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맘울림](2020 08)에 게재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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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명의 여성 지역협력자들
‘하혈하는 여인’과 ‘시로페니키아 출신 헬라여인’
하혈하는 여자
〈마가복음〉의 예수전에 의하면 모종의 위험을 피해 도주했던 곳에서 만난 한 남자, 다분히 폭력적 환경에서 살던 그가 예수를 만난 이후 예수의 지지자로서 살아갔다는 얘기가 데카폴리스에 속하는 한 도시인 거라사의 시골을 배경으로 하는 얘기로 전해졌다.(〈마가복음〉 5,1~20) 그리고 바로 다음 구절인 5,21에서 예수일행은 다시 갈릴래아로 돌아왔다고 말한다.(“예수께서 배를 타고 맞은편으로 다시 건너가시니”)
흥미롭게도 5,21~43의 이야기는 두 스토리가 겹쳐 있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둘러싸고 있는, ‘스토리(A)+스토리(B)+스토리(A)’ 형식의 구성은 다른 예수 이야기에서 좀처럼 발견되지 않다. 게다가 이런 구성은 〈마태복음〉 9,18~26과 〈루가복음〉 8,40~56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그것은 이 두 이야기가 오래전부터 이미 하나로 얽혀서 전승되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여기서 ‘이야기A’와 ‘이야기 B’는 어떤 관계에 있을까? 그런 물음을 가지고 이 단락을 읽어보자.
[스토리A] (21)예수께서 배를 타고 맞은편으로 다시 건너가시니, 큰 무리가 예수께로 모여들었다. 예수께서 호숫가에 계시는데, (22)회당장 가운데서 야이로라고 하는 사람이 찾아와서 예수를 뵙고, 그 발 아래에 엎드려서 (23)간곡히 청하였다.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오셔서, 그 아이에게 손을 얹어 고쳐 주시고, 살려 주십시오.” (24)그래서 예수께서 그와 함께 가셨다. 큰 무리가 뒤따라오면서 예수를 밀어댔다. |
[스토리B] (25)그런데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아 온 여자가 있었다. (26)여러 의사에게 보이면서, 고생도 많이 하고, 재산도 다 없앴으나, 아무 효력이 없었고, 상태는 더 악화되었다. (27)이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서, 뒤에서 무리 가운데로 끼여 들어와서는, 예수의 옷에 손을 대었다. (28)(그 여자는 “내가 그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나을 터인데!” 하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29)그래서 곧 출혈의 근원이 마르니, 그 여자는 몸이 나은 것을 느꼈다. (30)예수께서는 곧 자기에게서 능력이 나간 것을 몸으로 느끼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아서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31)제자들이 예수께 “무리가 선생님을 에워싸고 떠밀고 있는데, 누가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십니까?” 하고 반문하였다. (32)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렇게 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보셨다. (33)그 여자는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알므로, 두려워하여 떨면서, 예수께로 나아와 엎드려서 사실대로 다 말하였다. (34)그러자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안심하고 가거라. 그리고 이 병에서 벗어나서 건강하여라.” |
