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불광연구원,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연구실이 주최한 <탈종교화 시대, 종교의 위기인가, 기회인가?>를 주제로 하는 공동학술연찬회 때에 발표한 글입니다.
이 포럼에는 나의 글 외에
정경일 새길기독문화원장의 <'종교 이후'의 사회적 영성>
김근수 해방신학연구소장의 <가톨릭, 정말 잘하고 있는가>
온유와 마음 연구소 대표인 명법 스님의 <위기의 한국불교, 전통과 근대, 탈근대 가로지르기>
등이 발표되었습니다.
조성택 고려대 교수가 발제자와 모든 참가자 간의 대화를 이끌었고요.
다른 글을 보고 싶은 분은 불광연구원에 문의하길 바랍니다.
이 글을 수정 보완하여 [전법학 연구] 11호(2017 봄)에 게재하였는데,
그 글을 첨부합니다.
시대 새로운 종교성 - 교회 국경을 넘는 신자들, 종교 국경도 넘다_전법학연구11(2017 봄).pdf
---------------------------
교회 국경을 넘는 신자들, 종교 국경도 넘다
탈종교 시대 새로운 종교성
교회의 국경을 넘다
하나의 보편적 교회에 대한 이상을 가지고 있고 각 교회들의 위계적 체계가 잘 제도화된 가톨릭교회와는 달리, 개신교회는 교단정치와 개별교회정치가 상호작용하면서 형성된다. 이중 장로교회의 경우 후자의 요소가 좀더 중요하고, 감리교회는 전자에 강세가 있다. 한데 한국교회는 장로교적 체계가 전 교단의 제도화에 영향을 미친 탓에 개별교회주의가 상대적으로 더 강한 편이다.(이하에서 ‘교회’는 개신교회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종교의 경계’를 이야기할 때 교회라는 장소성은 한국개신교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즉 어느 개신교 신자의 종교적 정체성을 이야기할 때 그이가 어느 교파 소속인지의 문제보다, 어느 교회에 속한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이는 그 교회의 공식적 모임에 최소한 주1회 이상 참여하고, 수많은 비공식 모임에도 속해 있다. 많은 경우 그이는 자신이 속한 어느 커뮤니티보다 안정되고 친밀한 관계망을 그 교회 안에서 오랫동안 형성하고 있고, 그 안에서 수많은 기억들이 상호교차 하는 이들과 공동체를 이룬다. 하여 그이는 교회의 구성원으로서 소속감과 책임감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의식의 반영으로, 교회의 운영을 위해 적지 않은 기부금을 내며 많은 시간을 교회를 위해 투여한다. 그런 점에서 개신교회, 특히 한국의 개신교회는 교회라는 장소성의 ‘안과 밖’의 문제가 신자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정도가 매우 높은 종교다. 하여 교회는 일종의 ‘(신앙적) 국경’이다.
그러나 1990년 어간 이전에는, 교회가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었지만, 아직 ‘(신앙적) 국경’이 잘 형성되지 않았다. 그때에는 새신자의 유입이 매우 많았고, 오래되지 않은 신자들이 이 교회 저 교회 사이를 오갔다. 대략 목사나 은사자를 따라 교회를 옮기는 이들이 많았다. 그런 점에서 이 시기 교회간 수평이동을 한 신자들의 종교적 정체성은 그리 높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비록, 형제니 자매니 하는 가족주의적 신앙언어들이 넘쳐났지만, 아직 교회의 국경이 실체화되지는 않았다고 할 수 있다.
1990년대 이후 한국개신교는 양적 성장이 크게 둔화되었고 얼마 안 가 역성장 상황에 놓였다. 그러나 이때에도 크게 성장한 교회들이 많았다. 이 성장은, 새신자의 유입보다는, 교회간 ‘수평이동’을 통한 유입에 더 많이 좌우되었다. 이 시기 이후의 신자 변동에 관한 양적 조사연구들을 살피면 전체 개신교 신자들의 45~75%가 수평이동을 경험하였으며, 이 비율은 도시, 특히 서울에서 더 높았다. 또 주요 직분을 경험한 이들이 그렇지 않은 이들보다 더 많고, 연령은 30~50대가 더 많다.
