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에세이

“내 이름은 레기온”―거라사의 그 남자 이야기,

[공동선] 2020.07+08에 수록

-----------------------------------

내 이름은 레기온"

거라사의 그 남자 이야기,

 

 

두려움의 정체

 

갈릴래아 마을회당에서 안식일을 두고 바리사이와 충돌한 예수는 더 이상 마을 안에서 활동하지 못했다. 그 후 예수는 갈릴래아 호숫가 주변의 공터에서 대중과 만났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물러가시니, 갈릴리에서 많은 사람이 따라왔다. 또한 유대아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아와 요르단강 건너편과, 그리고 두로와 시돈 근처에서도, 많은 사람이 그가 하신 모든 일을 소문으로 듣고, 그에게로 몰려왔다.

마가복음3,7~8

 

호숫가로 나가자 갑자기 사방팔방에서 예수 주위로 사람이 몰려든 것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위의 구절은 좀더 길고 다층적인 스토리를 한 장면 속에 축약한 것이겠다. 아무튼 호숫가로 나가서 활동하는 중에 예수는 유명해졌다. 그 주변에 많은 이들이 몰려다녔다. 갈릴래아 사람들만이 아니라, 유대아, 이두매아, 요르단강 건너, 그리고 페니키아 지역에까지 알려졌다. 그중에는 그를 추종하는 이들도 생겼다. 이른바 제자단이 더 확대된 것이다.

마가복음4장은 예수가 여러 가지 비유로 대중에게 전한 말씀들에 관한 에피소드들이 나온다. 그리고 마지막 단락(4,35~41)에서 매우 유명하지만 왜 이런 얘기가 여기에 있는지, 미스터리 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날 저녁이 되었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 ...... 그런데 거센 바람이 일어나서, 파도가 배 안으로 덮쳐 들어오므로, 물이 배에 벌써 가득 찼다.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를 깨우며 말하였다.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으십니까?” 예수께서 일어나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고요하고, 잠잠하여라하고 말씀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고요해졌다.

―〈마가복음4,35~39

 

이 이야기의 소재는 두려움이다. 바로 이 점이 이 텍스트가 여기에 등장하는 이유다. 제자들은 두려웠다. 갈릴래아와 베레아의 통치자 안티파스 군대의 서슬 퍼런 칼날이 세례자 요한의 잔당을 향해 번뜩이고 있었기에 두려웠다. 군대에게 발각되는 순간 목숨이 위태로웠고, 그 전에 죽음보다 더한 고문을 당할 것이 두려웠다. 그나마 마을 안에서 활동할 땐 좀 더 안심이 되었다. 군대가 마을 안으로 들어오는 일은 공물을 거둬갈 때뿐이었으니 말이다. 근데 바리사이와 다툰 뒤 마을 밖 공터를 전전하며 이리저리 돌아다녀야 했는데, 여긴 누가 당국의 밀정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또 순례자나 상인을 보호하기 위해 돌아다니는 순찰대와 맞닥뜨릴 수도 있었다. 해서 여차하면 국경을 넘기 위해 호숫가 언저리 공터에서 대중을 만났다.

어쩌면 위의 인용된 구절 배후에는 어떤 절체절명의 위기가 상정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국경 너머로 배를 타고 건너고 있는 장면인지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제자들은 폐부까지 밀려드는 두려움에 정신이 아득해 있었을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광풍이 덮쳤다. 안티파스보다도, 바리사이보다도 더욱 치명적인 세력이 덮쳤다. 광풍을 휘몰아치게 하는 영계(靈界)의 권력이다. 고립된 배 안에서 체험되는 광풍은 더는 숨을 곳이 없는 위험을 의미했다. 그런데 예수가 그 무시무시한 바람을 멈추게 했다. 제자들은 그렇게 기억했다. 아니 그랬다는 얘기가 사람들 사이에서 전해지고 있었다. 이 이야기를 회자시키는 대중, 오클로스들은 시시각각 조여오는 위기 속에서 초자연적인 위험까지도 이겨내는 예수를 떠올리고 있다.

 

거라사의 그 남자

 

그렇게 건너서 간 곳이 거라사(Gergesēnos)라고 하는 성읍의 변두리 공터다. 마가복음5장은 그렇게 시작된다. 저 유명한 거라사의 남자 이야기는 바로 여기에서 벌어졌다. 긴 구절이지만 인용해보자.