[스토리A] (35)예수께서 말씀을 계속하고 계시는데,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말하였다. “따님이 죽었습니다. 이제 선생님을 더 괴롭혀서 무엇하겠습니까?” (36)예수께서 이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서, 회당장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37)그리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동생 요한 밖에는, 아무도 따라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38)그들이 회당장의 집에 이르렀다. 예수께서 사람들이 울며 통곡하며 떠드는 것을 보시고, (39)들어가셔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떠들며 울고 있느냐? 그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40)그들은 예수를 비웃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을 다 내보내신 뒤에, 아이의 부모와 일행을 데리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셨다. (41)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말씀하셨다. “달리다굼!” (이는 번역하면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거라” 하는 말이다.) (42)그러자 소녀는 곧 일어나서 걸어 다녔다. 소녀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 사람들은 크게 놀랐다. (43)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그들에게 엄하게 명하시고,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셨다. |
갈릴래아의 호숫가로 ‘야이로’라는 이가 찾아왔다. 그는 회당장(아르키쉬나고고스, αρχισυναγωγος)이다. 그러니까 그는 마을의 유지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그는 마을의 지도급 바리사이일 것이다. 여기서 주지할 것은 그 시대는 바리사이가 하나의 잘 정의된 종파집단이 되기 이전이라는 점이다. 그 시기에 바리사이란 어떤 특정한 율법해석을 가진 종파적 집단이라기보다는 토라를 읽을 수 있고 그것 속의 율법에 최대한 신실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토라의 율법은 오래전 예루살렘의 사제들이 지키는 규율에서 발전된 것이다. 그러니까 율법의 준수가 자신의 삶이자 신앙인 사람들의 계율에서 발전된 것이다. 한데 사제가 아닌 자가, 그것도 도성이 아닌 촌읍에서 자신의 삶의 기준으로 삼아 살려고 한다는 것은 그가 노동에서 자유로운 계층이라는 것을 뜻한다. 그런 이들 중 더 유력한 이가 자신 소유의 장소를 기부했다. 온 마을 사람이 율법의 정신에 따라 네트워킹되게 하는 곳이다. 그것을 ‘회당’이라고 부른다.
요컨대 야이로는 그런 회당을 기부한 마을의 유지다. 그런 이가, 예수를 찾아왔다. 그리고는 그의 발아래 엎드려 간곡하게 청원한다. “제 어린 딸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제발 낫게 해주십시오.”
마을의 최고 지도자가 예수에게 엎드렸다. 좀처럼 볼 수 없는 일이다. 아마도 예수 이야기를 한바탕 떠벌리며 사람들의 흥을 돋우던 이와 청중은 이 대목에서 굉장한 희열을 체감했을 법하다. 마치 판소리 〈춘향전〉에서 거지꼴의 선비가 ‘암행어사’로 출두하여 관하 대청에서 전횡을 휘두르던 마을 사또에게 호통치는 대목에서 이야기꾼과 청중이 대리만족 하듯이 말이다.
하지만 실제의 예수사건에서 회당장이 예수를 찾아와 조아리며 딸을 살려달라고 애원했다면, 그의 집을 향해 가는 예수 주위에 마을 사람들이 온통 몰려들어 우글거리고 있었을 법하다.
사람들이 이리저리 밀치고 있는 중에 중병 든 한 여자가 예수의 옷깃을 붙잡았다. 이를 느낀 예수는 그 다급한 상황에 그 여인과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는 그 여인의 병을 고쳐주었다. 그렇게 지체되는 중에 야이로의 하인들이 달려와 따님이 운명했다는 소식을 전한다. 하지만 예수는 그 집으로 가서 죽은 소녀를를 살려냈다.
누가 보아도 이야기의 핵심은 야이로의 딸 소생사건에 있다. 분량도 ‘13 대 10’으로 많은 데다, 하혈하는 여자의 치유보다는 죽음에서 살아난 것이 더 놀라운 사건이기 때문이다. 하혈하는 여인 이야기는 야이로의 딸이 예수의 행보가 지체된 탓에 사망하게 되었다는, 해서 야이로의 딸 치유사건을 소생사건으로 전환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하나로 된 두 이야기의 보조역할에 그친다. 하지만 이 글에서 나의 관심은 하혈하는 여자에 있다.
