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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예언자의 목소리는 늘 우리 문지방에 와 있다 - 생명 살림의 패러다임을 향하여

[공동선] 2013년 07-08월호에 게재된 글.. 박근혜의 창조경제론에 관한 코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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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의 목소리는 늘 우리 문지방에 와 있다

생명 살림의 패러다임을 향하여

 

 

 

 

주님께서 친히 다윗 왕실에 한 징조를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가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사야서7,14

 

 


 

예언자는 아들을 데리고 급히 “‘세탁자의 밭으로 가는 길, 윗못 물 빼는 길 끝(이사야서7,3)으로 달려갔다. 힌놈의 아들 골짜기 바로 북쪽에 있는 샘터인 엔로겔(En-Rogel, 로겔의 샘), 그곳에 왕 아하스가 틀림없이 있을 것이라고 그는 확신했다. 그 조금 전 왕은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아들을 불살라 재물로 바쳤다.


[그림] 엔로겔(En-Rogel)



그 격정의 순간 아비는 야훼께 울부짖으며 이 국난에서 구원해 주시기를 간구했다. 시리아와 이스라엘 연합군은 백성들을 마구 죽여 댔고 살아남은 이를 마구잡이로 끌고 가고 있는 형국이었다. 동쪽의 암몬국과 서쪽의 블레셋 국도 유다국 영토를 사정없이 난도질하고 있었다. 예루살렘을 빼면 전 국토는 적군들에 짓밟혔고 이제 예루살렘도 함락될 위기에 놓였다.

더구나 왕위를 찬탈하려는 궁중모반도 있었다(이사야서7,6). 그들은 시리아-이스라엘 연합군의 일원으로서 아시리아와 싸울 것을 주장했던 자들이었다(이사야서8,6 "이 백성이 고요히 흐르는 실로아 물은 싫어하고,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을 좋아하니...“). 아시리아의 예속국이 되는 것이 살길이라고 보았던 왕은 가까스로 그들을 물리쳤지만 예루살렘 성 코앞까지 다가온 적군 앞에서 어떻게 해서든 백성의 지지를 받아내야 했던 것이다. 해서 극약처방으로 아들을 제물로 불사르는 제사를 드렸다.

아들을 바쳤으니 거기서 가까운 샘터인 엔로겔에서 몸을 씻어, 아비의 비정함을 속죄하는 의식을 치러야 했겠다. 예언자는 자기를 독대하려 하지 않는 왕을 만나려면 거기서 기다려야 했던 것이다. 아들과 함께 말이다. 아들을 죽인 이를 만나는 데 아들과 함께 갔다.

예언자는 아들을 죽인 아비에게 자기 아들을 인사시켰다. “얘는 스알야숩이라고 합니다.” 왕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꾹 참는다. 그 이름 뜻이 남은 자가 돌아온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며칠 전 왕이 아들을 바칠 것이며 그 재물을 받으신 야훼께서 아시리아 군으로 하여금 저들을 무찌르게 해줄 것이라고 포고했을 때, 예언자는 그것에 반대하는 신탁을 선포했다. ‘야훼께서 경거망동하지 말고 기다리라고 말씀하셨다고 말이다. 그의 주장인즉슨 외세를 물리치기 위해 다른 외세를 끌어들이는 것은 야훼의 뜻이 아니며, 그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누군가를 희생시키는 건 더더욱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마무리했었다. 야훼께서는 견뎌내게 하실 것이라고, 그렇게 해서 남은 자들은 제자리로 돌아가게 된다고.

왕은 아무리 생각해도 예언자가 괘씸했다. ‘도대체 아시리아 말고 이 상황에서 어떻게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단 말인가. 하니 야훼께 아시리아가 저들을 물리치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런 고육지책을 몰라줘도 유분수지, 이젠 아들 이름을 들이대며 나를 비방하고 있다니......’

하지만 왕은 참아야 했다. 예언자를 처벌한다면 부정 타서 야훼께서 자기 제물을 받아주시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한데 예언자도 물러서지 않는다. 그는 느닷없이 이런 말을 던졌다. “다윗 왕실은 백성의 인내를 시험한 것만으로는 부족하여, 이제 하느님의 인내까지 시험해야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주님께서 친히 다윗 왕실에 한 징조를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가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입니다.”(이사야서7, 13~14)

왕은 자기의 행동이 백성을 위한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예언자는 백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독설을 퍼붓는다. 왕은 하느님이 아시리아를 통해서 백성을 구원해줄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예언자는 그것이 하느님을 시험하는 것이라고 독설을 퍼붓는다. 왕은 그 징표로 아들을 죽였는데, 예언자는 징표는 희생당한 아들이 아니라 태어난 아들이라고 주장한다. ‘임마누엘이라는,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이름 뜻의 아이다.

이 일화는 두 개의 대립하는 패러다임의 충돌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는 외세 의존형 생존 패러다임이라면, 다른 하나는 사회통합형 패러다임이다. 전자는 그때까지 유다국이 펴왔던 생존 전략이었다면, 후자는 대안적 전략이다.

