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사상] 2013년 8월호 특집 '왜, 다시 1903년인가?'에 게재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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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대부흥운동, 새로운 기억의 계보를 찾아서
실패한 2007 년의 ‘어게인 1907’, 비판과 대안
실패한 기억하기
2007년을 꽤나 소란스럽게 했던 ‘어게인 1907’의 슬로건은 그 해가 지난 뒤 거의 기억에서조차 사라졌다. 물론 일부 대형교회들이 주도했던 이 소란스런 횡보는 큰 성과를 올렸다. 그해 12월 19일에 벌어진 제17대 대선에서 기독교도들의 몰표가 MB에게 집중되었고, 결국 ‘장로대통령’을 당선시켰다. 10년 동안 2회에 걸친 중도개혁정권의 집권으로 전통적 기득권 세력의 권력은 상당부분 위협을 받았고, 일부는 신흥 기득권 세력에게로 지분을 빼앗긴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이 더 계속된다면 전통적 권력의 자원 우위 상황은 역전될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이 팽배했다. 그런데 대형교회가 주도한 보수대연합이 ‘잃어버린 10년’을 되찾았다. 게다가 새로 집권한 정부는 시작부터 처절한 ‘복수의 정치’를 감행했고, 그 과녁은 신흥기득권세력에 맞추어져 있었다.
권력과 자원의 점유를 둘러싼 정치게임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전통적 보수세력에게는 ‘성공’이라고 평가해도 무방하다. 하지만 일등공신인 교회에게 그것은 그다지 성공이라고 평가할만하지 못하다. 이미 1990년대 초부터 급격히 둔화된 성장세는, 2005년의 인구센서스에 따르면 지난 10년 사이(1996~2005년)에 개신교의 성장이 마이너스 상황에 진입했다. 불과 1.4%라는 소폭의 감소였지만, 1960~1990년 대부흥기에 워낙 초고속의 성장을 거듭하던 직후의 급격한 반전이었기에 그 타격은 꽤나 심각했다.
무엇보다도 교세의 초고속 성장에 맞추어져 있던 목사후보생 양성 시스템이 파행으로 치달았다. 이 과정에서 세계를 분석하고 미래를 기획할 신학의 기능은 퇴화되었고, 성장을 위한 기능학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지구화 시대를 맞아 세계의 변화 속도(velocity)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빨라졌고, 그중에서도 한국의 변화는 더욱 무시무시하게 과속으로(speedily) 달음질하고 있던 때였다. 그런 시기에 미국발 수입신학인 성장 기능학의 효과는 기대 이하로 미미했다. 일부의 예외를 제외하면 전체적으로 교회는 성장하지 않았고, 양극화는 극적으로 악화되었으며, 심지어 매년 문을 닫는 교회가 1,300여개나 되었다. 이것은 교회 매매를 둘러싼 ‘블랙마켓’의 극적인 비대화를 초래했고, 여기서 온갖 추문들이 시민사회로 여과 없이 유포되었다.
가뜩이나 교회에 대한 시민사회의 시선이 따갑던 때였다. 2천 년대 초부터 미국의 부시정권이 명분 없는 전쟁을 벌이면서 전 세계에 반미가 물결치고 있었고, 특히 가장 친미의 공간인 한국에서도 반미는 시민사회의 다수 견해가 되고 있었다. 이때 한국의 개신교는 부시의 종교와 동색(同色)이라는 혐오적인 이미지로 싸잡아서 비판받았고, 실제로 대형교회 중심의 개신교 지도자들이 부시의 전쟁을 ‘정의의 전쟁’이라고 소리높이고 있었으니 시민사회의 그런 시선은 크게 보다 틀리지 않았다.
거기에 한국의 근본주의적 개신교도들의 공격적 선교, 그것의 파행성이 전 세계적으로 탄로되었다. 이에 국외에선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공격의 표적이 되었고, 국내에선 불교계가 중심이 되는 강력한 비판을 받았다. 게다가 안티기독교운동이 활발해졌고, 과학주의자들의 도전 또한 거셌다.
이런 추세와 맞물려 개신교 신자들의 교회에 대한 충성심은 현저히 낮아졌고, 목사나 장로 등 교회의 엘리트 집단에 속하는 이들조차 대외적으로 자신의 종교성을 드러내는 것을 꺼려하는 경향도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전체적으로 신앙적 자존성이 크게 추락했던 것이다.
‘어게인 1907’이 드높이 울려 퍼지게 된 것은 바로 그때다. 그 해는, 말했듯이, 대선이 있던 때였고 마침 장로대통령 후보가 유력하게 떠오르던 때였다. 또한 그 해는 평양 대부흥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하여 위기 타개를 위한 전환점으로 삼기에 2007년은 꼭 알맞은 해였다. 그리고 말했듯이 개신교가 몰표를 주며 지지한 후보가 당선되는 개가를 이룬 것이다.
