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중지성의 정원 2013년 3분기 강좌로 개설한 나의 강의 <예루살렘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 - 기독교의 위기 매뉴얼>의 셋째 강의 '예수 담론과 식민주의>를 준비하다 이 글을 발견했다. 이 글을 쓴 것이 기억나기는 하지만 어디에 수록된 것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파일 제목을 보니 작은산출판사에서 펴낸 책이고, 2011년 9월 26일에 탈고한 것인 듯하다. 여기까지가 이 글의 서지사항에 관해 알고 있는 것의 전부다.
아무튼 역사의 예수에 관한 나의 공부길에 관한 나름 진지한 고민 이야기가 담겨 있다.
‘역사의 예수’와 더불어 경계를 휘청거리며 걷기_작은산출판사(2011 09 26).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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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예수’와 더불어
경계를 휘청거리며 걷기
1980년대, 예수 공부의 버거움
처음 역사의 예수(historical Jesus)에 대한 연구를 시작할 때 그 주제가 버거웠다. 1987년이다. 대학원 2년차, 그러니까 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하지 않은 학생이 대학 4년치 공부를 1년에 다 하는, 고밀도의 첫해를 보낸 뒤 본격적인 대학원 코스가 시작하는 해다. 그해 가을, 논문지도를 부탁하러 까칠하다는 평판이 자자한 안병무 선생님을 찾아갔다가 퇴짜를 맞고 다른 주제로 다시 준비해서 브리핑한 것이 바로 ‘역사의 예수’였다.
왜 예수였는지는 기억이 감감하다. 아마도 민중신학자 안병무 하면 떠오르는 주제였기에 택한 것인지도 모른다. 혹은 ‘예수’라는 연구주제가 모든 신학도에게 가장 근원적인 물음이었을 테니, 알고 있는 것이나 미리 준비한 것이 없어도 한번 도전해보고 싶은 주제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무튼 첫 번째로 준비해갔던 ‘마태복음 공동체의 형성’에 관한, 나름 심혈을 기울인 리포트가, 단 10분 만에 수포가 되어버린 뒤였다. 하여 부담백배의 마음으로 두 번째로 준비해 간 주제가 ‘예수’다.
기어이 허락을 받았다. 이제 쓰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나서, 본격적인 자료검토와 독서를 시작하고서야 알게 된 것은 초짜 학도가 할 만한 주제가 아니었다는 사실이었다. 당시 예수 연구는 서양학계에서 답보상태에 있었다. 주목할 만한 논문도 나오지 않았고, 주요 저서도 별로 없었다. 이미 19세기말에 제기되었던 실증주의 역사학의 위기가 20세기 첫 30년 동안 돌이킬 수 없는 장벽으로 확증되었을 때 가장 타격을 받은 제2성서학(신약학) 분야가 역사의 예수 연구였다. 실증주의 예수 역사학이 추구했던, 그때 거기서 실재 했던 예수의 모습 그대로를 알 길이 없다는 것이 당시 예수 연구의 귀착점이었던 것이다. 그 후 예수 학계는 별다른 출구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니 뭘 모르는 신입자의 호기만으로 헤쳐 나가기에는 험난한 장애물이 첩첩이 있었다.
아니 사실은 그런 것만은 아니다. 주류학계는 그랬지만, 내가 역사의 예수를 추구하던 1980년대 말 이후의 연구동향에서는 실험적인 시도들이 붐을 일으키고 있었다. 특히 사회학, 인류학, 경제학, 문예학 등을 활용한 새로운 모색들이 활기를 띠었다. 학제간 공부에 관심이 각별했기에, 그 논의들을 따라가며 공부했다. 하지만 새로운 시도들인 만큼 다분히 산만했고, 그것을 나의 생각의 틀로 재해석하고 재배치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또 다른 가능성의 징후도 있었다. 유대교에 대한 연구가 그리스도교 신학과 성서학계에서 활발히 다루어지던 시기도 1980년대다. 기존의 그리스도교 신학은 유대교와 대결하면서 그리스도교가 발전했다는 가정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하지만 주로 문헌연구를 통한 유대교에 대한 재발견은 그리스도교가 유대교와 대립하면서 발전했음에도, 유대교는 그리스도교의 모태였고 무수한 신학적, 신앙적, 제도적 모델이기도 했다는 사실이 최신의 연구를 통해서 드러난 것이다. 이것은 기존의 가정을 여지없이 붕괴시켰고, 유대주의 청산을 기조로 하는 그리스도교 중심주의적 편견으로 가득 찼던 종전의 역사 해석을 바닥부터 흔들어 놓았다. 나아가 문헌적 사료가 부족하긴 하지만, 예수 당시 이스라엘 종교가 유대교만이 아니었다는 점이 고고학적 발굴 등을 통해 드러남으로써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문제는 이스라엘 종교사와 그리스도교의 문제로 확대 재편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연구들이 당시 나의 안테나에 포착되기는 했다. 문제는 그것이 역사학에 얼마나 새로운 충격파인지를 해독할 능력이 없었다는 데 있다.
