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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그이가 살렸듯이

한백교회 2019년01월06일에 했던 하늘뜻나누기 원고를 수정 보완하여 신앙인아카데미가 발행하는 비정기간행물 [맘울림]의 2019년 상반기호에 게재하였음.


그이가 살렸듯이

 

 

‘패싸움’을 아시는지? 여러 사람들이 서로 뒤엉켜 한판 싸움을 벌이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바둑에서 쓰는 전문용어다. 서로 한 수만 두면 상대의 패(들)을 잡을 수 있게 되었을 때 그 패를 잡기 위해 벌이는 고도의 수 싸움을 말한다. 한쪽 편이 상대 패를 잡으면 다른 편은 한 수 건너뛰어서 그 수를 잡을 수 있다. 하여 그는 자신이 다른 곳에 패를 둘 때 상대가 패싸움을 해소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 고수들 간의 패싸움은 그 바둑의 가장 최고의 장면이 되는 경우가 많다. 한 수 한 수 둘 때마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다 승부가 결정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세계 8대 바둑대회 중 중국기원이 주최하는 ‘춘란계 세계바둑선수권대회’(春蘭杯世界職業圍棋錦標賽, Chunlan Cup World Go Tournament)가 있다. 격년으로 벌어지는데 11회까지 열리는 동안 한국과 중국이 각각 5회와 6회를 우승하여 치열한 각축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최근 세 번이나 연이어 중국선수가 우승을 차지했다. 요즘 추세가 중국이 세계바둑계를 휩쓸고 있으니 최근 춘란배 우승을 중국이 연이어 차지한 게 이례적인 것은 전혀 아니다. 하지만 한국은 중국독주를 견제하는 유일한 나라다. 아무튼 12회는 오랜만에 한국 기사가 차지하게 되었다. 박정환 9단과 박영훈 9단이 결승에서 맞붙게 되었다.

아무튼 어느 나라 기사가 우승하든 간에, 내게 인상 깊은 경기는 중국의 커제 9단과 한국의 김지석 9단이 맞붙은 8강전이었다. 지난 2018년 12월17일에 8강전 네 경기가 동시에 벌어졌는데, 커제와 김지석의 기전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가장 치열하고 가장 멋진 한 판이었다. 그들은 무려 125수에서 175수까지 치열한 패싸움을 벌였다. 한 수만 실수해도 치명적이었기에 극도의 긴장 상황에서 무려 50수를 둔 것이다. 한데 패싸움은 김지석 9단이 이겼는데 경기는 커제 9단이 반집을 이기는 것으로 끝났다. 바둑에서 가장 치열할 격전은 반집 승부이니 그들이 이 경기에서 얼마나 치열하게 맞붙었는지를 알 수 있다.

지난 12월27일 정부가 제출한 일명 ‘김용균법’이 극적으로 국회를 통과하여 법안이 확정되었다. 문재인 정부가 등장한 이래 벌어진 진보와 보수 간의 각축에서 가장 치열하고 가장 극적인 법안으로 기억될만한 사건이었다.

김용균법의 정식 명칭은 ‘산업안전보건법 전부 개정안’인데, 이는 1981년 만들어진 산업안전보건법을 일부 개정한 1990년 법안을 전면적으로 뜯어고친 것이다. 2016년 구의역에서 19세의 청년노동자가 사망한 것을 계기로 시작된 입법 논의는 수많은 법안만 제출된 채 지지부진하다가, 올해 2월9일에야 고용노동부가 만들어 입법예고하였고 10월30일 국무회의에서 좀더 후퇴한 법안으로 국회에 제출되었다. 그렇게 한걸음 물러서게 된 배경에는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가 주도하고 보수언론들이 다각도로 벌인 입법저지운동과 이에 호응한 산업자원부의 반대에 영향받은 것이다. 촛불을 든 국민의 압도적인 지지로 탄생한 진보적 개혁 정권인 문재인 정부 내에서조차 진보적 개혁 법안이 어떻게 가로막히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 사례였다.

