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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평

종교평화지수 연구를 기대하며, 그 ‘공백’을 묻는다

이 글은 한국종교연합이 주관하는 종교평화지수 콜로키움의 첫번째 포럼 발표글인 전병술의 <평화, 갈등, 지수, 종교>에 대한 논평글.(20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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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평화지수 연구를 기대하며, 공백을 묻는다

 

 


엇갈림과 얽힘사회과학담론과 인문학담론, 두 가지 가능성

 

측정할 수 없으면 객관화할 수 없고 객관화할 수 없으면 일반화할 수 없다.” 전병술 선생은 종교평화지수 프로젝트의 총론적 글에서 첫 문장을 이렇게 시작한다. 평화, 갈등, 분쟁을 지수화함으로써 현상을 객관화하고, 여기에서 종교간 갈등의 해소와 화합의 실현을 위한 사회과학가능성을 제안하는 것이다.

이렇게 경험을 객관화함으로써 다양한 사례들을 분류하고 다른 사례들과 비교 가능한 상황으로 데이터베이스화하는 것, 이것이 계량화 연구의 가장 큰 장점이겠다. 하여 종교 갈등의 현상을 측정 가능한 형태로 전환하고 그것을 표준화된 방식으로 평가하며, 이에 대한 제도적 대안을 제시하는 데 있어 종교평화지수는 반드시 필요한 작업임에 분명할 것이다.

하지만 하나의 사건에 대한 지수화는 그 사건 속에 얽혀 있는 다양한 함의들을 생략한다/은폐한다. 사후적으로 해석된, 정형화된 스토리라인을 갖게 된 사건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의 사건은 아직 미결성(openness)의 상태다. 도미야마 이치로(冨山一郞)미결성, 아직 결정되지 않은, 수많은 가능성을 담고 있는 열망과 행동의 상태로 보면서 그것이 제도 형성의 동인이 되면 그 가능성 가운데 하나 혹은 일부만 남아버리고 모든 것은 소실되어 버린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미결성, 그 원사건적 상황은 다중의 가능성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계량화하는 것도 어렵고, 객관화도 쉽지 않다. 반면 특정 사건에 대한 배타적인 의미를 부여받게 된 해석은 객관적인 분석의 대상으로 안성마춤이고 비교연구를 위한 훌륭한 요소가 되지만 그것은 아직 언어화되지 않은 사건의 생생함을 은폐함으로써 실현될 뿐이다.

그런 점에서 사회과학적 지수연구에 대한 인문학비평의 개입은 그 소실된 것을 복원하고, 거기에서 결과(해석이 확정된 사건)와 동인들(원사건) 사이의 균열이 갖는 다양한 가능성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균열을 발견함으로써, 은폐되고 묵살된 소리들을 재현할 수 있다.

그러므로 평화지수 프로젝트는 그 자체로 충분한 의의가 있지만, 동시에 그 지수의 공백지점을 묻는 인문학적 비평이 동반되지 않으면 종교평화에 관한 해석과 제도적 대안 모색에 있어 중요한 반쪽을 놓치게 될 수 있다.

하여 이 논평에서는 종교평화지수에 관한 사회과학적 연구가 놓칠 수 있는 한계지점들을 드러내고, 거기에서 인문학적 비평이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지 논의하는 데 초점이 있다. 특히 은폐된 소리들을 전제로 하는 종교평화담론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비평적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평화라는 말의 당혹스러움

 

최근 미군에 의해 사살된 오사마 빈 라덴에 얽힌 담론들로 논의를 시작하겠다. 미국 대통령 오바마는 빈 라덴의 죽음을 브리핑하면서 평화와 인간의 존엄성을 신봉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것은 희소식이라고 말했다. 이 말은 오늘 우리 시대의 위기가 이슬람 원리주의에 혐의를 둔 종교 갈등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통념을 재확인시켜주고 있다. 빈 라덴의 존재가 오늘의 위기와 전혀 무관한 것이 아니지만, 이 위기의 핵심에 이슬람 원리주의가 있고, 그 중심에 그가 있다는 생각의 코드는 이슬람혐오주의가 서구 중심주의적인 인종적 편견의 산물이기도 하다는 점을 숨긴다. 또한 이슬람 원리주의가 형성되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서구와 엮인 온갖 불편한 관계의 매듭들을 생략하고 한 인물에게 그 모든 불편함을 투사시키는 결과이기도 하다.