더구나 1980년대 후반부다. 그 시대는 예수에 관한 공부에 집중하는 걸 방해하는 또 다른 장애물이었다. 그 시절 청년들은 너무나 바빴다. 앉아서 찬찬히 공부하기란 쉽지 않았다. 당시엔 세미나가 많았다. 대개는 학교수업이 아니다. 학생들끼리 소집단으로 모여서 공부를 했다. 주로 한국사회의 자본주의적 독재체제와 식민주의적 종속체제에 대한 논의, 그리고 민중신학과 한국사회에 대한 논의가 주조를 이루었다. 거기에선 연일 격한 언쟁이 있었고, 토론 문화에 익숙하지 못한 데다 역사 변혁에 대한 조급증에 빠져 있던 우리는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 모욕적인 언사를 아낌없이 뱉어댔다. 세미나가 끝나면 후반전은 술집이다. 감자탕과 소주를 앞에 놓고 다시 언쟁을 재개했다. 감정이 격해지고 술이 거나해지면 종종 말싸움에서 몸싸움으로 이어진다. 그 시대의 청년들을 이렇게 과하게 흥분되어 있었다.
이튿날 학교에 가면 연일 새로운 사건이 벌어져 있었다. 아무개가 경찰 프락치였다느니, 통일교 프락치였다느니..., 대개는 헛소문이다. 수업시간엔 교수들과 논쟁이 계속되었다. 민중신학이나 해방신학에 대해 비판을 가하는 이가 늘 있었고, 그러면 언쟁이 시작된다. 물론 당시 대부분은, 교수나 학생이나, 그 글들을 거의 읽지 않았다. 그냥 안다고 생각했다. 많은 수업들은 그렇게 소모적 말싸움으로 점철됐다. 채플에선 학생들의 도발이 속출했다. 기성의 제도화된 예배 패턴을 그냥 봐주기가 역겨워 충동적인 돌출행동과 발언이 모두의 심사를 격동시키고 흥분을 야기했다.
또 연일 시위가 벌어졌다. 독재 권력을 타도하고, 민족 민중 자주 정권을 수립해야 한다는 논조의 시위였다. 그리고 국면적으로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의 요구가 전 국민을 아우르는 반정부적 의제였다. 수업에 빠지는 것이 훈장처럼 생각되었다. 교회에서도 대자보가 붙었고, 목사와 교인 간에, 교인과 교인 간에, 무엇보다도 청년과 기성세대 간에 다툼이 벌어졌다. 국가에 순응하는 교회에 대한 찬반 논리가 그 핵심 논점이었다. 현존하는 국가 권력은 절대악이라는 믿음과 악한 권력조차도 순응하여야 한다는 믿음이 대립했다. 이런 논쟁의 중심에 있던 당시 청년들은 공부할 틈도 없었고 마음도 없었다.
모두들 그렇게 들떠 있었다. 과하게 흥분하고 있었고 과하게 낙관하고 있었다. 바뀌어야 한다는 열망은 바꿀 수 있다는 자신감과 분리할 수 없이 얽혀 있었고, 타도의 대상은 타도의 주체와 어떠한 얽힘도 없이 선명하게 분리되어 있었다. 이론은 명쾌했고, 논쟁은 선명성 경쟁을 벌이듯 과장된 순수함을 과시하며 벌어졌으며, 나와 같은 학생들은 더더욱 단순함과 확실함에 도취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그 확실함은 동시에 불확실함이었다. 공부를 해야 하고, 또 공부를 할 필요가 없었다. 너무나 명쾌하고 확실한 세계를 공부한다는 건 그렇게 많은 노고가 필요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세계를 보는 눈이 중요했다. 해서 그러한 시야를 트여주는 글들을 읽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세상을 충분히 볼 수 있는 듯 생각했다. 그렇기에 공부는 많이 필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행동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렇지만은 않았다. 안다고 생각할 때조차 다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다. 무엇으로 정신의 허기를 채울지 알지 못했지만 아무튼 이것저것 읽어댔고, 여기저기 기웃대며 듣고 말하고 행동하곤 했다.
나에게서 역사의 예수는 그러한 정신의 허기를 채우려는 공부의 안내 표식이었다. 딱히 보이는 건 없었지만, 무슨 책을 읽든 대부분의 독서는 예수에 관한 물음으로 수렴되었다. 한데 예수를 향한 물음은 묘하게도 생각을 지속하게 하는 마력이 있다. 여전히 마음의 답답함이 해소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생각은 계속되었다. 마치 예수에 대한 물음 자체가 하나의 순례 같았다. 이것인가 하고 달려갔더니 이것이 아니고, 저것인가 하여 달렸는데 저것도 아니었다. 진리를 향한 물음은 끊임없이 실패하였지만, 그럼에도 정처도 없는 길을 어디론가 또 다시 가게 하는, 그런 순례길의 안내 표식이 ‘예수’였다.
예수, 혁명, 안병무, 그리고 나
아무튼 이렇게 예수에 대한 공부는 시작되었다. 나의 첫 결실은 석사논문이었다. 당시 나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던 것은 ‘혁명’이었다. 아직 20대를 살고 있던 청년의 눈에는 모순과 가식으로 가득한 세계였다. 더욱 참을 수 없는 것은 나 역시도 그러한 모순과 가식의 질서에서 벗어나 있지 못하다는 사실이었다. 탈출하고픈 욕망과 보이지 않는 출구 사이에서 동요하고 있었다. 그런 심사에서 일체의 것을 모조리 전도시키는 ‘혁명’이라는 반역사의 시간, 그 카이로스적 시간(시계 해체적인 질적 시간)은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혁명의 크로노스적 시간(chronos, 연대기적 시간)은 무한히 지연되고 있는데, 그 때를 계산하는 일이 여전히 무망한 상태인데, 예수는 어떻게 그 지연되는 혁명의 시간의 도래를 정신 속에서 실현하고 있었을까, 예수는 어떻게 그 시간을 행동 속에 실행하고 있었을까? 나의 물음의 핵이었다.
