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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평

이웃의 탄식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복음주의의 필요조건이다(서평_랍 벨, 덴 골든, [네 이웃의 탄식에 귀를 기울이라])

[기독교사상] 2011년 4월호에 실린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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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의 탄식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복음주의의 필요조건이다

서평_네 이웃의 탄식에 귀를 기울이라(랍 벨&덴 골든)

 

 

 

 

 

랍 벨(Rob Bell)은 복음주의자로서 마스힐 바이블 처치(Mars Hill아레오파고Bible Church)라는, 미국 미시간에서 신도 1만 명이 넘는 메가처치를 담임하고 있는 젊은 목회자다. 그가 이제까지 저술한 책은 다섯 권인데, 그중 , 영성, 결혼을 말하다당당하게 믿어라가 이미 우리말로 번역 출간되었고,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책인 네 이웃의 탄식에 귀를 기울이라까지 합하면 세 권이나 한국어로 출시되었다.

무엇보다도 올해 3월에 출간된 사랑이 이긴다: 천국과 지옥, 그리고 모든 이들의 운명(Love Wins: Heaven, Hell, and the Fate of Every Person Who Ever Lived)이라는 책은 출간되기 전부터 엄청난 반향과 논란을 불러 일으켰고, 저자에 대한 이단시비까지 있었으나, 출간된 지 불과 며칠 만에 미국에서 수십만 권이 판매되는 열렬한 독서 붐을 야기시켰다. 여기서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은 사후에 심판의 대상에게 고통을 준다는 지옥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외려 성서 메시지의 핵심은 사랑이 지금 여기에서 승리하고 있다는 얘기에 있다고 한다. 하여 저자는 영생은 바로 지금 여기서 시작되는 것이며, 성서의 메시지에 따라 모든 교회, 모든 그리스도인은 사람들을 주가 사랑하듯이 서로 사랑하여야 한다는 시사를 담고 있다.

한데 실은 이와 거의 다르지 않은 메시지가 네 이웃의 탄식에 귀를 기울이라에서 이미 다루어져 있다. 2008년에 저술된 이 책의 원제는 예수는 그리스도인을 구원하기를 원한다(Jesus Wants To Save Christians)라는 논쟁적인 제목이다. 그리스도인은 구원받은 존재가 아니라, 구원받아야 하는 대상이라는 것이다. 물론 저자는 이것을 개념적으로 정의내리는 데에 관심이 없다. 그보다는 우리 시대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구원에서 멀리 있다고 할 만큼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는 통렬한 비판에 초점이 있다. 사랑이 이긴다의 논법으로 말하면, 그리스도인들 자신이 이미 죽음 상태에 놓여 있다. 이웃의 탄식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자의 서술 방식은 성서의 출애굽 신앙의 논법을 이 책을 읽는 독자의 시점에서 읽어내는 것이다. 저자는 그것을 톰 홀랜드(Tom Holland)의 용어를 빌어와 새 출애굽(New Exodus)의 관점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출애굽 신앙의 논법을 저자는 네 개의 장소를 통해 서술한다. 첫 번째 장소가 이집트인데, 압제의 장소이고 고통의 장소이다. 두 번째는 시나이다. 해방의 장소다. 하지만 동시에 압제와 해방 사이의 기로에서 동요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셋째는 예루살렘이다. 구원이 성취되는 장소다. 하지만 동시에 타자에 대한 압제가 시작될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리고 마지막 넷째가 바벨로니아다. 압제당하던 자가 압제자가 된다면 바로 그 행위로 인해 다시 압제당하며 탄식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바벨로니아는 그런 장소다.

저자는 성서에서 이 네 장소를 일종의 기억의 터로 간주한다. 프랑스의 역사학자 피에르 노라(Pierre Nora)가 새로운 역사학적 개념으로 제안한 기억의 터(lieux de mémoire)는 과거의 상징을 담고 있는 사물이나 장소, 개념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지금 여기에서 재현되어 의미작용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용어다. 기억의 터라는 역사학의 키워드는 역사를 과거의 실증학이 아니라 기억하는 이의 현재의 기억학으로 대체시킨다. ‘기억한다는 것은 바로 이렇게 과거의 어떤 것이 과거 그 자체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는 이의 심상 속에서 현재의 것으로 변형되어 의미 형성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을 가리킨다. 그리고 그 중 어떤 것들은 개인적 기억을 넘어서 사회적, 집단적 기억으로 되살아난다. 기억의 터란 이렇게 집단적 기억이 일어나는 매개로서의 사물, 장소, 개념 등을 가리키는데, 그중 장소는 가장 대표적인 기억의 터이다. 랍 벨이 말하는 네 개의 장소가 그런 예다. 그는 네 개의 장소를 단지 성서 속의 단순한 과거의 장소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 재현되는 장소, 곧 기억의 터로서의 장소로서 제시한다. 그렇게 성서는 시공간을 넘나들며 해석된다.

