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백교회가 후원하여 만든 책 《죽은 민중의 시대, 안병무를 다시 본다》(삼인, 2006.10)의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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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무 다시 읽기_서론
‘민중의 죽음’과 안병무를 다시 읽는다는 것
안병무 선생은 1989년 8월쯤에 한 인터뷰에서 그리운 얼굴을 회상해보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폭동’을 그리워해요, ‘민중봉기’를! ... 종말론적인 환상이라 할 수 있겠지만, 세상이 완전히 한 번 바뀌는 그런 개벽이 그립지...” 2년 전, 폭발적으로 분출한 이른바 ‘1987의 민중의 광장’을 보면서 “환호, 환호”라고 외쳤고(〈민중사건 속의 그리스도〉, 137쪽), 비록 6공 정부가 집권함으로써 그 광장의 정치가 일시적인 카니발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귀결됐을지라도, ‘5공비리청문회’와 ‘광주청문회’(1988) 등을 접하면서, ‘단(斷)’하라고, 철저한 역사청산의 에토스를 부르짖었던 선생의 즐거운 흥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항상 죽임당함에서 시작하는 ‘죽임의 권력’에 대한 민중의 응징은, 그 아이러니한 역사의 천사는 또한 언제나처럼 강력한 ‘역사의 반폭풍’에 부딪쳐 저편 구석진 곳으로 내동댕이쳐지고 만다.
선생은 곧 냉정을 찾아야 했고, 낙망한 이들에게 위안을 주어야 했다. “수없이 곤두박질하면서도, 계속 시행착오를 해도 어느 길이 옳은지 자기의 희생을 통한 실험으로 인식해야 하고, 그때그때 잃음과 동시에 얻는 결단을 통해서 앞으로 나가야 한다.”며, 실낙원 이후의 ‘역사의 천사’들이 마주해야 하는 소망은 단순히 ‘환원된 낙원’의 향유가 아니라 끊임없이 그것을 전유하기 위해 투쟁하는 ‘과정’이라는 〈창세기〉의 역사철학적 충고를 상기시켜 준다.(〈그래도 다시 낙원에로 환원시키지 않았다〉, 21쪽)
이와 같이 실패로 귀결된 민중사건에 대한 역사철학적 성찰에 이르기 전(前)의 민중신학자, 아니 민중신학적 신앙을 내면화한 자, 그(녀)는 말할 수 있는가? ‘역사의 패배자들’이 패배자의 윤리를 발견해냄을 통해서 실패 속에서도 여전히 세상을 살아갈 이유를 찾아내기 전의 그(녀)에게 허용된 언어는 있는가? 필경 종말에 대한 상상은 바로 이런 자리에서 태어날 것이다. 종말적 상상은 언어 부재, 역사의 실어증에 닥친 이의 내재화된 병증의 일종이라는 것이다. 요컨대 종말적 상상은 존재의 실존적 고통을 전제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상처 입은 심성에 대한 자기 치유의 몸부림이기도 하다. 바로 이런 고통의 자기치유 과정에서 역사철학적 성찰이 탄생한다. 위에서 언급한 선생의 민중봉기에 대한 종말적 상상은 아마도 이런 배경을 염두에 두어야할 것이다.
여기서 내가 특히 주목하는 것은 민중봉기에 대한 종말적 상상에서 선생의 좌절감과 고통 그리고 처절한 자기치유의 몸짓을 읽어낼 수 있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하면, 민중봉기의 종말적 상상이 역사 내에서의 ‘민중의 죽음’에 대한 좌절감의 ‘감각적’ 표현이라면, 민중신학자의 실존적(내적인) 좌절의 고통이 ‘민중의 죽음’이라는, 그 자신의 역사적(외적) 기억과 분리할 수 없이 얽혀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선생은 이러한 실존적 고통 속에서 민중의 죽음을 체감하고 있다.