교회를 옮기는 이유는 이사와 결혼이 제일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으로 조사되었지만, 이것은 과거보다 교인의 수평이동이 늘어난 이유로는 적합하지 않다. 이사로 인한 거주지 이동률은 1990년대 초 정점(22%)을 찍었다가 이후 약간의 변동이 있지만 빠른 속도로 지속적인 감소 추세에 있으며, 2013년에 이르면 (강남 지역으로 서울의 영역이 대대적으로 확장되면서 대규모 인구이동이 일어나기 직전인) 1973년 수준(14%)으로 낮아졌다. 결혼은 1990년대 이후 완만하지만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있다. 한편 수평이동의 이유로 조사되지 않았지만 이혼은 중요한 변수가 될 수 있다. 2천 년대 이후 급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수평이동의 또 다른 이유로 지목된 교회의 신앙제도와 리더십의 문제다. 이것은 30~50대 연령층과 주요 직분자의 수평이동률이 더 높다는 사실과 상응한다. 교회에 대한 경험이 많고 이해도가 높은 이들이 더 많이 수평이동을 선택한 것이다.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가장 안정된 신자층(직분자, 중간연령층)이어야 할 이들이 오히려 교회를 부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교회에 대한 경험이 많고 이해도가 높은 개신교 신자들이 1990년대 이후 교회에 대해 불만족감을 느끼고 있다면, 그것은 과거에 비해 교회와 목회자가 더 나빠진 탓일까? 일견 그렇게 보인다. 최근 들어 교회와 목회자의 추문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터져 나온다. 또 과거에는 그렇게 비추어지지 않았는데 오늘의 교회에 대해 사람들은 권위적이고 구태적이며 비상식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좀 더 생각해보면 그럴 것 같지는 않다. 가령, 최근 수평이동 신자들이 대거 정착하여 메가처치(mega-church)로 부상한 교회들은, 예전 교회 모습 그대로를 고수한 결과가 아니라, 더 동시대적인(contemporary) 감수성에 맞는 개혁에 성공하였기 때문이다. 교회 건조물, 인테리어, 예배 형식, 공간배치와 음향 체계, 목사의 스타일, 기타 프로그램 등에서 좀더 대화적이며 모던한 요소가 부각될수록 더 성공적인 교회가 될 가능성이 컸다. 또 성장주의를 폐기하겠다는 공공연한 선언을 하거나 재정적 투명성을 위한 가시적인 태도를 취한다거나 지역적 공공성 혹은 생태적 공공성을 강조한다거나 하는, 기성의 교회들과는 다른 신앙적 양식을 드러내는 교회들로 수평이동 신자들이 몰렸다. 그러니 1990년대 이후 수평이동 신자들은, 교회나 목회자가 과거보다 못해서라기보다는 현재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 것에 불만족을 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말했듯이 이들은 오랫동안 일원이었던 교회를 떠났다. 이들 중 많은 이들은 주요직분을 경험한 이들이기도 했다. 자기가 속한 교회에 대해 꽤 많이 알고 있는 이들이다. 해서 그 교회를 떠나는 것으로 인한 데미지가 새신자들의 그것보다 좀 더 큰 이들이다.
이렇게 교회를 떠나기로 한 이들 중 일부는 아예 개신교로부터 멀어졌거나 냉담신자가 되기도 했지만, 더 많은 이들은 다른 교회를 찾아 유랑의 길에 올랐다. 각 교회들에 관한 무수한 데이터들이 온・오프라인 공간을 떠돌고 있었기에, 이들 유랑하는 신자들은 이 정보들을 찾아 읽으면서 방문할 교회를 발견해냈다. 또한 교회를 이탈할 무렵부터 유랑하는 기간 동안 교회나 신앙, 신학에 대해 적지 않은 궁금증을 갖고 공부를 한 이들도 매우 많았다. 이렇게 교회를 유랑하는 이들은 더 많이 고민하고 더 많이 공부하며 더 유능한 정보 검색 능력을 갖춘 이들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 이들이 정박한 곳은, 말했듯이, 기성의 교회들과는 다른 새로운 요소들이 비교적 짜임새 있게 잘 결합된 신앙양식을 구현한 교회들이다. 그리고 이들 교회들은 수평이동하여 정착한 신자들의 기호와 관심을 반영하는 ‘고객맞춤형 마케팅’을 더 잘 구현해냈다. 하여 이렇게 정착한 이들은 교회의 구성원으로서 좀 더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태도를 갖게 되었다.