우선 두 여성, 야이로의 딸과 하혈하는 여자를 비교해보자. 둘 다 이름이 명시되어 있지 않다. 반면 예수에게 청원하러 온 이는 ‘야이로’라고 이름이 명기되어 있다. 즉 남자 대 여자의 비대칭적 위상이 드러난다. 게다가 두 여성은 모두 발언의 주체가 아니다. ‘어린 소녀’는 그가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의 아버지가 전하고 있고, 하혈하는 여자는 자신의 고통을 감히 말하지 못하고 단지 손으로 그이의 옷깃만을 잠시 쥐었을 뿐이다. 예수가 그것을 알아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고 묻자, 제자들이 답한다. “인파가 이렇게 들끓고 있으니 손을 댄 게 아니라 사람들의 손이 닿은 것일 뿐입니다.”라고. 한데 예수와 그녀가 눈이 마주쳤다. 더 이상 아무 말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자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마가복음〉은 그녀의 발언을 인용하는 대신, 그녀가 말했다는 것을 그 정황으로만 설명한다. “두려워 떨면서, 엎드려서 사실대로 다 말했다”고. 그러는 사이 소녀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지만, 예수는 그 집으로 들어갔다. 물론 사망한 소녀는 말할 수 없었다. 다시 하혈하는 여성에게로 돌아가자. 그녀에게 예수는 말한다. “네 믿음이 너를 구했다.” 이것이 끝이다. 그녀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 다시 소녀 얘기다. 예수는 소녀를 향해 외친다. “탈리따 쿰”(Ταλιθα κουμ). “일어나거라”라는 아람어가 그리스로 음역된 것이다. 그리고 소녀는 일어나 걸었다고 한다. 그래도 여전히 그녀의 말은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 소녀와 하혈하는 여자는 동급이 아니다. 둘 사이에는 위계가 있다. 소녀는 말하지 않지만 누군가가 그녀를 대신해서 말하고 있다. 야이로는 그녀가 죽어가고 있다고, 살려달라고 예수에게 그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예의를 다해서 간청한다. 인파로 인해서, 그리고 하혈하는 여성의 치유로 인해서 예수의 행보가 지체되자 소녀는 끝내 사망했다. 그것을 회당장의 집 하인들이 와서 보고한다. 그럼에도 예수가 그 집으로 갔는데, 집은 이미 장례 절차에 들어갔다. 그때 통곡하는 이들이 울고 있었다. 죽은 아이의 슬픔을 대신 표하는 행위다. 그 소녀를 살려낸 뒤 예수는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한다. 소생한 뒤 주린 배를 채우려고. 소녀는 여전히 말할 필요가 없다. 자신의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누군가에 의해 끊임없이 대변되는 존재, 혹은 그래야만 하는 존재, 그것이 양가집 규수의 운명이다.
반면 하혈하는 여자를 묘사하는 구절인 5,25을 보자. 그녀는 “열두 해 동안 피를 흘리고 있는 여자”다. 여성이 피를 흘린다는 것은 하혈증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니까 그녀는 12년간 하혈하고 있는 사람이다.
(19)여인이 피를 흘리는데, 그것이 월경일 경우에는 칠 일간 부정하다. 그 여인에게 닿은 사람은 저녁 때가 되어야 부정을 벗는다. (20)그 여인이 불결한 기간 중에 누웠던 잠자리는 부정하다. 그 여인이 걸터앉았던 자리도 부정하다. (21)그 여인의 잠자리에 닿은 사람은 옷을 빨아 입고 목욕을 해야 한다. 그래도 저녁 때가 되어야 부정을 벗는다. (22)그 여인이 앉았던 자리에 닿은 사람도 옷을 빨아 입고 목욕을 하여야 한다. 그래도 저녁 때가 되어야 부정을 벗는다. (23)그 여인이 누웠던 자리나 앉았던 것 위에 있는 물건에 닿은 사람도 저녁 때가 되어야 부정을 벗는다. (24)그 여자와 한 자리에 든 남자는 그 여인의 불결이 묻었으므로 칠 일간 부정하다. 그 남자가 누웠던 잠자리도 부정하다.
(25)여인이 월경 때가 아닌데도 오랫동안 하혈하거나 월경이 더 오래 계속되거나 하면, 하혈하는 동안은 월경하는 때처럼 계속 부정하다. (26)그 여인이 하혈하는 동안 누웠던 잠자리는 월경 때 누웠던 잠자리와 마찬가지로 불결하다. 또 그 여인이 걸터앉았던 곳도 월경 때 부정하듯이 부정하다. (27)그런 것에 닿은 사람은 부정하다. 그는 옷을 빨아 입고 목욕을 해야 한다. 그래도 저녁 때가 되어야 부정을 벗는다. (28)그 여인이 하혈이 멎어 깨끗하게 되면 칠 일을 꼬박 기다려야 한다. 그 다음에야 정하게 된다.
