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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정치신학 대 문화신학’에서 ‘문화정치학적 신학’으로

[농촌과 목회]라는 계간지가 있었네요. 웬만한 계간잡지들이 사라져 없어졌는데, 이 잡지는 88호나 발간했네요. 무려 20년 넘게 발간해왔네요. 1990년대 말쯤 창간된 모양입니다. 당시는 계간지의 영향력이 요즘의 유튜브 못지 않던 시절인데, 2천년대 이후 급격한 위기에 빠지면서 하나둘씩 폐간되기 시작했는데, 그 이후 엄혹한 시간을 20년이나 버텨왔네요. 놀랍습니다. 더구나 농촌목회자들이 주요 독자로 타켓팅된 잡지라니 더욱 놀랍습니다. 영광스럽게도 이 잡지로부터 청탁을 받았습니다. 한때 계간지에 관여했던 사람으로서 이 잡지 운영진에게 감사했고, 그런 마음으로 원고를 썼습니다. 하지만 마음과는 달리 글은 많이 부족합니다.

아래는 내 글이 실린 88호(2020 겨울) 표지와 목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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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신학 대 문화신학에서 문화정치학적 신학으로

 

 

서양신학적 어젠더로서의 정치신학과 문화신학

 

2차 세계대전을 겪은 유럽의 여러 비판적 신학자들은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신학은 가능한가를 물어야 했다. 이는 신학의 불가능성에 대한 절망적 문제제기였다. 하지만 1960년대 중반경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은 그 절망을 전도시킨 희망의 신학이라는 제목의 저작에서 아우슈비츠 이후의 신학(theology of post-Auschwitz)을 말했다. 새로운 정치신학을 말함으로써 신학의 불가능성을 가능성으로 전도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시대의 신학적 어젠더로 부상했다.

새로운 정치신학을 말하겠다는 것은 낡은 정치신학을 청산하겠다는 주장이다. 그 낡은 정치신학이란 나치를 지지했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의 신학을 말한다. 특히 나치의 이론적 정당성을 부여했던 법학자 칼 슈미트(Carl Schmitt)의 신학적 정치학이 그 중심에 있다. 몰트만과 동시대의 가톨릭 신학자 요하네스 밥티스트 메츠(Johannes B. Metz)도 슈미트의 정치신학을 겨냥하면서 그 대안적 개념으로 신정치신학(Neue Politische Theologie)을 주장했다.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을 대표하는 이들 당대의 진보적 정치신학자들은 유럽의 68운동, 북미의 흑인신학,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신학, 그리고 한국의 민중신학 등을 실천적 자양분으로 흡수하면서 새로운 정치신학의 이론적 보편성을 주장하였다. 이것은 전 세계의 진보적 신학과 그리스도교 운동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신학의 학문적 범주 속에 정치신학이라는 항목이 탄생했고, 많은 신학도들이 정치신학을 전공하여 자국에서 진보적 신학 활동을 이어갔던 것이다. 또 진보적 그리스도교의 국제네트워크를 통해서 정치신학을 소재로 하는 각종의 프로젝트들이 수행되었다. 그런 점에서 민중신학이 몰트만 등의 정치신학의 영향을 받으며 태동했다는 주장은 일리가 있다.(1)

그런데 몰트만 류의 정치신학은 문화에 대한 물음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의 정치신학적 관심에 의하면, 종말론적 희망은 항상 현실을 향한 정치적 개입으로 나타나야 하지만, 그런 점에서 항상 정치적이지만, 동시에 언제나 신의 정치와 인간의 정치는 동일시될 수 없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것은 어느 것이 정치신학의 당위인가에 대한 논의다. 가령, 슈미트는 동일시(identification)를 당위로 보았다. 반면 몰트만에게선 길항성(contention)이 당위다.

하지만 문제는 무엇을 당위라고 말하든 간에 대중은 그 당위에 매이지 않고 정치행위를 수행한다는 데 있다. 이때 대중의 정치행위는 합리적 판단의 결과가 아니라 종교적 열광(religious enthusiasm)의 결과인 경우가 많다. 해서 유럽 최고 지성의 한 사람인 몰트만은 당위라는 근거를 중심으로 정치신학을 논하였지만, 대중 차원에서는 종교적 열광이 정치신학의 내용과 형식을 규정하곤 한다.