요컨대 신자들의 수평이동이 크게 확산되는 현상은 수평이동 신자들의 종교적인 내적 역량을 상승시켰고 그 역량을 기반으로 하는 적극적인 교회 평가 행위를 강화시켰으며, 이러한 평가는 일부 교회들에서 개혁을 이끌어냈고, 그런 개혁적 교회들로 수평이동 신자들이 몰려들게 하는 맥락이 되었다. 하여 수평이동 신자들이 정착하는 과정은 그들이 종교적 주권의식을 형성하는 과정이었다. 그런 점에서 나는 1990년대 이후의 수평이동 현상을 ‘주권교인’의 탄생에 중요한 계기로 해석하고자 한다. 이때 주권교인은, 교회에 대한 독점적 주권의식이 강한 특권적 신자를 가리키는 용어가 아니라, 교회 구성원들과 이해와 감정을 공유하며 교회에 대한 소속감과 책임감으로 주체화된 ‘교회적 시민’을 가리킨다.
이렇게 교회적 시민으로서 주권교인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교회들에서 ‘(신앙적) 국경’이 실체화된다. 즉 한국개신교에서 교회라는 ‘(신앙적) 국경’이 탄생한 것은 신자들의 수평이동의 심화 현상에서 주권교인의 탄생에 이르는 1990년대 이후의 일련의 교회적 변동 과정과 맞물려 있다.
이제야 우리는 ‘교회의 국경을 넘는다는 것’에 대해 신중하게 물을 수 있다. 단순히 잠시 머물렀던 교회를 떠나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종교적) 시민권’을 포기하는 행위이고, 종교적 유목민의 길을 선택하는 행위다.
앞에서 교회를 이탈한 이들 중 많은 이들이 수평이동 신자가 되었다고 말했고, 다른 일부는 냉담신자가 되거나 아예 탈퇴자가 되었다고 했다. 어느 경우든 그이들은 교회라는 ‘(신앙적) 국경’ 안에 있음으로 해서 얻는 기회들을 포기하는 행위를 선택한 것이다. 이렇게 냉담자 혹은 탈퇴자가 된 이들 중에는 무신론자로서 스스로를 규정하는 이들도 있지만, 기독교적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은 이들도 있다. 이들은 다시 수평이동 신자로서 교회를 찾거나 대안적 교회를 만들거나, 혹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홀로 기독인으로 산다.
‘가나안 성도’에 관해 최근에 수행된 한 질적인 연구의 논지를 빌리면, 이들은 교회의 입에 발린 교리적 주장들에 따라 자신의 종교적 정체성을 구성하기를 거부한 이들이다. 또 교회의 인습적인 예전에 참여하는 것으로 신앙이 구성된다는 생각을 거부한 이들이다. 나아가 어떤 방식이든 실천적 신앙을 지향하며 영적 역동성을 추구한다.
그들은 기성의 교회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성의 교단적 신학들로부터 기독교인으로 호명받지 못한 이들이었다. 또 지배적인 신학적 패러다임에 기초한 각종의 종교성 조사에서도 기독교도로 규정되지 못했다. 하지만 최근 일부 진보적 신학과 종교학에서 교회의 국경을 넘어선 기독교도들에 대한 신학적 재개념화가 모색되고 있다. ‘익명의 그리스도인’, ‘소속감 없는 신앙’, ‘종교적이기보다는 영적인 신앙’, ‘멀티신자’ 등은 그런 맥락에서 등장한 신흥 개념들이다. 그들은 이제 스스로도 기독교도일 뿐 아니라 신학에 의해서도 기독교도로 호명될 가능성이 열렸다. 하지만 이 개념들은 교회의 국경만이 아니라 종교의 국경을 넘는 신앙에 대한 재개념화로 이어진다.
