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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평

'정치적 죽음'에서 숭고의 신학을 발견하다 - 박희택의 <문수스님 소신공양의 사회적 의미>에 대한 논평

문수스님 소신공양 재가연대 세미나(2010.7.9 4:00~6:00. 만해NGO교육센터)에서
제1 발제글인 박희택 불교아카데미 원장의 글 <문수스님 소신공양의 사회적 의미>에 대한 논평글입니다.
박 원장의 발제글은 아래에 첨부하였습니다.
나의 논평글은 두 가지 점에서 박희택 원장의 주장에 비판적으로 개입하고 있습니다.
첫번째는 문수스님의 소신공양을 담론화하는 데 있어 박 원장은 스님의 행위가 '법의 이해'에 기초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살행위로서의 소신공양에 대한 스님의 자기 해석, 즉 법 이해의 차원을 강조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저는 감정의 차원을 강조하고자 했습니다. 즉 법 이해라는 이해의 차원보다는 뭇새명의 고통을 감정이입하여 자기의 고통으로 내면화하는 타자와의 감각의 동일화를 강조한 것입니다. 그러한 감각의 동일화는 스님을 헤아릴 수 없는 고통에 빠지게 했고, 그런 자기화한 타자의 고통은 그로 하여금 삶의 공간과 죽음의 공간 사이의 경계가 해체되는 환상적 체험으로 이끈 것이 아닌가라는 논점을 제기한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소신공양의 감각적 배후라고 해석하고자 했습니다.
논평의 두번째 요소는, 첫번째와 연결되는 것인데, 소신공양을 분신자살과 이분화하는 인식을 전제로 하는 불교계의 논쟁은 소신공양의 사회적 의미를 이야기하는 데 있어 한계를 지닌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이분법은, 발제자로 하여금 의도하지 않게 언술 속에 불교 배타주의라는 자가당착에 빠뜨렸다고 보는 것이지요. 
토론회 때, 제 의도가 잘 전달되지 않는 듯해서, 여기서 다시 그 논점을 보충설명하였습니다.  

박희택_문수 스님 소신공양의 사회적 의미.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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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죽음’에서 숭고의 신학을 발견하다

박희택의 「문수스님의 소신공양의 사회적 의미」에 대한 논평


 

 

 

지난해 6월 6일, 한국 통일운동의 거목인 강희남 목사가 목을 매 자살했다. 그리고 1년이 지난 올해 5월 31일 문수스님의 소신공양이 있었다. 두 죽음의 공통점은 MB 정부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식을 강하게 담고 있는 ‘정치적 죽음’이라는 점, 그리고 종교지도자의 죽음이라는 점이다. 근대국가체제가 성립한 이후 우리사회에서 성직자의 정치적 자살은 흔치 않다. 더구나 충동적 열정이 상대적으로 적은 중년 혹은 노년의 성직자의 죽음을 불러온 MB 정부 시대는 예사스럽지 않다. 이 자발적 죽음을 선택한 나이가 한 이는 89세이고 다른 이는 48세다. 이는 다른 항의형의 자발적 죽음이 대개 20대 청년들이 수행한 것이라는 사실과 대조적이다. 최근 우리사회의 자살 통계에서 노년의 자살률은 청년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다. 하지만 정치적 자살의 경우는 그 반대다. 그렇다면 강희남 목사와 문수스님의 경우는 죽음에 직면하여 자기 해석의 밀도가 상대적으로 더 깊은 죽음일 가능성을 추정할 수 있겠다. 이러한 밀도 깊은 정치적 죽음을 야기한 체제는 과연 어떤 것일까, 라는 물음이 나올 만하다.

