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선] (2019. 01+02)에 실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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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회심’의 역사, 그 만들어진 기억에 대하여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져 나가고, 그는 시력을 회복하였다.
―〈사도행전〉 9,18
바울의 인생에 극적인 반전이 일어나는 순간을 〈사도행전〉 9장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다마스쿠스의 그리스도파를 처단하겠다고 살기등등하게 나선 열혈청년 바울이 성에 거의 당도했을 무렵, 이제 드디어 그 일을 실행에 옮길 때가 왔다는 잔인한 설렘에 빠져 있던 순간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는 음성과 함께 강렬한 빛이 그에게 뿜어 나왔고, 그는 실명하게 되었다. 한데 자칫하면 바울의 희생자가 될 수 있었던 다마스쿠스의 그리스도파 인사였던 하나니아스(Hananias. 아나니아)라는 이가 주님의 명을 받아 그의 시력을 회복시켜 주었다고 한다.
고대 ‘서방교회의 아버지’라는 가부장적 표기의 주인공 아우구스티누스는 밀라노의 한 정원에서 성서를 읽는 중에 회심을 경험하였다고 하는데, 《고백록》에는 그 순간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그 문장1)의 끝에 이르자 그것은 눈 깜짝할 사이에 나의 마음 안에 넘쳐 들어오는 신앙의 빛 같았고 의심의 모든 어둠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바울의 ‘개명’(開明) 체험처럼 그의 회심 순간이 어둠에서 빛으로의 전환으로 해석되고 있다.
실은 〈사도행전〉 9장도 초기 그리스도파의 한 저술가가 묘사한 해석이었다. 그 극적인 묘사가 하도 인상적이어서 아우구스티누스의 경우처럼 회심자의 전형적인 고백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조선 기독교의 아버지’라는 또 다른 가부장적 별칭의 주인공 길선주도 바로 그렇게 자신의 회심을 진술한 바 있다. 그는 19세 때 도교에 입문하여 열렬한 수행을 거듭하다가 27세 때 성서를 접하게 되었고, 그 이듬해에 “길선주야 길선주야”라고 부르는 음성을 듣고 회심의 길에 들어섰다고 고백하였다. 여기에 그의 시력회복의 이야기가 겹쳐지면서 그의 회심 설화도 〈사도행전〉의 전형을 따르게 된다. 도교 수행자들은 ‘불로장생’을 갈망하는 격한 수련을 했는데, 아마도 그 과정에서 그는 선약(仙藥)을 복용하다 거의 실명상태에 떨어지게 되었던 듯하다. 그런데 개신교로 개종한 이후 선교사의 도움으로 현대의학을 통해 시력을 어느 정도 회복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그는 이렇게 간증했다. “과거엔 눈이 멀었지만 이젠 본다.”
그런데 그가 보게 된 것은 무엇일까? 아우구스티누스와 〈사도행전〉의 바울은 무엇을 보았을까?
도교에 입문한 18세(1887년)의 길선주가 추구한 것은 조선을 통제하는 지배체계인 유교질서가 몰락하고 있는 상황에서 대안적 진리를 향한 열망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는 유교질서에서 이탈한 적지 않은 젊은 지식인들이 그런 마음으로 속속 도교에 입문하였다.
그런데 1894년 7월에 청・일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해 9월 평양에서 양국군 수만 명이 대대적인 전투를 벌였다. 잔인한 사악함이 극에 달한 이 전투를 본국 선교국에 보고한 미국 북감리회 선교사 스크랜턴(William B. Scranton)은, 다소 과장되었지만, 그 참혹함을 더없이 적나라하게 표현한 바 있다. “8만 명의 거주민 중 남은 이들은 불과 몇백 명에 지나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지만 재앙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지만 군대가 휩쓸고 지나간 직후엔 콜레라가 대대적으로 유행했다. 그리고 기아와 질병이 덮쳐왔다.
이런 극한적 재앙에 대해 조선 정부는, 사전이든 사후든,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하여 백성들은 마음속에서 유교에 기반을 둔 조선 정부가 사실상 몰락한 것으로 기억하게 되었을 것이다. 물론 청국도 일본도, 악마의 표상 바로 그것에 다름 아니었다.