한편 이러한 ‘민중의 죽음’을 나타내는 사회학적 함의를 선생의 ‘오클로스’(οχλος) 개념을 통해서 보다 명료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 (이 책에 실린 나의 글 〈이름을 불러주기까지 그들은 ‘꽃’이 아니었다―안병무의 ‘오클로스론’ 다시 읽기〉에서 상세히 다루었으므로 여기서는 간략히 요약하면) 〈마르코복음〉의 예수의 청중으로 등장하는 오클로스는 라오스(λαος)와 중요한 사회학적 함의를 달리하는 집단적 특징을 지니는데, 후자가 영토에 귀속된 백성을 의미한다면 전자는 영토를 박탈당한 대중을 말한다. 그들은 땅을 빼앗긴 이들이며, 그래서 생존을 위해 이리저리 유랑하는 삶을 선택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하여 그들은 사회가 타부(taboo)시하는 것에 몸을 담그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다. 또한 그들은 나쁜 기운에 몸을 빼앗긴 이들이다. 그들의 몸 자체가 사회의 타부의 대상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귀속할 땅도 몸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삶의 준거를 빼앗긴 자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정체성이 부재하며, 윤리적이지도 않다.
그러한 이들을 사회는 자기 자신이나 조상 등의 탓으로 말미암아 신의 저주를 받은 자들로 규정한다. 그들 이외의 보통 사람들에게, 왜 신실해야 하는지, 왜 사회를 질서 짓게 하는 신성화된 규율의 통제에 순응해야 하는지에 대해 부정적인 극단적 본보기가 되는 존재다. 그러므로 오클로스는 세상으로부터 혐오의 대상이어야 하는 동시에 자기 자신을 혐오해야 한다. 그래야만 세상 속에 존재하는 것이 허용된다. 세상의 혐오의 대상인 자가 스스로를 혐오하지 않는다면 그는 세상을 향해 복수를 선택할 우려가 높은 자다. 그러니 사회의 위험을 예방하는 차원에서 영토 안에서 배제의 대상, 추방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오클로스는 자신의 존재를 부정함을 통해 존재하는 자이어야 한다. 규범체계는 그렇게 이들을 둘러싼 질서를 구축했다. ‘비존재인 존재’, 살아 있으나 죽은 것과 다름없는 존재, 바로 이것이 영토성(territoricity) 1을 통해 본 오클로스의 존재론적 규정인 셈이다.
선생에게 이러한 오클로스와 영토성 논의는 1970,80년대 한국, 그 ‘민주화 결핍의 시대’에 민중의 죽음을 이해하는 하나의 실마리가 된다. 서울을 영토성의 과도한 중심으로 삼는 당시의 ‘돌진적 산업화’ 2는 대대적인 이농의 물결로 이어져, 서울의 무허가 집촌, 그 번지 없는 집들에 거주하는 존재, 그곳에서 이러저러한 사연으로 주민등록이 말소된 존재를 부정적 부산물로 생성시켰다. 그들은 존재하지만 부재한 자로 기록된 이들이며, 이러한 기록의 부재는 급격한 근대화로의 ‘이행의 사회적 비용’을 절감시켰다. 고통은 은폐되었고, 그럴수록 돌진적 성장 사회는 그 생산성의 긍정적 측면만이 부각되어 기억된다. ‘국민’으로 부름받은 대중은 ‘영토 밖’으로 퇴출된 이들에 대한 부채의식 없이 산업 역군이 되었고, 가족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그것으로 족했다. 반면 이러한 ‘영토 밖’의 희망 없는 죽임의 현실, 그 침묵을 고발하려는 자는 ‘빨갱이’, 혹은 그에 준하는 불순분자로 낙인찍혀, 그 불결함이 타인에게 오염되지 않도록 일상의 영토에서 쫓겨나 감옥이라는 밀폐된 공간에 격리된 존재가 되어야 했다.