 

그들은 호수 건너편 거라사 사람들의 지역으로(eis tēn chōran tōn Geransēnōn) 갔다. 예수께서 배에서 내리시니, 곧 악한 귀신 들린 사람 하나가 무덤 사이에서 나와서, 예수와 만났다. 그는 무덤 사이에서 사는데, 이제는 아무도 그를 쇠사슬로도 묶어 둘 수 없었다. 여러 번 쇠고랑과 쇠사슬로 묶어 두었으나, 그는 쇠사슬도 끊고 쇠고랑도 부수었다. 아무도 그를 휘어잡을 수 없었다. 그는 밤낮 무덤 사이나 산속에서 살면서, 소리를 질러 대고, 돌로 제 몸에 상처를 내곤 하였다.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엎드려서 큰 소리로 외쳤다. “...... 예수님,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 제발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

예수께서 그에게 물으셨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대답하였다. “군대(legiōn)입니다. ......” ...... 마침 그곳 산기슭에 놓아 기르는 큰 돼지 떼가 있었다. ...... 악한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거의 이천 마리나 되는 돼지 떼가 바다 쪽으로 비탈을 내리달아, 바다에 빠져 죽었다.

돼지를 치던 사람들이 달아나 읍내(polis)시골(agros)에 이 일을 알렸다. 사람들은 ...... 그들은 ...... 귀신 들린 사람 곧 군대 귀신에 사로잡혔던 사람이 옷을 입고 제정신이 들어앉아 있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다. 처음부터 이 일을 본 사람들은 ...... 일어난 일을 그들에게 이야기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께, 자기네 지역(horion)을 떠나 달라고 간청하였다.

―〈마가복음5,1~17

 

거라사는 요르단 강 건너 10개의 도시연합체 곧 데카(10)+폴리스(도시)중 하나다. 그 도시에 속한 코라(chōra), 곧 시골지역이다. 민가가 있는 시골이 아니다. 멀지 않은 곳에 무덤터가 있고, 또 그 근방에서 돼지를 대량 사육하고 있다. 팔레스티나에서 서민들의 죽음의 공간인 므네메이온(mnēmeion. ‘무덤의 복수형으로 무덤터로 번역됨)은 시신들을 유기하는 장소다. 시신과 몸이 닿으면 누구든 부정 타게 된다는 레위기 11,24은 사람들의 일상을 규정하는 중요한 요소의 하나였다. 하여 시신을 인적이 없는 외진 곳에 유기시키는 관습이 있었다. 므네메이온은 그런 곳이다. 거기는 사람들이 가지 않기에 경험이 형성될 수 없는 곳이다. 즉 팔레스티나의 전형적인 비장소(nonplace). 한편 이스라엘 사람들은 돼지를 멀리했다. 성서에 따르면 부정 타게 하는 것 중 가장 많이 사용된 것이 돼지였다. 해서 아겔레 코이로스(agelē choiros), 돼지떼(a herd of pigs)가 있는 장소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근접해서는 안 되는 곳이다. 물론 돼지 사육에 종사하는 이들도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상종해서는 안 되는 존재에 속한다. 하여 그들도 비장소에 거주하는 혐오스런 사람들인 것이다. 바로 그런 곳에 예수일행이 당도했다. 이제까지 예수일행이 갔던 곳들, 그 숱한 비장소들 가운데 중 가장 치명적인 곳으로 말이다.

한 남자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마가복음이 묘사하는 바에 따르면, 그는 무덤 사이나 산속에서 사는 자다. 또 쇠사슬과 쇠고랑으로 손발을 포박해 놓아도 그것을 부수어 버리는 자다. 밤낮 괴성을 지르고 돌로 몸에 자해까지 한다. 한마디로 괴귀한 자, 혐오스럽고 공포스럽기까지 한 자다.

