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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제주4.3사건과 에브라임-베냐민 내전(〈사사기〉 21~23장) 이야기 - 포스트콜로니얼 교차읽기의 한 사례

한반도평화신학포럼 2019년 어느 모임에서 발표했던 것을 다듬어서 [맘울림](2019 10)에 실었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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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사건과 에브라임-베냐민 내전(사사기21~23) 이야기

포스트콜로니얼 교차읽기의 한 사례

 

 

 

교차읽기

 

교차읽기는 포스트콜로니얼한 문제의식을 담아내기에 유용한 독서 방식의 하나다. 다음 몇 가지 이유에서 그러하다. 첫째로 기존의 인습적인 해석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그 텍스트를 새롭게 읽는 데 어려움을 겪을 때 교차읽기는 유용한 방법이다. 왜냐면 그 텍스트(텍스트 A)와 다른 텍스트(텍스트 B)를 교차해서 읽음으로써 막혔던 역사적, 문학적 상상력의 지평을 보다 넓힐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교차읽기는 전문가의 고유영역을 넘어서 텍스트를 읽는 안목을 제공해준다. 교차읽기는 성격이 다른 두 텍스트를 읽으면서 새로운 역사적 문학적 상상력을 발견해내는 독서 방식이기에, 그것을 읽는 이들이 다양할수록 그 상상의 폭과 깊이가 넓어질 수 있다.

세 번째 유용성은, 교차읽기라는 방식이 골방에서 수행하는 연구자 개인의 고독한 작업이라기보다는 독서공동체와 친화적인 해석 방식이다. 다양한 전문적 지식과 관심을 가진 이들이 서로 대화를 나누며 독서를 수행할 때 교차읽기는 더 멋진 결론에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즉 그것은 연구자 개인의 능력보다는 독서공동체의 집단지성을 강조하는 방식이다.

이런 문제의식 아래 나는 제주4.3진상조사보고서(이하 보고서)사사기19~21장을 함께 읽음으로써, 포스트콜로니얼 교차읽기를 시도하기로 결정하였다.

 

두 텍스트

 

제주4.3사건의 역사화는 먼저 기억하기에서 시작한다. 보고서는 제주4.3사건에 대한 국가적 공식기록으로 인준되어 선포되었다. 그 자료는 온오프라에 공개되었고, 영어로도 번역하여 전 세계로 공지되었다. 하여 이 사건에 대한 학문적 연구는 보고서의 기록에서부터 시작한다. 또한 2006년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보고서에 기초하여 국가폭력에 대한 공식사과를 선언했고, 2018년에는 직접적 가해자인 군과 경찰이 사과를 표명했다. 제주4.3평화재단이 설립되고, 사건의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포고되며, ‘4.3희생자 추념일을 국가기념일로 공포했다. 그밖에도 수없이 많은 4.3 관련 국가프로젝트들이 진행되었고 현재 진행되고 있으며 앞으로 진행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제주4.3사건은 한국에서 진행된 과거사 청산 사건 중 가장 빛나는 이행기 정의(transition justice)의 사례로 꼽힌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의 핵심에 보고서가 있다.

사사기는 기원전 12~10세기 경에 존속했던 부족연합 이스라엘에서 일어났던 일들에 관한 에피소드적 기록이다. 그 기록을 최초로 남긴 이들은 기원전 7세기 말 유다국 요시야 왕실의 서기관들로 보인다.* 하여 이 텍스트는 요시야 왕실이 선포한 국가의 공식기억이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보고서의 제주4.3사건 기록과 사사기19~21장을 국가의 공식기억이라는 점에서 교차읽기 텍스트로서 유용하다.

한편 보고서194743일부터 1954921일까지 제주4.3사건의 전개 및 진상조사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 시대의 해방 이후에 대한 하나의 전망인 남한 단독정부가 출범하는 것을 둘러싸고 제주에서 벌어진 저항과 국가폭력이 다루어지고 있다. 요컨대 그 시대는 레짐(regime)의 이행기였다. 이때 남한 단독정부부터 시작되는 남한의 레짐을 나는 ‘48년체제라고 부른 바 있다.