선생에 의하면, 이러한 죽임의 현장은 1970,80년대 한국의 오클로스의 현장이다. 주-국가, 객-국민으로 구성된 독재사회의 영토에서 추방된 자들, 그 탈영토적 존재들(deterritorized people), 그들에 대한 사회적 침묵은 곧 ‘그들의 죽음’을 의미한다. 독재시대의 주객도식이 견고하게 사람들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던 상황에서 민중/오클로스의 고통이 객-국민에게 감정이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독재국가가 추동하던 ‘냉전적 발전국가’의 담론 속에서 이들 비자발적으로 탈영토화된 존재들, 아니 비존재들은 침묵을 강요당한 존재이자 스스로 침묵하는 자였다. 적어도 민중신학자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선생은 여기에서 민중의 죽음을 본다.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으로 영토에서 추방당한 자, 또한 국민의 기억, 심지어 민중/오클로스인 자기 자신의 기억에서조차 추방된 자, 그들은 귀환할 영토를 잃었으니 경험공간에서 부재한, 죽은 존재라는 것이다. 해서 민중신학자로서, 민중의 한(恨)의 사제의 한 사람으로서 선생은 민중을 부활시키기 위해 초혼제를 드린다. 부활의 신앙적 전형인 예수를 불러들이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전태일의 옷을 입고 그분은 역사 속에 환생한다. 민증신학의 실천 과제로서 제시된 ‘증언’은 바로 이것을 이야기하는 것을 가리킨다.
[표] 1970,80년대 한국의 민주화 결핍의 시대의 주객도식, 그리고 민중/오클로스
| 교회 | 사회 | |
영역 안 | 주 | 목자 | 국가 |
객 | 양 | 국민 | |
영역 밖 | 민중/오클로스 | 돌이킬 수 없는 죄인 | 빨갱이 혹은 불순분자 |
‘증언’이란 숨겨진 것을 드러내어 말하는 행위다. 즉 은폐된 민중의 고통을 폭로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을 언어화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데 있다. 우선 그 고통의 현장은 죽임의 체계에 의해 차단막 저편으로 가려져 있다. 차단막을 열어젖히는 것은 금지된 것이고, 그것을 위반한 자는 그 자신도 차단막 저편으로 추방되는 징벌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사람들은 위험 때문에 ‘밖’을 내다보지 않는 게 아니라 그것을 ‘모른 체’할 때 더욱 유리하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다는 데 있다. 실제로 영역 안의 객인 ‘국민’은 영역 밖의 고통의 현장이 있음으로 해서 돌진적 산업화의 부산물을 좀 더 많이 누릴 수 있었다. 3
이 모든 문제에도 불구하고 ‘밖의 현장’에 대한 증언자가 있었다. 물론 선생을 포함한 민중신학자는 그런 이들 중 하나였다. 이들은 언어의 전문가들이다. 누구보다도 본 것을 언어화할 효과적인 도구와 잘 준비된 역량을 갖춘 이였다. 신학자, 교수, 목사 등으로 불리는 그들의 상징자본은 증언의 사회적 호소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결정적인 필요조건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여전히 문제가 있다. 은폐의 주체인 냉전적 발전국가 4 그리고 그 외연인 서구 중심의 지구적 발전체계, 그 ‘죽임의 체계’들이 공모하여 구축한 언어 제도 속에는 민중의 고통을 형상화할만한 언어가 없기 때문이다. 이 언어 제도에서 ‘잘 교육받은 아들들’은 그 제도가 쳐놓은 견고한 언어의 그물 속에, 보통의 대중보다 더욱 심각하게, 빠져 있다. 이 글 앞머리에서 언급한 선생의 언어 장애로 인한 실존적 고통은 바로 이와 같은 맥락에서 발생한다.
