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신학의 미소]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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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를 조심하라”
20세기의 한국을 ‘격동의 세기’라고 부르는 것을 과장된 표현이라고 할 이는 아마 없을 거다. 일제 식민지 시대, 1945년 이후의 해방정국, 1950년 한국전쟁, 그리고 그 이후 오늘날까지 계속되는 극렬한 냉전의 시대, 1960년대 초부터 시작된 군부정권의 개발독재 시대, 1980년대와 90년대의 군부 및 민간인 출신 협잡꾼의 시대, 그리고 IMF ‘식민통치’ 시대 등, 큼직큼직하게만 봐도 숨가쁜 격란을 겪은 민족임을 알 수 있다. 대동아공영 대 민족해방, 좌우 이데올로기와 민족주의, 민주와 개발 동, 돌이켜보면 거대한 진리들 간의 쟁투의 시대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이 진리들은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무수한 희생자의 피를 빨아들이는 엄청난 식욕의 흡혈귀였다.
움베르트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은 중세 후기의 거대한 진리들간의 쟁투를 다루고 있는 한 편의 역사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이 소설 속의 진리는 희생자를 찾아 헤매는 흡혈귀적 얼굴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은 내게서 20세기 한국을 성찰하기 위한 하나의 텍스트다.
중세 최대의 도서관을 갖고 있다던 북부 이탈리아의 도미니크회 소속의 (가상) 수도원을 무대로 하여 펼쳐진 《장미의 이름》은 서양 중세 후기 전체사 1를 함축하는 갈등을 한 수도원에서 일어난 연쇄살인사건에 얽힌 이야기 속에 응축시켜 놓고 있다. 요컨대 이 수도원에서 벌어진 일련의 우울한 이야기는 서양 중세 후기의 진리들간의 쟁투의 축약판이라 할 수 있다. 소설의 화자인 아드소 수사는 자신의 청년기(18세)에 겪었던 한 사건을 인생의 종착지에 거의 다 온 노인네(80세)로서 회상하면서 지난 시대의 그 거센 풍파를, 그 풍파의 핵심이던 진리들을 ‘장미’에 비유하고 있다. 2 한창 시절 꽃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던 그 장미로 말이다. 그는 이 모든 이야기를 마치면서 씁쓸하게 마지막 말을 독자에게 건넨다. “지난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없는 이름뿐”(《장미의 이름》 776; 이하 쪽수만 표기함)이라고.
이로써 중세기의 그 모든 갈등은 ‘덧없음의 시간의 바다’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3 그와 함께 그 시절의 서슬 퍼런 진리의 수문장들, 그리고 그 진리의 순교자들도 모두 사라져 갔다. 위대함과 왜소함, 아름다움과 추함, 진리와 거짓, 정통과 이단,..., 이 모든 가치들 또한 깊은 망각의 수렁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지난 시대의 극복이 이렇게 오는 거라면, 새 시대의 도래가 이런 극복과 더불어 비로소 나타나는 거라면, 에코의 말은, 지난 격동의 한 세기를 회고한다고 할 때, 도대체 어떻게 재현하라는 충고일까? 다음 세기를 준비하면서 새 세대에게 새로운 미래가 가치 있게 구성되려면 어찌해야 할지를 가르쳐주어야 할(그것이 가능하다면, 그리고 필요하다면) 우리에게 어떤 지혜를 그는 남겨주는 것일까?
연쇄살인 사건에 대한 탐정소설 형식으로 구성된 이 소설은 7일간의 베네딕토회 특유의 시간전례를 따라 전개되어, 마침내 제7일에는 모든 것이 일언지하에 드러나게 된다. 수도원 원장으로부터 살인사건 수사를 의뢰받은 윌리엄은 점차로 도서관 속에 수수께끼가 들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며, 은밀히 그 속을 헤매면서 진실에 조금씩 접근해 간다. 이렇게 윌리엄 수사의 예리한 분석과 추리에 의해 범인이 도서관 사서인 노수사 호르헤였으며, 도서관 속에 ‘은폐된’ 아르스토텔레스의 《시학》 제2권(이 책은 실제로 현존하지 않은, 이름으로만 존재하는 책이다)인 ‘웃음’에 관한 책을 감추려는 것이 그 살해의 동기였음이 밝혀지게 된다.