하지만 진정한 나의 관심은 ‘그런 예수’가 아니라 ‘동요하는 예수’다. 이미 모든 것을 완성한 이가 아니라 나처럼 갈등을 몸에 새기면서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몸부림하는 모습이었다. 어떤 과정을 거치면서 그이는 실현의 기미가 무망한 혁명의 시간을 몸에 새겨낼 수 있었을까, 바로 이것이 나의 진정한 관심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내게 필요한 것은 교리의 언어로 덧입혀진 ‘교회의 예수’보다는 역사의 언어로 분해된 예수 곧 ‘역사의 예수’였다.
역사의 예수를 묻기 위해 참조한 가장 중요한 텍스트는 안병무 선생의 것이었다. 민중신학의 개척자로 세계적인 신학 사상가의 한 사람이었던 선생은 역사의 예수에 관한 가장 창의적인 논점을 제시한 예수 연구자였다.
선생은 예수를 독존적 개체로서 묻는 것에 반대하였다. 우리 모두처럼 그이도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산 이였다. 놀랍게도 이제까지의 예수 연구는 역사의 예수를 묻기 위해 그이와 그 주변 사람의 관계, 그들이 함께 일으킨 사건을 보려하지 않았다. 예수와 주변의 존재를, 혹은 말하는 예수와 그이를 전하는 대중을 ‘주’와 ‘객’으로 규정하고, 주변의 존재들로 인해서 곡해되지 않는 예수, 그 순수한 예수만을 찾으려 했다. 역사실증주의가 추구했던 예수는 그러한 순수한 예수였다. 예수를 전했던 이들의 기억에 의해 오염되지 않은 예수, 그네들의 상황과 사정에 의해 변질된 예수를 제거하고 난 뒤 발견되는 순수한 예수(real Jesus), 그것이 주류 예수 학계의 예수 물음의 기본 가정이었다.
해서 기존의 연구들은 복음서 속에서 예수의 입으로 발설된 것으로 나오는 여러 말들 가운데 예수가 진짜로 한 말이 어느 것인지를 가려내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이른바 예수 말의 진정성(authority) 물음이 그것이다.
한데 선생은 이런 진실 게임에 말려들지 않았다. 저 주객 이분도식에 말려들지 않고 예수를 보는 것, 그것의 선생의 방법이다(주객도식의 극복). 즉 예수와 그 주위의 대중이 한데 어우러져 사건을 일으켰고, 그것이 바로 역사의 예수임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예수 이해의 지평은 예수를 사회학적 물음으로 옮겨가게 했고, 또한 실증주의 이후의 역사학적 물음으로 옮겨가는 교두보가 되었다. 그럼에도 현대의 무수한 예수 연구들은, 사회학이나 현대역사학, 인류학, 의학 등의 물음으로 예수를 연구함에도 불구하고, 실증주의적 인식론을 청산하는 논점을 제시하지 않았다. 반면 예수 학계의 변두리 지식인 안병무는 놀랍게도 아무도 문제시하지 못했던 그것을 물었다. 하여 그 이후 민중신학의 예수 물음은 패러다임 전환이 가능했다. 곧 ‘개체’가 아니라 ‘사건’이 예수에 대한 역사적 연구의 소재가 된 것이다.
당연한 얘기인데도 이것은 역사의 예수 연구사에서 가장 신선한 주장에 속한다. 독일과 영미권의 쟁쟁한 연구자들이 미처 생각 못한 것을 변두리 민중신학자가 생각해 냈다. 하지만 제3세계의 변두리 학계에서 나온 정치적 문제제기에 솔깃해 하는 서구의 학자들은 많아도 거기에서 제기된 역사 인식론이나 방법론적 문제제기에 관심을 둔 이는 없었다. 하여 그의 문제제기의 신선함은 거의 주목받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그들의 역사의 예수 연구는, 언제나 순수한 예수를 묻는 그들의 물음은, 지난 예수 연구사가 보여주었듯이 그리고 실증주의 역사학의 좌초가 입증하였듯이, 역사가 규명할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의 역사 인식과 방법은 좌초했다. 반면 사건은 역사적 물음에 적합한 분석단위다. 거기에는 개인 예수가 아니라 어떤 사건에 중심인 예수와 그를 추종하는 대중이 함께 있다. 더욱이 이것이 사건인 것은 예수 당대에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그 이후 그것을 기억하고 계승한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즉 시공간적인 예수 기억의 계승 확산이 예수 사건의 양상이다. 그 사건들은 다양한 계보로 계승된다.
이러한 계보 가운데 어느 기억의 계보를 추적하여 예수를 묻는 것, 그것이 ‘예수 계보학’이다. 안병무의 예수 연구는 이러한 예수 계보학을 통해 예수에서 「마가복음」을 거쳐 전태일에 이르는 예수 기억의 민중적 계보학을 이야기했다.
나의 예수에 대한 물음은 방법론적으로 여기에서 시작한다. 즉 예수가 혁명의 시간을 몸에 새겨낸 과정에 대한 물음은 예수와 그 주변의 대중이 예수운동을 통해 인습의 시간을 극복하는 성찰의 과정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하여 나의 물음, 곧 ‘예수는 혁명적인가’라는 것은 ‘예수운동은 혁명적인가’라는 물음과 동일한 것이고, 그것은 예수운동의 전복적인 자기 성찰 과정에 대한 물음이다. 다시 말하면, 어떻게 예수운동은 역사와 사회의 부조리함과 거기에 공모하고 있는 이들 자신의 시공간적 한계를 발견해 갔으며, 그것의 전복적 성찰을 향해 발전해 갔는지를 묻는 것이다.
