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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쉬볼렛, ‘악의 평범성’에 관한 하나의 성서적 전거

한백교회 2005.3.13자 하늘뜻나누기 원고를 수정, 보완하여 [신학비평](2005 봄)에 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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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볼렛

악의 평범성에 관한 하나의 성서적 전거

 

 

길르앗 병사들은 강을 건너려는 사람에게 쉬볼렛을 발음하게 했다.

누가 시볼렛이라고 하면 병사들은 그를 요르단 강 나루터에서 쳐죽였다.

이렇게 하여 그때 죽은 에프라임 사람의 수는 사만 이천이나 되었다.

사사기 12,5~6

 

 

요르단 강과 그 지류인 얍복 강이 만나는 여울목에 살기등등한 길르앗 병사들이 지키고 있다. 혹 한 명이라도 에프라임 족속 패잔병들이 살아 돌아갈까 하여 그들의 경비는 철통같다. 강을 건너려다 붙잡힌 사람들은 공포에 질린 채 길르앗 병사들에게 심문을 받는다. “‘쉬볼렛이라고 말해봐라.” ‘곡식 이삭을 뜻하기도 하고, ‘빠르게 흐르는 물결을 가리키기도 하는 이 단어를 에프라임 사람들은 시볼렛이라고 발음한다. 그들은 사력을 다해 길르앗 식으로 말해보지만, 태어나면서부터 익힌 몸에 밴 발성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해 어설픈 발음이 튀어나온다. 그리고 그것은 죽음을 뜻했다. 강물을 피로 물들인 이 살육전은 길르앗으로 쳐들어온 에프라임 병사들을 거의 전멸시키다시피 하고서야 끝이 난다.

전사자가 42천 명에 달했다는 판관기(12,6)의 보도는 터무니없다. 현대의 고고학자들에 의하면 이스라엘이 서부 산간지대에 정착할 초기 인구를 다 합쳐도 45천 명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성서 연구자들이 흔히 주장하는 것처럼 이 에프라임-길르앗 전쟁이 판관 시대 말기라고 해도, 불과 2백 년도 채 못 되는 시기에 그 수가 그렇게 엄청나게 늘어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자급자족에 의존하던 이들의 생활양식에서 식량 생산 능력이 최소한 열 배는 향상되어야 가능한 일일 테니 말이다. 하여,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억지로 엿본다면 아마도 에프라임 전 족속을 다 몰살하고도 남는 사람들이 죽어갔다는 뜻이 아닐까. 그만큼 이 전투는 처절한 형제 족속 간의 동족상잔으로 사람들에게 기억됐고, 그 고통스런 기억의 한 가운데에 쉬볼렛/시볼렛이라는 생뚱맞은 단어가 휘말려들어 있다.

위에서 보았듯이 이 처참한 전쟁의 기억에 쉬볼렛/시볼렛이라는 말의 뜻은 아무 관계도 없다. 이 단어엔 죽음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 그런데 역사 속의 한 사건은 당사자들이 기억할 수 있는 한 가장 처참한 살육의 악취를 풍기게 해버렸다. 단지 관습상의 차이에 불과했을 발성의 차이가 증오와 한이, 그리고 복수가 넘쳐나는 가장 흉물스런 단어로서 자자손손 대물림되는 기호가 된 것이다.

후대의 역사에서 에프라임도 길르앗도 요르단 강 하구 동서 지역의 주인공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다. 그런 탓에 에프라임과 길르앗 사람들 사이에서 대물림되었을 법한 이 원한의 기억이 우리에게 보존되어 있지 못하다. 그 증오가 어떻게 표출되었으며 두고두고 사람들을 얼마나 고통스럽게 했을지 우리는 알 길이 없다. 혹 어떤 화해의 사건이 쉬볼렛/시볼렛의 비극을 가로질렀을 수도 있고, 종족적 정체성이 해체되고 새로운 정치 단위로 사람들이 자신의 귀속의식을 갖게 된 이후에도 다른 방식으로 변형되어 남아 여전히 그들을 반목하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몽고족의 침입에서 시작된 세르비아와 보스니아 두 족속간의 해묵은 갈등이 유고 연방에 의해 최소한 공식적으로는 해소되고 평화스럽게 살아가는 듯 했지만, 연방이 해체된 이후, 알다시피, 처절한 살육전이 벌어지지 않았는가. 천 년이나 지난 뒤에 말이다. 그 오래된 증오가 긴 세월의 부침 속에서도 삭아들지 않고 지속된 것은 교회를 통해 분노와 증오의 어휘들이, 그네들의 쉬볼렛/시볼렛에 얽힌 기억들이 생생하게 보존되어 왔던 탓이다. 그러니 어쩌면 에프라임과 길르앗 사이의 이 참혹한 사건도, 비록 에프라임이나 길르앗의 종족적 정체성이 사라진 뒤에도, 어떤 형태로든 대물림되어 기억되었을 법하지 않을까. 42천 이라는 숫자는 그 불길한 기억 가능성의 높은 강도를 시사하는 정보일 수도 있다.