예컨대 안병무 선생은 성서학자로서 성서에 관한 역사비평학적 담론의 횡포에 심한 적대감을 느끼지만, 동시에 그러한 비판을 수행하는 구체적인 언술을 역사비평학적 도구를 통해 구성하곤 한다. 오히려 역사비평학 외부의 (문학적/탈역사비평적) 상상력이 선생의 담론적 교란행위를 보다 철저하게 하지만, 5 대개의 경우 그는 학문 제도 속의 담론의 장벽 안에서 허우적대며 힘겹게 죽임의 권력과 사투를 벌인다. 물론 모든 민중신학자들이 그렇듯이, 아니 모든 제3세계적 사유, 탈식민지적 사유의 전문가들이 그렇듯이 말이다. 결국 선생은 민중신학자로서 예수와 더불어 죽은 민중의 부활을 욕망하되 그것을 언어화할 수 없는 장애에 부딪친다. 기존의 개념들을 받아들일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딜레마 속에서 더듬거리지 않을 수 없고 언술의 모순적 자취를 숨길 수 없는 장애, 그것이 민중신학자인 선생의 존재론적 언어 장애인 것이다.
여기서 신의 침묵, 민중신학자 자신의 실어증, 그리고 민중의 죽음이 등가적으로 체험된다. 예수의 죽음 장면을 이야기하는 대목에서 선생은 예수 자신의 죽음만이 아니라, 그분을 추종한 이들의 죽음, 그분이 구원하고자 했던 민중/오클로스의 죽음, 또한 그분을 밀고한 배신자의 죽음, 그분을 죽이라고 외쳐댔던 대중의 죽음, 그분을 죽이기로 결정했던 지배자들의 죽음, 죽임의 체계에 의해 이들 모두가 죽임을 당하는 ‘주검들의 현장’을 발견한다. 그리고 마침내는 죽임의 체계가 활개치는 그 극한의 순간까지도 침묵해야 했던 신, 곧 신의 죽음을 읽어낸다.
바로 이 세 요소의 등가성이 선생의 민중신학적 신학하기의 기본축이다. 곧 민중신학자는 민중의 죽음과, 그러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침묵해야 하는 신의 눈물을 자신의 몸에 새긴다. 언어화하지 못하는 증언자의 고통이다. 증언은 이렇게 민중의 죽음, 신의 죽음을 감정이입하는 자신의 실존적 죽음을 체감하는 가운데서 수행된다. 죽임의 체계를 그토록 증오하면서도 그 숨막히는 질서를 넘어서지 못한 채로 그 밖을 상상하는, 죽임의 세계와의 갈등적 동거를 의미하는 것이다.
한편,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 즈음, 서경석 목사는 수차례에 걸쳐 ‘시민’의 화려한 등장과 ‘민중의 퇴장/죽음’을 선언한다. 그 어간 그의 주장은 진보적 기독교 집단 안팎에서 벌어진 일련의 소동의 진원지였다. 그의 논지는 ‘1987년 6월 이후’라는 시대 인식과 그것에 따른 실천 전략에 근거한다. 독재 대 민주라는 이항대립의 시대가 갔고, 바야흐로 계급이익보다는 ‘공공선’을 지향하는 사회운동을 요청하는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국민적 합의에 기초한 운동’을 이끌어갈 완충적 요소로 ‘시민 중심성’이 요청된다는 주장이다. 물론 이것은 이념 지향성이 강했던 1980년대적 민중운동과의 차별성을 강조함으로써 대안적인 상징적 위상을 확보하려는 것이겠다. 그런 점에서 안병무의 ‘민중의 죽음’에는 ‘고통’이 서려있는 반면, 서경석의 ‘민중의 죽음’ 주장에는 급격히 격상하고 있던 ‘경실련’의 위상을 체감하는 ‘숨길 수 없는 달콤함’의 기조가 엿보인다.
한데 약한 논거와 강한 주장이 잇는 허술한 강변에도 불구하고, 불행하게도 그의 불순한 발언 속에는 1987년 이후의 한국 민주화의 공허함이 예시되어 있다. 나는 이 과정을 ‘성찰 없는 민주주의로서의 민주화’라고 명명하고자 한다. 민주화란 과거 독재 시대의 영토성이 해체되고, 새로운 경계들로 인한 재영토화(reterritorization)가 구축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때 민주화라는 재영토화 과정은 시민사회가 독재권력에 의해 독점되던 권력 자원의 배분에 핵심 변수로 개입함으로써 수행된다. 그런데 한국에서의 시민사회의 급격한 사회구성 능력의 확대는, 지나친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도식적으로 평가하면, 공공성의 확대로 나타나기보다는 ‘시민사회의 이익집단화’의 확대로 나타났다.
