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백교회 1997.01.12자 하늘뜻 나누기 원고를 수정, 보완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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뻐꾸기와 멧새, 공존의 그늘
뻐꾸기는 멧새의 둥지에 알을 낳고는 ... 교활하게도 멧새가 이미 까놓은 알 중 하나를 둥지 밖으로 떨어뜨리고는 날아가 버렸다. 돌아온 멧새는 잠깐의 외출 중에 엄청난 변화가 있었던 사실을 모른 채 열심히 알을 품었다. 뻐꾸기 알이 먼저 부화되었다. 뻐꾸기 새끼는 부화되자마자 이미 어미 멧새보다도 몸집이 컸다. 어미 멧새는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그 큰놈을 먹여 살리자니 열심히 밥벌이를 해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 아직 털 한 오라기 안 난, 눈도 못 뜬 상태의, 그 주름 투성이의 징그런 뻐꾸기 새끼가 멧새 알을 둥지 밖으로 밀어내려고 쉬지 않고 뒷발질을 해댔다. 몇 시간 만에 하나를 떨어뜨리는 데 성공하고, 한참 후 다른 하나도 떨어뜨렸다. 그러나 나머지 하나는 밀어내지 못한 채 부화가 돼버렸다. 오호라! 갓 태어난 멧새 새끼는 이유도 모른 채, 태어나자마자 엄청난 시련을 겪어야 했다. 밀어내려는 뻐꾸기 새끼의 집요한 노력과 살려는 멧새 새끼의 안간힘은 한 편의 드라마였다. 혼신의 투쟁 끝에, 승리는 뻐꾸기 새끼의 것이었다.
― 조한경, 〈비평 기계, 질 들뢰즈〉에서 인용
한 불문학자가 동물 생태에 관한 TV 프로를 옮겨놓은 것이다. 마치 인간 사회의 단면을 풍자하는 듯이 보인다. 지나친 단순화이지만, 우리 세상에는 이렇게 두 부류의 사람, 두 부류의 사회, 그리고 두 부류의 국가가 공존하고 있는 것 같다. 말이 공존이지, 실은 기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모습이다. 뻐꾸기 알은 멧새의 둥지에서 멧새의 온기를 받으며 부화되고, 멧새의 피땀 어린 노동으로 성장한다. 이처럼 우리 인간 세상도 타인의 노동의 대가를 빼앗아 먹는 존재와 그를 위해 노동하는 ‘군상’이 살고 있다.
흔히 ‘기생’이라 함은 강자에 빌붙은 약자를 연상하게 된다. 그런데 뻐꾸기와 멧새의 관계는 반대로 강자가 약자에 빌붙어 있다. 어미 멧새는 자기보다 더 커다란 갓 부화된 뻐꾸기를, 그 식성을 충족시키느라 죽을 지경이다. 우리 상식과는 다른 모습의 기생 생태인 듯하다. 그런데 우리가 (머릿속의 상상에서 벗어나) 세상으로 눈을 돌리면 이것이 얼마나 우리 모습에 대한 적나라한 시사인지를 금새 깨달을 수 있다. 강자가 약자의 땀과 피를 빨아먹으며 자신을 살찌우는 것은 마치 역사의 자연법칙인 것처럼 일상적으로 경험되어 왔던 모습이 아닌가. 성서에도 이러한 현실에 관한 비평이 도처에서 발견된다. 가령, 왕실 예언자인 나단은 자신의 주군主君인 다윗이 부하 장수(우리야)의 아내(바쎄바)를 빼앗으려고 음모를 꾸며 그를 죽게 한 일에 대하여 주군을 비판할 때, 강자가 약자에게 기생하는 일상의 불합리함을 지적함으로써 왕에게 호소하고 있다(〈사무엘기하〉 12장). 즉 그는 부자가 자신의 손님을 접대하는 데 이웃에 사는 가난한 자의 생명줄인 가축을 잡았다는, 아마도 당시 흔히 일어나곤 했던 부당한 상황을, 다윗의 소행에 유비시키는 비유로 주군 다윗에게 고언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기생 방식은 국가 간에도 예외가 아니다. 