그 3년 뒤인 1897년, 29세의 길선주는 기독교로 개종한다. 그렇게 잔인한 전쟁이 벌어지고 혹독한 재앙에 휩싸인 조선의 백성들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서양의 종교인 기독교가 더 큰 진리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였던 것이겠다.2)
도교에서 빠르게 지도자로 부상했던 그는 개신교로 개종한 후에도 금새 매우 영향력 있는 인사도 부상했다. 누구보다도 헌신적인 신앙인이자 열렬한 수련자로서, 그리고 굉장한 달변가로서 그의 지도력은 급상승하지 않을 수 없었겠다. 하여 그는 교회(장대현교회)의 엄청난 성장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쳐 개종한 지 4년 만인 1901년에 장로로 피택(被擇)되었다. 또한 평양 지역의 유력인사가 되어, 1898년에는 양전백, 안창호 등과 함께 독립협회 평양지부를 창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의 미친 존재감은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에서 절정에 이른다. 부흥사로서 이 대부흥 현상을 이끌었고, 그해 평양신학교 최초의 졸업생 7인의 한 명으로 목사 안수를 받게 된다. 그리고 전국을 순회하며 부흥회를 이끎으로써 조선 기독교 최고의 지도자가 된다.
그렇다면 그가 개종함으로써 ‘보게 된 것’은 조선의 미래가 아니었을까. 부패하고 무능하여 내적으로 몰락하고, 강력한 외세의 침탈로 외적으로 몰락하고 있던 조선, 하여 그 나라의 백성이라는 이유로 온갖 고초를 겪고 있는 이들에게, 부유하고 강력한 서양 나라들의 신인 그분이 내려주는 그 미래 말이다. 청국도 일본도 능가하는 나라들의 신, 그 신의 가호를 받게 될 조선의 백성에 관한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하여 그가 보게 된 것은 불가피하게 ‘정치적’ 성격을 지닌다. 요컨대 도교에서 개신교로 개종하고 장로교 목사가 되며, 대대적인 부흥사로 전국을 누비는 그의 신앙 안에는 정치적 해방의 꿈이 뒤얽혀 있었다는 것이다. 그 자신 또한 고통당하는 조선의 백성이었기에 그에겐 이런 꿈은 자연스런 것이었겠다. 그 꿈이 세계를 너무나 순진하게 읽은 것임은 말할 것도 없지만, 그럼에도 그의 열렬한 바람의 이면에는 조선 민중의 절망을 직시한 정치적 문제의식이 깔려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에게 신학교육을 시키고 목사 안수를 베풀었던 선교사들의 가르침에는 조선 민중의 정치적 해방이라는 항목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런 교육과정을 누구보다도 충실히 수행하여 졸업생 7인 중 첫째 반열에 있는 자로서 그의 신앙의 언표에는 정치적 해방의 요소가 완전히 배제되어 있었다.
필경 그는 양자 사이에서 내적인 분열을 일으키고 있었던 듯하다. 하여, 앞서 말했듯이, 독립협회 평양지부 설립에 적극 참여했을 것이다. 그의 장자인 길진형은 ‘105인 사건’으로 체포(1911)되어 이루 말할 수 없는 잔혹한 고문을 받으며 유죄가 확정되어 2년간 수감생활을 한 후 출소했지만 몇 년 뒤 그 후유증으로 26세에 요절했고, 차남인 길진경은 3.1운동에 참여하여 1년간 징역살이를 했으며, 훗날 참여적 기독교 교회들의 연합체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의 총무를 지냈고, 반독재민주화운동에 가장 적극적인 교단인 한국기독교장로회의 총회장을 역임했다.3) 그리고 삼남인 길진섭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했고, 1948년 월북했다. 이렇게 길선주 목사의 세 아들 모두가 정치적 진보의 노선에서 열렬한 활동가였다는 사실은 그의 가족의 분위기를 짐작하게 한다.
