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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아무도 몰락하지 않도록 - 포스트코로나 시대에 희년/안식년을 다시 생각하다

[주간기독교] 2243호(2020.07.05)에 실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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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몰락하지 않도록

포스트코로나 시대에 희년/안식년을 다시 생각하다

 

 

코로나19가 세계를 감염병의 공포 속으로 휘몰아가고 있는 가운데, 이 질병으로 인한 사회적, 경제적 재앙을 최대한 빨리 극복하고 새로운 사회를 위한 도약의 발판으로 삼기 위한 여러 정책들이 앞다투어 실시되고 있다. 그중에 우리에게 가장 인상 깊게 다가온 것은 긴급재난지원금이었을 것이다. 비록 일시적인 것이고 그 액수도 그리 크지 않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소비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여전히 굉장히 많은 사람들은 막막한 하루하루를 견뎌내야 하지만, 그럼에도 긴급재난지원금을 사용할 때의 쾌감은 그 금액의 크기와 상관없이 많은 이들에게 신선한 짜릿함으로 다가왔다.

게다가 2차 재난지원금이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가 사람들 사이에서 제법 널리 퍼져있고, 아예 기본소득제도 도입의 필요성에 심정적으로 공감하는 이들도 꽤 많아졌다. 소상공인 지원이나 채무면제 등의 정책이 시행되거나 논의되고 있고, 의료보험과 공공의료기관 확충 등 서민의 건강관리 대책도 폭넓게 논의되고 있다. 또 단순히 일자리 확충이 아니라 공공일자리를 확충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도 예전과는 달리 반대의 목소리가 그리 두드러지게 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대량사육 시스템과 환경파괴 산업을 지양해야 이런 치명적인 감염병을 예방할 수 있다는 주장도 전보다 훨씬 더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제까지 세계를 주도해 왔던 신자유주의적 자본의 논리와는 상반되는 진보적 대안들과 의견들이 여론이 되고 있고 그중 많은 것들이 정책으로 반영되고 있는 것이다.

최근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킨 책 21세기와 자본을 쓴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는 최근 신자유주의로 인해 파괴되어 가고 있던 공정하고 공평한 사회에 대한 가치나 제도가 코로나 이후 전 지구적으로 놀라울 만큼 확산되고 있고 그것은 세계의 진보적 변화를 추동하는 동력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한 바 있다. 영국의 세계적인 저널리스트 폴 메이슨(Paul Mason)의 주장도 비슷하다. 코로나는 지구적 자본주의 종말의 강력한 신호탄이며, 그 이후를 상상하게 만들었다고 말이다.

과연 세계는 그렇게 변화할 수 있을까? 아무튼 신자유주의적 시스템은 코로나19에 매우 취약한 체제임이 드러났고, 해서 포스트코로나 시대는 신자유주의의 종언을 불러올 수도 있다는 담론의 프레임이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 나는 성서의 용어인 희년(yobel)을 떠올린다. 성서에서 27회 사용된 용어인데, 그중 24번이 레위기에 집중되어 있어서, 이 문서 속의 용례가 이 단어의 성서적 의미를 대표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레위기25,2~7에서 안식년에 대해 말한 뒤 바로 이어서 25,8~55까지 희년얘기가 길게 나온다. 그 내용에 의하면 안식년은 7년 주기로 돌아오며, 희년은 7번의 안식년을 지낸 다음 해, 그러니까 50년 만에 돌아오는 온다. 안식년에는 땅을 쉬게 하고, 그곳에서 자라난 모든 열매를 그 집에 속한 모든 존재, 노예와 가축과 떠돌이 거류민까지도 먹도록 내버려 두라고 하는데, 희년에는 그 모든 예속된 존재들의 자유를 선포한다. 그리고 땅을 빼앗긴 이들에게 땅까지 돌려주라고 한다. 그러니까 희년 개념 속에는 공정하고 공평했던 약속의 땅의 질서의 시간, 제로포인트로 모든 것을 되돌려놓으라는 정신이 담겨 있다.

한데 레위기25장에서 안식년의 분량은 달랑 6개 절인데, 희년은 무려 48개 절로 되어 있다. 희년이 8배나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 디테일이 너무 세세해서 실제로 활용되었던 법안이 아니었을까 생각될 정도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문서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이 극소수인 사회에서 이렇게 길고 세세한 법 규정이 실정법으로 작동될 수 있었을까. 게다가 당시 사람들의 평균수명보다도 더 긴, 50년 주기의 규정들이 하나의 제도로 정착하는 것이 가능했을까.

흥미롭게도 레위기는 안식년을 묘사할 때는 법적인 규정처럼 서술되어 있지 않는 반면, 희년은 법률 형식으로 묘사되어 있다. 여기서 주지할 것은 그 당시 사회가 법률에 의해 통치되는 사회가 아니라는 점이다. 즉 법은 그 사회의 실질적 운용의 논리가 아니라 그 사회가 꿈꾸는 이상을 다루는 서사 양식이었다는 점이다.