약소국이 강대국에게 바쳐야 하는 조공외교는 바로 이러한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심화되고 있는 빈곤화의 배후에는 무자비한 대식가인 초국적 기업들이 있으며, 이들 지구적 자본 세력은 대다수가 미국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미국은 마치 이러한 기업들의 배후 세력인 양, 이들을 위한 국제 질서를 구축하는 중심축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고, 이러한 지구적 권력 네트워크는 ‘21세기판 제국’의 실체를 이루고 있다. 즉 조공외교에 의존했던 전근대적 제국과는 달리 지구화된 세계에서 새로운 방식의 기생관계가 21세기형 제국에 의해 구축되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강자임에도 뻐꾸기의 기생 방식은, 이 세상 착취자의 근성과 너무나 유사하다. 본능적으로 새끼 뻐꾸기는 가상의 경쟁자를 제거한다. 어떤 위해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설사 새로 태어난 멧새와 공정한 먹이 경쟁을 하더라도 자신이 유리할 것이 뻔한 데도 뻐꾸기는 그것마저도 허용할 수 없다는 자세다. 남의 밥상이라도 그는 독차지해야만 만족하는 그런 대식가적 욕망의 소유자인 것이다. 더구나 뻐꾸기의 생리엔 자신과 한 둥우리의 멧새들이, 서로 공생해야할 사이인데도, 한갓 경쟁자로만 인식되었던 것이다. ‘날아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다’는 말처럼, 뻐꾸기는 지극히 폭력적으로 자신의 욕망 충족을 위해서 멧새 가족의 삶을 파괴한다.
그런데 더욱 불행한 것은 멧새는 이 난폭자를 자신의 새끼로 오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둥지에서 알을 깐 뻐꾸기의 농간을 모른 채, 그는 열심히 최선을 다해 노동하고 있다. 마치 이 노동의 대가가 자신과 가족에게 돌아오리라는 생각으로 말이다. 갖은 위험이 도사리는 세상에서 가족을 위해 온 힘 다해 일하면 그것으로 행복을 얻을 줄 알았다. 그러나 결과는 파멸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런 세상을 ‘뻐꾸기와 멧새의 기생 관계’라고 하는 대신 ‘공존’이라는 표현을 사용했고, 그것에 ‘그늘’이라는 말을 첨부하여 글의 제목으로 삼았던 것이다. 나는 이 글에서 ‘뻐꾸기의 기생’이, ‘그 난폭한 기생의 생태’가 ‘공존’처럼 보이게 하는 세상 질서에 주목해 본다. 이 세계 질서의 핵에는 말할 것도 없이 미국이 있다. 예수 시대 ‘팍스 로마나’가 지중해 지역의 국제 질서의 축이었고, 그것을 통해 강자가 약자에 기생하는 국제관계, 나아가 지중해 주민들 사이에서 그러한 일상이 구성됐던 것처럼, 오늘날에는 이러한 강자와 약자 사이의 불공정한 공존의 그늘을 지탱하는 세계 원리는 미국 중심의 제국 이데올로기인 ‘팍스 아메리카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여기서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의 소설 《심판》에 들어있는, 한 유명한 우화적 텍스트를 떠올린다. 소설 전체의 주제를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이 우화는 ‘법’ 안으로 들어가려는 한 시골 사람과, 그것을 막는 문지기의 얘기다. 시골 사람은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다’는 법의 안으로 들어가려 문지기와 실랑이하면서, 기다리고 연구하며 평생을 보낸다. 그러나 끝내 법은 그에게 문을 개방하지 않는다. 이 시골사람은 죽을 때까지도 알아차리지 못했으나 실은 그것은 그에게 주어진 ‘운명’이었던 것이다.