사사기19~21장은 가나안 중부고지대에서 구축된 부족연합사회가 내외적 요인에 의해 해체되어 가는 시대에 벌어진 사회적 갈등을 다루고 있다. 군주제를 반대하는 평등사회 지향의 기조와 이상적 군주에 의한 평등사회 지향이라는 두 개의 다른 이데올로기가 이행기 이스라엘 각 부족들 간의 반목과 증오, 갈등, 나아가 전쟁의 배경이 되고 있다. 요컨대 이 두 텍스트는 이행기의 다른 이데올로기 간의 충돌을 그 내용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교차읽기에 유용한 텍스트다.

그런데 보고서‘48년체제의 해체를 지향하면서 새로운 정의를 구성하기 위한 또 다른 이행기의 문제의식으로 기획, 구성된 것이다. 그리고 사사기, 이 문서 도처에 나오기도 하거니와, 그 최종 구절에서 마치 결론처럼 제시되고 있는 그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의 뜻에 맞는 대로 하였다.”로 끝맺는다. 사사기는 유다국에서 본격적인 군주제 사회가 확립되던 요시야 왕실이 제시하는 새로운 정의를 선포하기 위한 이행의 공식기록이다. 그런 점에서 이 두 텍스트는 교차읽기에 유용하다.

 

교차읽기의 실재

 

여성주의 사회학자인 권귀숙 교수는 이승만 정권 이후 계속된 한국사회의 권위주의적 레임이 국가폭력의 불가피성 내지는 정당성을 주장해온 것에 반하여 보고서는 국가폭력이 부당하다는 증언을 중심으로 진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행기 정의를 위한 교과서적 텍스트라고 평하고 있다. 하지만 국가폭력의 부당성과 정당성, 악과 선, 패해자와 가해자 등에 대한 표준적 틀에 너무 압도된 나머지, 그런 이분법적 틀에 흡수될 수 없는 소수자의 기억들, 특히 여성의 기억들이 왜곡되거나 망각되는 점이 아쉽다는 평가를 내린다. 그 결과 미시연구로서의 여성에 관한 반기억혹은 대안기억에 관한 연구가 대단히 미흡하게 되었다는 문제를 지적한다.

광주5.18사건의 경우도 비슷한데, 경찰서에서 총기를 탈취한 시민군이 가족을 살해하는 사례가 두 건이 있었지만 민주정권에 의한 공식기록에서 삭제된 것은 암암리에 알려진 사실이다. 이때 죽임당한 가족의 목소리는 은폐되어 있다. 한편 제주4.3사건에서 서북청년단이 제주도민을 학살한 뒤 생존한 여성을 아내로 삼아 제주에 정착했다는 보고들이 있는데, 가족이나 친지, 이웃을 살해한 가해자의 아내가 된 이의 트라우마, 혹은 그것을 견뎌내면서 일어날 수 있는 기억의 왜곡 현상 등에 대해 어떤 연구도 주목하지 않았다. 이것은 가해-피해의 이분법으로 충분히 수렴될 수 없는 사례인데, 공식기억에서는 망각되었다.

사사기19~21장은 부족연합 해체기에 연합이 두 진영으로 양분되어 가는 상황을 다룬다. 한편에는 반군주제적 평등주의라는 부족연합의 전통적 가치를 수호하려는 에브라임 족 중심의 연합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이상적 군주에 의해 수호되는 평등주의를 주장하는 새로운 세력인 베냐민 족 중심의 연합이 있었다.

베냐민 족이 주장하는 이상적 군주의 필요성은 두 가지 요인에 대한 현실주의적 대안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대내적으로 평등주의가 깨진 현실과 관련이 있다. 아들만 70명이 있었다는 므낫세 부족의 불세출의 영웅 기드온(사사기8,30)이나 권력남용과 착취 행위를 일삼았다는 실로의 제사장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사무엘기상2,13~14), 그리고 권세가 막강한(hayil gibbor, 사무엘기상9,1) 집안 출신이라고 묘사된 사울 등은 평등주의가 무너지고 권력화 현상이 이미 심화되고 있는 주요 사례들이다. 대외적 요인은 더욱 결정적인데, 도시가 발달하지 않은 이스라엘 부족연합과는 달리, 도시 중심의 부족연합체, 그러니까 계급분화와 권력집중이 보다 두드러진 블레셋 부족연합체의 팽창주의가 이스라엘에 심대한 위협이 되고 있었다. 이미 단 족속은 골란고원 지역으로 집단 이주를 해야 했고 많은 부족들이 연합에서 이탈하지 않을 수 없는 위기에 놓였다. 이는 이스라엘을 대동단결하게 하는 존재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증폭시키는 계기가 된다. 그것은 권력집중에 대한 요청이기도 하다.