그런 점에서 유서 속의 문제제기들을 표층으로 읽고 그 ‘죽음의 사회적 의미’를 해명하기는 쉽지 않다. 왜냐면 흔치 않는 성직자의 정치적 자살이 왜 이때 두 번이나 일어난 것인지, 특히 그들이 중, 노년의 나이에 자발적 죽음을 선택한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는 매우 다층적이고 깊이 있는 논증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자살은 그 수행자에게 있어 ‘삶의 공간’과 ‘죽음의 공간’ 사이의 거리감이 급격하게 좁혀들 때 실행된다고 할 수 있다. 대개의 문화들은 이 두 공간 간의 거리감을 극한적으로 확대하여 상상하는 다양한 상징적 코드들을 담론화해 왔다. 이러한 거리감 해체의 원인에 대해 ‘우울증’이나 향정신성 약품의 복용으로 인한 심리적 효과가 주된 설명 방식으로 제기되곤 했다. 하지만 정치적 죽음이 우울증이나 마약 중독 상태를 주된 요인으로 발생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그다지 타당하지 않다.

인습적인 거리감이 해체되는 카이로스적 시간의 느닷없는 엄습은, 종교적 각성 혹은 예술가의 광기어린 미학적 체험에서 볼 수 있듯 자기 초월적 순간에도 일어난다. 이와 같은, 일상적인 상징 코드가 해체되는 해석의 전복은 경계선을 해체하고자 하는 밀도 높은 종교적 혹은 미학적인 해석적 모험의 산물인 것이다. 그러므로 범상치 않은 종교적, 미적 수행의 효과인 셈이다.

그러한 경계 해체의 종교적 자기 초월 행위로서의 자발적 죽음이 MB 정부 시대에 두 번이나 발생했다. 유서에서 보면 강희남 목사에게서는 해소되는 듯이 보였던 남북한 사이의 관계 악화가 MB체제에 대한 주된 비판적 문제의식이었고, 문수스님에게는 4대강 사업 등 주요 MB의 개발 사업이 내포하고 있는 체제의 부패상과 빈부 양극화 현상 등이 문제로 다가왔던 듯하다. 물론 이것은 비단 MB체제만의 현상이 아니다. 또 다른 관점에서 문제를 말하면 언급된 비판점들 못지 않는 위기 요소들이 근대 한국사회에서만 보아도 항존했다. 그렇다면 왜 지금인가? 왜 MB가 특별히 문제인가?

다양한 분석이 필요할 것인데, 그중 하나의 개연성 있는 설명은 자살의 일반적인 양상과 연동하여 해석하는 방식이다. 알다시피 1998년 이후 자살률은 줄곧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중 1위를 고수하고 있고, 2006년 통계에 따르면 OECD 평균의 두 배를 기록했으며, MB 정부 출범 이후 그 증가 속도가 더욱 가파르다. 이러한 자살률의 증가가 경제적 고통의 심화와 회생 가능성의 결여에서 주로 기인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실업률과 물가상승률의 합으로 매겨지는 ‘(경제적) 고통지수’는 그것을 잘 보여준다.

여기에 민주화와 소비사회화로 인한 욕망의 가파른 증대와 지구화와 더불어 현저해진 욕망 실현 가능성의 가파른 추락 현상이 맞물리면서, ‘사회적 고통’의 질적 수위가 매우 높아졌다. 자살률의 급증은 바로 이러한 현상과 맞물리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한편 두 종교지도자의 죽음은 위기에 대한 대안적 해석체계의 부재와도 연관될 수 있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를 경유하면서 진보적인 대안적 해석체계의 위기가 심화된 것이다. 종교담론이 대안적 해석체계를 주도하지 못하는 현상은 이미 오래되었고, 그런 점에서 종교지도자들은 해석적 비전을 구상할 때에 비종교적 대안담론에 적지 아니 의존해왔다. 생명살림이나 민족자주 등의 사회적 의제와 종교적 의제를 연동시키려 했던 종교지도자들에게서는 더욱 그러하다.

대중의 고통을 자신의 몸에 체현하는 것을 종교적 수행의 주된 요소로 해석하는 데 익숙한 성직자들이 현실적 삶의 공간에서 대안 부재의 절망적 상황을 체험하였다면, 그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강희남 목사나 문수스님의 경우,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은 이런 것이 아닐까.