이런 곳에 그런 사람이 살았다. 하지만 사람들 대부분은 그를 못 보았을 것이다. 부정 타게 하는 것들로 가득한 곳이 아닌가. 다만 돼지 사육에 종사하는 자, 이스라엘의 규범적 질서에서 이미 떨려나간 자, 그런 사람들만이 어쩌다 그를 보았을 것이다. 혹은 그에게 쇠사슬과 쇠고랑을 채웠다면 그런 일을 수행했을 용병들도 그를 보았을 수 있다. 몇 사람 외에는 거의 본 적도 없는 사람인데, 그에 관한 소문은 그 일파만파 퍼져 그 일대의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졌다. 그는 더럽고 부정한 자이며, 동시에 무시무시한 자다. 동시대에 그이처럼 강렬한 혐오와 공포의 낙인이 찍힌 이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어쩌다 그런 사람이 되었을까. 내막을 알 길은 없지만, 그 사람 자신의 관점에서 보면, 세상은 온통 그에게 불행과 절망, 공포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를 부정 탄 자라고 멸시하고 배척했지만, 또 그 기괴한 소문에 무서워했지만, 그런 사람들을 맞닥뜨릴 때마다 재앙에 빠진 것은 다름 아닌 그 사람 자신이었다. 하여 그는 사람들을 피해 살았다.

사람들과 맞닥뜨릴 일이 가장 적은 곳은 무덤터다. 뼈다귀가 사방에 흩어져 날카롭게 살갗을 찔러대고 시신을 뜯어먹는 야수들이 들끓는 장소, 죽은 자들의 영혼들이 귀신이 되어 사방을 떠도는 그런 곳에서 그는 살았다. 그럼에도 그곳에 시신을 유기하려 오는 이들이 있다. 그런 이들을 만나면 그는 공포에 휩싸였다. 해서 소리를 지르고 미친 듯이 날뛰었다. 그래도 피할 수 없으면 돌로 자기 살을 찢어 피를 뿌려댄다. 사람들이 그런 그를 무서워했지만, 그 역시 사람들이 무서웠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예수에게로 다가왔다. 어쩌면 그때도 그는 소리를 지르고 자해를 했을지 모른다. 아님 예수에게만은 신비한 기운에 이끌려 순한 양처럼 되었을지도 모른다.

 

‘내 이름은 레기온’

 

어쨌거나 예수는 그와 대화를 시작했다. 그 세세한 말들이 전해지지 않지만, 그들 간의 대화에서 핵심중의 핵심은 예수가 그의 이름을 묻는 대목이다. “당신 이름이 무엇이요?” 너무도 오랫동안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그도 자신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으니 그의 이름은 있어도 없는 셈이다. 한데 예수가 그에게 이름을 묻는다.

이름은 그를 대표한다. 그 이름의 말뜻이 무엇이건, 그는 이름을 통해 사람들에게 기억되었고 이름을 통해 자기 자신을 형성한다. 해서 사람들에게 이름이 잊혀졌다는 것은 그의 존재가 사라졌다는 것을 뜻하며, 자기 자신이 이름을 잊었다면 그 자신에게도 존재가 유실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여 그는 비존재인 것이다. 살아 있으나 산 자가 아니다. 그래서 그는 무덤터에서 산다. 산 자들이 없는, 죽은 자들의 공간에서 산다. 기억이 만들어질 수 없는, 단지 사람들 사이에서 진실과는 무관한 풍문으로만 알려진 존재다.

그런데 예수가 그에게 이름을 묻고 있다. 그것은 현재의 그와 분리된 과거의 기억들을 소환하는 것이다. 서툰 말로,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앞뒤 안 맞는 말들을 떠벌리는 사람, 그에게 이름을 묻는 순간 그는 그가 태어났던 곳, 그의 엄마, 아빠, 형제, 누이, 친족, 친구들, 그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 모든 이들과 얽혔던 그 자신이 기억의 장소 안으로 반가운 손님처럼 찾아왔다. 드디어 그는 존재가 되었다.

아니, 아직은 아니었다. 그동안 그를 포박해온 온갖 악령들이, 저 기억의 손님들의 방문을 방해한다. 하여 그는 입으로 말을 하지만 그의 입으로 발화된 말들은 그의 말이 아니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그 발화의 주체는 레기온이었다.

그가 실제로 그렇게 말했기야 했겠는가. 또 이름을 망각하고 말이 유실된 이가 이름이 뭐냐는 말 한마디에 그 모든 장애가 기적처럼 해소되었다고 하는 것도 너무 과장된 얘기다. 아마도 많이 축약된 이야기일 것이다. 하지만 그 세세한 내용은 사라졌고, 예수를 이야기하는 대중, 오클로스들은 이름이 무엇이오’, ‘레기온이오.’는 짧은 문답으로 그 사건 전체를 응축시켜 기억했다.