아무튼 두 개의 다른 이상으로 인해 에브라임과 베냐민, 이웃하는 두 라이벌 부족 간에 서로에 대한 부정적 감정이 점점 악화되어갔고 때로 치명적인 갈등으로 표출되기도 했다. 19장은 바로 그런 현상을 반영하는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에브라임 지역에서 레위인으로 일하는 한 남자가 베냐민 지역을 대표하는 기브아 마을**에서 모욕을 당했다. 이때 윤간당한 아내의 신체는 남편인 에브라임의 레위인을 향한 기브아 열혈청년들의 증오의 대체물이다. 그리고 죽은 아내의 신체는 레위인의 상한 분노를 응징해주는 도구다. 또 에브라임 부족의 관점에서는 불온한 사상의 중심지인 베냐민족을 응징하기 위해 연합군을 동원해내는 도구다. 한편, “이런 수치스런 일은 없었다.”는 반복되는 문구에서 시사되고 있듯이, 요시야 왕실의 서기관들인 편집자들에게 윤간당해 죽은 아내의 신체는 왕 없는 시대의 야만스러음을 증언해주는 도구에 다름 아니다.

수치스런 일에 대한 응징을 명분으로 하는 전쟁에서 에즈라임 연합군이 승리했다. 그 마지막은 패자에 대한 처절하고 잔혹한 살상이다. 종족이 멸족될 만큼 무자비한 살상이 있었는데, 죽임당한 이들은 그 전쟁의 귀결에 관한 디테일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 베냐민 전사들의 죽음에는 허황되나마 숫자와 지역이 명시되지만, 나머지 사람들의 죽음은 그 성읍에서 사람이나 가축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모두 칼로 쳐서 죽였다. 그들은 그 일대의 성읍도 모두 불살랐다.”(사사기20,48)는 포괄적 묘사만 등장한다. 여성, 노인, 아이, 가축, 더 구체적으로 가면 빈민, 장애인, 유민(게르) 등이 다수 죽었을 것이다. 그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은 이 두 이데올로기와 별로 관련도 없고 그런 사회적 발언권과 위상도 갖치 못했다. 하지만 그들도 비참한 죽임을 면치 못했다. 그럼에도 그들의 죽음은 병사의 죽음에 의미와 가치가 흡수되어 있다.*** 또 요시야 왕실 서기관도 그들이 어떻게 고통을 겪었는지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때 벌어진 수치스런 일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그렇게 전쟁은 끝났다. 하지만 아직 끝이 아니다. 이 그로테스크한 전쟁의 참상에 대해 논할 것이 두 가지 더 있다. 하나는 베냐민을 응징하는 전쟁에 동참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길르앗 족은 부족연합에서 아예 제거되었다. 입다는 길르앗 족 인물이지만 므낫세 부족 출신으로 묘사된 것으로 보아서는, 길르앗 족은 부족연합에 관한 공식적 기억목록에서 제거된 종족임을 시사한다. 언제 제거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에브라임-베냐민 전쟁이 이 기억처벌의 요인이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뿐만 아니다. 에브라임 연합군은 길르앗 족속을 무차별 학살했다. 다만 남자와 동침한 적이 없는 젊은 여자만은 살려두어, 베냐민의 종족 보전을 위한 생식의 도구로 만들었다.

