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필름2.0](2004.4.7)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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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리티가 부재한 영화의 리얼리티,
그 넘치는 폭력성에 대하여
영화 〈패션 오브 크리아스트〉에 대하여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의 첫머리에는 18세기 프랑스에서 국왕 살해범으로 기소된 다미앙에 대한 잔혹한 고문과 처형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불에 달군 쇠집게로 몸 곳곳을 도려내고, 찢겨진 살 속으로 펄펄 끓는 납물을 붓는다. 이어서 말을 이용해 사지를 찢는다. 그리고 아직 꿈틀거리는 몸둥아리들을 불 속에 던져버린다.
기원전 8세기, 아시리아의 티글랏 필레세르 3세의 승전을 기념하는 한 비문의 그림에는 커다란 말뚝에 꿰어 처형된 사람들이 나온다. 거기에 이르기까지 어떤 고문이 가해졌는지를 상세히 알 순 없지만, 다른 문헌들들과 억지로 연결시키면, 눈알을 뽑고 손을 절단하고 불로 지지고, 아내나 딸을 강간하는 소리를 듣게 하고, ..., 온갖 잔인한 고문을 가한 뒤 비로소 처형한다.
수도 없이 많은 이런 사례들 가운데 ‘십자가 처형’이 있다.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가 묘사하듯이 가죽채찍의 끝 부분에 쇠공이 달려 있어 심한 경우 뼈가 으스러지기도 한다. 게다가 채찍 끝에 새가슴뼈를 단 가는 채찍이 또한 이어져 있어, 살점을 마구 할퀴고 튿어낸다. 그리고 자신의 형틀을 매고 형장까지 가는 과정에서도 갖은 고문이 가해진다. 이렇게 죽기까지의 과정을 묘사하는 일은 악마적 상상력을 최대한 동원할수록 사실에 가까워질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에 의하면, 형 집행자들은 마음껏 학대할 수 있는 재량을 가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잔혹한 고문과 처형 장면은 이런 몇 가지 정보를 기초로 한 가학적 상상력의 결과다. ‘십자가’라는 상징물을 한갓 장신구로만 기억하고 있는 현대의 기독교도에게 이런 장면들은 졸도하고 죽기까지 할 만큼 충격적이었다. 한데 영화의 리얼리티는 이것이 전부다.
스토리는 지금까지 흔히 보아온 예수 영화들의 상투성에서 조금도 빗겨가지 못했다. 네 복음서를 적당히 짜깁기한 이야기 전개는 복음서들의 수난 이야기 묘사가 얼마나 서로 다른지를 간과한다. 그 때문에 필요했던 비평학적 연구나 역사적 연구의 고전적 성과물조차도 참조하지 않은 듯하다.
가령, 예수의 수난 배경이 되는 유월절 절기의 예루살렘은 주민의 몇 배나 되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낮에는 성전 뜰에서 북새통을 이루고, 그때마다 뭔가를 도모하던 급진적 저항가들이나 예언자들의 선동으로 치안이 매우 위태로웠다. 해안도시 ‘가이사리아’에 거주하던 총독이 주둔군 거의 전부를 이끌고 일시적으로 예루살렘에 와야 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런데 영화 속의 이 ‘바보’는 그런 곳엘 아내를 대동하고 온다. 또 산헤드린 의원들은 총독이 예수 재판을 헤로데 안티파스에게 떠넘기자 그에게로 예수를 끌고 간다. 갈릴래아 지방 통치자인 그가 이곳에 왔다면 명절 때에 순례차 온 것일 터인데, 희한하게도 예루살렘의 원로원들은 방문객에 불과한 이웃 국가 통치자에게 재판을 청구하러 갔다.
이런 장면은 수도 없이 많다. 결국 ‘잔혹극의 리얼리티’는 역사적 개연성을 상실한 채 과도하게 넘쳐나고 있다. 도대체 영화는 뭘 보여주고 싶어 이런 최소한의 역사적, 문헌학적 고증도 거치지 않은 과도한 폭력을 그토록 ‘사실적’으로 보여주려 애쓰고 있는가?
로마인 역을 맡은 배우는 라틴어로, 유대인 역은 아람어로 대사를 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정작 유대인 예수는 너무나 서양적인 외모의 사람이다. 또 유대인일수록 예수에 적대적이고, 로마의 고위직 관리일수록 예수에게 동정적이다. 이 속에 계급적, 인종적 편견은 없는가?