한데 그럼에도 이후 교세는 전혀 반전되지 않았고, 교회 양극화는 훨씬 더 심화되었으며, 시민사회의 혐오 현상은 단순한 감정적 반대에서 체계적인 반대로 비약하고 있는 추세다. 그리고 개신교 신자들의 충성심 이완 현상은, 다중 종교성(multiplexization of faith)을 드러내는 멀티신자 현상을 부추겼다. 최근 일부 신학자들이 주목한 ‘가나안 성도’에 대한 연구는 바로 이런 다중 종교성 현상을 해석하는 실마리를 담고 있다. 충성심 이완이라는 신앙적 자존성의 해체 현상이 탈교회적 종교성(dechurched religiosity)으로 재신념화되고 있는 것이다.
하여 2007년을 소란스럽게 했던 ‘어게인 1907’이라는 구호는 한국 개신교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를 반전시키는 데 거의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심지어 개신교의 위기를 더욱 심화시켰고, 오히려 반개신교적 담론을 더욱 체계화하도록 자극하는 역효과를 가져왔다.
그런 점에서 최근 감리교를 중심으로 조용히 불고 있는 ‘1903년 원산 대부흥’의 기억하기는 ‘1907년 기억의 소환 작업’의 실패를 반추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실제로 1903년 원산의 대부흥은 ‘헤게모니화 과정’을 수반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권력게임에 과도하게 집착했던 1907년의 기억과는 처음부터 차별화된 지점을 보여준다. 바로 이 점이 내가 이 글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어게인 1907’의 실패한 기억 운동의 요체다.
1907년 기억의 두 요소
우선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원기억(原記憶)에 관해 이야기해보자. 흔히 평양 대부흥운동을 얘기할 때 많은 이들은 1903년의 원산 대부흥운동을 떠올리곤 한다. 한데 그것은 ‘해석의 주체’가 기억을 서사화할 때 즉 기억의 주체가 원산과 평양을 기억의 계보로 만들 때 소환되는 선행적 기억의 요소가 원산 대부흥운동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한데 원기억은 해석의 주체가 기억을 서사화하기 이전, 즉 기억하기가 작동하기 이전에 기억의 요소가 형성되는 체험에 관한 것이다.
나는 그들 평양 대부흥운동의 기억을 처음 발생시킨 이들 배후에 놓인 체험의 근저에 ‘러일전쟁’이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즉 인천을 통해 육로로 진군하던 일본군의 군대폭력을 피해 많은 사람들은 교회로 피신해 들어왔다. 특히 평양의 교회는 일본으로선 침범할 수 없는 ‘미국의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한데 러일전쟁의 기억 배후에는 그 10년 전에 벌어졌던 청일전쟁의 기억이 있다. 그때 전쟁터가 되었던 평안도의 조선 양민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심각했다. 그리고 러일전쟁 당시에도 조선 양민은 적지 않은 고통을 겪었음이 최근의 연구에서 속속 드러나고 있다.
하여 1907년의 평양은 ‘전후’라는 파행적 체험이 응축된 시공간이다. 전쟁을 겪은 뒤, 그 미친 불꽃을 방사시켰던 폭력성이 일상화되고 내면으로 들어가면서 벌어진 몸과 정신의 분열적 갈등이 고조된 시공간이고, 그것이 원인불명의 파괴적 징후로 신체 외부로 돌출하여 발현되는 파생적 폭력의 시공간이다.
특히 갑자기 신자들이 늘어난 평양의 장로교 교회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교회 지도자들은 새로운 신자대중 간에 벌어진 이러한 증오와 분열, 폭력성을 이해하지도 겪어내지도 못했다. 하여 그들은 골방에 들어가 기도회를 갖는다. 위기에 대해 이런 신앙적 행위 양식이 선택된 직접적 계기는 아마도 1903년의 원산의 사례를 전수받은 탓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공교롭게도 이 기도회는 곧 신비 체험에 휩싸인다. 이 기도회 참석자들 다수가 자신들이 겪고 있던 혼돈과 무력함을 단박에 사라지게 하고도 남을 만큼의 종교적 엑스타시 상태에 진입한 것이다. 이러한 종교적 열광주의는 순식간에 다른 이들에게 전염된다. 즉 점점 더 많은 이들이 그런 종교적 엑스타시 체험에 몰입하게 되어, 이들은 모두 신비를 공유한 체험공동체로 결속하게 되었다. 아울러 그 신비체험은 전후의 정체 모를 퇴행적인 파괴성에서 자유로워지는 해방의 체험으로 이어진다. 여기까지가 바로 평양대부흥운동의 원기억이다.
