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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평

타자성 체험으로서의 깨침과 시민사회의 공화제적 비전 - 박희택의 「불교와 시민사회의 소통 가능성과 그 방법론 연구」에 대한 논평

이 글은 2010년 8월 17일에 열린 <한국사회에서 시민종교의 현상 탐구 - 종교와 시민사회의 소통 가능성과 그 방법론>(주최_만해사상실천선양회 / 주관_종교자유정책연구원, 우리신학연구소,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 장소_우리함께빌딩6층)의 제1발제인 박희택 교수의 글에 대한 논평글입니다. 박교수의 글은 아래에 첨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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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성 체험으로서의 깨침과 시민사회의 공화제적 비전

박희택의 불교와 시민사회의 소통 가능성과 그 방법론 연구에 대한 논평

 

 


박희택 교수의 논지는 배후에 국가와 시민사회의 이분법이 자리잡고 있다. 영토 내의 모든 자원이 국가와 왕에게 귀속되어 있다는 전근대적 사회이상 아래서 국가와 시민사회는 일체였다. 그러나 근대적 사회이상은 시민사회가 국가의 통제에서 벗어난 영역으로 자리잡음으로서 성립한다. 그러므로 시민사회의 자율성을 통제하고 시민사회의 구성원, 시민을 국가의 구성원, 국민으로 포획하려는 국가는 민주국가일 수 없다. 반면 시민사회는 국민의 시민화를 통해 구현되는,(김진호 2007) 근대적 민주사회 이상의 중심축을 이룬다.

한국사회에서 시민사회 담론이 대두한 것은 1980년대 말경부터다. 군부 권위주의 정부의 하위주체(subaltern)로 국가에 포섭된 국민이 광범위하게 이반하여 시민적 주체로 정치화되던 시기였다. 그러므로 국가와 시민사회의 이분법은 한국의 민주화를 해석하는 데 있어 매우 적절한 인식의 틀이었다. 예컨대 임혁백은 1983년 전두환 정부의 제한적 개방조치 이후의 정국과 19852.12총선 이후의 정국을 출현적 시민사회(emergent civil society)동원적 시민사회(mobilizational civil society)라는, 베이글과 버터필드(Marcia A. Weigle and Jim Butterfield)의 개념으로 설명한 바 있다.(임혁백 2009)

한데 민주화 운동 이후의 한국사회를 이해하는 데서 국가와 시민사회의 이분법에 기초하는 한, 시민사회론은 한계를 노정한다. 민주화된 사회에서 시민적 주체는 더 이상 단순히 반독재운동의 추동자로서만 이해될 수 없기 때문이다. 시민운동은 민주주의를 제도화하기 위해 국가와 대립각을 세우기도 했지만, 국가의 협력자이기도 했다. 시민사회는 더 이상 단수의 정치적 행위자로 이해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시민사회의 존재 방식이 민주화 이후, 운동에서 제도로 변화되었다는 견해들이 제시되었다(“운동에서 제도로” - 홍성태와 신종화 2007; “제도적 시민사회 institutional civil society” - 임혁백 2009).

