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선] 110(2013.5-6)에 실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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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기념비를 세우라
차별금지법 논란에 대하여
비록 고자라 하더라도, 나의 안식일을 지키고, 나를 기쁘게 하는 일을 하고, 나의 언약을 철저히 지키면,
그들의 이름이 나의 성전과 나의 성벽 안에서 영원히 기억되도록 하겠다.
아들딸을 두어서 이름을 남기는 것보다 더 낫게 하여 주겠다.
그들의 이름이 잊혀지지 않도록, 영원한 명성을 그들에게 주겠다.”
―〈이사야서〉 56,4~5
콰할, 법공동체 이스라엘
우리말 성서에서 ‘회중’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콰할’(qahal)은 칠십인역성서에서 그리스어로 번역될 때 ‘에클레시아’(ecclesia)로 바뀌었다. 그리고 칠십인역성서의 ‘에클레시아’는 제2성서(신약성서)에서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교회(church)라고 번역한 성서의 용어가 바로 ‘에클레시아’다.
〈출애굽기〉 16,9는 제1성서(구약성서) 시대 이스라엘에서 콰할의 용례를 보여주는 주요 본문의 하나다.
모세가 아론에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이 원망하는 소리를 들으셨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주님 앞으로 가까이 나아오라고 일러주십시오.”
이 구절에서 ‘회중’이 바로 콰할을 번역한 것이다. 이 용법에 따르면 ‘콰할’은 모세의 법 앞에 모인 백성을 뜻한다. 이 구절은 형식상 국가 이전 시기 광야의 유랑자들이 야훼가 내린 법을 통해 법공동체가 되었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하지만 법공동체는 (광야를 유랑하는 떠돌이 사회의 상상이 아니라) 국가형성의 상상이다. 떠돌이 집단보다 훨씬 규모가 크고 복잡한 사회적 집단이 되었을 때, 이들을 묶어내는 양식이 곧 법의 반포인 것이다. 하여 법의 반포는 그 법이 포괄하는 공동체의 안과 밖을 나눈다. 즉 다양하고 복잡한 전통과 관습과 역사를 가진 이들을 일괄하여 법의 일원으로, 곧 법의 ‘안’이 되게 함으로써, 그들이 그 나라의 백성이라는 자의식을 갖게 하고, 나머지를 ‘밖’으로 배제하여 이방인이 되게 하는 이분화의 형식이 바로 국가에서 법의 효과인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정치적 집단이 법공동체가 된다는 것은 그들이 비로소 국가다운 국가가 되었다는 시금석이 된다. 이때 중요한 것은 누가 그 공동체의 일원인가의 문제다. 즉 법은 누구를 ‘안’으로 포함하는가의 문제가 국가 형성의 핵심적 과제가 되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유다국의 멸망 이후, 그곳에서 일어난 재건공동체가 국가로 발전해가는 과정에서 벌어진 ‘누가 법공동체의 일원인가’를 둘러싼 논의를 살피고자 한다. 여기서 유다 재건공동체는 과거 유다국이 바벨로니아 제국에 의해 멸망할 때 유배되어 끌려간 자들의 일부가 반세기 이후부터 돌아오게 되면서 시작된다.
누가 재건공동체의 일원인가?―에스라식 법공동체론
귀환자들이 속속 돌아왔다. 바벨로니아가 페르시아에 의해 멸망하게 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그 먼 곳에서 오려니 나이든 이들은 엄두를 내지 못했고 혹여 용기를 내어 길을 떠난 이들도 험한 여정에서 쓰러졌다. 하여 기어이 고향 땅 유다로 무사히 돌아온 이들은 대개 청년들이었다. 경험이 많지 않지만 열정은 넘쳐나는 이들이다.
이들은 전에 왕족 혹은 귀족 집안의 자제였거나, 전문직에 종사하던 이들의 자손이었다. 해서 그들은 꿈꿨다. 그 땅에 무사히 돌아오면 다시 주인으로 살 수 있을 거라고. 하루아침이 유배민으로 전락하여 고생고생하며 살아가는 종의 신세가 아닌, 땅의 주인이 되는 삶, 인생역전의 꿈이다.