흔히 법치국가는 독재국가나 전제군주국가와는 대립된다고 한다. 이유인 즉, 모든 이에게 항상 문을 열어 놓는, 기회 균등의 사회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공평한 기회를 보장하는 필요조건이 법이라고 한다. 나아가 호혜성을 원칙으로 하는 법에는 모든 이가 존중해야 하는 최소한의 기본적 의무가 상징적으로 표상되어 있으므로, 법이 존중되는 사회일수록 타인에 대한 약탈이라는 야만성이 제거된 양상을 담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한, 서양 근대성에 대한 선망은 우리 내면에 역사주의적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언젠가는 도달하고 말리라는 발전주의적 역사 인식 말이다.
그런데 카프카는 시골남자에게 절대로 열리지 않는 ‘법의 문’을 얘기한다. 이것이 한갓 사변적 지식인의 무망한 불평이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내 눈에는 우리 세상이 카프카가 겨냥한 과녁과 전혀 무관하다는 확신을 가질 수가 없다. 평생 시골남자를 속이며 그 ‘정의로운 지엄함’을 주장하는 법, 그것이 우리를 옭아매고 있고, 우리 자신의 둥지에서 우리의 삶을 파멸시키고 있는 권력의 생존 양식의 한 단면처럼 보인다.
〈마르코복음〉 15,42~47과 이에 바로 이어지는 16,1~4에는 예수가 죽임 당한 이후의 연관된 두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다. 앞의 것은 무덤 제공자가 나타나 예수의 시신을 안장하는 이야기며, 나중 것은 시신에 향료를 바르기 위해 여자들이 그 무덤으로 향하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 둘은 예수 부활사건의 결정적인 배경이 되고 있다.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이 용기를 내어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내어달라고 청하였다. ... 요셉은 시체를 내려다가 미리 사 가지고 온 고운 베로 싸서 바위를 파서 만든 무덤에 모신 다음 큰돌을 굴려 무덤 입구를 막아 놓았다.
― 〈마르코복음〉 15,42~47
안식일이 지나자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무덤에 가서 예수의 몸에 발라 드리려고 향료를 샀다. 그리고 안식일 다음날 이른 아침해가 뜨자 그들은 무덤으로 가면서 “그 무덤 입구를 막은 돌을 굴려 내 줄 사람이 있을까요?”하고 말을 주고받았다. 가서 보니 그렇게도 커다란 돌이 이미 굴러져 있었다.
― 〈마르코복음〉 16,1~4
무덤 제공자는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이다. 그는 지체 높은 귀족이었으나, 하느님 나라를 대망하는 사람이었다고 마르코는 전한다(15,43). 이것은 다른 귀족과는 달리, 현세의 권력을 추구하기보다는 이 세상을 개탄하고, 세상의 질서가 무너지는 날을 기다렸던 사람이라는 대중적 평판을 시사한다. 그는 ‘두려움’을 무릅쓰고 총독 빌라도에게 간청해서 ‘의인’ 예수를 자신을 위해 만든 무덤에 안장한다. 일반적 관행은 처형자를 들판에 내던져 버림으로써 야수들의 밥이 되게 하는 것이었다. 그에게 최대한의 모욕을 주자는 것이다. 그래서 그곳이 골고타, 곧 ‘해골 골짜기’였다. 이것은 동시에 사람들에게 시신에 대한 불손함을 내면화시키는 기재이기도 했다. 그러니 아무리 지체 높은 양반이라 해도, 총독에게 국사범의 시신을 안장하겠다는, 그것도 자신을 위해 잘 마련해둔 훌륭한 무덤 속에 안치하겠다는 청탁은 위험천만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때 그의 ‘두려움’은 그의 권력이 빌라도 앞에서 얼마나 왜소한 것인지를 시사한다.
큰 돌이 무덤 입구를 차단하고 있다. 〈마태오복음〉에 의하면, 그것은 예수의 추종자들이 시신을 탈취해갈 것을 막으려 했던 빌라도의 용의주도한 예방조치였다고 한다(28,64). 정권에 비판을 가하다 죽은 의인의 시신에 반정부세력이 접근하는 것을 막으려는 공권력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그것은 뻐꾸기 같은 권력의 기생적 존재 양식을 은폐하기 위함이며, 그것을 위해 차단해 놓은 은폐막이 뚫리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동굴 입구에는 병사들도 지키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곳을 향해 여인들이 간다. 남자들도 여간해선 굴리기 힘든 커다란 바위가 가로놓여 있으니, 그 방벽을 뚫고 예수에게로 접근하기에는 이들 여자들은 너무나 나약한 존재들이다. 마치 카프카의 법의 문 앞에 있는 시골사람처럼, 무장해제된, 무력한 존재들인 것이다.