집안에서 아들들과 조선 민중의 해방의 꿈을 공유했을 것으로 보이지만, 그는 교회의 지도자로서 선교사들과 동역자들의 반(反)정치적 신앙 노선에 충실함으로써 아들들과 반목하기도 했을 법하다. 어쩌면 그는 누구보다도 교회의 신앙 노선에 철저한 이였기에 내적 분열을 스스로 용납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의 분열은 무의식의 영역에서 작동했을 수도 있다. 아무튼 분명한 것은 그의 삶은 그의 신앙적, 정치적 모순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한 실례가 3.1독립선언에 서명한 지도자로서의 행보에서 나타난다. 그는 33인 중 기독교를 대표하는 이들 중 하나였다. 특히 그는 한국개신교를 사실상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평안도의 개신교 대표자였다. 3.1만세운동이 가장 처음 본격화된 곳이기도 하고 또 가장 격렬하게 전개된 지역이었다. 바로 그런 곳의 대표자인 것이다. 교회 지도자로서의 위상뿐 아니라, 평양 독립협회를 이끌기도 했고 아들들의 적극적인 정치적 행보 등에서 그의 지도력은 3.1독립선언 당시 그 정치적 해방 투쟁의 대열에서 이 지역 지도자로 지목되기에 터무니없는 인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3월1일 선언문 낭독의 자리에 참여하지 않았고, 뒤늦게 서울로 상경하여 바로 종로경찰서로 가서 자수하였다. 심문조사를 받으면서도 시종 독립선언서를 모른다고 했고 모든 책임을 이승훈에게 돌리는 비겁함을 보였다. 어쩌면 8년 전 105인 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불과 이태(1917년) 전에 사망한 큰 아들로 인해 상처받은 가족을 떠올려야 했을지도 모르겠다. 또 그를 주목하는 선교사들과 교회지도자들의 의심의 시선을 의식했을 수도 있다. 아무튼 대단한 기독교 지도자 길선주의 3.1운동 당시 행보는 너무나 평범했고 지질했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중 32인이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는데, 그중 그는 유일하게 무죄선고를 받았다. 이것은 그에게 치명적인 낙인이 되었다. 사회주의 계열의 청년들은 그를 더 이상 지도자로 추앙하지 않았고 심지어 ‘적’으로 지목하여 공격을 가하기도 했다. 또 자신이 목회자로 시무하던 교회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그렇게 됨으로써 이제 그의 행보는 명료해졌다. 철저히 정치적 행보와 단절하게 된 것이다. 재판에 계류되어 있던 2년간 감옥에서 〈요한묵시록〉을 무려 1만2천 번 읽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 탈정치적 신비주의에 확고하게 몰두하게 되었다. 이 묵시록은 그런 의미로 해석되었다. 3.1운동의 대열, 나아가 조선 민중의 정치적 해방의 대열과 철저히 단절하는 신앙을 선택하기 위한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과거엔 눈이 멀었지만 이젠 본다.”고 하는 간증은, 형식에선 도교에서 개신교로 개종하던 1897년의 고백으로 진술하고 있지만, 실은 이 고백은 훗날에 회고한 것이었다. 그 회고의 시점은 그가 탈정치적 신비가로 전향한 1920년대 이후의 어느 시기다. 그리고 이 고백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는 보수적인 주류개신교의 반민중적 신앙계보의 원초적 고백처럼 받아들어져 왔다. 그런 원초적 고백의 발원지로 추앙된 길선주는 ‘한국개신교의 아버지’로 불리게 되었다. 그렇게 한국개신교의 탈역사적이고 탈민중적인 내세주의 신앙은 자신의 계보의 조상을, 그리고 그 원초적 고백을 되뇌며 오늘의 견고한 신앙양식을 구축했다.
그리고 그런 신앙의 계보를 더 위로 올려 아우구스티누스와 바울의 눈을 뜨이게 한 사건을 탈역사적이며 탈민중적인 내세주의에 맞추어 해석해냈다. 이렇게 길선주를 중심으로 하고, 그 앞과 뒤의 신앙에 관한 역사적 기억이 만들어졌다. □
[각주]
1) ‘그 문장’이란 〈로마서〉 13,14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으십시오. 정욕을 채우려고 육신의 일을 꾀하지 마십시오.“이다.
2) 그에게 ‘기독교’란, 구체적으로 말하면, 미국 북장로회 계열의 개신교 교파인 장로교를 의미했다. 하지만 이 맥락에서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장로교가 아니다. 단지 그가 서북지역의 인사였기에 그 지역 선교을 담당하던 미국 북장로회 계열의 장로교로 개종한 것이다.
3) 1961년 인도뉴델리 3차 총회 이후 세계교회협의회(WCC)는 한국사회변혁운동에 본격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그해 WCC와 관계를 맺는 한국측 기독교대표기관 역할을 했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의 총무가 바로 길진경이었다. 그리고 NCCK 가맹교단 가운데 진보적 담론과 활동을 가장 적극적으로 수용한 교단은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였는데, 그 무렵 ‘기장’의 총회장이 길진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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