우여곡절 끝에 국회로 간 ‘김용균법’은, 그러나 재계, 보수언론들, 그리고 보수정당들이 총력전을 펴서 입법 저지 활동 탓에 다시 물거품이 되어가고 있었다. 게다가 지지율이 하락추세인 정부로선 향후 진보적 개혁이 더욱 어려워질 것이 예상되었다.

그런데 12월11일 김용균 씨의 사망사건이 벌어졌다. 24살짜리 노동자가 침침한 조명과 자욱한 석탄 가루로 시야가 가려진 가운데 도처에 널린 장애물을 피해가면서 빠르게 컨베이어벨트의 작동을 살펴야 하는 최악의 노동조건 속에서 일해야 했다고 한다. 과거엔 숙련공 두 명인 했던 일을 입사한 지 불과 3개월도 채 안 된 초자노동자가 홀로 감당해야 했으니 사고가 안 난다는 게 오히려 이상한 상황이었겠다. 그런데 그는 하청업체의 비정규직 노동자다. 바로 ‘위험의 외주화’의 전형적 사례인 것이다.

매년 2천명 가까운 노동자가 산업재해로 죽어가고 있고, 그 비율은 OECD 국가들 가운데 가장 높다. 그런데 사망자 중 압도적 다수는 비정규직 노동자였고, 특히 사고사망자들은 미쳐 날개를 펴보지도 못한 20대 안팎의 젊은이들이 많다. 이에 2016년 구의역 사건 때처럼 다시 산업안전에 관한 여론이 비등해졌다.

그리고 8일 뒤인 19일 드디어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산하 고용노동소위원회에서 김용균법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그날부터 26일까지 고용소위에서의 논란은 그야말로 초읽기에 들어간 패싸움 같았다.

2018년이 넘어가면 산업안전에 관한 입법은 이번 정부 내에서 훨씬 어려워질 것이 예상되었기에 그 며칠간의 보수와 진보 간의 싸움은 사력을 다한 치열한 공방전이었다. 보수진영은 국민여론의 눈치를 보느라 노골적인 반대를 하지 못했고, 그 결과 이제야 법안이 통과되나 했다. 한데 거의 합의가 마무리될 즈음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를 포함한 당지도부가 끼어들어 막판에 다시 좌초될 위기에 직면했다.

이번에는 청와대가 개입한다. 국회운영위원회에 조국 민정수석이 참석하기로 하면서 자유한국당은 이 법안을 통과시키는 데 합의한 것이다. 그 운영위원회가 12월31일에 열렸고 새해 첫 새벽까지 계속되었다.

그렇게 한 해가 지났고 새해가 시작되었다. 그러니까 2019년은 29년 만에 전면 개정된 산업안전보건법이 관철되고 적용되는 첫해가 된 것이다. 한 사람의 죽음이 많은 노동자들의 산업안전에 관한 진일보한 법률을 선사한 것이다. 진보 성향이 강한 정권이 집권했음에도 보수정치세력과 재계와 보수언론권력의 저항을 막아내는 것이 여의치 않은 데다, 그 정권조차도 내부에서 보수와 진보 사이를 동요하고 있는 현실에서 권력 없는 노동자들의 안전은 뒷전으로 밀려나야 했는데, 이번에도 그렇게 귀결될 것 같았는데, 이렇다 할 자원도 갖지 못한 젊은 무능력한 노동자의 죽음이 많은 이들의 안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IS의 본거지로 유명한 이라크의 모술 지역에는 여의도만한 크기(220만평)의 니느웨 성의 유적이 있다. 과거 아시리아의 수도다. 한데 거기에서 16,000개 이상의 점토판이 보관된 도서관이 발굴되었다. 흔히 ‘니느웨 도서관’이란 불리는 고대의 거대한 문서고가 있었던 곳이다. 이 도서관은 기원전 17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보이지만 거대한 왕립문서고가 존립했던 시기는 기원전 9세기 이후로 보인다. 어쩌면 이 고대의 왕립문서고 운동은 고대 유다국의 요시야 왕실의 문서고 운동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 오늘 우리의 제1성서의 최초형태의 문서들 상당수가 바로 이 운동의 맥락에서 편찬되었다.