그이들은 대중의 고통을 자신의 몸으로 일체화하였다. 죽음 같은 고통 상황에 빠져든 것이다. 이런 질곡 속에서 그이들은 삶의 공간과 죽음의 공간 사이의 거리 해체를 체현하는 고도의 정신적 혹은 신앙적 각성에 도달하였을 수 있다.

이것은 현상적으로 우울증이나 마약중독으로 인한 정신 해체의 상황과 유사하다. 하지만 그이들의 죽음은 타인을 내재화함으로써 실행되었다는 점에서 자신을 타자화함으로써 발생하는 자기 파괴와는 다른 과정을 통해 일어난다. ‘종교적 자기 초월’의 행위를 사회적 의미로 담론화한다면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은 발제자가 말하는 문수스님의 소신공양의 의의에 관한 설명을 나의 언어로 다시 표현한 것이다. 한데 나는 여기서 한 가지 비판적 논점을 덧붙이고자 한 한다. 그것은 발제자가 문수스님의 소신공양과 일반적인 분신자살 사이를 이분화하고 있는 서술 방식을 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몸에 불을 붙이는 분신자살과는 현저한 차이”가 있다거나, 분신자살이 “생명을 경시하고 부처님의 생명중시 가르침을 저버린 것”이라는 말은 오해의 소지가 많다.

필경 이 주장은 스님의 소신공양에 관한 반론을 전제한 말이겠다. 논쟁은 상대편이 제기한 논점에 따라 가곤 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먼저 논점을 제기한 이나 그것을 해명하면서 재의미화하는 이는 그 비판적 논점 속의 가치를 공유하곤 한다. 바로 이 논쟁이 그것을 보여주는 듯이 보인다.

분신자살과 소신공양 사이를 이분화하면서 발제자는 문수스님의 분신은 ‘법대로’ 한 적법한 수행행위에 속한 것이라는 주장을 편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말씀이나 그 경전적 해석의 전통에 기초하지 않은 죽음은 ‘생명 경시’라는 말인가? 그것은 ‘단순히 몸에 불을 붙이는 행위’에 불과한가? 발제자가 그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님을 유추할 수 있음에도, 필경 그는 반대자를 염두에 두면서 말하고 있고, 그런 한 내가 비판하고 있는 물음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발제자는 문수스님의 죽음이 사회적 의미의 차원에서 부처님의 가르침과 배리되지 않음을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 정치적 자살 행위의 선택과 과정은 다른 정치적 죽음과는 구별되는 경전에 의거한 행위임을 강조한다. 여기서 그는 정치적 죽음의 의미화를 포기하는 듯이 보인다. 왜냐면 종교적 전통이 내포한 행위를 특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특화된 선택은 정치적 자살과 종교적 자살을 이분화하는 셈이 되고, 결국 자신이 말하고자 했던 사회적 의미를 스스로 희석화하는 셈이 된다.

신앙의 사회적 의미화, 그 해석적 작업이 매우 중요한 신학적 과제임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발제자가 문수스님의 소신공양이 한국불교의 사회적 자아 형성에 기여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해석은 그러한 신학의 필수 요소다. 한데 해석 과정에서 불교적 수행의 전통을 특화시키는 순간 종교적 배타주의의 혐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오히려 더 많은 정치적 죽음들, 불교와 특별한 관계가 없는 것까지도 불교적 가르침의 외연에서 포섭하는 것이 필요하다.

개신교는 이러한 종교적 배타주의의 원흉이다. 내가 잘못 이해한 것인지는 몰라도, 이 글 속에는 불교 내부에서도 그러한 종교적 배타주의에 기초한 논쟁의 흔적이 엿보인다. 혹 개신교 신학의 잘못된 관행이 여기에 관여된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앞선다. 하여 개신교 목사로서, 소신공양에 관한 불교적 해석이 종교적 배타주의를 넘어서고 있음을 발견하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