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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증오의 정치’의 끝에는 모두의 재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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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선] 2019년 07+08월호에 실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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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의 정치의 끝에는 모두의 재앙이

 

 

 

 

1980521일은 부처님오신날이었다. 광주항쟁 4일째 되는 날이다. 그날 1, 난데없이 애국가가 울렸다. 그리고 갑자기 무수한 총탄이 광장의 시민들의 살 속으로 파고들어 온몸을 헤집어 버렸다. 장갑차에서, 도청 옥상에서, 그리고 하늘을 휘젖고 날아다니던 헬기에서 자국민을 향해 총탄이 난사된 것이다.

자비를 가르친 부처님의 오심을 기념하는 날, 일단의 정치군인들은 자국 국민을 향해 학살극을 벌였다. 그 잔혹한 살기를

쏟아내는 신호음은 다름 아닌 애국가였다. 국가의 일원으로서 소속감과 자긍심을 불러일으키는 합창곡이 학살의 노래가 된 것이다. 1979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영화 지옥의 묵시록(감독: 프랜시스 코플러)에서 베트남의 한 마을을 헬기에서 네이팜탄으로 폭격하여 불바다로 만들어 버릴 때 헬기 스피커로 바그너의 저 유명한 발키리의 기행(Ride of the Valkyries)이 울려 퍼지는 장면을 연상하게 한다. 그래서인지 전두환 전권 시절 이 영화는 국내상영이 금지되었다.

아무튼 1980521일 이후 부처님오신날과 애국가, 이 어울리지 않는 조합은 광주의 사람들에겐 학살기억으로 자리잡았다. 불자들은 이 기억과 아무런 상관이 없지만 광주의 적잖은 사람들은 그날을 회상할 때 초파일 연등과 함께 그 끔찍한 기억을 불러와야 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39년째 부처님오신날, 그날의 상흔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은 그 잔인한 기억을 더욱 몸서리치며 맞아야 했다. 극우주의자들의 목소리가, 그때 그곳에선 남파간첩이 들끓었고 수많은 저항시민들은 실은 저들에게 사주받은 좌경화된 폭도였다는 망언들이 어느 해보다도 더 크게 증폭되어 울려퍼지고 있기 때문이다.

거리의 극우개신교 광신도들과 극우탈북자 단체의 소리만이 아니고, 어버이연합이니 해병전우회니 고엽제전우회니 하는 소수 극우단체들의 소리만도 아닌, 자유한국당 같은 극우적 정치세력과 극우적 언론들, 그리고 극우 유투브 플랫폼 등이 그 증폭된 소리의 주역들이다. 그 소음이 하도 요란스러워서 이제 많은 이들은 다시 극우주의의 망동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박근혜 정권이 출범할 때 한국의 비판적 지식사회에서는 극우주의에 대한 진지한 분석들이 줄을 이어 제기되었다. 1948년 제주 4.3 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본격적으로 등장한 남한의 극우주의체제는 박정희 정권의 장기집권과 더불어 제도화되었다가, 박정희의 피살로 내파되기 시작하면서 신군부의 십여 년 간의 집권기에 해체기에 본격 돌입했다. 그러나 극우반공주의 체제인 ‘1948년 체제는 그리 호락호락하게 소멸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김영삼 대통령 시대인 문민정부, 김대중 대통령 시대인 국민의 정부,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에 이르기까지, 우파세력은 극우적 성격이 상당히 후퇴하였다.

실용적 자유주의 정권을 표방한 이명박 대통령은 적어도 집권 초기까지는 극우적 성격이 매우 낮았지만, 천안함 사건 이후 군부, 법조계, 언론계를 아우르는 광범위한 극우세력이 빠르게 재구축되었다. 하여 그렇게 구축된 극우가 중심이 되어 우파 전체를 결속시켜 집권한 것이 박근혜 정부였다. 하지만 알다시피 박근혜 정권은 가장 처참한 극우의 실패를 보여주었다. 즉 이명박-박근혜 정권기에 극우의 반등이 있었지만 그만큼 급격한 추락을 맞이해야 했다. 우파의 내파가 그 중요한 이유의 하나지만, 극우를 제외한 진보와 중도, 온건 보수를 아우르는 시민의 거대한 결속을 통해 극우가 단죄를 받은 것이다.