참극을 낳은 수많은 다른 역사들을 통해 우리가 추론할 수 있는 것은, 한 비극적 사건은 그 사건의 직접적인 이해당사자가 완전히 사라진 이후에도 오랫동안 비극의 잔영을 남긴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더욱 증폭되고 더욱 폭력적으로 서로를 증오하고 복수하게 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지난 과거의 극복은 너무나 힘들고 긴 인고의 여정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한데 여기서 우리는 그 극복의 역사를 이야기할 수 없다. 그것에 대해 아무런 정보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그 사건 배후의 역사를 통해 발생의 근저를, , 무엇이, 어떤 행위들이 그 비극의 원인이 되었는지를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성서의 역사가 판관(사사)들의 시대라고 일컫던 때다. 이스라엘에 왕이 없던 시대다. 그래서 혹자는 야훼신앙의 위대한 정신의 제도화라고 규정짓기도 한 시대다. 평등 이상으로 넘쳐나는 사회, 남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억제되는 사회, 고통을 겪는 자들에 대한 보호와 복권(復權)의 정신이 고무되는 사회라고. 이와 같이 왕국 시대 못지않게, 혹은 더욱 잘 짜인사회처럼 이 시대를 보려는 견해는 그리 타당하지는 않지만, 최소한 불평등의 제도화가 덜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왕국 시대보다는 좀 더 평등한 사회라고 보는 것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견해와 그리 멀지 않다.

한데 이 전쟁 배후에는 그러한 사회의 이상과 현실 간의 불행한, 하지만 필연적인 동거가 가로놓여 있다. 사실 지배적인 이상은 그 사회를 조직하는 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이상에 위배되는 현실 또한 그 이상이 더욱 지배적 가치로서 통용되게 하는 요소가 된다. ‘위악성이라는 것은 그것이 위악적이라고 보는 이들에게 그들이 공유하는 의 가치를 더욱 빛나게 하기 때문이다. 이때 이상과 동거하는 불미한 현실은 그리 추악한 것이 아니다. 평범한 것이고 누구에게나 가능한 것이다. 다만 그것이 추하다고 여겨지는 점에서 다른 보통의 행위들과 다를 뿐이다. 반면 평범함을 넘어선 악, 이른바 악의 축인 악은 동거의 대상이 아니라 제거의 대상이다.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길르앗의 영웅 입다의 등장 배경에는 그 사회 속에, 그들의 이상과 동거하는 위악성이 도처에서 엿보인다.

판관기(사사기) 11,1에 의하면 그는 길르앗이라는 남자가 매춘녀에게서 낳은 자식이라고 한다. 길르앗 족속의 한 남자 이름이 길르앗이라는 건 좀 어색하다. 아마도 이 길르앗은 사람의 이름이라기보다는 길르앗의 한 남자를 잘못 표기한 것 같다. 열두 지파 명단에서도 볼 수 있듯이 길르앗 족속은 이스라엘의 기억에서 일찍이 사라졌으니, 시대를 넘어 기억되는 과정에서 이러한 혼동이 일어난 것이겠다. 아무튼 이 남자의 본처 자식들은 아비가 죽자 창녀의 자식이 아비의 재산을 상속받을 수 없게 하려고 그를 집에서 쫓아낸다. ()을 팔아 살아가야 했던 여자, 그리고 그를 거둔 아비의 집에서 천덕꾸러기로 자라났고 끝내 추방당한 자식. 평등 이상을 추구한다던 사회의 위선은 여자와 그녀의 자식에게 던져진 고통의 발원지다. 물론 그 시대에도 또 다른 입다들’, 추방당한 천한 태생의 자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역사의 비극적 사태의 주인공 입다는 그 중의 단지 한 사람이다.