한데 나는 선생의 예수론에 동의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선생은 예수를 지사적인 예언자처럼 묘사하고 있었다. 주변의 대중과의 교호가 예수운동에서 핵심적임을 강조하면서도 대중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그이 자신만의 실존적 선택이 예언자의 길을 결정한 것처럼 얘기한다. 가령 이런 것이다. 선생은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느닷없이 간 것은 ‘자발적 살인’을 선택한 것이라고 보았다. 여기서 선생은 아마도 전태일을 떠올린 듯하다. 이것저것 시도하다 끝내 자기 자신이 죽음으로써만 모든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신념에 따른 것이라는 얘기다. 즉 그는 죽기 위해 이 도시로 들어갔다.
내가 동의할 수 없는 것은 바로 그 점이다. 그는 대중운동가이자 대중운동을 이끄는 조직의 지도자인데, 왜 그의 실존적 선택이 대중으로부터의 단절이었나 하는 점이다. 그이는 한 사람의 예언자이자 선각자이지만, 그것이 그이의 전부가 아니다. 그는 동시에 운동의 지도자다. 그이를 추종하는 이들이 있고, 그이와 더불어 생사고락을 같이 하면서 형성된 조직이 있다. 한데 느닷없는 자기 해체의 결심은 너무 무책임한 것 아닌가. 아마도 예수가 하나의 조직을 이끈 지도자이기도 했다면, 죽기 위해 그 도시로 들어간 것은 아닐 것이다. 아프리카에서 의술을 펼친 20세기의 성인이자 바하 음악의 명연주자이고 동시에 위대한 신학자였던 알베르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가 한 세기도 더 전에 말한 것처럼, 예수는 예루살렘에 들어갈 때 하느님의 변혁이 일어날 것을 확신했다. 마치 1980년대에 청년들이 자신의 미래를 다 바치면서까지 헌신했던 변혁에의 꿈이 그들이 꿈꾸는 시대가 곧 도래할 것이라는 확고한 신념의 결과이듯이, 예수도 그러했을 것이다. 그를 따르던 제자들과 대중은 바로 그런 예수의 열망을 공유했던 것 아닌가.
하여 내가 혁명가 예수를 묻는 것은 예수운동의 혁명성에 관한 물음이었고, 그것은 그 시대의 한 조직운동가로서 예수와 그이의 추종자들이 하느님의 변혁을 꿈꾸며 운동을 기획하고, 그때그때마다 주어진 변화의 상황에 대처해서 생각과 행동의 자기 성찰이 이루어지는 과정에 대한 물음이었다. 그 과정에서 예수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그 사회의 가장 밑바닥 계층의 억눌림 현상을 발견했고, 그 과정에서 그들의 억눌림의 체계가 식민지 종주국 로마와 그들의 하수인인 헤롯 정권, 그리고 대제사장 가문을 필두로 하는 귀족들에 의해서만 운위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했다. 그이가 발견한 것은 대중의 일상을 통제하는 또 다른 권력, 마을 사람들의 생각과 꿈과 희로애락, 옳고 그름, 아름답고 추함, 선하고 악함을 통제하는 일상권력인 회당체제가 있다는 것이었다. 일상권력과 중앙의 체제를 구성하는 권력, 이 둘 사이에는 수직적인 위계관계가 있었지만, 동시에 서로 독자적인 영역을 통해 영향력을 펼치는 자율적 관계이기도 했다.
이렇게 예수는 팔레스티나의 민중운동에서 새로운 문제의식을 발전시켰는데, 그것은 바로 정권의 전복에만 몰입하는 반체제적 예언운동이나 마을에서 일상권력에 대항했던 일탈적 예언자의 그것이 아니라, 두 권력이 ‘따로 또 같이’ 엮이면서 형성하고 있던 팔레스티나의 지배 메커니즘 일체에 저항하는 것이다. 하여 그것은 그야말로 혁명적인, 체제에서 일상까지, 꼭대기에서 바닥까지, 의식적인 것에서 무의식적인, 나아가 구조적인 것에까지 얽힌 시대의 죽임의 권력, 권력의 죽임을 문제제기하는 발본적으로 혁명적인 운동의 전거를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하여 내게서 예수(운동)의 혁명성이란 거대한 변혁, 곧 국가, 아니 우주 전체의 질서를 해체하는 것에 관한 상상력이며, 동시에 일상의 변혁, 곧 이웃과의 소소한 관계, 아니 자기 내면의 생각과 습성까지를 전도시키는 것에 관한 상상력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나는 예수 공부길에서 안병무를 경유하되 그를 넘어서는 상상력에 다가가게 되었다.
예수, 혁명, 교회, 그리고 나
하지만 혁명가를 꿈꾸었음에도 진짜 혁명가가 되는 건 두려웠다. 내게서 교회는 혁명가의 대열에서 회피하는 도피구이기도 했다. 교회에는 위대한 말들이 난무했고 격정적인 존재의 전쟁터로 뛰쳐나간 영혼들의 전투가(戰鬪歌)들로 넘쳐났다. 신앙은 현실을 전도시키는 역사적 상상을 북돋게 하는 영성적 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당시 교회는 한국사회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의 하나였다.