약소국인 유다국은 오랫동안 외세와의 불균등한 국제관계를 활용하면서 국가로서 존속해왔던 것이다. 한데 그런 외세 의존형 전략은 백성간의 갈등을 피할 수 없다. 어느 쪽에 가담할 것인가의 문제를 두고 말이다. 이럴 때 갈라진 국론의 통합은 생존전략의 목표가 될 수 없다. 아니 그것은 수단이어야 한다. 국론통합이라는 수단을 통해 어느 외세의 우산 아래로 들어감으로써 국가가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때 국론통합을 위해 누군가의 희생이 도모될 수도 있다. 어차피 통합은 수단이기 때문이다.

한데 대안적 패러다임은 국론 통합, 나아가 사회통합을 더 상위에 놓는 태도다. 어느 나라와 연대할 것인가의 문제는 사회통합의 수단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백성/국민의 희생을 담보로 하는 통합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 시대로 돌아와 보자. 위에서 얘기한 고대 유다국의 두 패러다임이 오늘 우리사회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우리사회는 수출주도형 패러다임으로 초고속의 발전을 이룩해왔다. 성장을 절대 우선시하는 것이고, 그것을 위해 국민의 희생을 감수하는 성장모델이다. 한데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경제성장률은 4%대로 낮아졌고, MB 정부 시절에는 3% 미만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박근혜 정부의 집권 첫해인 올해 성장률 전망치는 2%대에 머물 예정이다.[각주:1] 국민의 희생은 더 커졌지만, 성장도 둔화되고 있는 것이다. 단지 수출 중심의 대기업들만 성공가도에 있다.[각주:2]

이에 박근혜 정부는 양극화 해소를 공약했다. 한데 전문가들은 박근혜 정부가 이를 위해 국정지표로 내세운 고용율 70%, 중산층 70%’가 가능하려면 최소한 4.5%의 성장을 이룩해야 한단다. 당장은 어렵다 치더라도, 5년 재임기간 중에 4.5%대 성장을 이룩해야만 정부가 내세운 국정지표에 조금이라도 근접하는 결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여 무언가 성장 동력이 필요하다. 이에 정부가 내세운 것이 창조경제. 문제는 이것이 너무나 생소한 문제설정이라는 데 있다. 즉 창조경제를 어떻게 구체화할 것인가의 과제가 남아 있는 것이다.

박정희 시대와 같은 성장 중심적 발전동원체제를 재가동하겠다는 생각은 너무나 안이하다. 오직 발전만을 위해 전 사회가 군대처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게 하기엔 사회는 너무나 복잡해졌다. 거기에 박정희 시대의 발전동원체제는 근력기반산업이 중심이 된 성장전략이라면, 박근혜 정부는 지식기반산업인 IT 융합산업이 주축이 되는 성장전략을 추구한다. 근력기반산업은 성장을 추동하면 수많은 새로운 고용을 창출하지만, 지식기반산업은 성장하여도 고용이 증가하지 않는다. 소수의 엘리트 노동자의 역할이 더 중요해지기 때문이다.

하여 IT 융합산업이 핵심 성장동력이 된다면, 내수시장은 그다지 활성화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왜냐면 시장에서 물건을 살만한 계층이 몰락했기 때문이다. 지난 MB 정부의 실패가 그렇지 않은가? 기업이 성장하면 고용도 높아진다는 낙수효과(trickle down effect)를 주장했지만, 오히려 내수시장의 침체로 중소상인까지 몰락했다.

더구나 박근혜 정부 일각에서 솔솔 들리고 있는, IT 융합 청년창업을 육성한다는 계획도 현실성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경제민주화가 훨씬 잘 제도화되어 있고 실리콘밸리 같은 IT 인프라가 잘 갖추어진 미국도 자영업 성공률이 고작 7%에 불과한 현실이다. 게다가 미국 경제가 최근 호조기에 들어섰다고 해도 한국의 수출 기업이 성장하기에 결코 좋은 상황이 아니다. 막 미국에서 상용화가 시작된 셰일 가스(Shale Gas) 혁명은 그 단기적 효과의 하나로 미국 석유화학산업의 가격경쟁력을 아시아국가보다 우위에 서게 할 것이기 때문에, 한국의 IT 융합산업의 미래는 그다지 장밋빛이 아니다.[각주:3]

하여 창조경제라는 모호한 비전을 구체화하는 데 있어 단기간에 효과를 볼 수 있는 방안에 집착하게 되고, 그리하여 기존의 대기업 중심의 수출주도형 성장 패러다임을 재활용하는 것으로 시행된다면 지난 정부들의 과오를 되풀이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수출주도적 기업을 위해 또 다시 국민이 희생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경제민주화 공약은 물 건너가게 된다. 또 다시 당장은 현실이 여의치 않으니 훗날로 미루겠다고 변명하게 될 것이니 말이다. 하여 잠시 반짝하는 경제민주화 이행 노력도 흐지부지될 수 있고, 복지도 허울만 멀쩡한, 유효한 삶의 안전망이 되지 못할 것이다.