29 팔 일째 되는 날 그 여인은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두 마리를 잡아 만남의 장막 문간, 사제에게 갖다 드려야 한다. (30)사제는 한 마리를 속죄제물로, 또 한 마리는 번제물로 삼아 드려야 한다. 이렇게 하여 사제는 야훼 앞에서 그 여인이 하혈로 부정탄 것을 벗겨 준다.
―〈레위기〉 15,19~30
아론계 제사장들이 만든 이른바 ‘성결법전’(Holiness Code)에 포함된 구문이다. 이 법전은 기원전 3세기, 헬레니즘 시대 초기의 문서로 추정된다. 거기에 따르면 여성이 생리 중인 것 ‘불결한 상태’라고 전제하고 있다. 하여 그녀뿐 아니라 그녀가 누웠던 잠자리, 앉았던 자리, 입었던 옷, 그녀의 몸과 닿았던 것이 모두 불결하다고 한다. 그녀와 동침했던 남자도 예외가 아니다. 또한 생리가 아닌 상태의 하혈하는 여자도 생리와 같은 방식으로 부정한(filthy) 존재로 규정된다.
〈마가복음〉 5장의 하혈하는 여성은 바로 이런 규율 아래에 매어 있다. 그녀는 12년간 하혈했다고 한다. 여기서 ‘12’라는 숫자는 자연수 12일 수도 있지만, ‘모든 날들’을 가리키는 표현일 수도 있다. 만약 후자의 의미로 쓰였다면 그녀는 평생 그 질환으로 살아야 했다는 뜻이겠다. 아마도 11년도 아니고 13년도 아닌 12년간 그 질병을 앓고 있었다기보다는, 헤아릴 수 없이 긴 세월을 그 병과 함께 살았다는 것이 는 더 적합한 뜻일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전 존재가 부정한 여인이다.
만약 그녀가 야이로 같은 중간층 이상의 집안 배경을 가진 사람이라면 아마도 그녀의 질병 상태를 대신 말해줄 누군가가 등장했을 법하다. 한데 그녀에겐 그런 이가 없다. 그것은 그녀가 하층민에 속한 여성임을 암시한다. 심지어 그녀는 위에서 인용한 〈레위기〉 구문처럼 자신의 질병을 말해서도 안 된다. 아니 그런 곳에 나오는 것조차 불경스럽다. 마치 코로나에 감염되었을 법한 불결한 외양의 사람이 거리를 함부로 돌아다니는 것과 비슷하다. 하여 그녀는 감히 말하지 못하고 예수의 옷깃에 손을 대었을 뿐이다. 너무나 간절하지만 말하지 못하게 하는 상징체계가 그녀와 그녀 주위의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기 때문이다. 곧 그녀는 말할 수 없는 자이고, 대언해 줄 이도 없는 자다.
한데 예수가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그녀에게 말한다.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했소.” 이 말은 그녀가 더 이상 말할 수 없는 자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녀는 자신을 치유하는 주체가 된 것이다. 그리고 예수는 그녀에게 말했다. “평안히 가시오!”(휘파게 에이스 에이레넨, ὑπαγε εις ειρηνην) 온 삶을 괴롭혀왔던 질병에서 해방된 그녀는 이제 자신이 살던 지역에서 예수운동을 지지하는 자로 살게 되었다는 뜻을 담고 있는 말이다.
