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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망가진 무전기의 교신, 그것은 ‘시그널’이다, 예언이다

[공동선] 148호(2019 09+10)에 실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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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가진 무전기의 교신, 그것은 시그널이다, 예언이다

 

 

, 우리가 ..., 그들이 거기에서 하는 말을 뒤섞어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창세기11,7)

 

연쇄살인사건이다. 피해자는 11, 모두 여성이다. 그녀들의 사망 시점은 1997년 가을부터 2014년까지 비교적 길게 분포되어 있다. 하지만 피해자들은 별다른 공통점이 보이지 않는다. 생김새도, 옷차림도, 헤어스타일도, 신장도, 나이도 제각각이다. 그럼에도 피해자들 간에는 공통점이 있다. 강간의 흔적은 없었고, 모두 머리에 검은 비닐이 씌워져 목 부분에 묶여 있었다. 그리고 목이 졸려 사망했다. 또 그 시신들은 서울의 빈곤밀집지역인 한 동네의 야산 한곳에 버려져 있었다.

처음 시신 두 구가 발견된 1990년대 말에 경찰이 수사를 벌였으나 실패했고, 연쇄살인이 벌어진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야산에서 9구가 한꺼번에 발견된 2015년에야 경찰은 연쇄살인사건으로 규정짓고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했다.

피해자들의 중대한 공통점이 확인되었다. 그녀들은 예외 없이 극단적인 대인기피증을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모두 가족과 떨어져 홀로 사는 여성이고, 직장에서나 동네에서나 아무와도 얽히지 않는 외톨이였다. 시신의 상태에도 공통점이 있었다. 포박상태 등이 꼼꼼하게 뒤처리되어 있었다.

여기서 프로파일러는 범인의 신상에 대한 가능성을 제시한다. 그자는 꼼꼼하고 세심한 성격의 사람으로 옷차림이나 머리스타일이 단정하고 거주환경 등을 깔끔하게 정리하는 사람이며, 피해자들처럼 외톨이일 가능성이 높고, 가족 없이 홀로 사는 자로 마당 없는 독채에서 살고 있을 것이라고.

그리고 마지막 피해자의 일기에서 그자는 편의점에서 일하는 자라는 결정적인 분석이 도출되었다. 그 피해자가 공책과 연필을 사고 컵라면과 삼각김밥을 먹던 곳에서 그녀를 줄곧 지켜보는 남자 얘기가 적혀 있었던 것이다. 편의점은 물건을 사든 밥을 먹든 아무도 그이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 커뮤니케이션의 단절을 상징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수사망을 좁혀가던 경찰이 드디어 범인을 잡았다. 그자는 어린 시절 부모가 이혼한 뒤 엄마와 함께 살았는데,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던 엄마의 학대를 경험하면서 정신이 왜곡되어 성장한 남자였다. 엄마는 가방 속에 아이를 가두곤 했고 상한 음식을 강제로 먹이기도 했다. 한번은 버림받은 강아지를 자신과 동일시했던 아이는 그 강아지를 데려왔는데 엄마는 그 강아지를 죽여서 검은 비닐에 넣어 집 앞 마당에 내다버렸다.

아이가 청년이 되었을 때 엄마는 죽었고, 그때부터 아들은 엄마의 죽은 시신을 집 장롱 속에 넣어둔 채 살인을 시작한다. 엄마처럼 외톨이의 대인기피증이 있는 우울증상의 여자들의 머리에 검은 비닐을 씌워서 목을 졸라 죽였다.

이 얘기를 처음 들은 이라면 마음이 무거웠겠다. 하지만 안심해도 된다. 이것은 실화가 아니라 드라마의 일부다. 그럼에도 그 이야기가 갖는 남다른 리얼리티에 여전히 마음이 무거울지도 모른다. 드라마이긴 하지만 너무나 있을 법한 이야기다.

 

시그널의 연쇄살인범, 그는 편의점 알바노동자다. 제일 윗단의 여자는 그에게 살해당한 여성 중 하나다. 그녀들은 한결같이 주변으로부터 따돌림당하는 외톨이들이다.

경찰수사드라마는 2천년대 이후 전 세계적으로 가장 크게 유행을 탄 드라마 장르에 속한다. 그런 유행을 선도한 것은 미국의 과학수사드라인 CSI: 라스베가스일 것이다. 2000년에 첫 방송을 시작한 이래 무려 2015년까지 16개 시즌에 걸쳐 방영되었으며, 본편의 파생드라마인 스핀오프(spin-off) 시리즈로 CSI: 마이애미CSI: 뉴욕, CSI: 사이버가 줄줄이 제작 방영되었다. 전 세계에서 20억 명 이상의 시청자가 관람했을 만큼 본편과 스핀오프 드라마들의 성공은 역대급이었다. 이 성공은 2천년대 드라마 시장에서 경찰수사극의 대대적인 붐으로 이어졌다.