종교의 국경을 넘다
한 개신교 신자가 교회에서 이탈하여 1차, 2차 수평이동을 한다고 하면(한국개신교도의 평균 수평이동 횟수는 2회다), 그이의 타자에 대한 태도는 ‘적대’에서 ‘관용’으로 이동하게 될 가능성이 많다. 또 그이가 찾아간 교회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그 다음 단계로 ‘관용, 그 너머’를 향하게 될 수도 있다는 데 있다.
관용이라는 어휘는 본래 관용의 주체와 대상이 위계적으로 이분화되어 있다는 가정을 전제로 한다. 즉 관용은 타자에 대해 적대하지 않지만 그 타자로부터 자신을 구별짓고 우월감을 재확인하는 이분법적인 심리적 주체의 장치로 등장한 것이다. 한데 관용 개념과 제도의 역사적 발전 과정에서 그 의미가 본래의 의미를 전도시키는 방향으로 발전하곤 했다. 가령 배타적 주체화의 의미를 넘어, 상호주체성(intersubjectivity)이나 타자적 주체성(subjectivity composed by others)과 같은 급진주의적 해석으로 의미가 확장된 사례들이 있었다. 하여 관용의 태도를 갖게 된 이들이 교회가 권장하는 책뿐 아니라 확장된 의미로 관용을 재해석하는 책들을 접할 수 있고, 또 교회가 가르치지 않은 바깥의 신앙 혹은 신념에 대해 열린 관찰자가 되어 배움을 얻게 될 수도 있다. 그럼으로써 주권교인들은 관용, 그 너머를 향하는 신앙적 태도로 사유를 발전시킬 수 있다.
한데 주권교인과는 달리 교회는 이 점에서 융통성이 별로 없다. 그것은 ‘교회 중심주의’와 ‘성서 중심주의’, 그리고 ‘유일신 신앙’ 등이 견고하게 교회적 관용 개념과 유착되어, 전복적인 의미 확장 가능성을 봉쇄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 성서, 유일신 등은 신학적 개념어 가운데 가장 중요한 비중을 갖는 것에 속한다. 하여 그러한 무게감 있는 신학적 개념어들이 신학 전반을 견고하게 포박하여 개신교라는 ‘종교의 국경’이 구축된다. 교회의 바깥과 성서의 바깥, 그리고 유일신 신앙의 바깥에는, 그 상상적 적대의 대상 혹은 관용의 대상으로 다른 교회 신자가 있는 게 아니라 다른 종교인 혹은 비종교인이 있다. 동시에 동일시의 대상으로 개신교라는 종교가 하나의 상상적 공동체로서 존재한다.
물론 개신교 신자들이 다른 개신교 신자들과 공유하는 것은 실제로는 별로 없다. 가령 가톨릭 신자들은 동일한 예전, 동일한 복장의 사제, 교황이라는 명료한 중심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지만, 개신교 신자들은 그런 정도의 구체적인 신앙적 장치를 공유하고 있지 않다. 특히, 글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개별교회정치의 요소가 더 강한 한국의 개신교는 아주 느슨한 ‘(종교적) 국경’으로 포섭되어 있는 종교다. 해서 종교라는 국경은 교회라는 국경보다 월장이 용이하다. 특히 교회의 국경을 월장한 이들에게는 말이다.
여기서 주권교인, 특히 ‘관용, 그 너머를 향해 열린 신자들’과 교회 중심주의를 고수하려는 교회 간의 치열한 갈등이 발생한다. 교회는 예배나 여러 프로그램들을 통해 교회 중심주의를 강조하고, 여러 가지 신앙적 인센티브를 통해 신자들의 생각을 규율하려 한다. 때로는 이단이나 기타 내부의 위험요소들을 색출하고 공격하는 프로그램에 신자대중을 동원함으로써 관용의 태도가 그 너머로 이어지지 못하도록 종교적 바리케이드를 설치한다.