한데 그들이 당도한 꿈의 땅 예루살렘은 폐허가 된 채 버려진, 아무도 살지 않는 땅, 불에 탄 잿더미와 무너져버린 벽돌, 잡초만 가득한 ‘죽은 도시’였다. 그들을 환대해주리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없었다. 고국 땅에서 주인이 될 줄 알았던 귀환자들은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스스로 살 길을 찾아야 했다. 폐허가 된 담벼락을 보수하고 잡초를 치워 가까스로 살 집을 마련했고, 겨우겨우 끼니를 잇는 절박한 생활고에 꿈이 자리잡을 곳은 없었다. 몇 번에 걸쳐 대대적으로 귀향한 사람들, 새 나라에 대한 꿈에 한가득 부풀었던 그들은 번번이 절망하고 말았다.
그중 한 귀환집단이 있었다. 예수아 제사장과 스룹바벨 총독이 이끄는 귀환자들이다.(〈에스라기〉 2,2; 〈느헤기야기〉 7,7) 이들의 지도자들이 황제가 준 기금을 가지고 와서 그 날이 곧 도래할 거라고 부추겼을 때, 그들과 앞서 귀환했던 이들, 그리고 그 지역의 일부 토착민들은 힘을 내어 무너진 성전을 다시 지었다.(〈에스라기〉 5,2) 성전이 세워지면 야훼가 보살펴줄 것이라고, 하여 영광의 시간이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성전이 세워졌어도 야훼의 영광은 보이지 않았고, 비루한 현실은 여전했다. 게다가 때만 되면 몰려오는 약탈자들은 성전이 세워진 뒤 더 기승을 부렸다.
그렇게 한 세기가 지났다. 다시 큰 규모의 귀환자들이 돌아왔다. 지도자는 느헤미야 총독, 페르시아 황제의 관리였다는 자다. 1 그는 황제가 준 기금과 유배민 공동체에서 기부받은 기금, 그리고 귀환민들로부터 징수한 기금을 모아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는 사업에 착수했다.
가까스로 성벽이 세워지니 이제 더 이상 약탈자들에게 시달리지 않을 수 있었다. 그뿐이 아니다. 성벽은 그것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이곳이 다름 아닌 예루살렘이었기 때문이다. 과거 예수아와 스룹바벨이 재건축한 성전이 성벽이 수축됨으로써 제 기능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멀리 디아스포라 공동체들에서 보내온 기부금과 기부물품이 쌓이기 시작했고, 성전 제사의 규모가 커지기 시작했으며, 제사장들의 권위는 다른 성소들의 권위를 압도하게 되었다.
식민지가 된 이후 유다 지역에서 가장 유력한 성읍이 되었던 미스바(예루살렘 북족의 13킬로의 성읍)도 예루살렘에 밀리게 되었고, 남쪽으로 30킬로 떨어진 성읍 벧수르도 예루살렘에 복속되었다. 하여 느헤미야는 이제 영토다운 영토를 다스리는 총독이 되었다. 그 주(州)의 이름은 ‘예후드’(Yehud)였다.
예후드 주에서 느헤미야 총독은 강력한 분리주의 정책을 취했다. 식민지 이후 이 지역은 한동안 사마리아에 복속된 하위의 정치단위였었다. 또 사마리아 못지않은 강력한 정치세력이던 암몬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 하여 느헤미야는 분리주의 정책을 통해 사마리아와 암몬으로부터 실제적으로 독립된 자치구로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얼마 후 에스라 제사장이 황제의 재가를 받아 이곳으로 파송되었다.(〈에스라기〉 7,12~26) 그는 예후드 주의 백성을 결속시키는 법을 반포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이 법은 ‘성전에 계신 야훼께서 주신 율법’이라는 것이다. 이제 느헤미야의 분리주의는 하느님의 법의 이름으로 실행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율법이 최초로 백성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통합시키는 장치로 활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성전 제사도 비슷한 통합의 기능을 하지만, 그것은 제사 드리는 그 순간에야 효력을 미친다. 한데 예후다 영토가 넓어지자 모든 이가 제사에 참여할 수 없게 된 데다, 제사는 연중 불과 몇 회만 시행될 뿐이다.