운동으로서의 시민사회론을 다루는 관점은 시민사회를 특정한 시민운동이 벌어지는 국면의 시민적 주체로 협소화하여 해석한다. 반면 제도로서의 시민사회론은 좀 더 폭넓은 사회현상, 문화양식, 상징체계 등, 보다 광역의 의미체계에 주목한다. 요컨대 제도론적 시민사회론의 시각은, 한국에서 제도로서의 시민사회론을 적용하여 해석한 논자들(임혁백 2009; 홍성태와 신종화 2007; 임성호 2007)처럼, ‘민주화 이전에서 민주화 이후운동에서 제도라는 선형적 발전의 관점에서 다루는 절충적 해석들의 범주를 넘어서는 지점까지 사고하도록 이끈다. 예컨대 이것은 민주화 이전의 국가체제를 배제의 관점에서만 주목하게 하며, 국가에 포획된 국민을 수동적인 탈주체적 존재로만 보게 한다. 하지만 이러한 시각은 국민의 국가로의 포획이 다층적인 전략적 행위의 산물임을 간과하게 한다. ‘회색지대는 다층적인 전략적 행위가 가능한 영역이다. 하여 민주화 이전과 이후를 우리는 징후적 차이로서만 가려낼 수 있을 뿐, 양자를 가르는 명료한 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박희택 교수가 기대고 있는 시민사회론적 논점은, 운동과 제도의 선형적 절충의 관점을 취하든 제도론적 관점을 취하든, 역사적 설명력이 제한적이다. 특히 민주화 이후의 시대 맥락에서 그의 시민사회 이해는 한계를 갖고 있다. 이에 나는 그의 논지를 수정 보완하여, 세 가지 요소를 동시에 고려하여 시민사회에 관한 이해틀을 설정하고자 한다. , (1) ‘국가 대 시민의 문제뿐 아니라, (2) ‘시민 대 시민의 문제와 (3) ‘시민 대 비시민의 문제를 동시에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첫 번째는 박희택 교수의 논지에서 충분히 다루어지고 있으므로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치 않다. 둘째 요소의 측면에서, 시민사회는 동질적인 시민들의 결속체가 아니라, 서로 협력하기도 하고 경합하기도 하는 다층적 시민들의 관계의 장이다. 그런 점에서 시민 대 시민의 관계가 국가의 특정한 시공간적 장에서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지를 살피는 것은 시민사회를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 셋째 요소의 측면에서, 시민사회는 포섭과 배제의 메커니즘이 작동되는 장이다. ‘비시민’, 즉 시민사회의 외부로 배치된 존재에 관한 물음 없이는 시민사회는 충분히 해명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해틀은 박희택 교수가 자신의 시민사회론적 관점에서 도출한 시민종교에 대한 논점을 재고찰하게 한다. 그에게서 시민종교란 시민사회의 출현에 기여하는 종교, 곧 근대적 종교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전근대적 국가, 시민사회를 억압하는 국가에 저항하여 시민적 권리를 옹호하는 종교인 것이다.

그리고 불교는 태생적으로 근대적 종교의 특징을 지니고 있음을 역사적으로 밝힌다. 그에 의하면 근대적 시민종교로서의 불교의 특징은 한마디로 공화제적이라는 데 있다. 하여 불교가 근대적 시민종교로서, 공화제적 이상에 따른 실천을 하고 있지 못하다면, 그것은 우리 시대의 합리성에 부합하지 못한 종교가 될 뿐 아니라 불교적 가르침에서 벗어난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공화제적이라는 말은 너무 모호하다.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하다. 이 점에서 박희택의 공화제에 관한 생각의 결은 다소 혼돈스럽다. 그가 강조하는 국가 대 시민사회의 이분법적 틀에 기초한 시민사회론의 관점에서만 보면, 공화제적 가치는 단수적 공동체로서의 시민사회의 단일한 가치에 포섭된다. 석존의 정치적 이상에 관한 설명에서도 평등이념을 내걸고 (새로 부상한, 그리하여 불평등한 지위에 놓인인용자) 상업세력의 지위와 권익을 옹호하는 입장과 관련하여 공화제 논의를 도출한다. 즉 국가와 귀족에 대해 상인세력의 불평등에 관한 관점이 공화제를 설명하는 담론적 틀이 되고 있다.

그러나 불교와 시민사회의 소통을 다루는 장에서 그는 불교의 깨침이라는 요소를 강조함으로써, 공동체주의로 단순 환원될 수 없는 개체적 이해들 혹은 생각들이 서로 소통하는 것에서 공화제의 가능성을 논한다. 이것은 위에서 내가 그를 보충하면서 제기한 두 가지 요소들을 도입해야만 설명 가능한 관점이다.

공화제란 갈등 조정의 체제를 지향하는 정치적 모델이다. 한데 국가와 시민사회 간의 갈등 조정에 국한하려면, 시민사회는 단일한 가치와 의미를 갖는 단일 공동체라고 가정해야 한다. 하지만, 위에서 말한 것처럼, 시민사회는 다양한 이해와 생각이 절충하고 경합하는 장이다. 또한 배제와 포섭의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장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시민사회의 갈등 조정의 틀은 국가 대 시민, 시민 대 시민, 시민 대 비시민이라는 세 차원의 갈등을 어떻게 조정하여야 하는지에 관한 구체적인 제도적 논의를 필요로 한다.

