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16년 10월에 발행된, 신앙인아카데미의 부정기간행물 [맘울림]에 실린 글입니다.
가족위기 시대, 국가가 답하라
다말의 ‘가족관계증명서’를 다시 보다
호적제도가 폐지된 후 가족관계등록제가 도입된 지 벌써 9년째 되어간다. 이것은 ‘누가 가족인가?’라는 사회적 규정을 둘러싼 논쟁의 산물이다. 호주를 중심으로 하는 남성 혈통에 의해 규정되는 대가족적 혈연가족 대신에, 결혼으로 묶인 3대에 한정된 가족만을 가족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무엇보다도 여성주의자들의 헌신적인 투쟁의 산물이다. 동시에 사회에서 실질적인 의미를 갖는 가족 양식이 변화한 것을 반영하는 제도로, 다소 늦었지만, 등장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증명서는 새로운 가족적 공동체를 가족에서 제외시킨다는 점에서 새로운 변화를 가로막는 측면도 있다. 아무튼 가족관계증명서에는 현재의 지배적 체제가 추구하는 사회적 이상이 담겨 있다. 이런 맥락에서 성서의 한 텍스트를 다시 읽어보자.
나는 〈창세기〉 38장을 하나의 가족관계증명서로 읽고자 한다. 이 텍스트의 주인공은 사실상 ‘다말’이기 때문에 이 증명서의 발급자를 다말로 보아도 무관하겠다. 다말의 남편은 에르이고, 시아버지는 유다, 손아래 시형제는 오난과 셀라다. 이 증명서에서 여성은 발급자인 다말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이름이 명기되어 있지 않다. 그러니까 남성 중심 사회임을 의미하겠다.
그런데 다말의 남편 에르가 요절했다. 그 본문을 읽어보자.
유다의 맏아들 에르가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하므로, 주님께서 그를 죽게 하셨다.
― 〈창세기〉 38,7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지만 모종의 ‘악’한 행위 때문에 죽임당했다. 죽을 만큼의 악한 행위라면 필경 어떤 범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그가 죽임당한 것은 하느님의 의한 것이다. 즉 국가가 혹은 공동체가 신의 이름으로 그를 처형했다. 그만큼 그의 범죄는 치명적인 것이었겠다. 이는 그가 사회에서 완전히 매장당한 채 처벌을 당했을 것이라고 상상하게 된다.
한데 문제는 처형당한 에르가 자식이 없이 죽었다는 데 있다. 해서 그의 처형으로 이야기가 끝나지 않고 다른 사단이 이어진다. 에르의 처형 본문에 이어지는 구절을 보자.
유다가 오난에게 말하였다. “너는 형수와 결혼해서, 시동생으로서의 책임을 다해라. 너는 네 형의 이름을 이을 아들을 낳아야 한다.”
― 〈창세기〉 38,8
시아버지는 둘째 아들더러 형수와 잠자리를 해서 형수에게 아이를 출산할 수 있게 하라고 명한다. 신적 처벌로 죽은 이의 자식을 낳아주라는 얘기다.
아들을 낳아주라는 것은 신적 처벌을 받은 이도 그 사회의 상속자라는 뜻이다. 신의 저주를 받아 죽은 자에게 가문의 재산을 상속한다는 것을 오난은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마도 그 사회의 누구도 그랬겠다. 더욱이 그렇게 낳은 자식의 처지는 어떨까? 모두의 멸시를 받고 성장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비의 명을 거스를 수 없었기에 오난은 형수와 성관계를 맺어야 했다. 하지만 정액을 땅바닥에 흘려버려 형수가 임신할 수 없게 하였다.(9절)
한데 이 사회의 신은 그런 행위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아니 심지어 그런 행위를 극형으로 처벌한다. 그렇게 오난도 죽임을 당하였다.
Horace Vernet 〈Judah and Tamar〉(1840)
유다는 걱정되었다. 신의 이름으로 전승된 규칙이니 어쩔 수 없이 오난에게 명을 내렸지만, 오난이 편법을 쓴 것을 그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던 것이겠다. 이러다가 마지막 아들 셀라까지 죽게 될까 걱정되기도 했다. 해서 그는 며느리더러 막내는 아직 어리니 기다리라고 핑계를 대고 친정에 보낸다. 그런데 오랜 세월이 흘렀고 시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도(12절) 시아버지는 며느리를 불러들이지 않았다.
얼마 후 유다는 양떼를 이끌고 며느리의 친정집 가까운 마을을 지나게 되었다. 그는 거기서 마주친 한 매춘여성과 잤다.
얼마 지났을 때다. 이상한 소문이 들렸다. 며느리가 임신했다는 것이다. 유다는 불같이 화를 내면서 종들에게 단정치 못한 며느리를 불에 태워 처형하라고 명을 내린다. 수절하지 않은 여성을 처벌하는 것은 가부장의 권리였던 것이다. 친정으로 돌려보내 자기 집의 일원에서 사실상 배제했음에도 그녀는 여전히 시아버지에게 목숨까지 저당 잡혀 있다. 그런데 충격적이게도 그녀가 밴 아기는 바로 자신의 씨였다.
막장도 이런 막장이 있을까? 유다 집안의 며느리가 발급한 ‘가족관계증명서’는 너무도 엽기적인 정보를 담고 있다. 남편은 처형당할 만큼 심각한 범죄자였고, 그런 집안에 자기 씨를 주지 않으려는 시동생도 처형당했으며, 막내아들이라도 살리려던 시아버지의 꼼수로 친정집에 보낸 며느리가 바로 자신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가족관계증명서에 따르면 사건의 결말은 더욱 놀랍다. 며느리의 행실은, 그 사회의 관습에 따르면, 처형당해 마땅한 일인데, 결과는 무죄였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유다 가문의 재산을 상속받을 권리를 부여받았다. 그 권리를 위해 남편의 형제들이 책임을 져야하고,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시아버지라도 기꺼이 그 의무를 져야 한다는 것이다. 상속 권리를 주장할 집안이, 곧 다말의 남편 에르가 신의 저주를 받았을지라도 말이다.