이제 기억하기의 두 번째 차원, 곧 본격적인 기억하기, 기억의 제도화 과정을 보자. 교회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신비 체험을 ‘성령의 체험’이라고 명명했다. 하여 이 사건은 성령사건이 된다. 사건의 해석이 시작된 것이다. 한데 해석은 늘 여러 해석들과의 경합 과정을 통해 수행된다.
가령 예수가 악령을 추방한 사건을 바리사이는 악령이 벌인 사건으로 해석했다. 반면 예수는 악령이 악령을 추방한다는 것이 어불성설이라는 논거를 제시하며 자신의 사건이야말로 성령의 사건임을 강변한다. 여러 다른 해석들이 경합을 하는 가운데, 한 해석이 경쟁에서 승리하면 그것은 지배적 기억으로 자리잡게 된다.
한데 흥미로운 것은, 평양의 장로교 교회들에서 해석의 주도권을 장악한 이들은 교회의 지배층인 미국계 선교사들과 그들을 추종한 한국인 지도자들이었다는 점이다. 그들이 기도회를 시작했으니, 기도회의 효과를 선점하고 통제권을 쥐게 된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다.
일반적으로 영의 체험은 기존의 질서를 교란시키는 종교적 전복의 코드가 되곤 했다. 해서 학식 있는 자나 제의권을 독점한 자들보다 그런 일상의 체계를 해석하는 언어를 보유하지 못한 이들이 더 자주 영의 체험을 했고, 그 체험은 그들이 비록 교육받지 못한 이들이라 하더라도 어느 기성의 지도자들 못지않은 담론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했다. 그런데 1907년의 평양의 교회에선 학식과 제의권을 전유한 이들이 영의 체험도 전유했다.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견제받지 않는 압도적인 신앙적 헤게모니를 행사할 수 있게 했다.
문제는 당시 평양의 미국인 선교사들이 이른바 ‘맥코믹 네트워크’의 일원, 즉 나이아가라 무디 부흥운동의 열정을 가지고 시카고의 맥코믹 신학대학에서 신학과 선교비전을 전수받은, 당대 미국에서 가장 근본주의적인 신앙의 수호자들이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이들이 전권을 쥐게 된 이 사건의 해석이 어떤 편향을 띠게 되었는지를 의미한다. 결론을 얘기하면 종교적 문화적 배타성과 성공주의가 결합된 해석이 평양대부흥운동의 지배적 기억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후 목사 후보자의 선발과 양성에 관한 일체의 신학제도를 독점하는 관행과 제도를 낳았다.
정리하면,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에는 원기억과 제도화된 기억, 이 두 가지 기억이 함축되어 있다. ‘원기억’은 신비 체험 현상이며, 그 속에는 ‘전후’라는 파행적 기억이, 그 발작을 일으키는 정체 모르는 미친 상흔들(trauma)이 신비 체험에 의해 압도되어 해소되고 극복되는 ‘해방의 체험’이 들어 있다. 또한 그것으로 그들은 이웃을 적으로 환치시켜 그들에게 쏟아 부었던 폭력성을 속죄하고, 이웃을 그리스도의 새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관계적 체험’이 들어 있다.
바로 이 원기억이 제도화되는 과정, 곧 다른 해석들을 압도하고 하나의 해석이 주도권을 갖게 되는 일종의 헤게모니화 과정과 결과가 바로 ‘제도화된 기억’이다. 한데 평양 대부흥운동에서 제도화된 기억은 부모의 전통과 단절하고 신앙을 달리하는 이웃을 적대시하게 하는 배타주의적인 해석의 제도화를 포함했다. 또한 그 배타성의 근거를 서구 백인 남성 중심주의적 가치 친화적인 원리에 종속시키는 식민주의적 해석의 제도화를 포함했다.
이렇게 원기억과 제도화된 기억은 서로 연계된 것이지만, 또한 동시에 이질적인 차원을 갖는다. 이 글에서 나는 그 연계성을 과소해석했고 그 이질성을 과대해석했다. 그것은 2007년의 슬로건인 ‘어게인 1907’의 기억하기의 실패가 저 1907년의 제도화된 기억을 무비판적으로 반복한 결과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음에서 이야기할 새로운 기억하기의 가능성을 원기억의 다른 계보에서 찾고자 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기억의 계보
2007년의 ‘어게인 1907’은, 1907년의 제도적 기억이 바로 그랬던 것처럼, 교회로 하여금 그 신앙의 배타성과 식민주의를 청산하는 대신, 교회의 권력 지향적 패권주의를 위해 신앙적 재활의 열정을 쏟아 붓게 했다. 그해 전국 곳곳에서, 심지어는 한인교회가 세워졌거나 한국인 선교사들이 활동하는 세계 곳곳에서, 그곳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의식을 치루는 캠페인이 벌어졌다. 그런 종교의례 중에 가장 위험스런 것은 이른바 ‘성시화’ 의례다. 왜냐면 그것을 주도한 이들이 그 도시의 시장, 고위관료, 기업인 같은 그 지역에서 자원을 독과점하고 있는 권력엘리트이기 때문이다.