이것은 시민사회가 더 이상 사회적 통합의 단위로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분열된 시민사회 내의 각 행위자들은 수많은 영토들을 만들고, 그 외부를 배제하는 소위 민주화라는 게임에 돌입하게 된 것이다. 물론 각 영토들은 서로 경쟁만 하는 게 아니라 한편으로 결속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경쟁한다. 그리고 이러한 영토들 간의 교차 과정에서 특권과 비특권이라는 통합과 배제의 메커니즘이 생성된다. 여기서 우리는 비특권의 영역에서 시민사회 내의 ‘비시민’의 대두를 본다. 과거 독재시절의 민중/오클로스가 국가라는 영토의 외부로 쫓겨난 ‘비국민’이라는 단일요소로 묶일 수 있었던 반면, 이제는 ‘비시민’이라는 다층적 영토화의 배제 메커니즘의 희생자가 등장했던 것이다. 즉 비시민으로서의 민중/오클로스는 비균질적 존재다. 이런 맥락에서 민중/오클로스는 ‘소수자’(minorities) 개념과 맞물리게 된다. 6
[표]1987년 이후, 한국의 민주화 시대(성찰이 부재한 민주주의)의 주객도식, 그리고 민중/오클로스
| 사회 | |
영역 안 | 주 | 국가-시민사회의 엘리트 부문 |
객 | 시민사회의 비엘리트적 부문 | |
영역 밖 | 민중/오클로스 | 비시민 |
한편 이런 맥락에서 88올림픽을 계기로 하는, 1980년대 말 이후의 한국 자본주의의 변화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시기에 산업구조상 소비재 산업이 급격히 팽창하기 시작했고, 88올림픽과 2002월드컵 같은 대대적인 스팩터클은 이러한 소비 중심적 사회로의 이행에 열렬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주었다. 요컨대 한국의 민주화는 한국의 소비자본주의화와 맞물려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사실은 이 시기에 한국 사회에 ‘개인’이 탄생했다는 점이다. 독재 시대의 권위들이 해체되고 대안적 권위가 부재한 상황에서, 가족이나 세대 등과 같은 일상적 영역에서의 권위마저도 붕괴되자, 비로소 개인은 공적, 사적 결속체의 운명에서 자유로워지게 되었다. 또한 ‘너 자신의 취향을 개발하라’고 유혹하는 끊임없는 자본의 달콤한 속삭임은 개인을 주체화시키는 커다란 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문제는 ‘개인’이 공공성이 부재하는 가운데서 역사의 주체로서 등장했다는 점이다. 앞서 말했듯이 한국에서 시민사회의 급격한 부상은 공공성의 확대로 나타난 게 아니었던 것이다. 또한 1997년의 경제대란은 지구화된 자본주의 메커니즘이라는 파괴적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지 않을 수 없는 조건을 형성했는데, 그 속에서 사람들은 지구적 자본주의가 실패자에게 얼마나 무자비한지를 뼈저리게 체감해야 했다. 한데 이 혹독한 체험의 주체는 많은 경우 개인이었다. 가족이나 이웃은 더 이상 그들의 보증인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한국사회에 새롭게 탄생한 개인은 ‘성찰이 부재한 개인’이다. 그리고 그것은 재영토화 게임에 몰두하고 있는 시민사회의 ‘성찰 없음’과 상호 규정적으로 연계된다.