레기온을 한글성서는 군대라고 번역했다. 차라리 좀 낯설더라도 많은 영어번역들처럼 legion이라고 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레기온은 부대 단위이지만 로마군 전체를 지칭하기도 한다. 왜냐면 레기온은 로마군의 가장 특징적인 군대 단위이자 전술의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거라사의 그 남자가 발설했다고 전해지는 레기온도 군대 단위를 가리키는 기술적 표현이 아니라 로마군 혹은 로마제국을 뜻하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 사람을 기억하는 오클로스들은 그가 로마제국이라는 악령에 씌워 있다고 기억하고 있다. 그는 로마제국이라는 악령에 포획된 자였다.

내 이름은 레기온이라는 대답에서 순간 우리는 이제까지의 모든 상상이 혼란에 빠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는 사람들이 혐오하는 자였다. 또 무서워했다. 또 그도 사람들을 무서워했다. 해서 인적 없는 곳에서 살았고 누군가 나타나면 고함을 질러대고 자해까지 했다. 곧 그는 편견의 대상으로 모든 사람들에 배척된 자다. 사람들도 그를 잊었고 그 자신에게도 잊혀진 자, 존재가 사라진 자였다. 하여 그는 어쩌면 사람들의 집단적인 린치에 존재가 파탄 나버린 자가 아니었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한데 당신 이름이 무엇이요라는 물음에 그가, 아니 그를 장악해버린 어떤 존재가 한 대답은 내 이름은 레기온이었다. 모든 폭력의 중심이요, 환원불가의 압도적 폭력의 주체다. 약자, 혐오스런 자, 해서 편견의 피해자 컨셉으로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대답이 그에게서 나왔다. 아니 사람들은 그가 그렇게 답했다고 기억했다. 즉 사람들의 생각 속에 그는 그런 자로 기억되었다.

드라마 미스터선샤인의 구동매(유연석이 연기함)는 조선의 백정 출신의 천민이다. 해서 조선사회로부터 온갖 폭력의 희생자였다. 그는 조선을 혐오하며 떠났다. 그때는 조선이 몰락하고 외세인 일제가 강점하는 격변기였다. 그리고 구동매는 일본 낭인(조폭집단)의 돌격대장이 되어 돌아왔다. 부하들을 이끌고 칼을 차고 다니는 자, 폭력이 일상이고 그 폭력 속엔 대상을 가리지 않는 증오, 조선에 대한 복수심이 들끓었다. 한 여자에 대한 로맨틱한 순박함의 모습만 제하면 드라마에서 그는 그런 난폭한 자였다. 한데 그의 배후엔 일본제국이 있다. 모든 폭력의 중심이고 환원불가의 압도적 폭력의 주체인 제국 일본이 그의 폭력을 비호하고 그의 폭력을 이용한다.

사람들은 그런 구동매를 어떻게 기억할까. 전지적 관찰자 시점으로 드라마를 보는 관객이 아니라, 그런 살기어린 무자비함에 접한 조선 대중의 눈에 그는 어떻게 보였을까. 여기서 폭력적이지만 로맨틱한 마초적 남자로 표현하는 드라마와는 다른 상상을 해보자.

조선을 증오하고 일본인이 되어 버린 괴물적 존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말은 어떤 말일까. 되든 안 되든 그는 중요한 대목에선 일본말을 썼을 것이다. 그것은 일본 마초 특유의 고함소리로 들렸을 것이다. 사람들이 그를 가장 무서워할 때는, 물론 폭력을 휘두를 때일 것이다. 한데 그때 그의 모습은 어땠을까. 일본 낭인의 옷을 입고 무자비하게 칼날을 휘두르는 자, 그자의 눈동자엔 살기가 뿜어나왔겠다. 그의 온몸은 그의 칼에 베인 이들의 피로 범벅이 되었을 것이고, 피의 역겨운 비린내가 사람들의 콧구멍 속을 사정 없이 헤집었을 것이다.

레기온이오!’, 이 말속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상상은 이렇지 않았을까. 그는 단순한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였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는 분노의 찬 폭력의 화신으로 소문난 자였다는 얘기다.