한국의 경찰수사드라마는 1970~80년대를 풍미했던 수사반장이후 이렇다 할 것이 없었다. 시그널, 그해 시청자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던 태양의 후예에 비해 보잘 것 없는, 그렇고 그런 시청률을 보였다. 하지만 청룡영화제와 더불어 한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대중문화상인 백상예술대상에서 그해 3관왕(작품상, 여자최우수연기상, 극본상)을 차지할 만큼 그 가치는 크게 주목받았다.

이 드라마의 열혈 시청자였던 나의 관점에서 시그널은 그해 한국드라마 중 단연 최고였고, CSI보다도 훨씬 수준 높은 드라마다. 두 드라마 모두 치밀한 분석이 돋보이지만, CSI에는 선과 악의 이분법이 선명한 데 반해 시그널은 극의 전개 과정에서 어느 순간 그 이분법이 조각나 버린다. 위에서 요약한 이 드라마의 한 에피소드처럼 우리의 일상적인 무심함이 저 극악한 범죄의 배후가 되어된 것이다.

연쇄살인범은 이혼당한 엄마와 단 둘이 살아가는 모자 가족인데, 경제적 빈곤뿐 아니라 모친의 정신적 장애로 정상적인 삶이 불가능한 상황에 있었는데 사회적 보호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드라마에서 그 내막이 상세히 다루어지진 않았지만, 어찌 되었든 사회적 보호가 절실한 가족이 보호망에서 제외된 결과 그 아들은 치명적인 연쇄살인범이 되었다. 한편 그에게 살해당한 이들은 엄마처럼 사회적 보살핌에서 제외된 고독한 여성들이었다. 격렬한 고통 속에 살았던 엄마를 편안하게 했던 것이 죽음인 것처럼 그는 저 외톨이 여성들을 죽게 하는 것이 모두에게 외면당한 그녀들에 대한 돌봄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웃이 사라진 세계, 그런 세계의 충실한 일원이 되어버린 우리, 그런 이웃 부재의 현상은 일상에선 소소한 무심함으로 표현된다. 한데 그 소소한 무심함 속에서 누구는 잔인한 폭력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다 몸과 정신이 왜곡되어 버렸다. 그는 잔인한 폭력의 화신이 되어버린 것이다. 더욱이 그이가 저지르는 폭력의 대상은 자신과 같은 세상의 피해자들이다.

 

현실의 시간 안에서는 결코 만날 수 없는 두 형사가 현실의 공간 안에서는 결코 작동하지 않는 무전기를 통해 교신하고 있다.

 

이 에피소드에서 볼 수 있듯 드라마는 사람들 간의 교신이 무너진 세상의 참혹함을, 그 속에서 희망의 실낱같은 가능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실제로 이 드라마는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교신의 위기가 스토리의 골격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위기를 돌파하는 출구는 현실에선 여간해선 보이지 않는다. 해서 드라마는 현실 공간 바깥에서 실마리를 찾는다. 1989~2000년 사이에 경찰이었던 이재한(조진웅 분)2015년 프로파일러로 활용하는 또 다른 경찰 박해영(이제훈 분) 사이의 망가진 무전기를 통한 교신이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실마리가 되는 것이다. 현실의 시간 안에서는 결코 만날 수 없는 그들이, 현실의 공간 안에서는 결코 작동하지 않는 무전기를 통해 교신하고 있다.

현실 세계 안에서는 얘기들이 꽉 막혀 버렸다. 그 불통의 세계 속에서 가장 약한 자들 중 혹자는 죄인이 되고 또 다른 혹자는 죽임을 당한다. 그리고 그런 폭력과 죽검들을 이용해서 어떤 이들은 부당한 권력을 장악한다. 출구가 없다. 누군가는 그 불통의 현실을, 그 현실의 부조리함을 헤쳐나가기 위해 발버둥치지만 방법이 없다. 그 막힌 것에 작은 출구가 바로 이재한과 박해영 사이의 교신으로 마련되고 있다.

이것은 이 드라마가 바라보는 현실의 세계가 교신할 수 없는 불통의 세상임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겠다. 하여 이 드라마의 스토리는 교신을 향한 절망적 갈망을 탄식하듯 외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고대 유다사회, 아마도 바벨로니아에서 예루살렘과 그 인근지역으로 되돌아온 어떤 이들도 그런 불통의 현실에서 소통을 갈망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이 그런 마음으로 구상해낸 이야이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성서의 바벨탑 이야기.

 

Abel Grimmer The Tower of Babel(1604)

 

시날(Shinar) , 그러니까 바벨로니아 중심부까지 끌려온 망국(亡國) 유다 유배민들은 도시들의 웅장한 건조물들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우주의 중심인 줄 알았던 예루살렘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풍경에 입을 다물 수 없을 정도였다. 해서 어떤 이들은, 야훼는 한갓 변두리 신에 불과하고 바벨로니아의 최고신 마르둑(Marduk)이야말로 신 중의 신, 우주의 중심이라고 고백하였다. 그렇게 그들은 바벨로니아에 동화(assimilation)되어 갔다.