여기서 ‘가라’는 뜻의 그리스 단어 ‘휘파게’(ὑπαγε)는 〈마가복음〉에서 한 번도 적대자에게 쓰이지 않았다는 점을 유념하라. 오히려 예수로 인해 질병이 나았거나 예수가 애틋하게 바라본 이를 향해서 이 단어가 쓰였다. 〈마가복음〉에는 이런 뉘앙스의 다른 단어가 또 있다. 예수가 시몬(베드로)과 안드레아를 향해 “나를 따르라”(듀테 오피소 무, Δευτε οπισω μου)고 하자 그들이 “그분을 따랐다”(에콜류떼산 아우토, ηκολουθησαν αυτω)고 할 때, ‘따르다’는 뜻의 동사 ‘아콜류떼오’(ακολουθεω)가 그러하다. 이 단어도 거의 대부분 적대자에게 쓰이지 않았다. 둘 다 예수의 입장에서 우호적인 이들에게 쓰인 단어다. 단, ‘아콜류떼오’는 예수를 수행하며 함께 떠돌아다니던 추종자형 제자들에게 쓰인 반면, ‘휘파게’는 지역에 머물면서 예수에 동조하는 활동을 하는 이들을 향해 쓰였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즉 예수의 은사를 받은 이 여성은 지역협력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예수가 그녀에게 한 또 다른 말,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원했소”(ἡ πιστις σου σεσωκεν σε)라는 말을 들은 두 명의 사람 중 하나다. 또 다른 사람은 예수의 추종자형 제자가 된, 시각장애인이었던 ‘티매오의 아들’(10,52)이다. 두 사람 다, 사람들의 강력한 제지를 받았음에도 적극적인 행위를 통해 예수의 은사를 받아낸 인물들이다. 그런 점에서 이 표현은 예수가 주는 가장 큰 치하와 격려의 말일 수 있다.
시로페니키아 출신 헬라여인
또 다른 여성 지역협력자로 우리가 주목하는 이는 ‘시로페니키아 출신의 헬라여인’이라는 인물이다. 거라사의 그 남자처럼 이 여성도 이방 지역에 사는 이다. 한데 거라사의 그 남자가 굴곡 많은 밑바닥 인생이라면 이 여성은 전혀 다른 배경의 사람으로 보인다. 그는 어떻게 예수와 엮이게 되었고 어떻게 예수운동에 참여하게 되었을까.
(24)예수께서 거기에서 일어나셔서, 두로 지역으로(εις τα ὅρια Τυρου) 가셨다. 그리고 어떤 집에 들어가셨는데, 아무도 그것을 모르기를 바라셨으나, 숨어 계실 수가 없었다. (25)악한 귀신 들린 딸을 둔 여자가 곧바로 예수의 소문을 듣고 와서, 그의 발 앞에 엎드렸다. (26)그 여자는 그리스 사람으로서, 시로페니키아 출생인데,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달라고 예수께 간청하였다.
(27)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자녀들을 먼저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이 먹을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28)그러나 그 여자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개들도 자녀들이 흘리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 (29)그래서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돌아가거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다.” (30)그 여자가 집에 돌아가서 보니, 아이는 침대에 누워 있고, 귀신은 이미 나가고 없었다.
―〈마가복음〉 7,24~30
이번에 예수일행이 간 곳은 ‘두로 지역’이다. 페니키아를 대표했던 네 개의 도시국가들(아르밧, 비블로스, 시돈, 두로)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나라가 두로(Τυρος)다. 로마가 이 도시국가들을 정복해서 ‘페니키아’라는 하나의 속주로 만들기 전까지 이 지역은 서로 다른 도시국가들이 병립하고 있던 곳이었고, 두로는 그중 남부에 위치한 하나의 도시국가였다. 로마가 네 도시들 중 두로를 속주의 수도로 삼았다. 그것은 당시 이 도시가 페니키아에서 가장 발달한 곳이었음을 시사한다.
한데 예수가 당도한 곳은 두로의 ‘호리온’(ὅριον)이다. 호리온이란 중심부가 아니라 변두리나 지방을 가리킨다. 두로의 중심부가 육지에서 1㎞ 정도 떨어진 섬이었으니, 예수일행이 당도했던 ‘두로의 호리온’은 이 섬 지역이 아니라 두로에 인접한 육지의 어느 곳이었을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두로의 변경지역, 특히 남서부의 갈릴래아와 인접한 시골지역이었을 것이다.