그것은 교회가 국제적 네트워크가 가장 잘 짜인 조직 가운데 하나인 덕이다. 그 무렵 세계교회협의회(WCC)의 활약과 더불어 진보적 그리스도교회와 기구들은 인권에 관한 세계적 의제를 형성하는 가장 유력한 세력의 하나였다. 만약 어떤 정부가 신앙적 양심에 대해 탄압을 가한다면 그 정부는 악한 정권이라는 전 세계적인 낙인이 찍히는 걸 감수해야 했다. 그러므로 국가권력은 다른 어떤 영역보다 더 조심스럽게 교회를 대했고, 더 용의주도하게 탄압을 기획해야 했다. 당시 한국기독교에서 인권의 문제로 국가와 대립각을 세우던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수는 그 반대편에 비해 상대적으로 훨씬 소수였다. 지금에 비하면 그것조차 매우 큰 비중이었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런 소수의 활동도 비교적 안전할 수 있었던 비결은 국제적인 네트워크의 힘이었다.
한편 교회에서 활동하던 많은 진보적 그리스도인들은 반정부적 인권운동에도 참여했지만 다양한 교회의 일상적 신앙활동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것은 교회활동 또한 인권적 신앙을 실천하는 중요한 현장이었기 때문이다. 가령 교회교육은 대안교육을 실험해보는 썩 괜찮은 장이기도 했다. 비판적 신앙을 위한 대안교재를 만드는 활동, 그리고 청년과 청소년, 아동 대상의 실험적 교육활동 등이 당시 교회에서 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것은 교회가 진보적 사회운동의 전위대와는 구별되는, 일종의 후방지대로서 자리매김하고 있었음을 뜻한다. 그리하여 많은 교회의 활동가들은 후방지대 활동가였고, 내게서 그것은 종종 전위활동가의 위험함을 회피하면서도 도피구에 안전하게 피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자의식에 머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요컨대 교회는 안전함과 비장함이 공존하는 기묘한 장소다. 하여 교회 안에서 나는 ‘안전한 혁명가’일 수 있었다.
예수운동에서도 그러한 ‘안전한 혁명가’들이 있었다. 독일의 성서학자 게르트 타이쎈(Gerd Theissen)이 ‘공동체조직가들’이라고 불렀고, 미국의 성서학자 도미니크 크로싼(Dominic Crossan)이 ‘집주인들’이라고 은유적 표현을 쓴 존재들은 예수 당대와는 달리 그가 죽은 뒤 그 운동을 계승한 주역이 된 이들로, 이 표현들 속에는 그들의 사회적 특성이 잘 반영되어 있다. 예수와 더불어 그이의 동료이자 떠돌이 예언자들이었던 측근 제자들은 예수 사후에도 여전히 예수가 펼쳤던 운동의 형식을 유지하려 했던, 전위적 활동가들이었다. 반면 예수와는 달리 지역에 정착하여 운동의 새로운 범례를 이끌어낸 자들이 바로 ‘공동체조직가/집주인’이었다. 후자는 대개 공동체가 모이는 장소의 소유자들로, 대체로 재산에 있어서나 신분에 있어서 혹은 학식에 있어서 공동체의 유력인사였다. 물론 「빌레몬서」에 나오는 오네시모처럼 훗날 소아시아의 도시 골로새(Colosse)의 예수공동체의 위대한 지도자가 된 노예출신 인사도 있었지만, 그런 사례는 독특한 경우이고 대개는 중류층 이상의 인사들이 공동체조직가 유형의 지도자였다는 것이다. 이들의 새로운 존재방식은 위험한 전위적 활동보다는 안전한 후방지대 활동이 중심인 신앙을 제도화하는 계기가 된다. 교회는 이러한 제도화의 후예이다.
그러나 나는 예수 당대의 예수운동에서 공동체조직가들/집주인들과 비슷한 부류를 발견했다. 그들은 타이쎈과 크로싼처럼 예수 사후 예수운동의 역동성을 부여한 이들이기도 하지만, 예수 당대에 예수운동에 참여한 하나의 양식을 보여주었다. 내가 그들에게 붙인 범주적 명칭은 ‘지역협조자’다. 「마가복음」에서 이들은 예수가 은거한 혹은 소집회를 열었던 집의 소유자였거나 이런저런 방식으로 예수의 활동에 조력한 지역의 ‘소극적’ 활동가들로서, 대개 신상이 비공개된 사람들이었다.
나는 예수운동이 예수 사후 붙박이 공동체 형식으로 자리잡는 과정에서, 즉 교회 유형의 예수운동이 탄생하는 과정에서 소극적 활동가인 지역협조자 유형의 예수운동가들이 공동체의 지도자 유형으로 부상한 것이 공동체조직가라고 보았다. 소극적인 활동가들은 창의적이고 주체적인 문제의식과 실천 양식을 발전시키지 못한다. 반면 그런 유형의 활동가들 가운데 적극적으로 자기 현실을 해석하고 독창적인 실천의 양식을 개발하게 되는 이들이 등장하게 됨으로써 공동체 조직가 유형의 예수운동이 대두하게 된 것이다.
예수운동에 관한 이러한 해석은 나에게서 교회 활동가의 자의식을 발전시키는 과정과 맞물린다. 교회는 ‘떠돌이들’이 될 수 없는 자들의 예수 따름의 형식이다. 예수 자신을 포함해서 ‘떠돌이 예언자’ 유형의 활동가들은, 타이쎈의 분석에 따르면, 무소유, 탈가족, 그리고 유랑의 에토스에 따라 살았다. 그런 점에서 이들의 실천은 ‘탈정치의 영역’이며, 일상으로 회수되지 않는 삶이다. 그러나 교회는 일상의 원리 속에서 형성된다. 거기에는 ‘정치’가 있다. 추구하는바 이상과 목적이 있지만, 그것은 언제나 협상과 타협을 통해서 불완전하게 관철된다.