한편 이슬람 사회의 공격적 남성주의도 이러한 혐오증에 영향을 미친다. 이슬람 사회의 남성주의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이슬람사회의 지체된 근대화에 서구 제국주의가 부정적으로 얽혀 있다는 점을 은폐하고 있다.

이렇게 빈 라덴의 죽음에 즈음한 담론 현상은 서구 중심주의적 시선에 의해 과잉 규정된 편견을 드러내준다. 그러므로 빈 라덴이 죽었다는 사실이 세계 평화에 긍정적 징후라는 근거 없는 믿음은 그러한 믿음 배후에 놓인 은폐된 요소들을 사고할 수 없게 한다. 즉 빈 라덴 사망과 얽힌 오바마의 평화론은 종교 갈등을 넘어서서 세계평화를 지향하는 성찰과 대안모색을 저해할 수 있다.

이슬람 원리주의와 서구 중심주의에 대한 얘기를 좀 더 해보자. 알다시피, 이 두 주체의 범주가 서로 교차되는 지점에서 오늘 세계의 주된 갈등과 분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슬람 원리주의자들과 서구 제국주의자들은 서로 상대방이 선행적 가해자였다는 논리를 편다. 물론 자신들은 피해자라고 주장하면서 말이다. 특히 역설적이게도 피해자 의식이 가장 고조될 때는 상대방을 공격할 때인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러한 갈등의 후방지대에서도 폭력적 가해는 불을 뿜곤 한다. 미국과 유럽에서 벌어지는 이슬람 혐오주의는 원리주의자도 아니고 테러리스트는 더더욱 아닌 모슬렘의 인권에 폭력을 가한다. 또한 이슬람 사회에서 벌어지는 성차별을 비롯한 각양의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폭력 또한 후방지역에서 벌어지는 폭력적 가해의 흔한 양상들이다.

한데 부시나 오바마, 그리고 빈 라덴은 서로 평화의 이름으로 가해적 폭력을 정당화한다. 여기서 주지할 것은 부시나 오바마, 그리고 빈 라덴은 하나의 실존 인물임을 넘어서 하나의 기호적 실재. 그들은 하나의 이념이나 체제, 나아가 진영의 상징적 중심이고, 그 범주 속에서 발생하는 욕망의 핵심이다. 그런 점에서 그들의 평화는 그들이 대변하는 이념, 체제, 진영의 가치이자 욕망이다. 그러한 가치와 욕망을 내포하며 평화는 담론화된다. 하지만 후방지역의 폭행당하는 소수자들의 소리는 담론화 과정에서 삭제되곤 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평화, 갈등, 분쟁에 관한 담론과 그 사건은 소수자의 강제된 침묵과 폭력의 은폐를 수반하며 벌어진다. 하여 이 세계의 많은 평화주의자들, 그 담론적 다수자들이 벌이는 평화의 담론과 사건은 소수자의 평화와 안전을 저해하는 과정과 결과를 낳을 수 있다.

하나 더. 평화의 이름으로 벌어지는 다수자의 폭력에 희생되는 소수자는 많은 경우 자신의 평화가 위협당하고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언어를 빼앗겼다. 그들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위협이 반평화임을 주장할 담론적 출구를 갖고 있지도 못하고 담론화할 자원도 결여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또한 그이들 자신도 자신의 박탈당한 평화의 상황이 문제임을 말하지 못한다. 그들은 실어증에 걸려 있다. 게다가 그들이 하는 말과 행동은 많은 경우 부적절하다. 타인을 설득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자기 자신조차도 설득하지 못하며, 나아가 위악적 존재로서 살아간다. 요컨대 자신의 현실을 평화와 연결시켜 이야기할 언어를 박탈당한, ‘실어증 걸린소수자의 위악적인 병리적 행동은, 가령 무능력자의 습관적인 가정폭력, 알콜과 마약중독, 나아가 연쇄방화나 사이코패스적 범죄 등은 그이들 자신이 평화를 헤치는 암세포적 존재로 자리매김하게 한다. 즉 평화담론들 간의 충돌로 희생당하는 소수자의 박탈된 언어가 낳은 의도하지 않은 몸의 병리적이고 위악적인 반응은 평화를 저해한다.