그런 점에서 시민종교로서 불교가 그 정치적 이상으로 공화제를 추구한다고 할 때, 그 내용은 다층의 갈등을 조정하는 종교적 담론이 되어야 한다. 내가 보기엔, 그가 말한 깨침은 매우 중요한 지적이다. 깨침의 주체는 공동체일 수도 있고 개체일 수도 있다. 또한 깨침은 자기 열림의 체험’, 타자에 대한 열림의 체험 이다. 그것은 공화제의 핵심인 갈등 조정의 체계를 논하는 데서 종교, 특히 불교가 기여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항목일 것이다.

한데 여기서도 박희택의 논점은 흔들린다. 그는 글의 서두에서 시민은 합리적 존재라고 말하며, 이것은 자신의 권익을 잘 챙기는존재라는 함의를 갖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불교적 깨침자신의 권익을 잘 챙기는합리적 자의식이 발현하는 순간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내가 보기엔, 깨침이 타자에 대한 열림의 체험이라는 생각과 모순된다. 그것은 타자화의 체험이며, 그런 의미에서 결코 그가 말하는 합리성을 통한 주체화의 인식과 동일시될 수 없다. 깨침이 지향하는 소통은 타인 혹은 타자의 소리를 들음에서 일어난다. 이때 타자의 소리는 종종 들을 수 없는 소리다. 가령 천성산 터널공사에 반대하며 죽음을 각오한 단식을 감행했던 지율스님의 깨침은 도룡뇽의 소리, 합리성의 영역에서는 결코 들을 수 없는 소리를 듣는, 타자성의 체험이다. 마찬가지로 배제의 시스템에 의해 소통 메커니즘이 왜곡됨으로써 들을 수 없는 소리가 된 비시민의 소리를 듣고 그것을 대언하는 것도 일종의 깨침에 포함될 것이다.

박희택의 논점이 이렇게 동요하는 것의 근저에는 시민사회에 대한 부적절한 정의가 있다. 하여 위에서 내가 보충하고자 했던 세 차원의 시민사회적 관점은 깨침에 대한 그의 논지를 보다 적절하게 담아낼 수 있다고 판단된다.

 

마지막으로 나는 이 논평의 글에서 현대사회에서 비시민의 문제에 관하여 특별히 부언하고자 한다. 그것은 시민종교로서의 불교가 시민사회와 소통하는 데 있어 간과될 수 여지가 매우 많은 점을 담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시민사회에서 비시민의 체험은 무엇보다도 언어 박탈현상으로 나타난다.(김진호 2006) 공화제 정치가 소통의 불평등한 요소를 최대한 축소한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 내는 성과를 이룩하였다고 하더라도 비시민이 그 공론장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자기 언어를 가져야 한다. 한데 비시민의 언어가 왜곡된 것이다.

예컨대 사회복지학에서 발전시킨 하위계급(under class) 연구에 따르면(박병현 최선미 2001) 극빈층은 자존성이 극도로 훼손되어 있다. 해서 알콜중독자가 더 많고, 마약류에 중독된 이도 훨씬 많다. 범죄율도 더 높으며 가정폭력과 이웃에 대한 상호폭력률이 월등히 높다. 또한 자기 비하의 서사를 사용하는 기층대중이 사회로부터 좀 더 많은 혜택을 누린다. 이런 현상은 그들의 자기 존재에 대한 해석을 왜곡시켜 버린 것이다. 하여 자기를 설득력 있게 묘사하는 데 반복적으로 실패한다. 그것은 시민사회에서 비시민의 소리가, 그들의 현실이 은폐되고 있다는 것을 포함한다.

그런 점에서 박희택이 말하는 불교적 깨침은 이런 은폐된 비시민의 소리를 듣는 데까지 이르러야 한다. 그래야만 공화제적인 시민사회의 형성을 위한 시민종교 다운 면모가 갖춰진다.



논평_박희택의 불교와 시민사회의 소통 가능.hwp

박희택_불교와 시민사회간 소통가능성과 방.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