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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존 프락터, 아서 밀러, 그리고 ‘586’

2017년 11월5일 한백교회 하늘뜻나누기 원고로 썼던 것을 수정 보완하여 [맘울림] 2019년 호에 기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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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프락터, 아서 밀러, 그리고 ‘586’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않았느냐? 그러나 너희 가운데서 하나는 악마이다.”

―〈요한복음6,70

 

 

 

 

새뮤얼 패리스(Samuel Parris) 목사가 1692327일 세일럼빌리지의 교회에서 했던 설교의 성서 본문은 요한복음6,70이다. 패리스가 하고 싶은 말은 예수의 제자들 가운데 악마가 있듯이 이 교회 안에도 악마가 있다는 것이다. 이때는 세일럼빌리지에서 마녀재판이 시작(1692.3.1.)된 직후다.

 

그로부터 두 달이 조금 못된 주일 교회록(이 기록은 목사인 패리스의 의중이 깊이 관여되었을 것일 터인데)에는 일부 교인들이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것은 마술행위와 관련된 부당한 행위들때문이라고 적혀 있다. 그리고 3월 재판이 시작되고 기소된 사람들은 주로 교회에 출석을 잘 안 하는 사람들이 악령 들린 자라는 이유로 기소되었다.

재판은 15개월 간 지속되었는데 그동안 2백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기소되었고 그중 19명이 처형되었으며, 그 외에 1명은 재판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처형당했고, 5명의 아이들이 감옥 안에서 사망한다. 이렇게 총 25명의 목숨을 앗아가고서야 작은 시골마을에서 벌어진 죽음의 유희는 끝을 맺는다. 이것이 저 유명한 세일럼의 마녀사냥 사건의 개요다. 그리고 미국의 저명한 극작가 아서 밀러(Arthur Miller)1952년에 이 사건을 소재 삼아 연극 시나리오 크루서블(The Crucible)를 썼다. 그리고 1996년 헐리웃에서 니콜라스 하이트너(Nicholas Hytner)가 감독하고, 초특급 스타인 다니엘 데이 루이스(Daniel Day Lewis), 위노나 라이더(Winona Ryder)가 주연한 동명의 영화가 이 시나리오에 기초하여 제작되었으며, 많은 관객이 찾지는 않았지만 한국에서도 상영되었다(1997).

내가 속한 한백교회에서는 지난 2017년 크리스마스 때 연극배우 심영민이 연출을 맞고 교인들 다수가 참여하여 감동적인 극을 공연하기도 했다. 아마추어들이 만든 한 작은 교회 연극에 대해 한 출판에디터는 진짜 연극배우들이 하는 줄 알았다고 놀라움을 표현했다. 어떤 관람자는 연극이 끝난 뒤 한참이 지나도록 연극대사가 환청처럼 들렸다고 말했다. 연출을 했던 심영민은 자신이 관계한 연극 크루서블이 지금까지 5번이나 되는데, 어느 것도 이번 공연보다 낫지 않았다고 고백한 바 있다. 나 역시 한백극단(?)크루서블의 잔상에서 한동안 벗어나지 못했다.

이 공연을 계기로 나는 아서 밀러의 원작을 주목했고 가벼운 글을 쓰게 되었다. 아무튼 이 연극에 대한 나의 이야기 장르는 비평이다. 이 연극에 대한 비평이고 이 시나리오에 대한 비평이며 나아가 그 사건에 대한 비평이다. 그리고 결국은 나 자신에 대한 비평이기도 하다. 비평은, 내가 보는 바로는, 불편하게 하는 것이다. 지배적 스토리라인에서 성화된 것은 격하하고 비하된 것에서 숭고함을 읽는 것, 그것이 바로 내가 보는 장르로서의 비평의 의의다.