쫓겨난 입다가 정착한 곳은 북쪽의 이라는 고을이었다. 그 지명을 알아낼 길은 없으나, 아마도 척박한 버림받은땅이었을 것이다. 왜냐면, 입다 주위에는 그 자신처럼 사회에서 버림받은힘깨나 쓰는 젊은이들이 많이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들이 운거하고 살아갈 곳이란 필경 그들 자신의 운명처럼 버림받은땅이었을 것이다. 그는 이들을 이끌고, 사람들의 재산을 강탈하거나, 다른 자들로부터 그들의 안위를 지켜주는 대신 대가를 지불받는다. 초기의 다윗처럼 말이다. 그 사회의 폭력의 대상이 되어 추방당했던 이들이 폭력의 주체가 되어 그 사회 속에서 생존하는 비법을 터득한 것이다. 그 사회와 대항하는 방식이지만, 동시에 그들의 관점에서 볼 때 그 사회의 존재방식과 똑 같은 방식으로 그들은 살아간 것이다.

입다 패거리의 영향력은 날로 확대되었고, 길르앗 전체에서도 가장 유명한 폭력배가 된 듯하다. 동편의 암몬 왕국(아마도 원시적 왕권제 사회였던 듯한데)이 쳐들어오자 길르앗의 유지들은 입다를 찾아와 자신들의 콰신(11,6, : “통치자”), 즉 군대 사령관이 되어 달라고 부탁한다. 상비군이 있던 시대가 아니니 이 용어는 당장의 위급한 상황을 군대 지휘관으로서 지켜달라는 뜻일 것이다. 용병 대장을 고용하는 방식이지만, 길르앗의 의용군을 이끌 권한까지 부여한 정도의 권력을 말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승리하면 길르앗의 로쉬(11,11: “통치자와 지휘관”)가 되겠다고 계약을 한다. 전시 임시 사령관을 뜻하는 콰신과는 달리, 로쉬는 거의 왕과 유사한 상시 지도자를 가리킨다. 그리하여 입다의 폭력이 그 사회의 존속을 위해 쓰일 때, 그 사회의 이상은 치명적인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입다가 승리했다. 이제 계약에 따라 길르앗 족속은 그를 로쉬로 받아들여야 한다. 한데, 길르앗 부족과 바로 북부의 므나세 부족, 그리고 서부의 에프라임과 베냐민 부족 등은 형제 부족처럼, 느슨하지만 일종의 부족간 연합체로 엮여 있다. 그밖에 아주 일찍부터 므나세 지파에 통합되어 사라진 것으로 보이지만 마길 족속이나 야일 족속도 이 연합의 일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민수기 32,39~42). 좀 더 느슨하게 확대하면 므낫세 이북의 부족들(아세르, 즈불론, 이싸갈, 납달리 부족 등)과 베냐민 이남의 부족들(유다, 갈렙, 고라, 그니스, 여라므엘, , 시므온 지파 등)까지도 동지적 결속체로 묶일 수도 있다. 또 단, 르우벤, 갓 부족도 연합의 방계적 일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이 실체 불분명한 연합은 후대에 좀 더 과장되어 잘 조직된 것으로 기억되며, 그네들의 이상 또한 잘 짜인 것처럼 여겨지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기억은 주로 에프라임 부족으로부터 유래한 신념이었다. 이 부족의 족장이나 성소의 사제들, 예언자들은 가장 적극적으로 부족들 간의 평등 이상을 지켜내려는 이들이었다. 훗날 왕국 시대에도 이곳 출신 사제-예언자들은 공히 평등 이상을 통해 왕국시대에 개입하려는 사람들이었다(예컨대 사울의 파트너인 사무엘과 엘리 집안, 다윗의 사제인 아비아달, 북왕국 이스라엘의 시조인 여로보암의 동지 아히야, 유다 왕국 말기의 예언자 예레미야 등). 더군다나 길르앗 족속에 대해서는 거의 종주권에 가까울 만큼 강한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다.