둘째는 실로에 대한 응징이다. 실로는 성소를 중심으로 하는 제사장 집단과 깊은 관련이 있는 족속으로 보이는데, 이곳은 이상적 군주제이데올로기의 종교적 진원지였던 듯하다. 사울을 지지한 사무엘, 여로보암을 지지한 아히야, 다윗을 지지안 아비아달, 이들이 모두 실로 계열의 제사장들이었다. 그러나 군주제 시대로 이행한 뒤 실로는 역사 속에서 거의 어떠한 역할도 하지 못했다. 어쩌면 이상적 군주제, 정작 군주제사회가 도래한 이후에는 불온한 이데올로기로 취급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곳의 최후를 상징하는 듯한 묘사가 여기에 나온다. 실로의 여자들은 패배하여 멸족의 위험에 놓인 베냐민의 생존한 남자들에게 납치되어 베냐민족의 종족보전을 위한 도구적 신체로 묘사되어 있다. 그런데 길르앗 여자들의 가해자는 전쟁의 상대세력인 여로보암 연합군이었지만, 실로의 여자들에게 가해자는 이 전쟁의 동맹 세력이던 베냐민 사람이라는 점이다. 제주4.3사건 당시 서북청년단의 만행에 관한 증언에서 체포된 마을사람들이 자신의 가족일 수도 있고 가까운 지인일 수도 있는 이를 집단적으로 잔혹하게 짓밟아 형체도 알아볼 수 없도록 죽게 했다는 것처럼, 피해자들끼리 그 안에서 더 약한 자에게 잔혹행위를 강요하는 사례가 실로 사건에서도 엿보인다. 그런데 실로의 경우는 더욱 심각하다. 여자들이 축제 때 동맹세력인 베냐민 족 남자들에게 납치되었다고 했는데 그 과정에서 그녀들의 가족이나 이웃이 베냐민족에게 살해되거나 폭행을 당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런데 그런 가해자들의 아내로 살아가야 했던 실로의 여자들이 그 기억을 증언한다면, 이 전쟁은 어떻게 묘사되었을까. 물론 사사기에는 그것에 관한 어떤 기억의 흔적도 없다.

 

교차읽기와 교회/신앙공동체

 

교차읽기를 통해 우리는 사사기19~21장의 망각되거나 왜곡되었을 기억들을 발견할 수 있다. 한편 이런 성서 읽기는 제주4.3사건의 공식적 기록인 보고서나 이후 대부분의 연구에서 남겨져 있지 않은 사건들을 새롭게 연상할 수 있게 한다. 기존의 텍스트에서 미처 읽지 못한 것을 해독할 수 있고, 아예 누락되었을지도 모르는 사건들을 추정해낼 수도 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공식적 진상규명의 텍스트를 보완할 수 있고, 보다 완성도 높은 고통의 역사화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일상에서 일어나는 무수한 사건들을 다시 읽어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작업이 교회의 성서 읽기 모임에 활용될 가능성에 주목한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이러한 교차읽기는 여러 사람들의 대화나눔을 위한 상상력을 촉발하는 데 유용하며, 그것은 교차읽기의 내용을 보다 충실하게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내가 이 작업에서 감당할 수는 없지만, 교차읽기를 교회 프로그램화하는 후속 기획이 다양한 장에서 더 논의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후주]

* 그 이전에 이스라엘국에서 최초의 문헌적 기록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존하지 않는다. 또 이후 이 문헌이 어떻게 어떤 과정으로 수정 첨삭되었는지에 대해서도 논의가 분분할 뿐 어느 것도 아직 유력한 가설적 지위로 평가받지 못하는 형편이다. 하여 여기서는 최초 기록의 시간을 요시야 시대로 가정할 것이고, 명확한 후대적 첨삭으로 추정되는 것 이외의 대부분이 이 시대에 형성되었다고 전제하고자 한다.)

** 베냐민의 권세가 막강한집안 출신 사울이 기브아 출신이라는 점은 이 지역이 베냐민의 대표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 광주5.18사건 때에 도청에서 최후의 전투를 벌이다 사망한 17인 중 대부분은 언더클래스였음에도 그들은 공식기억에서 윤상원에 의해 과잉대표될 뿐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다. 또 그런 기억 누락의 맥락에서 5.18에 관한 이행기 정의를 위한 기획들이 촘촘이 구성되엇다. 결국 ‘5.18민중항쟁을 계승한다는 민주정권이 구현하려 했던 사회의 기획 속에 언더클래스는 거의 부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