이 연극에서 먼저 맞닥뜨린 문제의식은 마지막 4막이었다. 존 프락터(John Proctor. 다니엘 데이 루이스 분)가 갑자기 저 미친 마녀 놀이에 저항하여 숭고한 순교자가 되는 이야기 말이다. 여성노예 티튜바와 12명의 소녀들이 주술적 춤을 추는 프롤로그(마을 뒷동산)에서부터, 소녀들의 병증을 악마의 준동으로 추론해 내는 마을 유지들의 해석의 전개에 관한 1(패리스 목사의 집), 존 프락터의 아내 엘리자베스 프락터까지 마녀로 지목되는 데까지 이르는 마녀 광풍의 어처구니없는 소용돌이를 다루는 2(프락터의 집), 그리고 소녀들과 청교도적 지도자들의 다른 종류의 광기가 일으킨 마녀재판 현장에 관한 3, 여기까지 연극은 삶의 현장에 불어 닥친 선과 악의 이분법적 질서관이 자행하는 어처구니없는 폭력을 비판적으로 그려내고 있었다.

이러한 스토리 전개 속에는 선한 이와 악한 이가 따로 있지 않다. 또 주인공이 고정되지 않고 보기에 따라 각각의 인물이 주인공처럼 보이기도 하다. 이것이 내가 이 연극에 숨 막히도록 집중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였다.

누구도 특별히 선하지 않고 특별히 악하지 않지만, 그들의 삶의 현장에선 처절한 비극이 벌어져야 했다. 아서 밀러는 바로 이런 현상을 문제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 각자가 갖고 있는 삶의 스토리들이, 그 시대의 선과 악을 이분법적으로 단절시키는 억견의 질서와 결합하면서 악마적 파괴성을 드러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1692년의 사건을 다루는 시나리오를 그는 1952년에 펴냈다. 1950년부터 1954년까지 미국사회를 초토화시켰던 매카시즘이라는 20세기 미국 버전의 마녀사냥의 한 가운데 있는 시간을 그는 이렇게 비판적으로 세일럼 사건과 겹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한데 4막에서 그는 느닷없이 의인의 죽음이라는 영웅담 소재를 끌어온다. 그리고 간단히 언급된 아비가일(Abigail Williams. 위노나 라이더 분)의 도주 이야기에서 사건의 모든 악마적 전개를 아비가일에게 떠넘겨 버린다. 즉 마지막 부분에서 관객은 선한 프락터와 악한 아비가일을 대비하면서 관람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이렇게 해서 연극은 상투적 신파로 결론을 맺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앞에서 언급했듯이, 실존 인물 패리스는 마녀사냥의 해석적 실마리를 요한복음6,70을 통해 설교한 바 있다. 그런데 초기그리스도 운동 내에서도 예수가 죽임당하게 되는 복음서적 비극적 결말을 악마적 제자 한 사람의 배신의 결과로 환원시킨 것처럼, 아서 밀러도 세일럼 사건을 아비가일의 대사기극으로 돌려버린 것이다. 그렇게 절대악 하나를 지목하고 모든 죄를 그녀에게 뒤집어씌움으로써 이 사건의 공범자였던 모든 이들에게 섣부른 사면복권을 선언하고 있는 셈이다.

한편 이 연극의 내용을 좀 더 디테일하게 살피면 우리는 많은 비판적 문제제기에 직면하게 된다. 첫째는 소녀들에 관한 것이다. 소녀들은 미래의 배우자를 상상하면서 주술적 춤을 춘다. 하지만 주술적 춤은 금지된 행위다. 청교도 사회의 여성은 성적 상상력을 일으키는 그리고 이교도적 뉘앙스를 품기는 어떤 행위도 해서는 안 된다. 더구나 이 소녀들은 청교도 신앙으로 무장한 마을 유지들의 식솔이다. 하여 내면에서부터 금지된 상상이 가능하려면 질서를 이탈하는 모험이 필요하다. 바로 그것이 소녀들로 하여금 무속신앙으로의 일탈을 감행하게 하는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춤은 곧바로 마녀재판의 계기가 되지 않았다. 연극은 패리스를 자신의 음모의 공모자로 끌어들이는 아비가일을 그러한 전환의 중심인물로 설정해 버렸다. 자기 잘못을 은폐하기 위한 그의 계략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실제 사건을 다룬 기록들을 살피면, 아비가일이나 다른 소녀들은 꼭두각시인형에 가깝다. 히스테리를 일으키며 마녀사냥을 부추긴 소녀들은 일탈적 환각 속에서조차 자신의 아버지들의 상징적 질서를 대변했을 뿐, 아비들의 질서를 뒤흔드는 주범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반면 패리스와 동네 유지들이 핵심적 역할을 한다.