하지만 또 다른 유대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과거 유다국과 예루살렘이 무너져야 했던 이유를, 족히 열 배, 아니 수백 배는 더 큰 도시 혹은 제국 바벨의 한복판에서 그 거대문명을 바라보며 뼈아픈 깨달음에 이르게 되었다.

이 도시는, 이 제국은 하늘에 닿을 듯이 높이 치솟은 탑을 쌓아가고 있었다. 모두가 그 탑을 바라보고 세계의 이치를 깨달으며 그 탑의 소리로 소통하게 되면 세계에 평화가 도래할 것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소리높이 울려 퍼졌다. 그러나 그것은 역설로 귀결될 것이다. 그 탑은 치솟기를 멈출 것이고 세계는 분절될 것이며 불통의 세상이 도래할 것이다.

그랬다. 저 바벨의 신화는, 제국의 패권주의적 중심주의가 저들 자신을 괴멸하게 할 뿐 아니라 온 세계를 분절과 불통의 땅으로 추락하게 할 것이라는 암울한 문명비평이었다.

물론 이것은 바벨의 제국에 관한 것만은 아니다. 유다국의 몰락도 바로 그랬다. 예루살렘 성전이 온 땅의 중심이라는 자만에 빠져서 재앙에 빠진 이웃을 자신의 언어 질서 아래 병합하려 했던 패권적 자기 중심주의가 도리어 유다국을 괴멸시켰고 그 땅의 모든 이들에게 바벨의 재앙을 안겨준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바벨의 신화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모든 제국들이 바벨을 따라갔고 거의 모든 소국들도 마찬가지였다. 유배되었다 돌아온 유대인들의 귀환공동체도 마찬가지였다. 권력집중적 체제를 만들려는 데 집착하면서 사람들 하나하나를 살피는 섬세한 돌봄의 제도를 만드는 데 너무나 게을렀다. 거대한 제국 바벨의 실패를 작은 유대귀환공동체도 반복하고 있었다. 나아가 근대에 이르기까지 세계의 권력들은 공간과 시간을 무한히 확장하고, 나아가 미시공간까지, 심지어 무의식으로까지 파고들어 하나의 언어로 통합된 질서를 구축하려는 패권적 중심주의로 점철되었다.

그런데 그 귀결은 불통이다. 세상은 하나로 통하지 않는 무한 혼돈의 세상이 되었다. 통합과 불통은 서로의 원인이자 결과다. 떼려야 뗄 수 없는 하나다. 그 이유는 곰곰이 생각해보면 간명하다. 하나의 소리로 세상을 통합하려면 무수한 작은 소리를 묵살해야 한다. 그런데 묵살된 이들의 침묵당한 언어가 항상 침묵 속에 있지는 않다. 반란을 일으킨다. 문제는 그 반란은 대개 과녁을 빗나가곤 한다는 데 있다. 해서 약한 자들이 서로 죽이고 죽는 비극이 발생한다. 심지어는 그 비극을 틈새 삼아 권력은 그 힘을 더 쌓으려 한다. 악순환이다. 그런 불통의 악순환에 관한 문명비판적 이야기가 바로 바벨 이야기다.

조금 더 얘기해보자. 이런 분절과 불통의 세상을 비판하면서, 눈물 흘리는 이들, 굶주리는 이들, 상처받은 이들에게 다가간 기쁜 소식이라고 주장하는 그리스도교는 이와는 달랐을까? 안타깝게도 그리스도교의 중심 흐름은 바벨과 다르지 않았다. 여전히 세상을 하나의 소리로 통합하는 거대한 탑을 쌓고자 했다. 최고위 성직자가 좌정한 장소가 있었고 거기에서 울려 퍼지는 기쁜 소식이야말로 모두에게 구원의 소식이 된다고 선포되었다.

바벨의 이야기 같은 문명비평적 언어들이 저 거대한 탑의 어마무시한 확성기를 통해 울려 퍼지는 굉음 같은 언어를 향해 저돌적으로 달려들었지만, 미미한 흠집조차 낼 만큼도 되지 못했다. 물론 그리스도교에서 발화된 저항의 언어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놀랍게도 들릴까 말까 한 그 미미한 소리, 제국의 욕구가 실패할 것이라는 선포는 늘 사실로 귀결되었다. 해서 그 소리를 우리는 예언이라고 부른다.

불가능할 것 같은 소리가 가능성을 외쳤고, 누구도 믿지 않았지만, 그렇게 되었다. 성서 속 바벨의 이야기에 의하면 말이다. 시그널의 교신에 관한 불가능할 것 같은, 망가진 무전기 교신도 바로 그런 예언이다. 그러므로 불가능한 것을 갈망하는 소망은 결코 절망적이지 않다. 그것은 가능성의 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