반면 율법은 성전까지 오지 않아도 백성이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자의식에 매어 있게 할 수 있다. 마을마다 율법을 가르치고 예배하는 공간이 생겼다. 그리고 이 예배와 교육은 매 안식일마다 시행되었다. 법은 이렇게 제사보다도 예후다의 백성을 더 촘촘하게 결속시킬 수 있었다.
이렇게 안식일마다 마을에서 천명되는 율법에서 핵심은 ‘누가 예루살렘 성전공동체 예후다의 백성인가’라는 문제에 있다. 이때 에스라의 율법은 백성이 아닌 이를 규정함으로써 백성인 이들을 포용하는 형식을 지녔다.
‘이방인’이 바로 백성이 아닌 자의 첫째다.(〈에스라기〉 9장) 여기서 ‘이방인’이라는 말이 표적 삼고 있는 자들은 예후다 영역 외부의 사람들이 아니라 이 영역 ‘안’에 들어와 살고 있는 자들이다. 법이란 언제나 내부의 사람들에게 효력을 미치니 그럴 수밖에 없지만 말이다. 아무튼 에스라가 취한 조치는 예후다 지역에 들어와 살고 있는 이방인을 추방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결혼하여 남편의 집에 들어와 살고 있는 이방여인을 추방하는 것도 포함된다. 그런 가족을 강제로 가르고, 그녀들을 추방한 것이다. 만약 이 조치에 저항하는 집안이 있다면 그 가족 전체를 몰살하기까지 했다.
한편 이방인 목록에는 사마리아인도 들어있다. 과거 유다국을 법공동체로 만들기 위해 최초로 법을 반포했던 요시야 왕은 이방인 포용정책을 강조되었고, 특히 사마리아인은 아브라함-이삭-야곱이라는 공통의 조상을 가진 동족으로 간주했었다. 한데 에스라는 모암, 암몬, 에돔은 물론이고 사마리아, 갈릴리, 길르앗까지도 이방인들의 땅으로 배척하였다. 강력한 배타주의요 고강도의 폐쇄주의다.
둘째는 유대인이라 하더라도 ‘고자’는 배제의 대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에스라기〉나 〈느헤미야기〉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동시대에 활동한 예언자의 신탁모음집인 〈이사야서〉 56~66장 2에는 ‘고자’가 법공동체에서 배제된 자들임이 전제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고자 배제도 에스라적 법공동체의 원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이방인과의 결혼 금지가 혼혈의 위험으로부터 피를 깨끗하게 유지하려는 것이라면, 고자 배제의 원리는 깨끗한 피의 백성이 번성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 점에서 ‘고자 배제’ 원리 속에 함축된 것은 ‘생산하는 성’만이 진정한 ‘법의 내부’라는 주장을 천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에스라의 이러한 분리주의와 순혈주의는 유대주의적 성전공동체를 하나의 독자적인 정치적 세력으로 부상하게 했고, 하나의 사회적, 종족적 정체성을 가진 집단으로 주체화되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한데 문제는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이 체제는 누군가를 강하게 차별하는 배제주의적 사회를 만들어냈다는 데 있다. 하여 이 체제를 실행하기 위해 이웃 족속과 결혼했던 이들을 강제로 갈라놓았고, 생산하지 못하는 성에 대한 사회적 처벌을 제도화했다. 결국 소수자에 대한 배제를 제도화함으로써 그 사회는 성립했던 것이다.
“‘그들’도 우리의 일원이다”―차별금지법 논쟁
이제 오늘 우리 시대 얘기를 해보자. 최근 차별금지법안이 수차례에 걸쳐 국회에 상정되었다. 참여정부 시절이던 2006년 이 법안이 처음 인권위원회에서 마련되고 이듬해 법무부를 거쳐 국회에까지 이르는 동안 그 내용이 갈수록 후퇴하였음에도 결국 입법에는 데 실패했다. 또 MB 정부 시절인 2010년 법무부에서 다시 입법을 시도했으나 국회에 제출도 못한 채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MB 정부 끝 무렵에서 박근혜 정부 초기에 이르는 2012~2013년에 야권 국회의원들의 발의로 다시 시도되었다. 그런데 이 세 번의 입법 시도가 좌절되는 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개신교계의 반대였다.