여기서 우리는 세일럼을 포함해서 뉴잉글랜드 지역이 미국 마녀재판의 중심지였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영국

에서 이주한 청교도들이 미국 마녀재판의 중심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당시 청교도 성직자들은 고학력의 경건한 이들이었다. 물론 패리스도 그랬다.

당시 세일럼(Salem)은 도심(타운)과 시골(빌리지)로 나뉘었는데, 이는 세일럼타운이 급성장하여 뉴잉글랜드 최대도시로 부상한 것과 연결된다. 그리고 세일럼빌리지는 도심에 가까운 서쪽과 먼 동쪽으로 나뉘는데, 서쪽은 당연히 도시적 가치와 더 잘 결합되었다면 동쪽은 전통적 가치를 더욱 강렬하게 추구했다. 그런데 패리스와 교회유력자들은 마을 동편의 유지들이었던 반면, 희생자들인 프락터 등은 서쪽편의 상인이거나 상업적 농업에 종사하는 이들이었으며 프락터를 포함해서 그들 중 상당수는 외지인이었다. 아서 밀러가 죽임당한 의인으로 설정한 존 프락터는 세일럼빌리지 서편지역에서 술집을 운영하는 이주민이어다.

한편 마녀재판에 회부되고 실형을 받아 처형된 이들은 대부분 여성이었고, 특히 남편이나 아들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남편으로부터 큰 유산을 받았거나 전문직에 종사한 여성들이 단골 마녀혐의자였던 것이다. 가뜩이나 위축된 재산을 여성에게서 빼앗으려는 의도의 ()의식적 반영으로 보인다.

 

주목할 것은 이 지역 마녀재판들에서 실형을 받은 이들은 (남성유지들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점이다. 빌리지의 유지들이 마녀재판이라는 이데올로기적 주도권을 쥐고 있었음에도 처형으로 몰아갈 만큼의 힘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일종의 상징적 대체물이 필요했던 것이다.

나의 마지막 문제의식은 프락터에 관한 것이다. 연극에서 그는 매카시즘의 희생양이면서도 끝끝내 양심을 지키며 저항했던 아서 밀러 자신과 동일시되는 캐릭터인 듯이 보인다. 그런 점에서 오늘 한국사회에서 ‘586세대와 유사하다. 역사의 희생자들로서 속물적 존재가 아닌, 양심의 지배를 받는 자의식의 존재로 말이다. 하지만 동시에 프락터는 티튜바를 가혹하게 매질하며, 마녀재판의 증거를 조작해낸 패리스 목사처럼 자신의 주장을 위해서 폭력을 자제하지 않는 존재다. 그는 그 시대의 폭력적 가부장성을 고스란히 담지한 자인 것이다.

권인숙 교수의 대한민국은 군대다가 고발하는 586세대 남성들의 마초성은 그들이 극복하고자 했던 권위주의적 지배자들의 그것과 완벽히 일치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불의한 속물적 권력의 희생자라는 자의식과 그들이 극복하려 했던 폭력적 가해자의 속성을 함께 가진 존 프락터는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50대 남성의 얼굴과 겹쳐진다. 물론 나도 그 점에서 예외가 아니다.

어쩌면 아서 밀러가 그런 것처럼 오늘의 586’도 끊임없이 자기 자신의 포악함을 은폐시켜줄 아비가일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그래야만 숭고한 희생자 코스프레를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