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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소위 ‘정교분리의 원리’라는 것의 해체에 관하여

이 글은 '종교인의 정치개입의 한계와 정치적 표현의 헌법적 통제 가능성'(종교자유정책연구원 주최. 2019.12.23. 국회의원회관 제1간담회실)에서 송기춘 교수(전북대 법학전문대학원)의 발제글 종교인의 정치적 활동과 표현의 자유와 그 한계〉에 대한 논평글입니다. 이 토론회의 발제글과 토론들은 http://www.bulkyo21.com/news/articleView.html?idxno=44688에서 동영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발제글인 송기춘 교수의 글은 이 주제에 대해 손색없는 훌륭한 글입니다. 제가 여기서 공개할 수는 없으니, 글의 전문을 보려면 종자연에 문의해 보시길 바랍니다.  손 교수의 글에 대한 저의 토론문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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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정교분리의 원리라는 것의 해체에 관하여

송기춘 교수의 종교인의 정치적 활동과 표현의 자유와 그 한계에 대한 논평

 

 

 

1성서(구약성서)에는 극형에 처할 범죄를 다루는 두 가지 다른 법률적 텍스트가 수록되어 있다. 하나는 출애굽기20,12~17, 아마도 기원전 7세기 말 유다국의 요시야 왕실에서 만든 것으로 보이고, 다른 하나는 레위기20,2~24, 유다국이 멸망한 지 수세기가 지난 페르시아 식민지 시대나 헬레니즘 제국인 이집트 제32왕조(편의상 프톨레마이오스 제국이라고 부른다.) 식민지 시대, 그러니까 기원전 5세기 초에서 3세기 사이에 형성된 것이다. 여기서 전자는 극형에 해당하는 명명백백한 범죄를 다루고 있는 반면, 후자는 대부분 가족 내부에서 벌어지는 특정한 성행위들을 극형죄 항목으로 적시하고 있다. 전자는 단 5개 항목으로 되어 있는 데다, 굳이 문서로 작성하지 않아도 될 만큼 오래전부터 명명백백하게 극형에 해당하는 범죄로 알려진 것들이다. 반면 후자는 15 또는 16개 항목으로 되어 있어 기억하기엔 너무 많고, 그 항목들 대부분이 사형죄라고 하기엔 너무 사사로운 것들이다. 더구나 그 성행위들은 대개 가족 내부에서 은밀히 벌어지는 일이어서 외부로 공공연히 알려지기가 쉽지 않아 당국에 적발될 가능성이 매우 낮은 것들이다. 해서 전자는 실정법으로서 활용되었던 법전의 일부로 보이고, 후자는 (법률 텍스트처럼 보이지만 실은) 법의 통치를 실현할 만한 발달된 정치체제가 형성되지 않은 상황에서 여러 정파들이 주도권갈등을 벌이는 중에 활용되었던 이데올로기적 도구인 것으로 추정된다.

법의 문외한이 감히 법에 대해 얘기하기란 꽤나 부담스런 일이지만, 성서해석자로서 성서 텍스트에 대한 법제사적 해석을 간략히 언급하면서 말하고 싶은 것은 정교분리의 원리라고 불리는 것이 헌법적 원리로서 적절한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자 함이다.

신정일치를 주장하는 일부 국가들을 제외한 세계의 많은 나라들은 정교분리의 원칙을 종교와 정치의 관계에 관한 헌법적 원리의 하나로 제정하고 있다. 물론 한국도 그런 정교분리론을 헌법적 원리로 하고 있다. 한데 문제는 정교분리의 원칙이라는 것이 과연 종교와 정치의 관계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가 모호하다는 데 있다.

송 교수가 요약하고 있는 대로, 정교분리의 원리를 가장 먼저 헌법의 원리로 사용한 미국의 경우, 미국 침례교의 교조라고 할 수 있는 로저 윌리엄스(Roger Williams)는 급진적 청교도 일파가 주장했던 세속주의 성향이 강한 회중교회론자들의 신정국가 담론에 대해 반대하면서 교파주의 운동의 자율성을 확보하기 위해 정교분리를 주장했다. 그런데 또 다른 정교분리론의 기수인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은 그와는 반대로 신정국가 담론에 대해 세속국가론을 폈다. 특히 신학자이자 성직자인 로저 윌리엄스와는 달리 그는 정치인으로서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주들(states) 간의 네트워크체로서의 연방국가의 성격을 논하면서 정교분리론을 주장한 것이다. 사실 미국의 많은 주들(the respective states)은 개신교의 특정 종파 세력이 주도하면서 형성발전되었기 때문에, 각 주마다 그 영역들을 주도하는 종교권력들의 정치세력화가 뚜렷했다. 그러나 연방국가(the united states)의 정부는 어느 주의 종교와 정치에 치우치지 않는 중립성을 가져야 한다는 취지였다.