그런데 입다가 로쉬가 된 것이다. 이 만만찮은 인물의 등장은 에프라임을 바짝 긴장하게 한다. 이참에 길르앗 족속을 단속하지 않으면 제멋대로 굴 것처럼 보였다. 더구나 위험스럽게도 이 지파는 상임통치자로 그를 위임한 것이다. 이것은 왕권제를 이들이 추구한다는 혐의로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본때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더 강해지기 전에 그 위험천만한 직위의 소유자를 내쫓아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입다와 같은 무뢰배를 떠받드는 부족은 응징을 받아 마땅하다고 보았기도 하겠다. 그래서 에프라임 인들은 강을 건너 출병한다. 한편으로는 부족동맹의 평등 이상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급 부족이 자기들과 대등한 위치에 올라설 것을 견제하기 위해서.........

입다는 거들먹거리는 에프라임을 더 이상 용인할 수 없었다. 게다가 매춘부의 자식으로 천대받고 추방당했던 그가 우여곡절 끝에 기어이 부족의 지도자가 될 기회를 얻었는데 이 방해꾼들은 그의 꿈을 가로 막아서려 하는 것이다. 외동딸을 죽이면서까지 부족 사람들에게 신망을 지키려 했던 그의 욕망은, 도움이 되기는커녕 사사건건 감 놔라 대추 놔라 하며 참견하는 에브라임 인들의 소행을 못견뎌했던 길르앗 사람들의 바람과 맞물리게 되었다.

이렇게 전투는 시작되었고, 입다는 대승을 거두었다. 그리고 더 이상 적이 그를 가로막을 수 없게, 치명적인 패배를 안겨주기 위해 모든 생존자를 처형하기로 맘먹었다. 쉬볼렛/시볼렛은 바로 그 살육을 위한 언어적 수단이 되었다.

 

흔히 폭력의 역사는 나쁜 이상에 의해 추동되는 사회의 산물인양 생각하곤 한다. ‘악의 축운운 하는 말은 나쁜 이상의 극한이 존재하며, 그 극한의 악은 우리를 오염시켜 우리 자신을 재앙에 떨어지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념은 죽임의 문화를 낳는다. 예수의 죽임당함의 배후에도 바로 이러한 신념을 가진 유대인들이 있었던 것이다. 수많은 역사의 희생양들은 이 죽임의 악취를 풍기는 신념들이 휘두른 칼날에, 총질에 무참히 스러져가야 했다.

한데 쉬볼렛/시볼렛 비극은 그리 심각한 악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다. 흔히 있는 폭력과 배제의 현장에서 비극의 싹은 자라난다. 특별한 악마의 장난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이 품는 욕구들로 인해 비극은 키워지고, 흔한 상처들로 인한 욕망을 자양분 삼아 자라난다. 보통 사람들의 평범함 속에서 이 잔혹한 폭력적 사건은 배태되었던 것이다.

또한 쉬볼렛/시볼렛 비극은 아름다운 이상들을 품은 이들의 신념 속에서 발생하였다. 나쁜 이상과 좋은 이상이 부딪혀 나타난 게 아니라, 좋은 이상과 명분을 위해 폭력과 대량 학살이 자행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피비린내 나는 폭력 사태는 사악한 저주의 욕설만으로 자행된 것이 아니다. 아무런 의미상의 관련도 없는 언어들이 동원되었다. 어쩌면 아름다웠을 수도 있는, 혹은 행복한 꿈이나 추억을 간직하였을 수도 있는 쉬볼렛/시볼렛은, 그 평범한 말은 의도하지 않은 이 역사와 얽히면서 몸서리치는 잔혹함의 상징이 되어야 했다.

하여 쉬볼렛/시볼렛의 비극은,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평범한 언어들을 통해, 그리고 아름다운 이상을 위한다는 이름 아래 벌어지고 있는 역사의 참극들을 떠올리게 하는 하나의 교훈이다. 훗날 유대인이면서도 배타적 시오니즘에 대항한 위대한 사상가인 한나 아렌트는 유대인에 대한 나치와 독일인의 학살은 특별한 악의 축에 의해 책동되어 자행된 것이 아니라 악의 평범성이 얼마나 참혹한 데까지 이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예수의 죽임당함을 기억하고 기리는 많은 이들은 수난절기를 맞아 절대악에 대한 증오를 촉발시키는 언어를 서슴치 않고 발설한다. 그러는 사이 그들이 이라고 말하는 수많은 기독십자군들은 세계 각처에서 쉬볼렛/시볼렛의 비극의 주역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