비록 인용된 〈마르코복음〉을 포함해서 다른 모든 복음서들에서는 그녀들의 행동의 위험천만한 정황이 거의 드러나고 있지 않지만, 병사들이 지키고 있는 살벌한 그 곳을 향해 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행동임에 분명하다. 그것이 시신을 향한 예우를 표현하려는 것이든 아니든 관계없다. 권력의 무자비한 폭력이 난무하는 공간 한 가운데서, 그들의 하수인들이 칼날을 번뜩이며 지키는 그곳으로 간다는 건, 충분히 있을지도 모르는 극단적 봉변을 감수할 각오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필시 이 여인들이 걱정과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으리라는 추정은 그리 무리한 것이 아니다.
여기서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의 ‘두려움’과 여인들의 ‘두려움’이 중첩된다. ‘큰돌의 막아섬’과 ‘여인들’, 그것은 이 차단막이 확고한, 숙명과도 같은 장벽인 것처럼 느끼게 한다. 카프카의 시골사람처럼 평생 모르고 있었다면 할 수 없지만, 알고서는 결코 가려 하지 않는, 차라리 ‘그냥 사는 거야’라고 자위하며 자포자기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오히려 편한 것처럼 보이는 상황이다.
그러나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이 그랬던 것처럼, 그녀들은 철벽과도 같은 방어망을 향해 나아간다. 두려움을 안고서. 카프카의 시골 사람이 평생을 기다림으로 일관했던 것과는 달리, 기다림만으로 법의 문이 열리리라고, 그리하여 스스로의 믿음에 의해 속았던 것과는 달리, 그녀들은 숙명을 넘어서, 두려움을 넘어서 그 장벽을 향해 나아간다. 과거처럼 뻐꾸기의 약탈적 기생을 순응하며 용인했던 그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었기 때문이리라. 빼앗고 약탈함으로써만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권력자의 법칙에 더 이상 속아넘어가서 살 수는 없었기 때문이리라.
성서는 그녀들이 무덤에 당도했을 때, 장벽이 열려 있었다고 한다. 예수에게로 가는 길을 막아서는, 필경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그 두려움의 대상은 이미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순간 「마르코복음」은 예수의 부활을 이야기한다. 바로 이것이 그들에게는 진정한 부활이요 복음이었던 것이다.
오늘날, 뻐꾸기의 공존 논리의 그늘을 꿰뚫어보는 이들이 있다. 권력은 이런 이들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려 한다. 그럴 가능성만 보여도, 권력은 그들을 제거하려 한다. 서양의 근대성은 그러한 제거의 과정이 더욱 은폐된 양상으로 전개되게 할 뿐이다. 근대가 첨예화된 양상인 지구화는, 그 21세기형 제국의 이데올로기인 ‘팍스 아메리카나’가 구축하고 있는 세계는 이 은폐의 장치를 점차 전 지구적으로 확대․심화하고 있다. 여전히 뻐꾸기적인 약탈은 예외 없이 계속된다. 더욱이 ‘기생’이나 ‘약탈’이 아니라 ‘공존’이라고 할 만큼, 교묘하게 수행되는 사회적 장치가 고도화된 세상이 바로 근대화의 이름으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럼에도, 아니 그럴수록 굴복하지 않는, ‘두려움’을 무릅쓰고 계속되는 오늘의 ‘아리마태아 요셉’, 오늘의 ‘막달라 마리아(들)’의 행진, 우리는 바로 여기에서 예수 부활사건을 체험하게 되고, 복음의 소식을 접하게 된다. 그런데 왜 교회는 아리마태아 요셉, 막달라 마리아(들)이 아닌가? 아니 오히려 뻐꾸기를 옹호하고 나아가 뻐꾸기 자신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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