아주 간단하게 훑어본 ‘1948년 체제의 형성과 와해 과정이다. 그러나 아직 70년 묵은 극우의 사회적 기반이 그리 쉽게 고갈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지난 몇 년간 목도하고 있다. 그들은 과거와 같이 정국을 주도할 능력을 갖추지는 못하고 있지만,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고 변화를 가로막기엔 모자라지 않을 만큼의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그런데 그 반대 관점에서 이야기할 수도 있다. 한국의 촛불정치는, 그 자체가 갖는 명확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적으로 높이 평가할 만큼의 기념비적 사건이었다. 서유럽과 동유럽, 그리고 남미, 아시아, 아프리카 등에서 엄청난 기세로 부상하고 있는 극우화 추세와는 다른 길을 전 세계에서 가장 분명하게 보여준 사례인 것이다.

최근 유럽과 북미를 축으로 극우주의 열풍이 다시 불고 있다. 그 근원적 이유에 대해 세계의 많은 연구자들은 신자유주의의 광폭한 질주에 대해 각 사회의 가장 취약한 계층을 중심으로 불안의 정서가 불타오르고 있는 현상과 연관시켜 해석하고 있다. 이러한 불안증에 대해 기성 정치권이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자, 극우주의가 발흥하여 증오를 부추기는 포퓰리즘을 남발함으로써 대중의 지지를 받는 데 성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 이런 대중의 불안 현상은 거대한 제국들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그리고 이들 제국들에서는 이른바 스트롱맨들이 부상하여 강력한 자국 중심주의를 드라이브 하고 있다. 이에 휘둘리는 세계의 무수한 국가들은 사회적 위기에 대응할 수단이 더욱 제한되었고 이는 극우주의 정치세력에게 더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는 셈이 되었다. 한데 한국은 예외적으로 극우주의의 확산이 시민들에 의해 강력히 제어되고 있는 상황이 펼쳐졌다. 최근 뚜렷한 극우주의 성향을 노골화하고 있는 자유한국당에 대한 시민의 물밀 같은 해산청원 사태는 바로 그런 시민적 제어장치의 한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여기서 기원전 7세기 초부터 6세기 말의 유다국을 다시 주목해 보려 한다. 오늘 우리의 시대를 읽는 역사적 안목을 얻을 수 있는 시금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때는 요시야 왕과 개혁세력이 집권하던 시절이다. 한데 그 시대는 또한 기원전 8세기 후반 아시리아가 제국으로 부상하던 시대(주1)와 페르시아가 지중해 제국인 마케도니아에게 패퇴하여 몰락하게 되는 기원전 4세기 말의 시기(주2), 그러니까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지역에서 발흥한 국가들이 거대한 제국으로 발전하면서 세계를 휘젓던 시기 사이에 낀 시대다. 하여 그때는 작지만 오랜 동안, 나름대로 번창하며 존속해왔던 견고한 국가들이 속속 몰락하던 시기였다. 뿐만 아니라 거대 제국들도 거세게 불타올랐다가 금새 사그라드는 명멸의 시대이기도 했다.

이런 제국들의 시간 한복판에 끼어 있는 기원전 7세기 초에서 6세기 말, 그 어간은 거대제국들의 시간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통치자들이 겹쳐서 등장한 때였다. 이른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스트롱맨들의 시대다.

고대메소포타미아의 제국들 가운데 가장 빛난 업적을 이룩한 제국인 아시리아의 통치자 아슈르바니팔이 그중 하나다. 그는 기원전 669~627년 동안 이 제국의 황제였는데, 아시리아가 그토록 염원하던 이집트를 정복하고 남으로 나일강 상류지역의 쿠시왕국(수단지역)에까지 영역을 확대하는 데 성공하였을 뿐 아니라, 이집트와 지중해, 시리아를 메소포타미아와 연결하는 글로벌경제를 이룩한 통치자이기도 했다. 또한 니느웨도서관을 만드는 등, 문자문화에 기초한 제국을 구축한 장본인이었다.

그가 죽자 이 나라는 내란에 휩싸이다 결국 바벨로니아제국에게 멸망하고 만다. 하지만 친아시리아 왕조로 이집트의 번영을 다시 이룩한 제26왕조를 세운 것도 아슈르바니팔의 공로였다.

이집트 26왕조의 전성기는 네코(느고) 2세 시대다. 기원전 610~595년에 재위에 있었는데, 남쪽의 쿠시왕국의 위협을 물리치고 북으로 팔레스티나와 시리아에 대한 종주권을 되찾은 통치자였다. 그리고 수에즈운하를 만들어 아시리아가 주도하는 글로벌경제시장에서 커다란 성공을 이룩하기도 했다.