한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김종필은 독재정치에 반대하는 기독교 진보인사들을 비판하면서 그들이 정교분리의 원리를 어기고 있다고 주장한 반면, 장경동 목사는 차별금지법의 동성애 문제, 사립학교법 문제, 교회건축 기반시설부담금(200이상의 건축물 신·증축 때 추가 기반시설 설치 비용을 건축주에게 일부 물리는 제도) 문제 등, 한국의 민주정부들이 정교분리의 원리를 거스르는 것을 비판하면서 기독교정당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즉 정교분리의 원리를 지키는 국가를 만들기 위해 기독교의 정치세력화가 필요하다는 논리다. 반면 개신교정당 운동에 대해 반대하는 다른 개신교 인사들은 이 행동이야말로 정교분리를 어기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국이든 미국이든, 또 정교분리론의 또 다른 원조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의 경우든 정교분리론은 그때마다 다른 용례로 정교분리의 원리를 나름대로 해석했다. 즉 정교분리의 원리는 대다수 기독교인들과 심지어 기독교도가 아닌 많은 이들에게도 종교와 정치의 상관성을 논하는 원리로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그것이 함축하는 기조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다양한 운동과 결합되어 사용되어 왔다. 그런 점에서 나는 헌법상의 정교분리의 원리라는 것은, 우연히 세계의 무수한 국가들의 헌법 속에 들어와 있지만, 법률해석의 준거가 될 수 없는, 일종의 이데올로기적 도구에 다름 아니었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나는 정교분리에 관한 하나의 헌법적 원리라는 것은 사실상 폐기된 법적 가치로 보아야 한다고 본다. 실제로 정교분리는 무수한 법해석가들에 의해서 오용되어 왔다. 송 교수가 발제글에서 길게 인용하고 있는 안대희 대법관 등이 쓴 대법원 판결문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문제의 재판은 군종장교가 다른 종교를 비방하는 책자를 만들고 배포하는 것, 그리고 그런 취지에서 다른 종교를 비방하는 설교를 하는 것이 타당한가에 대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그 판결문을 작성한 대법관들은, 놀랍게도, 종교가 선교목적의 활동을 하면서 다른 종교를 비방하는 것에 대해 국가가 왈가왈부할 수 없다는 취지를 말하고 있다. 그 준거는 헙법상의 정교분리론이다.

이 판결문은 사실상 법적 준거가 될 수 없는 것이 법적 준거인 것처럼 작동할 때 그것이 얼마나 법을 희화화할 수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국가가 종교의 선교활동에 개입할 수 있는 명확한 지점은 어디인가? 아니, 종교의 선교활동의 경계는 명료한가? 어떤 종교가 선교활동의 일환으로 이단종파의 신자들을 집단학살했다면 그것은 종교의 선교활동인가 아닌가? 이때 법률가는 소위 엉터리 법률가가 될 소지가 농후하다. 법의 잣대가 가능한 한 공명정대하게 작동할 수 있게 하기보다는 특정 집단 혹은 종교를 옹호하는 논거로, 정교분리처럼 역사적으로 무수히 많은 활용례를 가진, 해서 그 함의가 아무것인 이른바 원리를 들이대는 일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사랑의교회가, 무수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공공도로의 지하공간을 일정 부분 점용하면서까지 교회당 건축을 단행할 수 있었던 것도 결국은 법적 준거가 명료하지 않은 요소들을 헌법이 내포하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이 교회는 한국에서 가장 강력한 법조선교팀을 가진, 일종의 법률적 종교제국이었다. 하여 이 교회는 법을 통해 사적 이익을 관철시킬 능력이 가장 막강하다는 의심이 세간에 널리 펴져 있었다. 사상 유례없는 어마무시한 초대형교회당 건축이 논란이 되면서 세간의 비판이 이 교회를 향해 집중되자, 뜻하지 않게 담임목사의 학력 위조 등의 비리사실들이 공론화되었고 그 과정에 저 막강한 법조선교회가 무기력해졌다. 한데 만약 법조선교회가 그 전처럼 잘 작동하고 있었다면, 불법건축에 관한 소송에서 교회의 패소로 대법원 판결이 나는 일이 가능했을까. 법률가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시민들은 법이 그렇게 활용될 가능성에 대해 의심을 품고 있다. 그런 의심의 배후에는 아무렇게든 특정 집단에게 유리한 법적 논리를 구성하는 것이 가능한, ‘플라스틱한 헌법적 원리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 맥락에서 종교와 정치, 특히 개신교와 정치의 문제에서 법률이 부적절하게 활용되어 온 것에 대해 비판하는 송 교수의 발제에 대해 나는 많은 부분 공감하지만, 그런 비판의 원리가 송 교수가 재해석한 정교분리의 원리라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어렵다. 그것은 이미 서양에서부터 엉터리로 적용된 잘못된 헌법적 원리다. 한국사회를 설계하는 과정에서 헌법 전문가들이 종교와 정치의 관계에 대해 깊은 식견이 없는 상태에서 서구국가들이 채택해온 그런 엉터리 헌법 원리들을 무비판적으로 참조한 결과일 것이다.

최근 한국의 시민사회는 일부 개신교 엘리트들이 공공연히 벌이고 있는 안하무인 같은 무뢰배적 행보에 신경이 곤두서 있다. 그들이 타인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듯 자기중심적 행동을 제멋대로 자행하고 있는데, 보통의 사람들에게 그토록 야박했던 법은 어떻게 저런 행동들에 대해 아무런 제재를 하지 않을까, 아님 못 할까.

내가 보기엔 이제 필요한 것은, 정교분리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퇴출하는 일이다. 그리고 종교가 사회의 변화에 개입할 때 공공적인 것이란 어떤 것인지에 대해 묻는 것이다. 공공적인 것에 대해 신학자들과 종교학자들은 사회과학자들이나 인문학자들과 더불어 논의해야 하고, 법률가들과 함께 종교의 공공적 행동을 권장하고 비공공적 행동을 제재하는 헌법의 원리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토론해야 한다. 그리고 각 종교의 구성원들은 시민사회의 각 범주에서 함께 공공적인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종교적이고 세속적인 가능성들을 찾아내는 실천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