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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평

이해를 초월하는 마음의 틈을 발견하기 - 이정용의 대화적 만남에 대하여

이 글은 이정용의 [민중신학, 세계 신학과 대화하다](동연 2010)에 대한 서평으로, [기독교사상] (2010.8)에 실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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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를 초월하는 마음의 틈을 발견하기

이정용의 대화적 만남에 대하여

 

 

이정용, 민중신학, 세계 신학과 대화하다(동연, 2010)

 

 

이 책은 저명한 재미 신학자 이정용이 엮고 지은 것이다. 그의 명성에 비해 영어권에서 그다지 주목받고 있지는 않은 것으로 보이지만, 그 의의나 가치는 그동안 북미나 유럽에 알려진 민중신학 관련 저서들에 비해 결코 부족하지 않다. 더욱이 한국의 독자들에게도 주는 의미가 남다르다. 이 서평글은 바로 이 남다른 의의에 대한 것이다.

원제(Emerging Theology in World Perspective Commentary on Korean Minjung Theology)에서 시사되고 있듯이, 이 책은 민중신학을 코멘트하는 행위를 통해서 (새로운) 신학적 상상력이 출현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런 취지는 책의 구성에 반영되어 있다. 이정용은 책을 기획하면서 민중신학을 코멘트할 연구자를 북미신학자, 아시아신학자, 라틴아메리카와 아프리카 신학자들로 범역을 나누어 찾았다. 다양한 지역 신학적 맥락에서 민중신학을 읽어보겠다는 뜻이겠다. 그리하여 북미 신학계의 반응’, ‘아시아의 반응’, ‘라틴아메리카와 아프리카의 반응으로 각 부가 나뉜다.

한데 이들 코멘터(commenter)들은 단지 공간적 범역에 따라 선정된 것만은 아니다. 그들은 대체로 민중신학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연구자들이 아니다. 그보다는 각 범역별로 발전한 비판적 신학을 대표할만한 저명한 신학자들이다.(“이 책에 글을 쓴 저자들은 자신의 각 분야에서 가장 권위 있는 신학자들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민중신학에 대해 전문적 지식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14) 서구에서 출간된 다른 민중신학적 저서들이 민중신학을 소개하려는 데에 초점이 있다면 이 책은 민중신학이 세계신학에 주는 상상력의 가능성을 찾아보고자 한다.

이렇게 말하면, 민중신학을 잘 아는 이가 그것을 충실히 소개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문제제기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정용은 그렇게 보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이 책에서 민중신학의 소개라할 만한 글은 이정용 자신이 쓴 글뿐이다. 더욱이 그의 글도, 민중신학에 대한 어떤 글보다 참신하고 훌륭한 논지를 펴고 있지만, 민중신학 내부의 글이 아니라 외부적 시선에서 요약된 것임을 여러 형태로 보여준다. 즉 책 전체에서 유일하게 소개의 역할을 부여받고 있는 글도 민중신학의 내적 시선보다는 외적 시선임을 분명히 한다.

서구에서 비서구인 연구자가 자국의 지역학적 관점을 소개하려 할 때, 대체로 그런 이는 자신이 그것을 소개할만한 특권적 위상을 지니고 있음을 강변하기 마련이다. 즉 내부적 시선의 코멘터임을 과시한다. 하지만 이정용은 자신이 내적 시선의 코멘터, 곧 민중신학의 내부자임을 억지로 강변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그의 글은 서구적 신학의 일원인 저자의 글임을 숨기지 않는다. 그것은 그의 자신감의 표현일 수도 있다. 그가 한국인임을 강조하여 말하지 않고도 서구신학계에 한국신학을 소개할만한 지위를 가지고 있다는 자신감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글쓰기 형식에서 그 이상을 보려 한다. 이정용의 자신감 외에도 그가 외적 시선의 비평가임을 드러내는 것은 특별한 기획이 담긴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그는 이 책이 시종일관, 민중신학의 소개가 아닌, 민중신학이라는 한국의 신학운동이 각 범역의 신학들에 새로운 자극을 주고 있음을 말한다. 그가 말을 걸고 있는 각 범역의 신학자들에게 자신도 다른 신학들의 시선에서 민중신학을 보고 있으며, 또한 거기에서 새로운 신학적 사유와 운동의 출현을 감지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다시 위의 물음으로 돌아가자. 민중신학이 다른 신학들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얘기하는 일은 충실한 소개가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문제제기 말이다. 한데 나는 위에서 이정용 자신이 그 충실한 소개자임을 자임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오히려 그는 충실한 소개자가 아니라 다른 코멘터와 다르지 않은 존재임을 암시적으로 드러낸다. 다만 다른 필자들과 구별되는 점은 한국어를 말할 줄 알고 한국의 문화적 코드를 해석할 줄 아는 서구의 신학자로서 민중신학을 소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자신도 북미의 신학자로서 민중신학을 말하며, 민중신학으로부터 새로운 상상력의 자극을 받았음을 말한다. 또한 민중신학에 대한 질문거리를 갖고 있음을 명시적으로 드러낸다.