이와 같은 개념으로서의 평화가 아닌 현실 경험으로서의 평화는 모호하며 혼란스럽다. 그런데 바로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평화를 논하며, 평화운동을 도모한다. 평화지수, 특히 종교가 개입된 평화와 분쟁, 갈등에 관한 지수는 이러한 평화와 평화운동에 대해 충분한 생각의 실마리를 제시하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말하고 있는 데서 침묵하고 있는 것을 찾아내고, 침묵하고 있는 데서 말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는 인문학적 비평은 종교평화지수 연구의 한계지점을 매울 수 있다.

 

의 치환종교평화지수 연구가 놓칠 수 있는 한 가지

 

한국사회 얘기를 해보자. 종교평화지수 프로젝트가 수행되는 맥락은, 종교간 갈등이 좀 더 가시화되고 있는 현상과 관련이 있다. 전병술 선생은 한국내 종교 상황이 더 이상 평화적 공존이 아닌 불편한 공존으로 변하고있다고 한다. 나아가 종교전쟁으로 심화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표한다. 바로 이런 상황인식 위에서 종교평화지수 프로젝트가 수행되고 있다.

여기서 주지할 것은 선행적 가해자가 거의 대부분 개신교라는 점이다. 그런데 한국개신교의 무례함이, 그 타자에 대한 배타적 태도가 바뀐 것은 원칙적으로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요즈음에 들어와서 갈등이 더욱 심화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그것에 이유가 될법한 질문들을 떠올리게 된다.

첫째로 개신교의 배타적 태도가 생각으로 그치지 않고 더욱 현저히 행동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즉 생각이 행동화하는 측면이 더욱 강화되는 무례함의 제도들이 발전했다는 것이다. 가령 성시화같은 개신교 지도자들의 도발적인 발언들이 경쟁적으로 표출되거나 땅밟기같은 개신교 열혈대중의 무례한 행동들이 도처에서 도발을 일으키는 것은, 그것을 생각으로 담아두지 않고 공공연히 드러내게 하는 담론제도가 활성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왜 고위공직자들이 다른 부문에서는 잘 숨기는 정치적 태도를 여기서는 더 잘 표출시키는 것일까? 그것은 합리적인 행동인가 덜 합리적인 행동인가? 전자라고 하면 그것이 그들에게 정치적으로 유리하다는 판단에 근거한 것이겠다. 그리고 후자라면 다른 부문에서는 충분히 정치적이던 이들이 여기서만 그러한 정치적 판단들이 퇴행화되고 있는가? 생각의 마비를 가져오는 요소가 있는 것일까? 종교평화지수 연구는 이러한 해석에 이르게 하는 유용한 데이터를 제공해줄 수 있을 것이다.

둘째로 다른 종단 지도자와 대중들이 개신교의 공격성, 그 무례함의 행동을 더 이상 묵과하지 않게 된 것은 아닌가? 그것은 그 종단의 신앙이 더 공세적으로 주체화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자존성을 지키기 위해 외부의 공세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것을 공세적으로 표출하게 된 것일 수 있다. 역시 여기서도 종교평화지수 연구는 유용한 데이터를 제공해줄 수 있다.

그런데 이 두 요소를 사회적 차원으로 확대해서 해석하면 어떨까. 여러 가능성이 있지만, 나는 하나의 불온한 상상에 정신이 꽂혔다. 위에서 살펴본 두 범주의 논의들에서 드러난 것처럼 개신교나 타종교 전반에서 지도자와 대중이 더 공세적이 되었다. 한데 개신교의 배타적 행동들에 상처 입은 타종교는 말할 것도 없고 개신교 신자들 또한 자신들이 피해자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위기담론에서 흔히 나타나는 것인데,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이 얘기하고 있듯이 자신들이 적으로 둘러싸인 포위된 요새에 갇혀 있다는 위기의식에서 공세적으로 반응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데 여기서 종종 간과되는 것은 포위된 요새 신드롬, 그 병증적 공격성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위협하고 있는 상상적인 적을 공격해도 되는 만만한 상대로 구체화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가상의 적을 궁극적인 적과 연계시키는 상상작용을 발전시킨다.

요컨대 개신교가 다른 종교에서 가상의 적발명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다른 종교들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선행적 공격을 당한 다른 종교들 또한 자신들에게 가해진 많은 공격들 가운데 개신교의 공격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즉 개신교를 적으로 과잉해석해도 괜찮다는 무의식적 상상작용이 있었다는 얘기다.