또 최근 연구에 따르면, 예수의 제자 가운데 막달라 마리아의 중요성에 대한 논의가 적지 않다. 실제로, 예수 사후 신비주의적 예수운동 집단 사이에서 그녀를 예수의 최고의 승계자로 받드는 전통이 있었다. 반면 일찍부터 여성 혐오적인 주류 기독교운동 가운데서 그녀가 원래는 ‘매춘녀’였다는 소문이 퍼졌다. 예수운동에서 막달라 마리아 같은 활동적인 지도자 이미지는 제거되고, ‘어머니’ 이미지가 모범적인 상으로 대체된다. 「마르코복음서」에서 예수 어머니는 예수 수난 과정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 한데 후대의 텍스트들에는 사정이 역전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는 어떤가? 어머니 마리아가 유독 강조된 것 말고도, 여인들은 대체로 고문당하는 예수를 보며 슬퍼하고 있다. 한데 그게 전부다. 예수를 동정하는 이 여인들은, 관객의 시선에서, 도리어 수동적이기만 한, 보호의 대상처럼 보인다.
예수가 죽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영화는 유대의 귀족들, 특히 최고사제인 가야파와 그의 장인이자 증경최고사제인 안나스 등의 기소가 결정적이라고 본다. 빌라도 총독은 이들의 요구에 마지못해 응한 것처럼 묘사된다.
이상한 것은 예수 사후 얼마 되지 않아서 예수의 추종자 중 급진파 지도자인 스테파누스는 유대의 처형방식에 따라 돌에 맞아 죽임당한다. 또 그로부터 한 세대 후인 62년 경 예수의 형제로 알려진 야고보 역시 산헤드린에 의해 같은 방식으로 처형당했다. 산헤드린이 사형의 권리가 있었다는 증거다.
그런데 왜 산헤드린은 예수를 로마 총독에게 기소했을까? 빌라도는 유대인들을 그다지 두려워한 것 같지 않다. 가장 예민한 문제인 로마 황제 형상이 새겨진 화폐를 주조한 장본인 아닌가. 게다가 그는 1,2차 총독령 기간인 주후 6년에서 66년까지 14명의 총독 중 만 10년 동안 재임한 최장수 총독이었다. 그만큼 그는 ‘유능한’ 통치가였다. 한편 당시 사제귀족 최고 계파의 수장인 안나스는 헤로데 가문을 유대 지방에서 축출한 주요 인물이었고, 이후 5대에 걸쳐 최고사제직을 독점해왔다. 그런데 안나스의 사위이자 이 계파의 마지막 최고사제인 가야파가 직위를 그만 둔 때는 흥미롭게도 빌라도가 직위에서 파면당하던 바로 그 해였다. 빌라도와 안나스 가문은 운명을 같이 했다.
그런 시기에 예수는 로마가 정치적 위험분자를 처벌하는 극형인 십자가형에 처해졌고, 거기에 안나스 가문이 유대인을 선동하는 역을 수행했다. 도대체 여기서 로마 총독이 예수 살해자의 혐의를 벗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복음서들이 이 말을 공론화하길 꺼리는 데는 로마 제국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의도가 숨겨져 있다. 이런 사정이니 이 영화의 반유대주의적이라는 혐의는, 의도한 것이든 아니든, 설득력이 있다. 여기에다, 앞서 말한 것처럼, 계급적이고 성적인 편견이 영화의 전면에 배경음처럼 울리고 있다.
이 영화의 지나친 폭력적 묘사의 이유에 관한 앞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영화는 예수와 악마 간의 대립구도 속에 모든 등장인물들을 배치시킨다. 이런 유치한 구도 속에 인종, 성, 계급에 관한 온갖 편견이 끼어들어 있다. 이런 틀 속에서 예수의 수난, 그 맹목적 무저항은 ‘마조히즘’적 성격을 띤다. 반면 저편은 지독한 맹목적 새디스트들이다. 왜 ‘맹목적’인고 하니, 예수가 당한 그 처절한 고문의 이유를 도무지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굳이 말한다면, 예수가 그처럼 처참하게 당함으로써 우리의 죄가 사해졌다는 투의 상투적 대답 정도가 아닐까?
그래서 아마도 예수와 함께 매달려 죽임당한 두 사람은 십자가형의 일반적인 관행인 고문의 흔적이 없게 그려졌는지도 모른다. 잔혹한 고문은 예수만이 당했으며, 그것으로 모든 것은 ‘다 이루었다’는 반리얼리티가 영화를 지배한다.
예수 이후 2천년이 지난 현재에도 처절한 고통 속에 신음조차 못하는 이들이 존재한다. 악마적 가학성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온 세계 곳곳을 두루 돌아다니며, 심지어 우리 내면까지도 지배하고 있다. 결국 이 영화의 리얼리티는 현재의 리얼리티를 가릴 뿐이 아닌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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