해방신학자인 끄로아또(J.S. Croatto)가 제시한 성서해석학적 개념으로서의 의미의 저장소라는 용어는, 랍 벨이 생각하는 새 출애굽의 관점에 관한 훌륭한 해석학적 전거가 될 것이다. 비록 랍 벨은 그를 모르고 있겠지만 말이다. 끄로아또는 성서 텍스트는 그 자체로 의미가 아니라 의미의 저장소라고 한다. 이것을 피에르 노라 식으로 말하면, 성서의 내용들, 인물, 사물, 개념, 장소 등은 그 자체로 어떤 말을 독자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즉 모두가 같은 똑 같은 뜻으로 생각하는 그런 굳어버린 요소가 아니라, 의미의 가능성으로 남아 있으며, 그것을 독자가 기억해 낼 때 비로소 현재 속에서 어떤 의미로 재현된다는 것이다. 그 어떤 의미는 기억될 때, 그때그때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즉 성서 텍스트 자체는 의미의 저장소이지 의미 자체가 아니다. 의미는 현재 속에 재현될 때, 다양한 기억의 요소들과 결합되면서, 심상 속에 구체화된다는 것이다.

새 출애굽관점의 요소로서 네 개의 장소는 바로 이렇게 독자가 그때그때마다 기억해 내는 기억의 터이다. 한데 저자는 이 기억의 터는 고정된 의미의 내용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어떤 기억의 코드를 함축하고 있음을 강변한다. 바로 그것이 위에서 말한 네 장소 속에 함축된 의미의 요소들이다. 이른바 장소성이다. 가령, 집단적 기억의 코드로서 이집트라는 장소는 억압, 해방을 향한 갈구라는 의미의 요소를 담고 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들은 집단적으로 이러한 기억의 코드를 공유하는 사람들이다. 예컨대 어떤 청년이 상습적인 폭력을 쓰는 아버지 아래서 살아야 했던 집을 이집트로 기억하며, 시나이의 이스라엘처럼 아비의 집에서 가출하여 방황하다가 세월이 흘러 집도 생기고 자녀도 거느린 가장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면, 그에게서 지금의 삶은 예루살렘의 이스라엘처럼 의미화될 수 있다. 여기서 그가 이집트의 이스라엘(히브리)을 회상하며 자신이 살고 있는 지금 자녀와의 관계를 성찰의 소재로 삼을 수 있다면, 바로 그것이 일종의 랍 벨이 말하는 훌륭한 새 출애굽의 관점이 될 것이다.

여기에 하나 더, 랍 벨은 기억의 터로서의 네 개의 장소를 위에서 예로 든 것처럼 지극히 개인사적인 체험을 넘어서 사회적 차원에서 말한다. 곧 이웃의 문제에서 기억의 터로서의 성서를 읽을 것을 주장한다. 한국어판 제목처럼 이웃의 탄식을 귀담아 들음으로써 성서를 읽는 것이다.

랍 벨은 케빈 베일즈(Kevin Bales)가 오늘 우리의 세계에는 2,700만 명의 일회용인간(disposable people)이 살고 있으며 그들이야말로 현대판 노예라고 말하는 것을 인용하며, 그들을 이집트에서 노예살이를 하는 히브리들, 해방을 갈구하며 탄식하는 이웃들이라고 얘기한다. 또 유니세프(UNICEF)의 자료를 인용하면서 인류 가운데 84,000명이 한 끼 식사를 해결할 돈이 없어 오늘 밤 굶주린 채 잠이 든다는 것을 말한다. 해마다 자살하는 사람의 수가 100만 명이라는 세계보건기구(WHO)의 자료를 소개하고, 유엔에이즈계획기구(UNAIDS)의 자료를 받아 매일 4,400명의 아프리카인이 에이즈로 죽는 세상을 증언한다.

이웃의 탄식이다. 끝도 없는 절망의 고리, 역사가 멈춘 시간, 오늘도 내일도 하등 다르지 않는 현실, 이집트의 시간이다. 한데 예루살렘의 시간을 사는 이들이 있다. 랍 벨에게 미국인이 그렇다. 하루에 2,000만 배럴의 원유를 소비하여, 전 세계 25%를 사용하는 세계 제일의 소비제국 미국은 또한 전 세계 군사비의 48%를 쓰고 있다. 미국은 평화가 아니라 전쟁을 통해 존재가 증명되는 나라며, 호혜보다는 탐욕으로 대표되는 나라다.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은 미국인에게 이런 모습으로 재현되었다. 랍 벨이 보는 미국이다.