그는 그곳의 어느 집에 묶었는데, 아무도 알지 않기를 바랐으나 그럴 수 없었다고 한다. 왜 그곳에 은둔하고자 했을까. 가장 개연성 있는 가정은 갈릴래아의 통치자인 안티파스 군대의 추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국경 밖으로까지 달아난 것이었을 법하다. 두로 영역으로 들어갔으니 군대의 추격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 그러나 정규군은 더 들어가지 못했지만 비공식적인 추격대가 계속 좇아왔는지도 모른다. 해서 예수일행은 자신들의 은거지가 알려지지 않기를 바랐다.
한데 이 텍스트가 다루는 주된 스토리는 여기서 시작된다. 한 여성이 영험한 예언자가 이곳에 왔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 그런데 이 여성의 신분이 흥미롭다. 그녀는 헬라사람(Ἑλληνις)인데, 혈통으로는 시로페니키아인(수로포이니키싸 토 게네이, Συροφοινικισσα τω γενει)이었다고 한다. ‘헬라’라는 말은 ‘그리스’라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그렇게 보면 모순적인 표현처럼 들린다. 헬라 혈통이자 시로페니키아 혈통이라니 말이다. 그런데 ‘헬라’라는 단어를 ‘지역으로서의 그리스’ 혹은 ‘혈통으로서의 그리스’로 보는 견해는 낡은 관점이다. 마케도니아 제국의 등장은 그리스인의 범주를 지역이나 인종의 차원에서 확장시키는 중요한 계기였다. 마케도니아의 정복군주 알렉산드로스가 그리스인이자 그리스철학의 대가인 아리스토텔레스를 스승 삼았다는 것은 그리스 북쪽의 나라로까지 헬라의 개념이 확장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데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알다시피 알렉산드로스는 그리스, 터키, 시리아, 이집트, 메소포타미아를 영토로 하는 전대미문의 거대제국을 이룩했다. 그리고 그 영토 곳곳에 70개의 도시를 세워 ‘알렉산드리아’라는 이름을 지었다. 이 도시들은 그리스어를 공식어로 사용했다. 그리고 이 도시들 간에 국제교류가 활발해졌다. 그리고 그가 요절한 뒤 그의 휘하 장군들이 제국을 분할하여 통치하는 시대가 이어진다. 이때에도 이 도시들을 중심으로 지중해와 메소포타미아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교류가 활발하게 펼쳐졌다. 하여 현대의 역사가들은 이 시대를 ‘헬레니즘 시대’(기원전 4세기 후반~기원전 1세기)라고 부른다. 그뿐 아니라 도시들 간의 문화적 혼융이 활발하게 벌어지던 시대는 헬레니즘 시대가 저물고 로마제국 시대가 도래한 이후에도 한동안 계속되었다. 정치적으로는 로마제국의 영토가 되었지만, 지배문화는 헬라어를 중심으로 하는 헬레니즘이었다는 얘기다. 이런 사정으로 해서 ‘헬라’라는 말은 더 이상 영역이나 인종으로서의 그리스의 범주에 한정되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그 용어는 문화적 함의를 지닌다. 대체로 이 단어 속에는 ‘고귀한 계층’이라는 함의가 숨어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혈통으로는 시로페니키아인인데 헬라사람’이라는 말의 뜻을 해명할 수 있다. 그녀는 ‘시로페니키아에서 태어나 계속 살고있는 귀부인’이라는 뜻이다.
예수가 좀처럼 만날 수 없었던 부류인 상류층 인사가 예수를 찾아왔다. 그 이유는 그녀의 딸이 ‘악령(δαιμονιον)에 들려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예수가 숨어 있고자 했지만 그럴 수 없었던 이유가 드러난다. 예수가 많은 이들의 병을 고쳐주었고 악령을 쫓아냈다는 소문이 여기까지도 파다하게 퍼졌던 것이다.