한국사회는 이렇게 또 한번 급격히 변화하고 있다. 내가 이런 변화의 상황을 강조한 것은 ‘오클로스의 현장’이 변화되고 있음을 말하기 위함이다. 다양한 현장 분석이 가능하겠지만, 여기서는 그 현장에서 민중은 ‘새로운 야만’을 마주치게 되었다는 점만을 강조하고자 한다. 독재 시대의 국민이 매우 수동적으로 민중을 망각했다면, 성찰 없는 민주화 시대의 시민은 좀 더 적극적 행위자로 민중을 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야만의 은폐 기재가 훨씬 ‘심미화’ 7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거엔 은폐의 주체가 국가였지만, 오늘의 은폐는 국가와 시민사회의 의식적 무의식적 공모를 통해 수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국민 혹은 시민사회에 있어서 민중 현실의 은폐는 외적 감시에 의한 비자발적 내지는 수동적 동의보다는 훨씬 무의식적이고 자연스럽게 벌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을 이름 하여 어떤 논자는 ‘은폐된 야만의 시대’라고 명명했다. 바로 이 새로운 야만의 시기에 민중신학적 신앙을 추구하는 우리는 안병무 선생의 글을 다시 읽고자 한다.
대담집인 《민중신학 이야기》를 쓸 무렵 선생은 ‘질문이 대답을 규정한다’는 말을 기회 있을 때마다 했다. 이때 질문자는 제2세대 민중신학 연구자, 즉 1980년대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민중신학의 재구성을 모색하던 이들이었다. 실제로 이 시기에 쓰인 몇 편의 글들은, 나의 주관적인 판단에 의하면, 마치 제2세대 민중신학자들이 선생의 입을 통해 복화술(複話術)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질문이 대답을 규정한다’는 말은 질문자의 시각이 일방향적으로 대화를 결정한다는 뜻은 당연히 아니다. 복화술이라고 하더라도, 연기자만의 시각이 말의 내용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녀)가 사용한 인형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연기자는 복화술의 형식과 내용을 달리하기 마련이며, 청중 또한 인형의 입을 통해 연기자의 소리를 경청한다. 인형의 이미지가 청중의 이해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요컨대 선생의 말은 ‘이해란 대화 과정의 산물’이라는 뜻으로 보아야 한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민중신학 이야기》는 대화 양자 간의 상호 영향이 잘 어우러져 있다. 좀 더 본격적인 분석을 거쳐야하겠지만, 지금의 내 생각에 따라 판단하면, 질문자에 의해 선생의 사유가 점거당한 것도 아니고, 이 대담이 선생의 정형화된 생각의 단순한 반복에 그치고 만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러한 대화주의적 태도는 선생에게 새로운 것이 전혀 아니다. 서구신학에 대한 선생의 비판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주객도식’이라는 문제설정은 (하이데거-)불트만 식의 실존주의에 대한 선생 나름의 재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불트만이 ‘실존’이라는 신과의 존재론적 대화성을 유념하면서 ‘사건’을 얘기했다면, 선생은 현장 속의 민중/오클로스와의 대화를 통해서 상호 변화되는(즉 성찰하는) 신과 민중의 이야기를 ‘사건’이라고 재해석하였다. 대화란 상대자에 의해 자아가 가변적이라는 것을 함축한다. 바로 이러한 대화적 가변성이 민중신학적 신의 가면(페르소나)이다. 그러나 선생이 보기에 서구 신학은 예수에게서 영원불변의 신적 가면(페르소나)을 씌웠다. 그런 점에서 독백적 언술구조인 서구 신학의 주객도식은 담론적으로 제국주의적 패권주의와 등가적이다. 제국주의는 식민화된 사회를 계몽의 대상으로 설정하면서, 원주민을, 그들의 언어를, 그들의 외침을 침묵하게 했고, 자신들의 말만을 소통되게 했다. 이러한 일방주의에 대한 대화주의적 비판이 바로 선생의 ‘주객도식의 극복’이라는 테제였던 것이다.