도대체 왜 개신교는 그토록 차별금지법 반대에 열을 올리는가? 말할 것도 없이 반대의 핵심은 동성애나 트랜스젠더 같은 성소수자 문제에 있다. 수많은 반대 주장에 들어 있는 공통된 불만은, 이 법안에 따르면, 동성애나 트랜스젠더를 죄라고 하면 징벌적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니 이게 가당한가라는 주장이다. 적어도 그들에게 동성애자나 트랜스젠더인 이들은 반성서적이고 반자연적인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반성서적이라 함은 성서가 동성애자를 명시적으로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고, 반자연적이라 함은 생식 없는 성은 부자연스런 성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런 주장은 억지다. 성서가 동성애에 반대한다는 주장은 타당성이 없다. 그렇게 해석될 여지가 있는 텍스트가 단지 몇 개 있기는 하지만, 그 텍스트가 동성애와 무관한 것이라고 해석할 여지 또한 있으므로 그것으로 성서가 동성애를 반대한다는 주장은 자명하지 않다. 가장 배타적인 법공동체를 주장했던 에스라적 법공동체론에서도 동성애 문제는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또 몇몇 성서 텍스트들이 설사 동성애를 반대하고 있다는 해석이 타당하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성서의 모든 주장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니, 불과 몇 개 텍스트에 불과한 것을 성서의 가르침이라고 일반화하는 것은 지나치다. 가령 성서가 월경하는 여자를 불경하다고 하고, 그 기간에 그녀가 눕는 자리, 앉았던 자리에 닿는 것까지도 주변의 모든 사람을 부정타게 하는 것이라고 하지만(〈레위기〉 15,19~33) 어느 교회도, 어느 목사도 그것을 가르치지 않는다. 또 고기를 먹을 때 피까지 먹어서는 안 된다는 성서의 가르침(〈레위기〉 19,26)을 반복하는 교회는 없다. 심지어 어떤 교회에선 주일 점심 식사로 선지국이 나오기까지 했다. 구리고 앞에서 언급한 바, 가장 배타적인 에스라적 법공동체론에서도 동성애는 전혀 고려되지 않았고, 제3이사야 텍스트에서 미루어 짐작한 것처럼, 불임의 남성이 배제된다. 그런데 오늘날 도대체 어떤 교회가 남성이든 여성이든 불임을 문제로 이야기한단 말인가.
대부분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성서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재해석하고 있다. 그럼에도 일부 개신교 신자들은 동성애 같은 몇 개 요소만은 성서의 가르침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나마 그런 성서 문구조차도 동성애 반대 논지가 불명확하니, 억지 부린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것이다.
반자연적이라는 주장도 마찬가지다. 자연적이라는 것을 다수자의 선택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단지 다수자에 속하는 이들이 낯설게 느낀다고 해서 그것이 부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하는 것은 종종 다수자의 폭력으로 드러나곤 하기 때문이다. 하여 나는 소수자든 다수자든 그 선택이 주변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차별금지법은 인권법이다. 인권법은 소수자라 하여 차별받지 않는 권리에 관한 법이다. 소수자든 다수자든 공공의 이익을 해치지 않는 한, 그 선택은 보호받아야 마땅하다. 한데 다수자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불편하게 느낀다는 이유 때문에 어떤 소수자들은 차별대우를 받는 일이 흔히 발생한다. 그런 차별을 금지하는 법이 바로 차별금지법인 것이다.
하여 차별금지법 같은 인권법은 다수자의 동의를 요하기보다는 국제적으로 표준화된 인권 개념을 수용하는 방식으로 법제화되는 것이다. 즉 차별금지법은 그 사회가 국제적 인권의 관점에서 얼마나 성숙한 인격을 갖추었는지를 보여주는 시금석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차별금지법 논란은, 우리 사회가 누구를 법공동체의 일원으로 삼을 것인가를 둘러싸고 국제적으로 격조 있는 사회가 될 것인가 아닌가의 기로에 선 논란이다. 그리고 한국 개신교 지도자들은 한국사회를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국제적 인격을 결여한 사회가 되게 하려는 일에 앞장섰다.