 

돼지떼에게로

 

그 남자가 예수를 만났다. 어쩌면 그가 예수를 찾아온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혹 주먹패를 이끌고 다니면서 권력 있는 자들과 돈 많은 자들에게 하청받아 폭력을 쓰는 자로서, 누군가의 명령으로 예수를 잡으러 온 자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가 예수에게 도리어 설득되었다.

마가복음은 그 남자의 몸 안에 들러붙어 있던 레기온이라는 악령들이 돼지떼에게도 갔다고 한다. 말했듯이 돼지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혐오하는 동물이다. 물론 식용으로도 터부시되는 동물이다. 실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팔레스티나에 거주하는 토착민들은 모두 돼지를 혐오했다. 한데 그곳에 대규모 돼지 사육단지가 있었다. 어쩌면 그 근방에 로마군 주둔지가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또는 거라사 폴리스 시민들의 식용을 위한 돼지농장일 수도 있다. 폴리스라는 이름처럼 그곳은 헬레니즘적 도시국가였고, 로마에 충성하는 이방인들이 지배자로 군림하는 곳이었으니, 그들이 먹는 돼지는 곧 로마와 등치되어도 무방하다. 이스라엘을 포함한 팔레스티나 대중의 시선에선 말이다.

한데 그 돼지떼에게로 레기온이라는 악령들이 들어갔다. 돼지떼는 미친 듯이 달렸고, 모두 물에 빠져 익사했다. 이런 스토리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예수를 만난 레기온이, 아니 레기온에 사로잡힌 사람이 레기온을 자신의 몸에서 축출하는 사건이, 로마군 혹은 친로마세력의 돼지떼의 몰살로 귀결되었다는 얘기, 이 말속에는 어떤 뉘앙스가 담겨 있을까.

또 한번 상상하자. 사람들은 레기온에 사로잡혔던 사람이 예수로 인해 변화된 사건과 그 일대의 돼지떼가 몰살당하는 사건을 연결시켜 기억하고 있다. 실제로 그 둘이 연계된 것이라면 거라사의 이 남자는 로마제국의 하수인으로 살았던 무뢰배였다가 로마를 공격하는 무장저항자, 그런 집단의 우두머리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이가 그 무렵 실재했을 수 있다. 그런 가능성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한데 사람들은 그 사람이 예수에 의해 변화된 결과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사람들이 예수에게서 그런 기대를 품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또 예수에게서 그런 기운을 느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 지역협력자를 기억하다

 

이런 시선에서 거라사 광인 이야기의 마지막 구절들을 읽어보자.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 들렸던 사람이 예수와 함께 있게 해 달라고 애원하였. 그러나 예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집으로 가서(hypage), 가족에게, 주님께서 너에게 큰 은혜를 베푸셔서 너를 불쌍히 여겨 주신 일을 이야기하여라.” 그는 떠나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일을 데카폴리스(데가볼리)전파하였다(ērxato kēryssein[began to proclaim]). 그리하니 사람들이 다 놀랐다.
―〈마가복음5,18~20

 

그는 예수와 동행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오클로스들은 그렇게 그 사건의 결말부를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예수는 그에게도 휘파게라고 말한다. ‘휘파게가거라라는 뜻의 명령형 어휘다. 마가복음에서 이 단어는 제자가 되어 따르다는 말의 반대되는 용례로 쓰였다. 즉 제자로 예수를 따르는 자와는 대비되는 존재다. 한데 그렇다고 적대자를 향해 쓴 말도 아니다. 즉 제자들처럼 예수와 함께 떠돌아다니는 추종자가 아니라 자기 지역에 남아서 예수를 따르는 행보를 하는 지지자들을 가리키는 단어다. 그러니까 추정컨대 이 텍스트는, 그후 거라사의 그 남자는 데카폴리스 지역에서 예수가 자기에게 한 일을 전파하게 되었다는 말로 마감하고 있는 것이다.

전파했다는 단어는 그리스어 동사 케뤼쏘(kēryssō)의 현재분사형이다. 그 명사형은 케뤼그마(kērygma). 말로 하는 가르침을 전하는 행위에 초점이 있는 표현인데, 위에서 상상했던 것처럼 그는 어쩌면 무력으로 의사를 표명하는 사람일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예수의 지역협력자 중에 그런 무력을 중심으로 활동한 다른 사례는 알려진 바 없다. 그렇다면 그는 이례적인 지역협력자의 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