이 소설에서 암시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2권이 묘사하는 ‘웃음’은 진리를 포착하게 해주는 계몽극으로서의 코미디의 효과를 가리킨다. 그것은 주로 반전에 의해 예기치 못했던 진리라는 비밀이 들추어짐에 따른 열락(悅樂)을 말한다(734). 한데 호르헤는 그 책의 웃음이 ‘인간으로 하여금 악마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함으로써(738), “인간이 이 땅의 환락경만으로도 천국을 누릴 수 있다는 ... 사상을 고취”시키게 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739). 그런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진리는 호르헤에게서는 감추어져야 하는 것이 된다. 요컨대 그 은폐 자체가 호르헤의 진리가 되는 것이다. 바로 그런 이유로 이 책을 몰래 보는 자는 죽어 마땅한 자며, 호르헤는 자신이 단지 신의 도구로 정당한 살인을 했을 뿐이라고 믿는다(733). 희생자에 대한 가해자의 가학성의 미학은 이렇게 해서 성립된다. 이데올로기의 희생자들을 향한 가해자들의 잔인한 미소가 언제나 그렇듯이.
그런데 실은 이러한 호르헤적 진리관은 그만의 것은 아니다. 실제로는 이 수도원의 도서관 자체가 그러한 존재다. 이 도서관의 사서가 소경인 호르헤 수사였다는 점은 아르헨티나의 맹인 소설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를 떠올리게 한다. 4 그의 단편소설 〈바벨의 도서관〉은 온갖 세상의 지식의 창고인 도서관을 숨막히게 꽉 짜인 질서정연한 거대 공간으로 묘사하고 있다. 5 여기서는 그 질서의 장소를 언어의 혼돈이 비롯된 ‘바벨(론)’으로 묘사하는데, 에코는 이것을 (위 그림과 같은) ‘미궁’으로 재현하고 있다(72). 그것이 미궁이어야 하는 것은 도서관은 진리를 (공개하기 위한 곳이 아니라) 은밀하게 ‘보관’하는 곳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6그곳은 관리자들만의 비밀스러운 곳이며, 외부로부터 차단된 공간인 것이다(70).
안토니 기든스(Anthony Giddens)는 이에 대해 좀더 진지한 사고의 지평을 열어 준다. 그는 권력 생산의 기본 요소는 자원을 저장하는 능력이며, 이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 정보의 저장 능력을 든다. 7 즉 권력과 정보의 저장 능력은 서로 긴밀히 연동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주장 속에는 텍스트를 생산・보전할 뿐 아니라, 그것을 얼마나 공개할지 혹은 얼마나 은폐할지 등을 규정하는, 나아가 정보를 표현하는 형식에 있어서까지 규제하는 장치가 권력에 있어서 필수적임을 시사한다. 이 점에서 도서관은 그러한 정보의 저장소이자 정보 규율의 장소를 상징한다. 요컨대 도서관은 세상의 온갖 정보를 집적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을 분류하고 배치하는 지식의 저장소를 시사한다. 이러한 배치 양식 아래서 사람들은 진리에 대해 생각하고 실천하게 되는 것이다.
《르피가로》(Le Figaro, 1909)에 실린, 제1차 미래주의 선언문의 “도서관 서가에 불을 지르고, 운하의 수로를 돌려 박물관을 홍수로 범람시키자”는 구절 8에는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이 담겨 있다. 도서관(이나 박물관)은 과거를 회상하는 기억의 방향을 체계화함으로써, 다른 방향의 사고를 허용치 않는 통념적 억견으로서의 진리(doxa)를 사람들의 일상적 실천 원리로 자리잡게 하는 것이다. 결국 도서관이 상징하는 진리의 관리방식이 호르헤를 낳았으며, 살인사건의 비극을 야기했다는 것이다.
소설 말미, 풀릴 것 같지 않던 미스테리인 연쇄살인 사건의 진범이 확인되는 순간, 그리고 그 동기가 들추어지는 순간, 호르헤는 도서관에 불을 지르며, 그와 더불어 그 자신 또한 산화하고 만다. 이로써 중세기 최대의 도서관과 그 속의 방대한 지식은 한갓 잿더미로 되어버리고, 중세적 지식의 수호자 호르헤 또한 역사로부터 퇴장해버린다. 이 광경을 씁쓸히 지켜보던 윌리엄 수사는 제자 아드소에게 이렇게 말한다.