하여 안식년은 그 당시 하나의 전통으로 자리잡고 있는 관행이었다. 레위기의 묘사는 그 관행이 당시 어떠했는지를 보여준다. 7년마다 땅을 쉬게 하고, 그 땅에서 자동적으로 자란 열매는 식솔 누구에게나, 노예나 가축, 떠돌이 거류민들이 마음대로 먹도록 내버려두는 그런 방식의 관행으로 말이다.

반면 법률적 서사형식을 띤 희년의 묘사는,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나면, 즉 안식년이 완성되면 도래하는 희년은 이런 정신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논지를 펴는 데 초점이 있다. 다시 말하면 희년 얘기는, 관행이 되어버린 안식년의 근원에는 이와 같은 정신이 깃들어 있다는 논지를 설명하려는 것이다. 하여 레위기희년 묘사는 안식년의 주해인 셈이다. 요컨대 안식년을 관행에만 따르지 말고 그 근원 정신을 염두에 두라는 경계의 메시지다.

왜 그런 경계의 메시지를 담은 주해를 해야 했을까? 나는 오래전 안식년의 전통에서 그 해답을 찾아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성서를 보면 안식년과 동일한 제도적 관행을 표현하는 용어로 일곱번째 해라는 개념이 나온다. 출애굽기23,10~13신명기15,1~11이 그것이다.

출애굽기는 아마도 이스라엘국의 문서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이 문서로 제작된 시기는 아마도 유다국의 요시야 왕 시대였던 것 같다. 요시야는 왕실문서를 대대적으로 만들어내어 국가운영을 문서를 통해 구현하려 했던 유다국 최초의 군주였는데, 그런 문서화 운동의 초기에는 선진국이었던 이스라엘국의 문서를 참조하는 시기가 있었고, 좀더 뒤에 독자적인 문서를 만들어냈던 것으로 보인다. 출애굽기가 전자를 대표하는 것이라면, 신명기는 후자를 대표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출애굽기신명기는 현존하는 문서들의 초판본이었을 것이다. 후대에 수백년 동안 조금씩 덧붙여지고 수정 보완되면서 현재의 문서가 되었다.

출애굽기일곱 번째 해에 관한 설명을 보면 레위기의 그것과 거의 대동소이하다. 한데 중요한 차이가 있다. 레위기와는 달리, 출애굽기에는 제7년에 그 땅에서 나는 열매를 식솔만이 아니라 모든 가난한 사람들, 심지어는 들짐승에게도 개방하라는 것이다. 한편 신명기출애굽기의 이런 내용을 전제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 얘기는 전혀 안 하고 다짜고짜 그 해는 부채 탕감을 실행에 옮기는 해라고 선언한다. 그러니까 일곱번째 해를 요시야 왕실은 부채탕감의 초점을 두고 제도화하려 했다는 것이다.

출애굽기신명기가 기원전 7세기 후반의 유다의 군주였던 요시야 시대의 문서인 반면, 레위기는 군주국이 멸망한 뒤 오랜 식민지 기간을 거친 뒤, 아마도 헬레니즘 시대 초기인 기원전 4세기쯤의 문서인 듯하다. 그런데 이 레위기시대에 안식년은 과거 이스라엘국의 시대나 유다국 요시야 왕 시대에 비해 좀더 보수적으로 그 관행이 지켜지고 있었던 것 같다. 심지어 엄청난 개혁의 핵심에 있는 신명기일곱번째 해담론과는 너무나 편차가 큰 보수적 관행이었다.

레위기를 저술한 제사장 계열의 한 분파 지식인들은 그 현행의 관행을 존중하고 있지만, 과거의 그것들에 비해 너무 보수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것을 그들은 문제로 여겼던 듯하다. 해서 희년묘사를 주해로 첨가함으로써 안식년의 의의를 좀더 대중에게 의미 있는 것으로 해석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 해의 근원 정신은 사실은 모든 예속된 이를 해방하는 것이며, 그들을 그렇게 예속되게 했던 원인 자체를 소멸시키는 토지 환원의 가치가 구현되어는 데 있다는 얘기다.

나는, 출애굽기신명기레위기, ‘안식년이라는 것은 그 당시 위기에 처한 이들을 위한 일종의 긴급재난지원제도로 활용되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것이 주기적으로 정착된 관행이라는 점에서 일회적 조치인 오늘의 긴급재나지원책과는 다르다. 이들 성서 구절들을 보면 그 관행의 양상이 시대마다 다르지만 그 근원에는 공정하고 공평한 사회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야훼신앙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

오늘 코로나19로 인한 재앙의 시대에 희년의 정신, 혹은 안식년 제도는 무엇일까. 지금 논의되고 있고 실행되고 있는 것들은 필시 오늘의 안식년 제도의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좀더 필요하다. 성서의 정신은 그 좀더 깊은 제도를 향해 마음을 열라고 우리에게 손짓하고 있다. ‘희년이 바로 그 손짓의 흔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