그럼에도 교회는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하며, 끊임없이 예수와 동일시를 추구하는 지역의 붙박이 공동체다. 그런 점에서 예수의 떠돌이 에토스는 교회가 추구하는 이상에 포함된다. 물론 교회는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하면서 예수에 관한 기억을 메시아 기억으로 전치시켰다. 이른바 ‘교회의 예수’가 탄생하였다. 교회의 예수 기억법이자 예수 해석학이다. 역사 속의 예수에게서 떠돌이의 삶은 주어진 상황에서 요청된 하나의 운동적 실천 방식이었겠지만, 교회의 예수에서 떠돌이의 삶과 태도는 신앙적 동일화의 대상이었다. 여기서 ‘떠돌이’라는 실천의 양식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양식이자 신앙의 양식이 된다.
교회는, 그리고 나는 모순에 빠진다. 이 세계의 질서에서 협상하고 타협하면서 예수를 추구하는 삶의 정치를 지향하지만, 협상과 타협 너머에 있는 근원적으로 탈정치적 범주인 그분의 삶의 양식을 동경한다. 이것은 일상과 혁명의 갈림길이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 아래 사는 일상에서 어떤 것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과 그 모든 시공간적 경계를 해체하는 탈정치의 시간과 공간에의 갈망이 공존하며 갈등을 일으킨다. 이것이 교회다. 그리고 이것이 교회살이를 시작한 나의 모습이다.
바울을 포함한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이중적 존재양식으로 기술하였다. 이 세상에 살아 있되, 살지 않는 자처럼 사는 것. 현대의 여러 철학자들이 간파하고 있는 그 이중적 존재성이 바울 등에 의해 이미 고백되었고, 나는 그러한 회색지대에서 경계인으로 사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교회를 살아가는 나의 일상이며 실존이다.
한데 신학생으로, 그러니까 예비 사역자의 자격으로 처음 2년간 다녔던 교회에서 내가 체험했던 예수는 그러한 ‘교회의 예수’가 아니었다. 교회는 경계인으로 살아가는 법을 공유하는 이들의 공동체라기보다는 이 세계의 질서에서 생존하고자 하는 욕망의 노예가 되어 버린 이들의 공동체였다. 오늘 우리에게서 교회라는 것 자체가 그랬다. 그 교회를 포함해서 거의 모든 교회는 양적 규모에 집착했고, 그것을 표현하는 건물 크기, 과시적 역사, 주변의 평판에 집착했다. 그러면서 교인들에게 내재된 욕망의 경제학을 더욱 부추겼다. 신앙의 이름으로.
‘역사의 예수’라는 연구 범주는 그것이 태동한 18세기 말부터 이러한 ‘교회의 예수’와 갈등을 일으켰다. 요컨대 역사의 예수는 교회의 기억법에 대한 도전이자 교회의 성공주의에 대한 저항을 표현하는 예수 역사학적 방법이자 형식으로 제안된 것이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비판의 담론은 시간이 흐르면서 체제에 순응하는 법을 배운다. 역사의 예수 연구도 그랬다. 알게 모르게 예수 연구는 순화되었다. 학문이 질서에 순화되는 전형적인 방식은 현실의 문제에서 벗어나 골방의 현학적 학문의 세계로 들어가 버리는 것이다. 그러한 징후들은 이미 19세기 후반부터 나타났고 20세기는 역사의 예수가 교회에 대한 전선을 포기하고 골방의 학문으로 들어앉아 버린 시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반도(叛徒)의 족보와 전통은 어디에선가 이어지곤 한다. 20세기 중반 이후는 제3세계 신학들에서 역사의 예수가 부활했다. 그 예수는 제국주이에 저항하고 제국적 교회주의에 저항하며, 계급주의 인종주의 남성주의에 저항한다. 그렇게 해서 안병무의 역사의 예수는 나에게 전파되었고, 나는 역사의 예수 연구자이자 그러한 예수를 따르는 교회 활동가가 된 것이다.
역사의 예수에게서 ‘작음’을 배우다
1995년, 한 작은 교회의 전임 사역자가 되었다. 나의 스승 안병무 선생이 만든 교회였고, 나는 줄곧 그 교회의 청년이었다. 하지만 내 또래의 청년을 포함해서 내 윗대의 어른들이 거의 대부분 교회를 떠났고, 20,30대의 청년들 다수를 포함 이십 명 정도가 남은 상태였다. 나의 과제는 이 교회가 애초부터 지켜왔던 정신을, 곧 민중신학적 교회를 이어가는 것이었고, 또한 당면한 사정을 고려해서 우리만의 고유한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이때 처음으로 ‘작은 교회’라는 꿈을 꾸었다.
나는 ‘작은 교회’가 아닌 교회의 일원이었던 경험이 없다. 하지만 언제나 더 큰 규모의 교회를 지향했다. 그것이 발전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야 뭐든 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니까 크지만 역사의 예수가 보인 비판적 지향을 간직하고 있는 교회, 그래서 규모로도 뭔가 의미 있는 것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교회, 그것이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의 생각이었다. 그러니 항상 ‘작은 교회’의 일원이었던 나에게서 ‘작음’은 규모는 작아도 ‘생각의 작음’을 간직한 교회들은 아니었다. 그것은 아직 미완성의 존재이고 아직 더 규모의 정치에 치중해야 하는 교회였다. 그러나 ‘작음’에 대한 새로운 성찰에 따라 새로 전임 사역자가 된 나의 출사표는 의자 25개를 구입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리고는 그 이상의 교회를 만들지는 않겠다고 떠벌렸다.