반면 일부 신자들은 교회의 강압에 고개를 돌림으로써 소극적 저항을 하고, 어떤 이들은 적극적인 문제제기를 함으로써 자신의 생각을 표현한다. 그리고 그런 이들 중 많은 이들이 교회의 예배나 프로그램에 대한 충성도를 적당히 낮추고 상호주체 혹은 타자적 주체에 관한 글을 읽거나 교회 외부 프로그램에 참여한다. 그리고 다른 일부는 다시 교회를 떠나 제3, 제4의 교회를 향해 수평이동을 하거나 교회의 냉담신자가 되기도 하고, 아예 특정 제도에 귀속되지 않는 종교인의 길에 들어서게도 된다.
이러한 종교적 국경을 넘나들며 때로는 교회 안으로, 때로는 밖으로 자유롭게 떠도는 유목민적 종교인들은 현재 개신교 신자들 사이에서 빠르게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그런 이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담아내는 대안적 교회를 도처에서 만들고 있다. 이러한 멀티신자들의 교회는 보수적이든 진보적이든 많은 기성의 교단들에서도 나타나고 있고, 독립교회 형식으로도 다수 등장했다. 또 매우 실험적인 교회로서 새로운 신앙적 실험의 도정에 들어서는 경우도 있다. 혹은 기성 교회 안에서 소모임 형식의 대안교회를 만들기도 했다. 물론 이들은 다른 종교의 프로그램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고, 비종교의 프로그램을 통해 자신의 새로운 종교성을 탐색하기도 한다.
탈종교 시대의 종교성과 포스트종교개혁
이제까지 우리는 ‘교회의 국경’과 ‘종교의 국경’을 월장한 신자들의 등장에 대해 말했다. 아니 실은 그 경계를 넘나드는 것, 그런 점에서 경계 위의 신앙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그런 이들을 다루는 신학적이고 종교학적인 시도들에 대해서도 간략하나마 언급했다.
이에 대해 나는 ‘멀티신자’라는 용어를 선호한다. ‘익명의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만 통용할 수 있는 용어라는 점에서 제한적이고, ‘소속감 없는 신앙’이나 ‘종교적이기보다는 영적인 신앙’은 기성의 종교제도로부터의 이탈이라는 함의에 치중하고 있어 너무 협소한 개념이라는 아쉬움이 있다. 반면 멀티신자는 제도로부터 이탈했든 아니든 여러 종교나 신념에 대해 존경심을 표하는 신자 혹은 종교인을 지칭한다는 점에서 다른 용어들보다 융통성이 있다. 그들은, 특정 종교의 제도에 귀속됨으로써 종교인이라는 자의식을 갖는 것이 아니라, 많은 종교들 혹은 비종교 영역에서 깨달음을 얻고 성찰하려는 태도를 ‘영적인 것’이라고 부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멀티신자의 새로운 종교성과는 달리, 교회는 신자들의 이런 변화에 대해 부정적이다. 앞 절에서 이야기했듯이 교회는 교회적・종교적 국경의 재국경화를 도모하고자 한다. 반공, 반동성애, 반이단 몰이가 ‘적’의 발견을 통한 재국경화의 시도라면, 가족회복프로그램이나 순결프로그램 등은 ‘우리’의 재무장을 통한 재국경화의 도모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시대를 ‘탈종교 시대’라고 부를 때, 그 속에 담긴 종교적 위기의 가장 뚜렷한 요소는 교회적・종교적 국경들이 무너지고 있다는 경험적 사실들에 기반을 두고 있다. 종교제도는 너무 세속화되었고, 세속적 제도들은 너무 종교화되었다. 가령 많은 기업들은 과거 종교의 전문영역이던 힐링의 산업화를 활발히 도모하고 있고 종교의 독점물이었던 영성을 마케팅의 중요 범주로 활용하고 있다. 정치영역에서도 종교적 메시아니즘이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으며, 시위자들은 종교적 염원의 표현인 촛불을 통해 시위의 종교화를 성공적으로 실현하고 있다. 또, 대중스타에 대한 팬덤은 청소년의 유사종교 현상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런 시대적 추세를 종교의 위기라는 관점에서 ‘탈종교 시대’라고 부르고, 새로운 종교적 현상이 확산되고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종교성’ 혹은 ‘종교 없는 종교성’이라고 부른다. 그런 상황에서 교회가 교회의 전통적 국경을 재강화하려는 시도는 과연 위기에 대한 돌파구일 수 있는가? 사회에 따라, 시대에 따라, 정세에 따라 성공한 사례들도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이런 시도는 위기에 대한 해법이라기보다는 종교의 퇴행성으로 해석된다.