지금까지 수출 주도적 기업에 의존하는 경제성장 정책은 중소납품기업과 노동자에게 고통을 전가시킴으로써 수익성과 경쟁력의 위기를 해소시켜 왔다. 한데, 위에서 보았듯이, 그런 패러다임을 바꾸지 않은 채 저성장 사회를 고성장 사회로 반전시킨다는 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IT 융합산업 중심의 하이테크널리지를 축으로 하는 기업도 여전히 큰 노력을 해야 하겠지만, 정부가 나서서 특별히 힘을 기울여야 하는 것은 첨단산업이 아니라, 내수시장을 활성화시킬 수 있는 종소기업을 육성하는 것이다.



[그림] 새누리당과 정부는 경제민주화 공약들을 쏟아내고 있다. 그러나 창조경제 정책들이 자칫하면 이러한 경제민주화 공약들을 수포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




최근 중소기업이면서도 사회적 공공성을 높이는 유형의 새로운 기업모델이 부상하고 있다. 사회적 기업이나 녹색금융[각주:4] 같은 모델이 그렇다. 서민의 희생을 담보로 하는 성장이 아니라, 서민의 안정과 사회적 공공성을 기반으로 하는 성장모델이 요청된다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가 말하는 창조경제의 상상력이 우선적으로 결합해야 하는 것은 IT 융합산업이 아니라, 바로 이런 중소단위의 공공적 산업이라는 얘기다.

아무튼 쌍용차 해고자들은 지난 정부들이 재물로 바쳤던 대표적인 아하스의 불탄 아들들이었다. 위기에 처한 대기업을 소생시키기 위해 정부와 일부 시민사회가 기업과 하나가 되어 희생자들을 만들어낸 것이다. 기업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상생의 공론장은 애초부터 없었고, 실직자들을 보호하고 재기하게 하려는 프로그램 또한 전혀 마련되지 않았다. 게다가 그 과정에서 정부와 기득권 세력에 의한 여러 비리와 조작의 의혹이 붉어져 나온 상황이다.

그러데 현 정부는 여전히 도처에서 현실에 절망한 자살자들이 속출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별다른 대책도 강구하지 않고 있다. 이것은, 정부가 공약한 경제민주화 조치들을 위해 어떤 정책 아이디어를 구상하고 있든 간에, 사회 도처에서 하나의 반노동의 신호로 작용하고 있기도 하다. 전국의 여러 지자체들이나 기업들, 일선 경찰에서는 현 정부의 경제민주화 공약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하는 여러 행보들을 보이고 있는 실정이다.

필경 경제민주화와 복지에 대한 사회적 압력이 느슨해지면 그나마 추진하겠다고 약속했고 일부 이행을 위해 노력했던 것마저도 수포가 될 것이다. 하여 결국 시민의 의식과 행동이 필요하다. 정부에 대한 강한 사회적 압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너무나 잘 잊는다는 데 있다. 이때 예언자가 우리 앞에 나타난다. 아하스처럼 희생자에 대한 부채의식을 망각하는 의례를 벌이고자 할 때, 우리 앞에서 임마누엘 징표를 선포한다. 생명을 죽임으로써 사회의 소생을 도모하는 패러다임이 아니라 생명을 살림으로써 성장을 추구하는 패러다임이 바로 신의 뜻이라고 말이다.

그런 예언자의 고언이 바로 우리 앞에 늘 있다. 우리가 무심하여 종종 듣지 못하고 있지만, 매일매일 그 소리들이 우리의 주변에서 울려 퍼지고 있다. 그날을 기다리는 삶, 그 마음으로 실천하며 사는 삶을 권고하는 소리다. (올빼미)

  1. 지난해 말, 정부는 올해 경제성장 예상치를 3%로 잡았으나, 올 5월 2.3%로 낮추었고, 최근 2.6%로 약간 상향조정했다. [본문으로]
  2. 재벌닷컴의 조사에 따르면, 2007~2011년 사이 대기업의 순이익은 28% 상승한 반면, 중소기업은 12% 상승하여, 연평균 순이익의 성장률이 7% 대 3%로 두 배 이상 차이가 났다. 또 같은 기간 중소기업은 자산이 25% 증가하고 부채가 84% 증가한 반면, 대기업은 각각 56%와 60%로 균형을 이루었다. 〈대기업-중기 양극화 심화… 동반성장 가능한가〉, 《연합뉴스》(2013.1.14.) [본문으로]
  3. 세일가스에서 추출한 에탄을 주원료로 사용하는 미국의 기업들이 값비싼 나프타를 사용하는 한국 기업들보다 훨씬 유리한 조건을 창출할 것이기 때문이다. 알렉산더 노이바허 외, 〈미국발 가스혁명 세계경제 판도 흔든다〉, 《Economy Insight》 35(2013.3) [본문으로]
  4. 녹색금융은 친환경이나 사회 공공성 여부를 조건으로 투자를 하는 금융을 말하는데, 최근 유럽에서는 이런 유형의 금융회사들의 성장세가 일반 금융회사의 성장세를 앞서고 있다. 다니엘 쇤비츠, 〈금융위기에도 녹색은행들 나홀로 ‘훨훨’〉, 《Economy Insight》 38(2013.6)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