선생의 대화주의는 시공간을 초월한다. 불트만적 실존이 역사 밖에서 수행되는 만남/대화에 초점이 있다면, 선생의 만남/대화는 역사 안에서, 즉 삶의 현장 내부에서 이루어진다. 이런 현장적 만남은 대면적(facible)이어야 한다. 그런데 선생은 대면성을 넘어선 만남을 상상해낸다. 문제는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에 있다. 이때 선생의 돌파구가 ‘기억’이다. 기억은 만남/대화의 일종인 것이다. 〈마르코복음〉은 예수와 오클로스의 만남 사건을 기억해낸 결과이다. 선생에 의하면, 이러한 기억이 가능했던 것은 〈마르코복음〉의 현장 또한 오클로스 현장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현장의 유사성, 그 경험적 유사성이 기억의 유사성을 낳았다.
여기에서 선생은 시공간적 대화가 가능한 하나의 전형을 발견한다. 그리고 이 전형을 한국에서의 오클로스 현장에서의 예수 기억으로 확대한다. 그리고 그러한 기억을, 경험의 유사성이 기억의 유사성으로 이어진 기억을 ‘전태일에 대한 기억’에서 찾아낸다. 그리하여 선생은 하나의 기억의 계보를 상상해낸다. ‘예수-마르코-전태일’의 기억의 계보. 거기에는 예수와 오클로스 간의 시공간을 달리하는 대화와 성찰의 사건이 있다.
이제 우리는 선생의 텍스트를 읽는다. 다른 오클로스 사건이 발생하고 있는 현장을 염두에 두면서 선생이 주선하고 있는 예수-마르코-전태일로 이어지는 기억의 계보를 떠올린다. 모든 현장에서 민중/오클로스는 죽임을 당했다. 이 모든 죽임의 현장은 사람들에게 망각되었다. 바로 이 사실을 체감하면서 우리는 선생이 텍스트를 읽는다, 아니 다시 읽는다. □
- 여기서 ‘영토성’은 물리적인 경계(boundary)의 차원을 넘어서, 담론적인 경계의 차원까지를 함축하고 있다. [본문으로]
- 한국의 돌진적 산업화 과정은 서울의 경계 안의 사람들인가 밖의 사람들인가에 따라 물리적일 뿐 아니라 담론적으로 권력이 차등적으로 배분되도록 구조화되었다. 그러므로 전 국민은 서울과 서울의 시민을 욕망하게 된다. [본문으로]
- 예루살렘 주민들이 그 도시 지배자들(고위사제와 왕족․귀족들)의 착취 대상임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성전 도시의 주민으로서 지배자들과 일정한 이해관계를 같이하고 있었기에 예수 같은 탈예루살렘 계보의 운동들에 대해 적대적이었다는 타이쎈의 견해에 선생이 동의를 표하는 것은, 명시적이지는 않지만 바로 우리 시대의 이른바 ‘국민’의 태도를 염두에 두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때 전 국민은 서울 시민이거나 서울 시민을 욕망하는 자가 된다. [본문으로]
- 한국의 냉전적 발전국가는 그 돌진적 발전을 위해 모든 사회적 자원을 총동원하려 한다. 이때 발생하는 무수한 문제들을 은폐하는 사회통합의 주요 기재가 ‘냉전적 사회 기조’다. 이 냉전적 기조를 통해 국가는 전 국민은 ‘감시의 대상’으로 삼는다. 즉 냉전적 발전국가에서 국민은 주로 감시의 대상으로 전락하며, 그런 점에서 이들은 주권이 심하게 제약당하는 ‘객(체화된 존재)’에 불과하다. [본문으로]
- 오클로스를 얘기하는 대목이나 막달라 마리아를 통해 민중사건을 얘기하는 대목은 선생의 문학적 상상력이 역사비평학적 이해의 비역사성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논의는 이 책에 실린 다른 글을 참조하라. [본문으로]
- 최근 안병무 선생의 오클로스론이 소수자 담론을 강조하는 시각에서 다시 부각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논의를 보려면 이 자료집에 실린 황용연의 글 참조 [본문으로]
- 은폐 메커니즘이 ‘심미화’되었다고 한 것은 그것의 강압성이 약화되고, 대신 도덕적, 정신적 차원에서 정당화되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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