성서의 차별금지법―‘제3이사야’삭 법공동체론
다시 성서 얘기로 돌아가 보자. 〈이사야서〉 56,4~7는 에스라가 주장하는 법공동체의 폐쇄적 개념에 대항하고 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비록 고자라 하더라도, 나의 안식일을 지키고, 나를 기쁘게 하는 일을 하고, 나의 언약을 철저히 지키면, 그들의 이름이 나의 성전과 나의 성벽 안에서 영원히 기억되도록 하겠다. ......”
주님을 섬기려고 하는 이방 사람들은, 주님의 이름을 사랑하여 주님의 종이 되어라.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않고, 나의 언약을 철저히 지키는 이방 사람들은, 내가 그들을 나의 거룩한 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기쁨을 누리게 하겠다. ......”
주장인즉슨, 이방인이나 고자라는 이유로 하느님의 공동체에서 추방하는 것은 안 된다는 얘기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이 그 사회의 질서를 반하는 행동이라고 한다면, 안식일을 지키는 이방인과 성소수자는 그 사회로부터 차별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요컨대 이 구절은 당시 예후다 지역의 지배적 법률인 에스라의 법의 배제주의에 대항해서 제기된 하느님의 차별금지법인 셈이다.
이 성서 구절에서 “그들의 이름이 나의 성전과 성벽 안에서(곧 야훼의 법 공동체 안에서) 영원히 기억되도록 하겠다”는 표현이 주목된다. 누가 우리 사회, 우리의 법공동체의 일원인가?를 둘러싼 논의에서 차별당하는 소수자의 기념비를 세우는 일이 야훼의 가르침이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부활에 관해 상상해본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에서 부활은 몸이 난도질당한 채 죽임당한 이들이 그 마지막 때에 하느님나라의 백성이 되어 일어서는 현상으로 설명한다. 여기에 등장하는 몸의 부활 모티브는 그 살해당한 이들이 고문당하고 처형당하는 과정에서 신체가 심하게 훼손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부활은 몸의 복원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담고 있다. 하여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부활은 그들, 곧 소수자이기에 차별받았던 이들이 하느님나라의 백성이 되는 사건이다. 이렇게 하여 바울은 차별당하고 죽임당한 소수자들의 기념비를 세우는 일을 벌인다. 그것이 바울 사역의 핵심이기도 하다. 곧 그것은 하느님의 차별금지법의 바울식 실천인 셈이다. □
- 〈에스라기〉와 〈느헤미야기〉는 예수아와 스룹바벨, 느헤미야 등이 동시에 귀환한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추진한 예수아-스룹바벨의 이야기와 예루살렘 성벽의 재건축을 이루어낸 느헤미야 이야기는 서로 겹치지 않는다. 해서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예수아-스룹바벨과 느헤미야의 귀환 시기가 서로 겹치지 않는다고 본다. 나는 예수아-스룹바벨, 느헤미야, 에스라가 서로 시기를 달리하는 별개의 귀환집단의 지도자이고, 그들의 활동시기도 겹치지 않으며, 위의 순서대로 활동했다는 견해를 취한다. [본문으로]
- 학자들은 이 부분을 ‘제3이사야서’라고 부른다. 일반적으로 〈이사야서〉는 시기를 달리하는 세 예언자의 신탁집을 이사야 예언자 신탁집으로 묶어놓았다고 알려져 있다. 기원전 8세기에 활동했던 원래의 이사야 예언자의 신탁집은 〈이사야서〉 1~45장이고, 바빌로니아 유배기인 기원전 6세기 후반에 활동했던 무명의 예언자의 신탁집은 46~55장이다. 해서 편의상 이 세 신탁집을 각각 〈제1 이사야서〉, 〈제2 이사야서〉, 〈제3 이사야서〉라고 부른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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