종교의 국경화는 16세기 유럽의 프로테스탄트 운동에서 시작되었다. 비단 종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서 국경이 속속 출현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의 국경화’ 현상은 근대성의 가장 핵심적인 특징에 속한다. 그런 점에서 국경은 ‘근대적 국경’을 의미한다. 전근대사회는 국경 대신에 변경(frontier zone)이 있었다. 변경이 ‘면’(zone)의 범주라면, 국경은 ‘선’(line)의 범주다. 하여 변경이 이편도 아니고 저편도 아닌, 동시에 이편이기도 하고 저편이기도 한 소통의 중간지대라면, 국경은 이편과 저편을 확고하게 가르는 단절의 선이다. 이렇게 면의 사회에서 선의 사회로 이행하는 분절점에 종교개혁이 위치한다. 즉 종교개혁은 근대유럽, 국민국가로서의 선의 사회들이 형성되는 일련의 역사과정의 첫 번째 도정이다.
이렇게 하여 근대적 종교로서의 개신교가 탄생했고 그것은 국가종교의 출현을 의미했다. 국가와 종교(개신교)는 선의 사회를 구현하는 근대적 지배동맹의 주체였다. 개신교가 북미로 전파되었을 때 개신교는 국가종교가 아니라 교파종교로 변신했다. 하지만 그것은 종교의 국가적 국경이 해체되고 대신에 교파적 국경이 등장하는 계기였을 뿐, 국경화의 반대 현상은 아니었다.(국가적 통제력이 와해된 교파는 개별교회적 정치를 충분히 통제하지 못함으로써 교단정치와 개별교회정치가 결합된 양상의 교회가 북미유형의 개신교회들의 특징이 된다.)
내년은 종교개혁 5백주년이 되는 해다. 지난 5백년간 개신교회는 교회의 국경화와 종교의 국경화를 통해 존속했고 발전했다. 그런데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최근의 변화는 이러한 근대적 국경화 패러다임으로서의 개신교회는 위기에 직면했다. 그리고 개신교회의 흐름에 휩쓸려 종교의 국경화를 도모했던 주류종교들도 위기를 맞았다. 그것이 바로 탈종교 시대 종교가 겪고 있는 위기의 정체다.
그렇다면 오백주년을 맞아 우리는 새로운 종교개혁의 깃발을 들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이 글의 논지에 따르면 새로운 종교개혁, 혹은 포스트종교개혁의 아젠다는 “‘국경 없는 종교성’ 혹은 ‘약한 국경의 종교성’을 지향하는 종교 되기”라고 할 수 있겠다. □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안식일과 일요일 (0) | 2016.12.10 |
---|---|
가족위기 시대, 국가가 답하라 - 다말의 ‘가족관계증명서’를 다시 보다 (0) | 2016.12.10 |
이웃을 사수하라 - 젠트리피케이션 시대, 신앙 문법 읽기 (0) | 2016.09.02 |
무엇을 추구할 것인가 - 지는 서북주의적 혐오주의 동맹, 뜨는 반혐오주의적 상생동맹 (0) | 2016.07.05 |
퀴어문화축제와 퀴어적 상상력 (4) | 2016.07.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