이 ‘증명서’의 사회적 무대는 유다사회다. 유다는 유다국의 조상이었고, 유다가 자식들을 낳은 곳이 예루살렘 남서쪽으로 30킬로 정도 떨어진 곳이며, 다말의 친정이 있는 곳은 서부 블레셋 족속의 땅과 접경지대에 있는 성읍이다. 그리고 유다와 동침하여 다말이 낳은 쌍둥이 아들 중의 동생은 베레스라는 인물인데, 그는 유다국의 창건자로 알려진 다윗의 조상이며, 〈마태복음〉의 족보에도 예수의 조상으로 나오는 인물이다.
이스라엘 부족동맹시대는 가문간의 평등 이상이 삶 곳곳에 스며들어 있었다. 그런 이상을 반영하는 제도들이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실행되고 있었는데, 그중 혈통이 끊겨 몰락 위기에 처한 집안을 되살리기 위해 시형제들이 형수와 동침해야 한다는 시형제결혼제도를 이야기하는 성서의 문서들로는 〈창세기〉 38장과 〈룻기〉 등이 있다. 이것들은 모두 유다 부족 전승이다.
그런데 그런 부족전통이 유다국 창건설화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언제부터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유다국 역사 문서가 처음 편찬된 요시야 왕 시대에 이 설화는 유다국의 가족에 대한 국가 원리로서 활용되었음이 분명하다. 왜냐면 〈신명기〉는 몰락하는 가족을 보호하는 각종의 법제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법제와 보조를 같이 하는 조상설화가 바로 〈창세기〉 38장이다.
아하스 왕(히스기야 왕의 부친) 시대부터 유다국은 국가다운 국가로 발돋음하고, 지방에 넓은 토지들을 소유한 귀족들이 이 발전국가를 구성하는 주요 동맹세력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이때 국가가 발전한다는 것은 귀족들이 더 넓은 땅을 소유하고 소농들이 더 많이 몰락하여 예속농이 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런데 이후 유다국의 역사는 발전주의자들과 평등주의자들이 치열한 권력투쟁을 벌이며 전개되었다. 아하스의 아들 히스기야와 요시야(히스기야의 손자)는 바로 평등주의자들이 집권하여 구축한 개혁정권의 수장이었다. 그리고 요시야 왕 때에 법전 및 역사 문헌들이 개혁의 일환으로 편찬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창세기〉 38장이 왜 그토록 몰락하는 가문의 보호를 중요하게 여기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당시 귀족들의 착취에 몰락해 가는 소농들을 보호하는 것은 개혁정권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정책이었던 것이다. 해서 오래 전 보존되었던 이런 설화들이 왕국 시조 가문의 역사로 재해석되었던 것이다.
하여 한 집안 안에서 시시콜콜하게 정액을 땅에 흘려보내는 등의 얘기가 신의 저주를 받을 만큼 그 사회의 근간에 관한 얘기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즉 한 가족의 위기를 그 가족의 도덕의 문제이거나 개인의 잘못의 문제로 다뤄지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책임지고 신이 책임지는 문제로 다뤄지는 것이다.
내가 참여하는 교회에서 있었던 한 예배에서, 가족의 위기를 다루는 집단설교가 있었다. 이 예배의 문제의식은 우리 시대 가족이 여러 이유로 위기에 처해 있다는 데서 출발했다. 그 집단설교 중에는 이런 이야기가 오갔다.
사람들은 살아남기 쉼 없이 일해야 하고, 이러한 강도 높은 노동의 과정은 몸과 정신의 건강을 위기에 빠뜨렸다. 오늘날 많은 가족들 내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폭력의 이면에는 바로 이런 사회적 스트레스가 원인이 되고 있다. 또 ‘가족까지도 상품화하라!’는 자기계발론의 주문은 ‘가족주의의 도구화’를 야기시켜 가족도 친밀함의 공간으로 남아 있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이런 문제제기들은 가족의 위기는 가족 구성원 개개인의 성격 문제라거나 잘못된 처신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그것은 사회적이고 국가적인 대책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한데 요즘 유행하는 ‘가족힐링’ 프로그램은 가족 성원들 하나하나의 자기반성과 대화로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이야기한다. 또 교회의 아버지학교나 어머니학교, 결혼예비자학교 등도 개개인의 태도의 문제로 단란한 친밀함의 장소로서의 가족의 꿈을 구상하게 한다. 또 국가도 가족에게 모든 문제를 떠넘김으로써 공공성을 방기하는 정치를 정당화하려 한다.
반면 〈창세기〉 38장에서 드러나는 요시야 정부의 정치는 그 반대다. 가족의 위기는 신이, 그러니까 국가가 책임져야 하는 문제다. 가족의 시시콜콜한 위기까지도 신이, 국가가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여 몰락의 위기에 놓인 가족에게 사회적 복지의 수혜가 돌아갈 수 있도록 국가가 힘써야 한다고 말한다. 심지어 그 위기가 가족 구성원 개인의 범죄와 연관될 때조차 말이다. 범죄조차도 사회적 문제와 무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곧 성서가 얘기하는 재가족화의 기획은 국가의 공공성 전략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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