그런데 네코2세는 북시리아의 갈그미스 지역에서 아시리아군과 연합하여 바벨로니아와 대규모 전투를 벌이다 크게 패퇴하여 본국으로 퇴각했고, 이후 권력이 크게 약화되어 26왕조 몰락의 계기가 된 통치자였다.

네코2세에게서 승리를 거둔 이는 바벨로니아의 느브갓네살 2(기원전 604~562). 그는 왕이 되기 전 이집트-아시리아 연합군을 격퇴하고 아시리아제국을 몰락시킨 장본인이다. 유다국도 그에 의해 역사에서 사라졌다.

이들 고대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걸출한 스트롱맨들은 강한 제국을 부르짖으면서 그 위세를 널리 떨쳤다. 하지만 그들의 발흥은 이웃의 무수한 나라들의 종말을 의미했고 무수한 대중의 재앙을 뜻했다. 한데 유다국의 요시야 왕은 바로 그 시기에 평등사회와 포용사회를 추구하는 개혁정치를 폈다. 그가 추구한 나라는 모두에게 공정하고 열린 사회였다. 귀족들에 의해 몰락하고 있던 대중의 복원을 지향했고, 제국들이 일으킨 전쟁으로 떠돌다 유입되어 들어온 난민들을 백성처럼 포용하는 나라를 만들고자 했다.

네코2세의 팽창주의는 이 개혁을 수포로 돌려놓았는데, 왕조는 몰락했어도 유다국의 대중은 그런 개혁적 사회를 향한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실은 요시야의 개혁도, 적어도 평등사회와 포용사회를 향한 개혁들은 개혁의 주요 협력세력인 암하아레츠, 곧 민중의 의지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었다. 한데 유다국의 구귀족들 일부는 증오를 부추기며 대중의 꿈이 담긴 제도들을 산산이 부숴버렸다. 왕국 멸망 이후 대중의 정치를 추구했던, 어쩌면 요시야 왕실보다도 더 적극적인 개혁정치의 상징이 될 수 있었던, 하여 급진주의적 예언자 예레미야도 열렬히 지지했던 그달리야를 암살한 것이다. 하여 예레미야 예언자는 저들로 인해 모두에게 내릴 재앙을 외쳐야 했다. 증오의 정치의 끝이 어떠한지를 말이다.

 

이제 여러분이, 가서 정착하기를 바라는 그곳에서, 전쟁과 기근과 염병으로 죽는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 두십시오.

―〈예레미야서〉 42,22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등, 한반도를 둘러싼 제국들의 통치자들은 유례없이 모두 스트롱맨들이다. 그들은 강력한 지지기반에 기초한 강한 힘의 지배력을 통해 이웃국가들을 배려하지 않는 폭력을 휘두르고 있다. 어느 국가의 제도도 여간해선 통제하지 못하는 지구가본의 횡포에 모든 나라들이 휘둘리고 있는데, 이들 제국들의 국제적 협의를 무시한 압박이 그 위에 가중되고 있다. 고대 제국들의 시대처럼 군사력에 몰락하는 일은 별로 없겠지만, 수많은 나라들은, 그 나라의 대중은 망국 백성들의 처지 못지 않게 삶이 바닥까지 내동댕이쳐지는 몰락의 위기 속으로 내몰리고 있다. 그런 와중에서 많은 사회들의 대중들 사이에서 극우주의가 불타오르고 있다. 그런데 한국만은 예외적으로 극우주의가 아닌, 더 많은 민주주의, 더 평등하고 더 호혜적인 포용국가를 지향하는 길에 들어서고 있다. 문제는 그달리야를 암살한 이들과 같은 일단의 극단주의적 반개혁파들의 준동이다. 그들은 우리 사회를 오랫동안 지속시켜왔던 냉전적 권위주의의 통제 메커니즘으로 구축된 ‘48년 체제, 그 와해되고 있는 낡은 증오의 정치를 되살리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예레미야는 25백 년의 시간을 관통해서 개혁에 분탕질하는 그런 이들을 향해 경고한다. ‘그들의 기획에 따르는 길은 모두를 비참한 죽음으로 내몰 것이다라고.

 

 

(1) 이때는 신아시리아가 제국으로 발돋음하던 기글랏 빌레셀 3세가 황제로 군림하던 시대다.

(2) 이때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결정적인 패배로 인해 페르시아 제국의 마지막 황제가 된 다리우스 3세의 시대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