악령으로 번역된 ‘다이모니온’은 ‘데몬’(δημον)이라고도 하는데, 악마, 악령, 사탄 등과 같은 의미로 쓰이는 단어다. 아마도 ‘다이모니온에 들렸다’는 것은 정신적 이상 증상을 가리키는 말로 보인다. 이 아이의 증상에 대해서는 구체적 묘사가 없으니 어떤 질환이었을지 추정하기는 어렵지만, 치유된 이후 침대에 누워있었다는 것은 발작 증상을 일으키는 질환에 걸렸던 것이 아닐까 추정된다. 아무튼 그런 귀부인이 천한 계층의 예수에게까지 찾아왔다는 것은 질병을 치유하기 위한 모든 가능한 방법을 다 시도해보았지만 실패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만큼 절박한 사정에서 귀부인과 예수는 만났다.
자녀들의 빵은 강아지에게 줄 수 없다
여인의 절박한 간청에 대한 예수의 태도는 우리를 당혹스럽게 한다. 예수는 그녀의 간청을 단호히 거절했다. 그것도 굉장히 모욕적인 표현으로 말이다. “자녀들이 먹을 빵을 개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 이런 격한 표현을 썼다는 것은 이 이야기 배후에 어떤 심각한 갈등이 전제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추정하는 것이 이 텍스트 해석의 관건이다.
‘개’라고 번역된 ‘퀴나리온’(κυναριον)이라는 단어의 용례는 대체로 두 가지로 쓰였다. 하나는 귀엽다는 늬앙스의 말이고 다른 하나는 비하하는 늬앙스의 말이다. 이 문맥에선 비하의 뜻이 더 적절해 보인다. 하여 “자녀들이 먹을 땅을 개들에게 줄 수 없다”는 예수의 격한 말속에는 ‘자녀’와 ‘개’가 대조되고 있고, 이 여인의 딸을 개에 빗대고 있다. 너무나 모욕적인 표현이다. 더욱이 그녀는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들을 만큼 천한 신분이 아니다. 게다가 그런 말을 쓴 이는 천박한 계층의 사람이다. ‘이쯤 되면 막 하자는 얘기겠다.’ ‘천한 계층’의 사람이 ‘고귀한 계층의 사람’에게 이렇게 막말을 하는 것, 그 속에는 분명 격한 계급적 증오가 담겨 있을 것이다. 도대체 어떤 내막이 있을까.
두로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점이 중요한 힌트가 될 것이다. 두로에서 북쪽으로 40킬로 올라가야 나오는 시돈이나 더 북쪽의 비블로스나 아르밧 같은 도시는 사정이 좀 다르겠지만, 갈릴래아와 바로 접하고 있는 부유한 국제도시 두로에는 수많은 갈릴래아 대중들이 살고 있었다. 필시 그들은 이곳에서 이주노동자로 고용되어 있었을 것이다. 백향목(cedar tree) 숲에서 일하는 노동자였을 수도 있고, 유리나 항아리 공장의 노동자였을 수도 있다. 혹은 “자주색과 청색 모시와 홍색 천을 짤 줄 알며, 모든 조각을 잘 합니다.”(〈역대지하〉 2,14)는 표현에서 보듯, 고대로마 사회에서 금보다도 귀한 옷감의 생산지로도 두로가 유명했으니 이 일에 종사하는 노동자였을 수도 있다. 아무튼 갈릴래아 출신의 노동자들이 대거 두로의 시골에서 거의 개와 같은 처지의 노동자로 살아가고 있었다.