8년간의 사역자 직을 사임하고 건 10년 동안 그 교회 교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고 있는 지금, 이 교회는 출석교인이 40명이 넘는다. 그러니까 나의 말은 지켜지지 않았다. 하지만 규모를 지향하지 않기로 한 것이 교회의 암묵적인 합의로 모두에게 자연스러워졌으니 완전히 안 지켜진 것은 아니다. 더 이상 누구도 더 커야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 대신 사람들은 이웃과 함께 하는 가능성에 뼈 속 깊게 열려 있다. 개신교 교회를 넘어서 다른 종단의 단체들과도 이웃이 되고, 종교를 넘어서 시민사회의 여러 단체들과도 동료가 되었다.
여기서 내가 깨달은 것은 배타주의를 넘어서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의 하나는 ‘작음’을 생각의 틀로 확정하는 것이다. 혼자서는 할 수 없기에 이웃과 동료가 되어야 하고, 모두들 작기에 그 이웃들 간에는 수평적 연대가 필수불가결하다. 하여 대화는 교리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작음에 관한 ‘생각과 삶, 실천의 나눔’에서 시작한다.
안병무 선생을 따라 민중신학적 교회는 세 가지 기조를 추구한다. 정전화(正典化), 교리화, 직제화, 이 세 가지, 곧 권력화된 제도교회의 세 가지 기조를 해체하는 것이다. 하여 민중신학적 교회의 사역자로 나서게 된 내게 맡겨진 과제는 이 셋을 교회의 일상적 가치로 확고히 하는 데 있다. 나는 ‘생각의 작음’을 구체화하는 것이 이 세 가지를 일상화하는 가장 중요한 기반이라고 보았다.
성서를 ‘정전’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성서가 통일된 거대한 파노라마를 가진 책이라는 믿음에 기초한다. 하지만 실상 성서는 하느님과 그이를 따르는 민초들 사이에서 벌어진 작은, 분절적인 에피소드들의 모음집이다. 성서가 위대한 것은 그것이 군림하는 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책이기 때문이 아니라 분절적인 작은 이야기들 속에서 우리와 대화하는 신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성서는 가장 초라한 이들과도 대화하는 신을 보여주며, 그런 신에 관한 책이기에 위대한 것이다.
교리 또한 ‘큰 것’에 관한 강박증적 자기 확신의 산물이다. 창조에서 종말까지, 그 모든 것에 관한 배타적이고 일관적인 진리에 관한 확신이다. 그것은 ‘신의 말함’, 모든 이로 하여금 경청하게 하는 배타적이고 우월한 진리의 발설이 교리를 구성한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예수가 보여준 진리의 단면은 가장 작은 이에게서 가장 위대한 것이 나온다는 데 있다. 하여 진정한 그이의 교리가 있다면 그것은 신의 거대한 독백에 관한 것이 아니라 ‘신의 들음’에 관한 것이다. 교리는 들음에서 시작하는, 가변적인 대화의 이야기여야 한다.
셋째로 직제화는 교회 내부를 수직화하고, 교회 간을 수직화하며, 교회와 사회를 수직화하는 권력 욕망의 산물이다. 하지만 예수가 말한 대안적 직제는 섬김의 직제다. 그것은 먼저 낮은 이임을 자처함으로써 시작한다. 진정한 직제화는 그런 의미에서 기존의 교회주의적인 수직적 직제화의 해체다.
이와 같은 세 가지 해체를 어떻게 교회에서 일상화할 것인가, 그것이 8년간 나의 과제였고, 그다지 성공적이지는 않아도 사람들은 이런 생각과 실행에 대해 그다지 낯설어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내게 위안이 된다.
그러나 나를 포함한 교인들 모두는 동시에 수직적인 틀에서 벗어나 행동하지 못한다. 왜나면 그것은 우리 사회의 인습이고 우리 존재의 습성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여 교회는 언제나 모순을 체감한다. 그러한 모순 속에서 갈등을 일으키며, 그 갈등을 봉합하지 않고 지속하는 법을 서로 배우는 마당, 그것이 교회다. 그리고 교회가 예수의 혁명을 생각과 행동 속에 담아두는 방식이었다. 나에게서 예수, 혁명, 교회는 이렇게 서로 얽힌다.
경계 위를 휘청거리며 걷다
1987년 민주주의는 열망의 대상에서 제도화의 대상이 되었다. 혁명적 상상력과 결합되어 있는 그 용어가 제도 그리고 일상의 체제와 결합되었다. 그로부터 20년, 우리는 민주주의가 보일 듯 말 듯 아련히 꿈꾸던 그것이 아니라 구질구질한 삶의 연속임을 발견했다. 그것은 본성상, ‘무한히 아름다운 무엇’이 아니라, 애써 아름답게 분칠하고 가꾸지 않으면 ‘너무나 평범한, 아니 흉물스럽기까지 한 무엇’이었다.