한편 또 한 번의 거대한 문서고 운동이 일어난다. 기원전 3세기경 프톨레마이오스 제국 치하 이집트의 수도 알렉산드리아에 거대한 도서관이 세워지면서 지중해 전역에 서기관의 수효가 크게 증가했다. 당시 해상무역을 통해 국제교역이 크게 늘면서 소자산가층이 급증함으로써 그들 가운데서 민간서기관들이 대대적으로 등장했다. 이들 민간서기관들은 알렉산드리아에서 온 문서수집관들에게 책을 판매하기 위해 필사로 복사판을 만드는 일을 하였고, 이후 이들은 여러 독자적 문헌들을 저술하는 일을 하게 된 것이다. 그 맥락에서 팔레스티나의 유대아 지역에서 성서에 포함된 많은 문서들이 재편찬되거나 새로 집필되었다.

아시리아제국과 유다국의 문서고 운동은 왕실서기관의 증가를 가져왔지만, 프톨레마이오스 제국 시대에는 왕실뿐 아니라 민간서기관도 급증한 것이다. 이들은 이 시대 지중해 역사의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팔레스티나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하스모니아 왕국의 등장, 바리사이 운동의 등장, 묵시문학의 등장, 지혜자(Qohélet)의 등장 등이 그 대표적인 예들이다.

이렇게 민간서기관이 역사의 중요한 추동자였다는 사실은, 여전히 대다수 대중은 비록 문자를 읽거나 쓰지 못했을지라도, 문자가 사람들의 공적인 삶뿐 아니라 일상에까지도 막대한 종교적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대표적인 현상이 바로 ‘악의 내재화’다. 이제 ‘악’은 적의 얼굴을 하고 있는 것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내면에서 준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내면에서 준동하는 악과 싸움을 벌이는 데 ‘글’이 한 몫을 한다. 일상의 규범을 규정하는 신의 계율로서 글이 존재의 내면에서 악과의 전투를 벌이는 선봉이 나선다. 율법은 그렇게 사람들에게 다가왔다.

문제는 사람들의 내면에서 악과 전투를 벌이는 율법을, 즉 문자를 대다수 대중은 읽지도 쓰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즉 대중은 그 무기를 활용한 능력이 없다. 하여 대중은 마치 서양에서 사탄과 대결하려는 이가 십자가를 들이대듯이 글자를 수호신 역할을 하는 부적처럼 하나의 신령한 이미지로 활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글이 신령한 힘을 지닌다고 믿게 될수록 글을 사용하는 이는 악과의 싸움에서 주도적인 힘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말하는 자다. 그들은 해석하는 자다. 그들은 변호하고 저주하며 심판하는 자다. 오늘날도 언론을 동원하는 능력을 가진 자가 말할 권리를 지닌 자이고 옳고 그른 것을 해석하는 자이며 그릇된 이를 교도하거나 심판하는 자가 아닌가. 또 그런 말의 능력을 결여한 이들은 죄인이 아닌가.

그런 세상에서 예수는 실어증 걸린 이들, 죄인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들을 향해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했소라고 선언한다.(〈마가복음〉 10,52) 그런 세상에서 바울은 예수, 그 한 사람이 대신 죽음으로써 모두를 살렸다고, 그러니 당신들은 아무런 죄가 없다고 선언한다. 해서 그이는 사람을 살리는 그리스도라고 말이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5,22) 오늘 저 ‘김용균’이 많은 이들에게 살림의 가능성을 선사했듯이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