이들은 노동자였고 이주민이었다. 이런 이중의 핸디캡은 이들이 이 지역에서 가장 밑바닥으로 내몰린 계층임을 시사한다. 그런 이들과 그들을 고용한 사람들 혹은 그런 급의 상류층의 사람들 사이에는 너무 심한 격차가 있었다. 이런 정황을 〈마가복음〉 7,27에 적용하면, 그들은 주인이 자녀에게 주는 빵 부스러기를 개처럼 주워먹는 신세였다. 필시 그들은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렸을 것이다. 해서 예수가 이곳에 왔다는 소문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그이가 오천 명의 대중을 배불리 먹였다는 소문이 파다했고, 악령을 쫓아냈다는 얘기도 널리 돌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그래서 예수가 소리소문없이 은거하고자 왔던 곳에서 사람들이 연일 집을 둘러싸고 그이에게 간청을 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래서 자객들도 예수를 체포하거나 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한데 그런 소문을 접한 한 귀부인이 거길 찾아왔다. 그리고 예수는 그곳에 모인 대중 앞에서 이렇게 그녀의 간청을 거절한 것이다. “자녀에게 줄 빵을 강아지에게 줄 수는 없다.” 그곳의 이주노동자들의 현실을 거꾸로 적용한 것이다.
이 모욕적인 말에 자리를 박차고 화를 내며 나가는 장면이 대중이 상상할 수 있는 귀족의 가장 익숙한 모습일 것이다. 그러면 그녀의 집안에 고용된 가내노예나 혹은 사병들이 달려들어 예수에게 몰골을 냈을 것이다.
한데 그런 조마조마한 상황에서 그녀의 대답은 모두의 예상을 벗어났다. “주님, 상 아래 있는 강아지들도 자녀들이 흘린 부스러기는 얻어먹지 않습니까.” 이 발언에 모두가 놀랐다. 심지어 예수도 놀랐다. 어쩌면 이 말은 예수의 섣부른 증오심을 부끄럽게 했는지도 모른다. 하여 예수가 그녀의 딸을 치유했다는 얘기가 대중 사이에서 널리 전파되었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다. 29절은 세 가지 표현이 다소 낯설게 이어져 있다. 첫 번째는 “네가 그렇게 말했으니”(διὰ τουτον τον λογον)라는 어구이고, 세 번째는 “다이모니온이 네 딸에게서 나갔다.”라는 문장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휘파게’라는 명령형 단어가 들어있다. 그렇게 말한 결과가 ‘가라’일 수는 없을 것이니, 첫째 어구는 세 번째 문장에 바로 이어지는 게 자연스럽다. 즉 ‘네가 그렇게 말한 덕에 네 딸이 치유되었다.’일 것이다. 그렇다면 ‘휘파게’는 무슨 의미일까. 가장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집에 가보면 딸이 나은 것을 볼 것’이라는 의미겠다. 하지만 “자녀에게 줄 빵을 강아지에게 줄 수는 없다”고 격하게 증오를 표현한 이가 그 말에 화를 내지 않고 순순히 받아들이면서 빵 부스러기라도 달라고 하는 말에 동화되어 그녀의 딸을 고쳐줬다는 것으로 끝난다면 그게 충분한 결과일 것인가. 그 감정의 해소를 향한 무엇인가가 필요한 것 아닌가. 그 비밀이 바로 ‘휘파게’라는 말이라는 게 나의 추정이다.
이 단어는 예수의 비밀후원자들을 암시하는 표현이었다. 위에서 휘파게에 대해 말했던 다시 요약하면, 예수를 지지하긴 하지만 추종자형 지지자가 아닌 사람, 주로 비밀스럽게 후원활동을 했던 사람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시로페니키아 출신의 이 귀부인에게 예수가 ‘휘파게’라고 말한 것은 단순히 집에 돌아갔다는 의미 이상을 뜻할 것이다. 그래야만 예수의 격앙된 감정이 그녀에게만은 취하될 무엇인가가 필요했을 것이다. 여기서 가장 그럴듯하게 추정할 수 있는 것은 ‘자녀에게 줄 빵을 강아지에게도 나눠주는 행위’일 것이다. 그녀는 이제 그 지역의 하층의 이민자들을 위해 무언가를 하는 이가 되었을지 모른다는 얘기다. 필경 그런 행위까지 포함된 일화가 오클로스 사이에서 전해진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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