지난 20여 년 동안 한국 민주주의의 가장 뚜렷한 얼굴은 ‘적나라한 권력의 체제’라는 것이다. 더 많은 권력을 가진 이에게 실컷 축복을 나눠주는 체제이며, 더 적은 권력을 가진 이에게 실컷 저주를 뿜어대는 체제였다. 역설적이게도 한국의 민주주의는 한국사회를 본격적인 격차사회로 이행하게 하는 계기였다. 그러한 격차성에서 ‘실패자’의 대열에 있다는 것은 회생의 기회가 거의 없는 하위계층의 감옥 속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삶을 의미했다. 아니 더 바닥을 향한 추락의 공포 속에서 허덕이며 살아야 하는 삶을 의미했다. 해서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점점 더 성공에, 아니 실패를 회피하려는 생존투쟁에 몰입하게 되었다. 우리가 만들어낸 민주주의 제도는 이랬다.
우리가 넘어서고자 했던 한 명의 보이는 독재자는 사라졌지만, 우리 모두가 보이지 않는 독재자의 손에 포획되는 세계 속에 살고 있다. 사실 그 독재자는 인격체가 아니라 시스템이다. 주체 없이 작동하는 ‘과정의 체제’가 도래했다. 더욱이 과거처럼 피동적인 포획이 아니다. 실패를 회피하고자 하는 무한 경쟁 속에서 우리는 자발적으로 이 체제의 동력이 되기로 했고, 이 체제에 동력을 제공해주는 연료가 되기로 했다. 소모되며 사라져버릴 때까지 온몸을 불태워 체제에 순응한다. 그러면서도 마지막 숨통이 끊어질 때까지 착각 속에서 불에 탄다. 내가 그 체제의 중심이 될 거라는, 그 체제가 벌인 전리품을 한 가득 품고 살 수 있다는 착각. 그런 착각 속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의 비명으로 이 세계가 유지된다. 한마디로 미친 성공주의 사회 속에 우리가 살고 있는 체제다.
하여 이 세계를 넘어서기 위한 몸짓이 필요하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권력, 마치 전지자처럼 세계를 구석구석 통제하는 능력을 갖춘 권력이다. 심지어는 나 자신의 내면까지 그 지배력을 미치고 있는 권력이다. 하여 다시 혁명의 상상력이 필요하다.
교회는 현존 질서를 전복시키는 혁명의 상상력과 현존 질서에서 이상을 꿈꾸며 살아가는 일상의 상상력을 결합하는 예수를 간직한 공동체였다. 혁명을 꾸꾸는 교회는 이렇게 표독한 현실을 견뎌내며 꿈을 간직하고 실천했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우리가 알고 있는 교회는, 우리가 일원으로 참여하는 교회는 우리의 표독한 민주주의적 제도와 별반 다르지 않다. 더 많이 가진 이에게 축복을 선포하고, 더 적게 가진 이에게 저주를 선포한다. 하여 교회는 더 많이 가진 이들의 장소가 되어 가고 있다. 교회는 세계의 성공주의에 이미 정복되었고, 이 전능한 권력의 열렬한 부역자가 되었다. 사회의 어느 영역보다도 미친 성공주의가 활개치는 곳, 그곳이 오늘의 교회다. 하여 오늘의 교회에는 실패자의 자리가 없다.
더 많이 가진 교회는 더 적게 가진 교회를 약탈한다. 성장이 멈춘 시대 교인들의 수평이동이 거의 유일한 교회 성장의 실체가 된 세계에서 더 많이 가진 교회는 더 작은 교회들을 고사시키는 것도 불사한 포교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게다가 시민사회의 ‘공공의 적’처럼 부정성의 표적이 된 상황에서 대형교회는 권력게임에 돌입했다. 정치세력화를 위한 게임이다. 권력을 창출하여 교회의 기득권을 지켜내고, 강자 중심의 사회를 견고히 구축하기 위해, 그러한 정치적 사회적 윤리적 가치를 실현해내기 위해 벌이는 게임이다. 하여 슬프게도 우리의 교회가 꿈꾸는 세계는 ‘부익부 빈익빈의 복음’ 바로 그것이다. 교회는 경계를 걷는 것이 아니라 경계를 창출하고 강화하는 세력의 선봉에 있다.
이럴 때 역사의 예수는 나에게 교회와 교회의 예수를 공격하는 날카로운 무기다. 하지만 그런 교회의 예수는 이 세계의 욕망의 경제를 신화화한 것에 다름 아니다. 그 욕망의 경제학적 질서는 이미 국가를 정복했고, 세계체제를 정복했으며, 내 일상을 정복했다. 나는 이 세계를 살아가면서 점점 더 부추겨지는 욕망의 점층 과정에 몸을 맡겼다. 하여 나는 욕망의 경제학의 노예이기도 하다. 내가 살면서 터득한 지혜는 그 욕망의 경제학 사전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런 몸으로 나는 그 외부를 상상한다. 그것이 전복되는 꿈을 꾸며, 그것의 전복을 향한 가능성을 실험한다. 이 세계의 사전에는 존재하지 않는 매뉴얼을 구상하며 죽지 않은 자로 이 세계의 밖을 밟고자 하는 데 사력을 다한다.
그런 나의 생각과 실천의 방식은 이 세계를 살면서 이 세계에 있지 않은 자처럼 사는 것이다. 곧 경계선 위를 걷는 것이다. 끊임없이 나 자신과 다른 이를 불편하게 하고 문제를 도발한다. 그러나 언제나 나의 주장은 모험적이다. 예수가 그렇던 것처럼, 그리고 예수를 따르던 초기의 선각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알지 못하는 길과 세계를 추구하며 모험의 길을 가야한다. 하여 나는 휘청이며 걷는다. 그리고 더듬더듬 말한다. ‘이것은 아니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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