기라는 것은 이론의 여지없이 합의된 사항이다.

이때 이성애론이 성립하려면 남자와 여자로 창조한 것이 이 두 텍스트가 주장하는 공통된 신학적 해석의 주제여야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렇게 해석하는 이는, 적어도, 성서학자 중에는 없다. 현대적 학문과 소통하는 이라면 말이다.

그밖에 동성애 반대론이 들이대는 몇몇 성서 구절이 더 있다. 하지만 그것들이 과연 동성애 반대에 초점을 둔 것인지에 대해서는 찬반양론이 팽팽하다. 설사 그것들이 동성애 반대 텍스트임이 명백하다고 해도, 그런 텍스트의 숫자는 불과 몇 개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성소수자 배제에 대해 반대 논거를 제시하는 성서 구절들 또한 그 텍스트 숫자만큼 성서 속에 담겨 있다는 점을 반대론자들은 간과한다.

더욱 문제는 성서 속에 동성애 반대 구절들이 하나라도 있는 한, 기독교인은 그 말씀에 따라야 한다고 단호히 주장하는 그들은 성서 속에 보다 명료하게 언급된 다른 많은 것들에 대해서는 조금도 준수할 의지가 없다. 예컨대 고기를 피 채로 먹지 말라는 해석의 여지없이 명료한 구절(창세기9,4)을 지키기 위해 선지국 반대 기독교운동연합을 만들려는 극우 기독교 근본주의적 신자는 한 명도 없다.

왜냐면 그들은 실상 많은 성서 구절들을, 사실관계를 지시하는 객관적 진술이 아니라, 문화적이고 신학적인 해석의 텍스트로 읽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명료하지도 않은 동성애 반대 텍스트를 명료한 텍스트라고 주장하면서, 그것을 특별히 성서의 가르침이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하여 그들의 동성애 반대론은 성서에 대한 하나의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 또 그 해석을 지지한다고 해도 성서 자체에서는 매우 주변적인 강조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성서를 가지고 동성애 반대론을 기독교적 가르침의 핵심인양 주장하는 것은 전혀 신학적이지도 신앙적이지도 않다. 하여 동성애 반대론을 극우 기독교 집단이 강조하는 것은 성서에 따른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다시 묻는다. 이 강도 높은 동성애 반대 주장은 왜인가?

미국 스팰만 대학의 김나미 교수는 한국의 경우 동성애 반대운동이 1990년 이후부터 본격화되었다는 점을 그 하나의 실마리로 본다. 즉 사회와 교회가 1960~1990년 사이 고속성장을 구가하였는데, 1990년 이후 그 추세가 급격하게 꺾이면서 나타나는 일련의 변화에 대한 반동적 흐름이 바로 동성애 반대운동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녀는 그것을 한국적 근대화의 가부장제적 변화의 흐름 속에서 해석한다.

여기서 위에서 언급한 동성애 반대론자들의 세 번째 주장이 흥미롭다. 동성애가 가정을 파괴한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기독교 극우주의자들이 가정을 사랑의 공간이라기보다는 증식의 공간으로 본다는 것을 뜻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증식이 전제되는 사랑만이 가정의 기독교적 가치라는 얘기겠다.

이런 생각 역시 성서에서 끌어온 얄팍한 지식이 활용된다. 한데 어찌할 것인가. 예수는 가정의 일원이지 않았고, 가족 증식의 가치를 구현한 이는 더더욱 아니었다. 결국 그는 의를 위해 스스로 고자가 된 이가 아닌가?(마태복음19,12) 어쨌거나 그는 주님의 총회의 일원이 될 수 없는 사람이었다.(신명기23,1)

자신들이 상상하는 가정을 파괴할지도 모른다는 것, 김나미 교수는 그것이 가부장적 권력자들인 교회 지도자들로 하여금 공포심에 사로잡히게 했을 것이라고 한다. 하여 그것은 동성애 공포증으로 나타났다. 세상의 변화를 해석하고 그 변화된 세계에서 하느님의 가치가 무엇이고 하느님의 공의가 무엇인지 살피고 실천하기보다는 그 변화를 두려워하면서 두려움을 분노로 대치시키고, 분노할 대상을 만만한 소수자 가운데서 선별하여 공격하는 것, 바로 이것이 극우 기독교의 동성애 반대운동의 정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그들에게 권하지 않을 수 없다. 성숙해지라고. 세계의 변화를 직시하고, 그 변화 과정이 하느님의 가치와 더 부합하게 하는 일에 동참하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