이렇게 적을 종교적 상대로 국한해서 과잉해석하기 시작한 것은 개신교의 경우 1990년대와 더불어 시작되었다(변선환 사건). 즉 민주화 이후다. 그리고 그러한 해석의 선례는 감리교 교권을 장악했던 대형교회 지도자들에게서 나왔다. 이후 교회지도자들과 열혈 대중들은 종교에 대한 적개심이 강하게 표현되는 언술들을 발전시킨다. 심지어는 1990년대 기독교 대중 사이에서 활발하게 통용된 뉴에이지 담론들처럼 대중문화조차도 유사종교로서 해석하는 경향이 있었다(낮은울타리).

그런데 상상된 적을 종교적 상대에게서 찾는 무의식적 작용은 그 상대가 만만하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상상의 적을 다른 종교로 동일시하여 공세를 퍼부어도 자신에게 위해가 가해지지 않을 수 있다는 의식이 전제되어 있다. 이것은 종교 갈등이 심각한 사회에서는 훨씬 어려운 선택이다. 반대로 종교간 평화가 잘 유지되어온 사회에서는 훨씬 손쉬운 선택이다.

여기에 우리가 더 생각할 점은 종교간 갈등을 현상보다 더 심각한 것으로 해석하는 대중미디어나 종교전문가들의 매개자적 행동이 더 활발해졌다는 점이다. 이것은 대중미디어 시장이나 종교학술 시장에서 종교간 갈등이 상품성 있는 중요한 요소로 활성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즉 일부 대중미디어나 종교학술 영역의 매개자들, 그 전문가들은 종교간 갈등이 속칭 장사거리가 되는 요소라고 알고 있다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사람들은 최근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더 공격적이 되었다. 민주화 이후 적이 교란된 담론 상황에서 누군가를 공격하지 않으면 안 되는 위기상황에 더 심각하게 놓이게 되었다. 그때 종교적 상대를 적으로 상상함으로써, 이른바 피 흘리지 않는전쟁을 치룰 상대를 무의식적으로 종교에서 찾아냄으로써 공격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호전성이 가상의 전쟁으로 치환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종교학이나 대중미디어에서 형성된 종교 갈등의 시장상황은 그것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

한데 여기서 우려스러운 것은 이러한 상상의 전쟁은, 종교가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위기를 직시하고 그것에 문제를 제기할 감수성을 상실하게 한다는 점이다. 또한 종교가 그동안 더 많이 담당해온 낯선 타자’, 자신을 표현하는 언어를 잃어버린 약자들에 대한 돌봄의 감수성이 점점 더 약화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전쟁에 대한 강박증은 생각을 적에 대한 총력전에로 몰두하게 한다. 가장 근본주의적이거나 가장 급진적 진보성을 신앙으로 가진 이들, 가장 치열한 상상의 전쟁을 벌이는 이들에게서 돌봄의 감수성이 가장 낮은 것도 그런 이유다. 총력전은 다른 감수성을 약화시키기 때문이다.

나는 이 점이 종교평화지수 연구가 간과할 수 있는 주요 문제지점이라고 생각한다. 변수를 설정하는 데 있어 종교 갈등에만 주목하면, 그것 이면에 있는 상상작용, 심각한 위기의식에 빠진 사람들이 만만한 적을 종교에서 발명하고 상상의 전쟁을 벌이려고 한다는 것을 간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인식은 종교평화지수 연구에 대한 메타적 비평이 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인문학적 비평의 역할이다.

마지막으로 하나 첨언하면, 지구화 시대에 이르러 사람들이 겪고 있는 위기감은 극에 이른다. 그런데 저항할 수도 없다. 왜냐면 그 적은 너무나 거대한 세력이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자기의 욕망까지도 병사로 거느리고 공세를 퍼붓는다. 그런 점에서 그 적은 우리와 적의 이분법까지도 교란시킨다. 그런데 종교 갈등에 대한 과도한 몰입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마비시킬 수 있다.

하여 종교평화지수 연구는 인문학적 비평, 특히 메타적 비평에 열려 있어야 하며, 서로 엇갈리며 동시에 얽힌 연구과제를 함께 수행할 필요가 있다. 종교평화지수 연구를 시작한 연구진에게 경의를 표하며, 이 작업이 의미 있고 성찰적인 성과를 이루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