, 이제 얘기를 본격화해보자. 그는 민중신학이 세계 신학들에 어떤 자극을 주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는 민중신학적 내용의 충실한 전달을 강조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는 자기 신학에 대한 충실한 이해를 대변하는 이들에게 민중신학에 대한 코멘트를 요청한다. 이정용이 의도하는 이 코멘트들의 목적은 민중신학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비평하는 것이 아니라 민중신학으로부터 자기 자신의 신학적 사유가 어떤 상상력의 자극을 받을 수 있을지를 고민하게 하려는 데 있다.

코멘트의 목적은 코멘트 대상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코멘터 자신의 이해와 성찰에 있다. 코멘트하는 대상에 대한 깊은 이해보다는 자기 자신에 대한 깊은 이해가 중요하다. 한데 자기에 대한 깊은 이해를 위해 타인의 말이 중요하다. 하지만 타인의 말을 자기 멋대로 더 듣고 말하는 일이 필요하다. 요컨대 그가 말하는 코멘트는 자기 성찰을 위한 타인(코멘트 대상) 돌아보기인 것이다.

이것을 그는 대화라고 말한다. 그가 이 책을 엮고 지은 목적은 민중신학과 이 시대의 중요한 신학적 사상들이 대화하게 만드는데 있다.(13) 여기서 대화는 서로에 대한 충실한 이해에 기초한 소통의 결과가 아니다. 상대방을, 그 의도를 충분히 알고 또 거기에 대해서 정확하게 자기를 말하는 것, 이것이 대화라고, 흔히들 주장한다. 하지만 그런 대화는 언제나 실패할 수밖에 없다. 항상 이해는 불충분한 것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여 대화는 늘 유예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실재의 대화는 유예되는 게 아니라, 일상 속에서 실현되고 있다. 사람들은 상대방을 다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마음을 나눈다. 마음을 나누는 행위는 그의 말로부터 자기가 배울 수 있다는 태도를, 그러한 생각의 여지를 남겨둔다. 상대방을, 그 생각의 결을 충분히 알고 있지는 않지만, 상대방의 말을 성실하게 받아들이고자 하고 그것에서 자기를, 자기의 생각을 되돌아볼 마음의 여지를 둔다. 요컨대 대화하는 이들은 서로를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이해한다고 생각하면서 타인에게서 배운다. 아니 타인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사회학자들이 말하는 성찰이라는 용어는 바로 이러한 현상을 가리킨다. 성찰은 타인으로부터 자기 마음을 비워두고 타인의 생각을 경청하는 데서 일어난다. 비록 타인을 다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타인을, 그 생각을 경청할 수 있는 태도, 마음의 여지가 있다면 말이다. 이정용은 이러한 성찰이 일어나는 것을 대화하고 말하고 있다. 즉 대화는 상호이해과정이 아니라, 상호영향과정이다.

그것을 위해서 그는 민중신학을 잘 아는 이는 아니지만, 각 신학에서 충분한 지적 업적을 이룩한 이들에게 코멘트를 부탁한다. 누누이 말하지만, 이때 코멘트는 민중신학에 대한 충실한 이해를 목적으로 하는 행위가 아니다. 충실한 이해는 텍스트의 본문 맥락과 그 사회적 역사적 문화적 맥락, 실천 맥락 등을 고려하면서 읽어야 한다. 물론 누구도 이러한 맥락을 다 섭렵하면서 이해에 도달할 수 없다. 해서 선행 연구들에 의존하기 마련이다. 한데 이 선행 연구들은 연구 제도의 산물이다. 정설이 만들어지고 적절한 방법이 틀잡게 되는 메커니즘의 산물인 것이다. 이렇게 기존의 연구 제도에 의존하여 텍스트의 맥락을 조명하려는 이해 방식을 일컬어 주석(commentary)이라고 부른다.