그런 신앙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준 이가 바로 제17대 대통령이 된 이명박 씨다. 그는 서울시 시장이던 때나 대통령이던 때, 인사와 정책의 종교 편향성이 지나치게 노골적이었다. 그 결과 교회에 대한 사회적 혐오감은 더욱 심화되었고, 정치에 관여했던 많은 기독교 인사들은 더욱 비소통적이고 부패한 권력을 행사했다.
말했듯이 이런 ‘어게인 1907’ 프로젝트는 실패했다. 하여 이제 우리는 평양 대부흥운동의 기억을 청산의 대상으로 삼아 ‘기억 추방’을 도모할 것인가 아니면 거기에서 새로운 기억의 계보를 발견할 것인가를 판단해야 한다. 나는 앞서 얘기한 것처럼, 기억추방보다는, 원기억에서 새로운 기억의 가능성을 말하고자 한다.
1980년대 말 이후 한국사회는 소비사회로 빠르게 전환되기 시작했다. 소비사회는 사람들을 취향에 따라 개별화한다. 즉 사람들은 남들과 다른 자기 취향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며 구매하는 자가 됨으로써 보다 완전한 시민이 되는 것이다.
한데 이런 상황은 1997년을 거치면서 극단적으로 강화된다. 사람들이 모두가 서로 경쟁자가 되어야만 하는 사회가 된 것이다. 승자에게는 엄청난 보상이 선사되고 패자에게는 무자비한 징벌이 부과되었다. 그 무렵 사회를 풍미했던 ‘부자되기 열풍’은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의 사회에서 최후까지 살아남는 자의 미덕에 탐닉했고 그것을 위해 몸을 불사르도록 책동시켰다.
한데 그런 서바이벌 게임의 판타지가 무너지는 데 긴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한국계 독일의 사상가 한병철 씨가 말한 것처럼 적극적으로 몸을 불사르며 열정을 다해 달리던 사람들 누구도 서바이벌 게임의 승자가 되지 못했다. 그들이 얻은 것은 피로증후군 같은 신체와 정신의 질병이었다. 게다가 한병철 씨가 생각 못했던 현상도 일어났다. 서바이벌 게임에 참여한 사람들보다 그런 게임에서 일찍이 퇴출되어 자신을 불태울 노동의 현장 자체가 없는 이들이 한병철이 얘기한 피로증후군에 해당하는 스트레스 증상을 더욱 더욱 심각하게 앓고 있다.
한데 이런 스트레스 증후군은 많은 경우 분노를 일상화한다. 이 분노는, 마치 1907년의 ‘전후’처럼, 이유도 근거도 없이 타자를 향해 퍼부어진다. 일상의 폭력과 테러가 횡횡하는 사회, 심지어는 자기 자신에게조차 폭력과 테러를 가하는 사회가 되었다. 이때 증오의 대상이 되는 이들은 약한 타자다. 가장 약한 타자를 자기 자신에게서 발견하면 자기를 증오하고 공격하게 되며, 다른 이가 더 약한 자임을 확인하게 되면 그이에게 린치를 가한다. 때로 그런 피해자는 그를 둘러싼 이들의 집단공격을 당하곤 한다. 한편 공격할 타자를 밖에서 찾지 못하는 경우 가족 내에서 폭력이 가해지곤 하고, 심지어는 낯선 타자를 이유 없이 공격하는 이른바 ‘묻지마 테러’가 벌어지는 이유가 되기도 하며, 또 때로는 동물 학대 같은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특히 서바이벌 게임의 종언의 시대에 이르면 이런 현상은 더욱 극심해진다.
바로 이런 사회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인 개개인은 세상과 마주하고 있다. 상처들이 넘쳐나고 분노와 증오가 남발되며, 서로가 서로를 경쟁자로 여기는 사회를 말이다. 이웃은 사라졌고 모두가 자신의 가상의 적인 사회를 우리는 대면하고 있는 것이다.
1907년의 원기억은 전후의 상처들이 해소되는 해방의 체험으로 구성되었다. 그렇다면 그 기억의 계보에 선 이들은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최근 주류 개신교의 신앙 행태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동성애 혐오주의자가 되거나 마초적 과잉 남성주의자가 되거나 극단의 반공주의자들처럼 이념적 분노와 공격성의 화신이 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타인의 상처를 주목하고 그것으로 인한 증후들의 배후가 되는 사회 체제를 비판적으로 해독하며, 해방의 체험을 일으키기 위해 기도하고 실천하는 자가 되는 것, 그 자리에 바로 평양 대부흥운동의 원기억의 계보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의 계보이며 바울의 계보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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