가짜 그리스도는 지나친 믿음에서 나올 수도 있고, 하느님이나 진리에 대한 지나친 사랑에서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 아드소, 선지자를 두렵게 여겨라. 그리고 진리를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자를 경계하여라.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는 대체로 많은 사람을 저와 함께 죽게 하거나, 때로는 저보다 먼저, 때로는 저 대신 죽게 하는 법이다(762; 강조는 인용자).
이 말속에는 범상치 않은 비밀들이 담겨 있다. 비밀 하나는 진리관에 관한 것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진리관에 따르면, 진리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며, 따라서 누군가가 ‘이것이 진리요’라고 외쳐야만 비로소 진리가 되는 것이 아니다. 진리란 사람의 지지 여부와는 상관없이 확고부동한 것이며, 그런 점에서 영원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윌리엄 수사는 이런 진리관과는 다른 견해를 피력하고 있지 않은가. 진리는 자기를 위해 죽어줄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진리란 그 순교자들의 목숨을 건 투쟁의 전리품이며, 그런 점에서 진리란 그것을 만들고 운위하는 자들의 실천 과정 자체라는 것이다. 요컨대 진리의 내용이 문제가 아니라, 진리 담지자의 태도가 문제라는 ‘니체적 진리관’과 유사한 태도가 윌리엄 수사의 입을 통해 발설되고 있는 게다. 9
둘째 비밀. 진리란 내용에 의해 담보되는 게 아니라, 그 담지자들의 실천 과정의 소산이라고 본다면, 진리를 위해 목숨을 거는 사람을 조심하라는 말은 곧 진리 자체를 경계하라는 말이리라. 다시 말하면 진리에 대한 ‘부정의 진리관’이 여기서 제시되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사실 이 두 비밀은 결국 하나의 얘기를 나누어서 한 데 불과하다. 진리란 기존의 진리가 이미 굳어버린 사실로서 실천되고 있을 때 등장한다. 다시 말하면, 진리가 그 수호자들의 실천 과정 자체라고 한다면, 기존의 진리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광분하는 진리 수호자들의 통념적 주장(doxa)에 불과하다면, 예언자가 등장하여 이 진리는 거짓이라고 주장하면서 새로운 진리를 주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새로운 진리는 옛 진리와는 전혀 새로운 내용의 진리라기보다는 옛 진리 운위자들의 통념적 주장에 대한 저항에서 비롯된 ‘부정의 실천’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리의 수호자들,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자들은 결국 진리를 거짓 진리로서 만드는 장본인이 되고 만다. 오히려 순교자들은 진리를 죽이기 위해 죽음을 선택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쯤에서 성서에 묘사된바 바울의 말을 인용해 보자. 그가 여기서 진리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기에 말이다.
그러나 때가 이르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분신을(원문은 ‘아들을’) 보내시어 여자의 몸에서 나게 하시고 율법의 지배를 받게 하셨습니다. 이는 율법의 지배를 받고 사는 사람을 해방하셔서 우리에게 당신의 자식(원문은 “아들들”)이 되는 자격을 얻게 하셨습니다.
―〈갈라디아서〉 4,4~5
이 텍스트에서 보듯이 바울이 말하고 있는 진리란, 단적으로 표현하면,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자라는 것이다. 율법의 지배를 받고 사는 우리에게 ‘당신의 자녀가 되게 하는 자격을 얻게 하셨다’라는 것이다. 한데, 바울에게서 정작 중요한 것은 이 주장 자체가 아니라(그리스도가 구원자라는 점은 바울과 그 서신의 수신자들 모두의 신념 속에서 공지의 사실이요 따라서 전제사항일 뿐이다), 이 말 바로 앞의 구절임을 유념하자. 곧 ‘하느님이 당신의 분신을 여자의 몸에서 나게 하셔서 스스로 율법 아래 놓이게 했다’는 것.