필경 우리도 랍 벨처럼 우리 사회를 읽는다면, 탐욕의 도시 이스라엘과 억압과 탄식의 장소 이집트가 공존하는 우리 사회를 살필 수 있을 것이다. 교회는 과연 어디에 서 있으며, 성서를 읽으며 네 개의 장소를 성찰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랍 벨은 이와 같이 매우 명료하게 성서를 읽는 시선을 제공한다. 네 개의 장소를, 그 장소에 관한 기억의 코드를 유념하면서 성서를 읽고 오늘 우리 시대를 성찰하라는 것이다. 이때 네 장소를 현재화하는 성찰에서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 이웃의 탄식이다. 이 책이 주는 해석학적 미덕은 바로 이와 같은 이타성의 시선으로 성서를 읽는 시선을 명료하게 제시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내 생각에 이 책은 교회와 신학교에서 성서 입문용 교재로 사용하기에 매우 훌륭한 틀로 이루어졌다. 성서를 문자주의로 읽지 않고, 그때 거기와 지금 여기 사이를 오가면서 성서 공부를 평이하면서도 감동적으로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공부하는 이들이 이 책과 성서 읽기에만 머물지 않고, 신문을 보고 혹은 기타 여러 자료를 보고, 오늘의 이집트, 오늘의 시나이, 오늘의 이스라엘, 오늘의 바벨로니아의 실재를 찾아보는 작업을 하면서 이 책을 교재로 하는 공부를 하게 된다면, 아마도 가장 훌륭한 성서 입문 과정이 될 것이다.

랍 벨은 50대 안팎의 세대(전후 베이비붐 세대)30,40대인 X세대, 그리고 20대인 Y세대를 아우르는 대중의 폭을 매개하는 몇 안 되는 목회자라고 한다. 더구나 그가 말하는 복음주의 신앙이란, 그의 신앙적 배경이 되었던 도덕적 다수(Moral Majority) 같은 단체가 함축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복음주의 신앙과는 다른, 이 책에서 보듯 이웃의 탄식에 귀를 기울이는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관련이 있다. 그의 복음주의는 X세대와 Y세대가 교회로부터 철수를 시작하고 있는 미국의 신자유주의적 복음주의 교회와는 다른, 여러 세대를 아우르는 이타적 미덕을 담은 새로운 복음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신앙을 과연 메가처치에서, 단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과 몸으로까지 실행에 옮기는 것이 얼마나 가능할지는 잘 모르겠다. 규모의 함정으로부터 자유롭기가 쉽지 않을 텐데, 그가 담임하는 메가처치인 마스힐 바이블 처치는 어떤지 궁금하다. 이 글의 과제는 아니어서 그러한 의문은 독자의 상상에 넘기고 마지막으로 이웃의 탄식에 관한 민중신학적 질문을 통해 이 책의 문제의식을 보다 깊게 사고하는 것에 관한 생각을 독자와 나누고자 한다.

민중신학자 서남동이 제시한 ()이라는 개념은 기존의 한국학에서 논하는 한의 어법과는 다른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기존의 한국학은 한을 한국인 특유의 감성으로 이해했다. 절대적 절망의 상황을 초극하는 한국인의 자기초월의 심리학이라 할까. 그런 점에서 의 자리는 민족이며, 따라서 한은 번역 불가능의 언어다.

그런데 서남동은 한의 자리를 리고 해석했다. 그것은 김지하가 한의 자리를 감옥이라고 말한 것에 영향받은 것인데, 곧 한을 민족이 아니라 민중의 자리에서 파악해야 한다는 문제제기다.

감옥이나 죄가 한의 자리라는 것은 한이 언어적으로 표현되는 것이 방해받고 있다는 사회학적 문제의식이 담겨 있다. 다시 말하면, 한은 수치스러워서 말할 수 없는 감정인 것이다. 타인이 그렇게 보며, 자기 자신도 그렇게 본다. 해서 한은, 한의 소리는 언어를 빼앗긴 언어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사회적 실어증으로 나타난다. 가령, 버벅거림, 말더듬현상 같은 것, 그리고 앞뒤 안 맞는 뜬금없는 말들, 뜬금없으면서 반복적으로 튀어나오는 말들 같은 대화 불가의 소리들이 바로 한의 전형적 표현들이다. 심지어는 다짜고짜로 술에 취해서 가족이나 이웃에게 행패를 부려대는 것, 더 심하게는 상습적 방화나 연쇄살인 같은 분노의 부적절한 사이코패스적 표현 등도 한의 소리에 속한다. 여기서 공통된 것은 소통 불가의 소리/행동들이고 대개는 불편한 소리/행동이라는 데 있다.

랍 벨이 말하듯이 이웃의 탄식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그리스도인적 윤리의 핵심이다. 한데, 문제는 어떤 이웃의 소리는 쉽게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니 안 들릴뿐더러, 나뿐 편견으로 해석되는 소리라는 데 있다. 민중신학의 과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 대화 불가의 소리를 듣고, 그것의 사회적 함의를 읽어내고, 그 소리를 대화 가능한 소리로 번안하는, 곧 증언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랍 벨의 논제는 민중신학과 만나야 하며, 랍 벨의 복음주의는 민중신학의 문제의식으로 보완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