반면 이정용이 의도하는 코멘트는 주석을 수행하는 작업이 아니다. 그들은 민중신학 텍스트를 읽지만, 그 텍스트를 본래적 맥락에서 과감히 떼어 내어 자신의 맥락 속으로 재설정한다. 이렇게 탈맥락화(de-contextualization)하고 코멘터 자신의 경험 영역으로 임의적으로 재맥락화(re-contextualization)하는 과정을, 일찍이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주석에 대하여 비평(critic)이라고 명명한 바 있다. 요컨대 이정용은 민중신학에 대하여 세계의 각 범역별로 저명한 신학연구자들에게, ‘주석이 아니라, ‘비평을 기대했다.

위에서 나는 이정용이 세계의 신학들이 각기 자기의 시선에서 민중신학에 대한 비평을 수행함으로써 각 범역별 신학들이 어떤 성찰에 이르기를, 그러한 신학적 성찰이 나타나기를 기대했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이 책의 한국어 번역본은 어떤 의의를 가질까?

물론 번역자인 연규홍(한신대)도 이 책에서 대화를 얘기한다. 한데 이번에는 독자가 한국인이다. 한국인이 모두 민중신학 연구자는 아니지만, 이 책이 민중신학에 대한 세계의 신학자들의 코멘트이니만큼, 독자들 대부분은 민중신학과 스스로를 내적인 연관성이 있는 존재로 생각하면서 읽게 마련이다. 즉 독자들은 민중신학 연구자들과 스스로를 연관시키면서 이 책을 읽는다.

어떤 독자는 내게 이 책의 내용에 대해 두 가지 문제제기를 한 바 있다. 하나는 세계의 신학자들이 수행한 코멘트의 내용이 민중신학에 대한 부적절한 이해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너무 낡은 민중신학 텍스트만을 읽은 탓에, 지금 여기서 살고 생각하는 독자들에게는 너무 낡고 생경한 주장에 그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때 이 사람은 이 책을 주석적방식으로 독서하고 있는 셈이다. 즉 그는 이 코멘트들 하나하나가 민중신학의 내적 맥락성에 얼마나 천착하고 있는지를 말하고 있다. 한데 이것은, 내가 보기엔, 이 책의 취지에서 빗겨간 독서다. 말했듯이 이 책에 수록된 코멘트들은 민중신학을 잘 아는 이들이 민중신학의 본래적 맥락성에 대한 이해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책의 코멘트들은 비평가들이 자기의 맥락 속에 재맥락화하는 관점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는 비평들을 주석으로 오인하면서 독서한 것이다.

이 책의 독서자는 여기서, 서구의 신학자들의 주장에 대해 주석을 하기보다는, 민중신학의 어떤 부분에서 성찰에 이르고, 또 어떤 부분에서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지를 살피면서 다시 독서자인 자기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 코멘트를 독서자 자신의 자리에서 다시 재맥락화하여 읽어야 한다. 그렇게 할 때에야 이정용이 의도했던 대화는 한국어 번역본을 읽는 독자에게도 수행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정용의 대화론은 이 책을 넘어서까지 유효하다. 대화는 이해를 추구하는 행위가 아니라 상대에게 마음을 여는 행위에서 시작한다. 이해에 이르지 않아도 상대와 말을 나누고 생각을 나눌 수 있다. 그러한 나눔이 가능하기에 서로 이웃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웃이 되기 위한 조건은 상대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서로의 인식의 접점을 발견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다. 상대에게 마음을 여는 행위는 이미 이웃되기를 실행하는 것이며, 접점을 찾아내지 않아도 서로 생각을 나누며 행동을 나눈다.

타종교와의 만남, 비종교 영역과의 만남, 그밖에 온갖 타자와의 만남, 우리에게 이 만남들은 고통스럽다. 경쟁과 대립의 연속이다. 이러한 고통스러운 만남을 지양하기 위한 우리의 노력은 적을 이해하려는 사투와도 같다. 하지만 이정용의 대화법은 그러한 우리에게 이해를 위한 노력이 아니라, 타인/타자가 자기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틈을 만들도록 권유한다. 대화는 이해가 아니라 이런 틈을 자기 내면에서 발견하는 행위인 것이다. 나의 존재의 집으로 타인/타자를 불러들여 그를 내 안의 일부로 있게 하는 것, 그리고 나 또한 그이의 안으로 들어가는 것, 정체성과 다른 정체성의 만남이 아니라, 모든 것이 두루뭉술한 지점에서 서로 얽히는 것, 그것이 대화적 만남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