여기서 ‘율법’이란 명문으로 된 법률이 아니다. 이스라엘에게서 율법은 그네들의 전통, 그네들의 삶의 방식에 관한 진리다. 바울은 이것을 보다 확장하여 사람의 ‘양심’을 가리키는 데 사용하고 있다. 요컨대 이스라엘의 진리라고 하든 (바울처럼) 인간 일반의 진리하고 하든, 율법이란 그렇게 살면 의로워진다는 내면의 소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그런 내면의 소리에 의해 참과 거짓을 나누고, 의로움과 부정함을 나누는 진리의 실천이 포함된다. 즉 율법은 의로워지는 어떤 내용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그러한 내용에 준하는 삶만이 정당하며, 그러므로 다른 것은 징벌받아 마땅하다는 배제주의적 실천을 내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진리란 무엇일까? 성서는 율법과는 그 내용이 다른 것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니라 그로부터의 ‘해방’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말기를 바란다. 즉 기존의 것과는 다른 ‘내용’의 어떤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기존의 진리에 의해, 그 독선적 주장에 의해 눌리는 자들을 해방시키는 ‘일’/실천이 그리스도의 진리라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런 점에서 옛 진리를 부정하는 실천을 행한 선구자인 셈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진리를 (존속시키기) 위한 죽음이 아니라 진리의 부정을 위한 죽음을 뜻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다른 율법을, 어떤 ‘내용’의 대안적 진리들을 주장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흔히 ‘믿음’을 율법과는 다른 내용을 가진 무엇, 마치 또 하나의 율법으로 얘기하곤 한다. 그러나 성서에서 믿음은 율법에 대응하는 다른 내용의 진리가 아니라, 어떻게 살면 의로워진다는 내용을 알려주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가 그런 진리를 부정하면서 죽임당했다는 사건을 공지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의 내용은 비워진 것, 부재하는 것이다. 믿음은 진리를 존속시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자가 아니라, 진리를 죽이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이의 실천을 잊지 말라는 종교적 기억의 장치인 것이다.
그렇다면 율법의 내용과 그리스도의 진리는 어떤 관계에 있을까? 바울은, 위에서 인용한 바, 이에 대해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하느님 자신이 여자의 몸에서 태어남으로써 스스로가 율법에 매이는 존재가 되었다고 말이다. 이것은 율법을 안 지킬 수도 있다는 걸 말하는 게 아니다. 어쩔 수 없이 율법이라는 양심의 장치 속에 구속되어 사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본문은 그분이 ‘여자에게서 나셨다’(γενομενον εκ γυναικος)고 되어 있다. 여기서 ‘여자’는 사실 ‘여자의 태’라고 하는 게 보다 정확한 표현일 거다. ‘태’('ιστερα)라는 뜻의 그리스어는 ‘히스테리’의 어원이 되는 단어다. 즉 갈등과 분노와 발광적 반응을 함축하고 있는 단어다. 그런 세상 속으로 신이 들어왔다는 것이다. 신 자신이 그런 속성을 가진 세상의 일원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민족주의적 혹은 계급적 갈등의 한 가운데서 이데올로기적 투쟁에 개입한 사람으로서 당신은 태어났고, 그러한 투쟁 속에서 격동의 삶을 살다 간 것이다. 이 속에서 당신은 옳고 그름의 준거인 율법 아래 살았던 존재다.
그러나 예수의 위대한 점은 그 율법을 본인 스스로 넘어서고자 하였다는 것이다. 율법을 위해서, 이데올로기를 위해서, 진리를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자가 되기보다는, 율법조차도 해체하기 위해 죽은 이가 되고자 한 것이다.
‘지난날의 장미들’을 위해 죽어간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우리는 알고 있다. 그들은 때로 우리의 혈족이기도 하고, 때로 우리가 존경했던 사람들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진리에 따라서 그들을 우리의 새로운 진리의 가족의 일원으로, 어버이로 누이로 자매로 형제로 받아들인다. 또 진리를 공유하지 않는 누군가를 적으로 여긴다. 이것이 지난 세기를, 특히 해방의 시각에서 기억하고 재현해보려는 우리의 일반적인 기억술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또한, 가령 한국전쟁을 거친 많은 이들의 전쟁에 대한 기억술이 전쟁을 겪지 않은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폭력이 되었는지를 알고 있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형성된 진리가 남과 북의 무수한 사람에게 얼마나 폭력을 가했으며 얼마나 무시무시한 권력을 휘둘러 왔는지를 알고 있다. 또한 타종교 혹은 세속적 일상의 관행에 대해 배타주의적인 우리의 신앙이 얼마나 냉담한 종교심을 우리 자신에게 부추겨왔는지를 너무 잘 알고 있다.
이제 우리는 반독재니 민주주의니 하는 지난날의 장미를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하며 살아간다. 어쩌면 우리의 진리는 지난날의 장미, 이름만 남은 장미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는 진리를 위해 죽을 각오를 하며 사는 자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의 진리를 죽일 때가 되었다. 그것은 우리가 적대하는 다른 진리를 포용하자는 게 아니다. 진리를 살리려는 자들의 일체의 억견에 대항하자는 것이다. 우리 자신에게까지도 말이다. 우리의 진리는 부정의 진리다. 죽기 위해 존재하는 진리다. 우리의 이데올로기를 죽일 수도 있고, 우리의 신을 죽일 수도 있고, 우리의 구세주/그리스도를 죽일 수도 있어야 한다. 그리고 성서와 교회를 죽일 수도 있어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적의 진리를 죽이려는 것처럼. 그리하여 진리를 위해 죽을 각오를 하며 사는 게 아니라, 진리를 부정하기 위해 죽을 각오를 하는 신앙적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
- 이 소설의 연대기적 배경은 1327년 11월 말이다. 그 시기의 의미에 관하여는 움베르트 에코, 《‘장미의 이름’ 창작 노트》(열린책들, 1995), 45~46(이하 《창작 노트》) 참조. [본문으로]
- 《창작 노트》, 11~20에서, 에코는 ‘장미’ 또는 ‘장미의 이름’에서 독자들의 자유로운 상상력을 부추기고자 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앞서 말했듯이 이 책을 보는 나의 관점은 20세기 한국의 진리들간의 쟁투를 성찰하기 위한 텍스트에 관한 것으로 한정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장미’의 의미를 이렇게 읽고자 하는 것이다. [본문으로]
- 이 소설의 형식상의 갈등은 교황 요한 22세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루드비히 간의 중세기 유렵의 패권을 둘러싼 정치적 분쟁과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그 분쟁의 명분은 프란치스코회 수사들에 의해 야기된 청빈 문제였다. 이 분쟁의 조정지로 선택된 곳이 소설의 무대인 베네딕토회 수도원이며, 황제편의 밀사로 파견된 자가 윌리엄 수사인 것이다. 한데, 이것은 단지 갈등의 한 배경일 뿐이다. 그 속에는 무수한 진리들을 둘러싼 갈등이 뒤섞여 있으며, 또 서로 얽혀 있다. [본문으로]
- 엄청난 백과사전적 지식의 소유자인 보르헤스도 맹인으로서, 실제로 아르헨티나 국립 도서관장을 역임했으며, 나아가 평생을 도서관 속에 묻혀 살았던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인물이다. [본문으로]
- 보르헤스, 《픽션들. 보르헤스 전집2》(민음사, 1997). [본문으로]
- 성 염, 〈움베르트 에코의 ‘장미의 이름으로': 매조키즘의 희열〉(http://www.sogang.ac.kr/~donbosco/) 참조. [본문으로]
- Giddens, 《사적 유물론의 현대적 비판》(나남, 1991) 참조. [본문으로]
- 김욱동,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현암사, 1997), 14쪽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 서영채의 흥미로운 논문에 의하면, 중세의 스콜라 신학/철학에 대한 세 유형의 사유를, 《장미의 이름》에서 중세와 근대, 그리고 ‘새로운 중세’(에코의 표현에 따르면)로서의 포스트근대를 아우르는 세 가지 ‘장미’로서 계보학적으로 제시한다. 즉 루터의 장미와 헤겔의 장미, 그리고 니체의 장미가 그것이다. 여기서 서영채에 의하면 윌리엄 수사의 사유 방식은 헤겔의 장미에 비유할 수 있다고 본다. 나는 그의 이러한 유형화가 매우 탁월한 분석의 결과라는 데 이견이 없지만, 인용한 텍스트의 윌리엄의 말에는 니체적 진리관이 은연중 깔려 있다고 보는 것이다. 서영채, 〈이성중심주의와 장미―에코의 ‘장미의 이름’ 읽기〉, 《소설의 운명. 서영채 평론집》(문학동네, 1996) 참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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