이때 대중이 열광하는 종교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 시대의 문화적 기억과 깊은 연관이 있다. 또 그 기억을 담아내는 (문화적) 매체가 무엇인지의 문제와도 깊게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그 매체를 이용하여 문화적 기억을 대중에게 생생하게 번안해내는 예언자가 어떻게 그것을 재현하는지도 중요한 고려의 대상이다. 가령 니치가 등장하던 1930년대 독일에서 새로 부상한 중요한 대중적 매체는 라디오였다. 라디오를 매개로 나치의 예언자들은 대중의 종교적 열정을 호출해냈다. 그렇게 그 시대는 대중의 정치종교가 작동되고 있었다.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은, 그 문화적 요소들이 정치신학의 형식(그릇)인 것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그 정치신학의 내용에도 영향을 미친다. 하여 매체학자인 마샬 맥루한(Herbert Marshall Mcluhan)이 말한 것처럼 매체(media)는 형식인 동시에 내용(메시지)인 것이다.

슈미트는 그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하여 그는 환호(Akklamation)를 그의 정치신학의 내재적 요소로 사용하고 있다. 대중의 환호가 없다면 정치신학은 작동할 수 없다는 것이다. 슈미트와는 정치적으로 정반대의 입장이던 발터 벤야민은 정치의 예술화(die Ästhetisierung der Politik), 곧 미학적 최면에 걸린 대중이 정치적 비판의식이 마비되어 맹목적인 추종자가 되게 하는 것을 비판하고 있는데, 아마도 그는 슈미트의 정치신학에는 그러한 요소가 있다는 점을 간파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벤야민이 문화를 정치에서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대중의 미학적 체험을 통해 정치의 예술화, 그 이데올로기적 유혹을 해체해내는 능력이 발휘되는 것에 대해 말한다. 그것을 그는 예술의 정치화(die Politisierung der Kunst)라고 말했다. 문화는 대중의 비판의식을 마비시켜 정치지도자의 맹목적 추종자가 되게 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그런 정치지도자의 유혹의 전략을 해체하는 감각의 장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한데 몰트만에게선, 위에서 보았듯이, 그런 문화적 요소가 정치신학의 내적 요소로 다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결코 동의하지 않겠지만 어쩌면 그에게서 대중은 계몽의 대상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에게서 중요한 것은, 신앙은 늘 정치적이어야 한다는 명제이고, 그 정치적인 것은 신의 정의에 기반을 둔 것이어야 한다는 명제이며, 신정정치를 구현한다고 주장하는 어떤 정치지도자도 신 자신과 동일할 수는 없다는 명제다. 그는 이런 명제들을 주장했지만, 그 명제를 대중이 수용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다.

한편 파울 틸리히(Paul Johannes Tillich)1919년에 이미 문화와 신학의 연관성에 주목한 문화신학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2) 하지만 그의 문화적 문제제기가 당대에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게다가 그는 나치와 대립한 끝에 1930년대 초에 미국으로 망명했고, 저술가이자 학자로서 어느 정도 기반이 잡힌 1950년대 끝자락에 와서야 문화신학(Theology of Culture, 1959) 같은 문화와 신학에 대한 묵직한 이론서들을 펴냈다. 그가 문화와 신학 사이의 다리를 가설하자, 1950~60년대에 미국 연구자들이 본격적으로 문화적 요소를 신학에 연결시켜서 다양한 논의를 진척시겼다.

그런데 그의 이러한 미국에서의 신학적 성과물들이 독일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몰트만은 정치신학을 논할 때 틸리히를 참조하지 않았고, 슈미트나 벤야민의 문화적 문제설정에 대해서도 무관심했다. 그것은 몰트만뿐 아니라 독일 신학계의 전반적 현상이기도 했다.

이렇게 전후(戰後)의 정치신학은 독일에서 발전했고 문화신학은 미국에서 발전했다. 이는 이 두 신학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지 않은 채 독자적으로 전개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특히 정치신학은 세계의 여러 저항적 신학운동을 그 신학적 범주 아래 포함시킨 반면, 문화신학은 타종교나 타문화, 혹은 도시성 등을 다루는 논의들을 자신의 범주 아래 두었다. 정치와 문화에 관한 이런 신학담론적 이원화는 마치 국경처럼 연구자들의 관심과 언어를 명확하게 나누었고, 그들은 각기 자기가 속한 학문범주의 국경 안에서 충성스런 백성처럼 자신의 신학 현상을 해석하곤 했다.

 

민중신학적 어젠더로서의 문화정치학적 신학

 

한국에서도 정치신학과 문화신학은 마치 국경의 양편으로 나뉜 별개의 신학처럼 이해되었다. 국제적 정치신학의 담론 네트워크에는 한국의 민중신학이 연결되어 있었고, 문화신학의 국제네트워크에는 토착화신학이 좌석을 배정받고 있었다. 정치신학과 문화신학의 한국 대리인들은 마치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두 가지 신학운동을 해석하기 위해 정치신학과 문화신학을 상징하는 거장들의 신학적 언어가 한국에서 어떻게 재해석되었는지를 해독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한데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해석의 타당성에 대해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신학적 담론 현상을 읽어내고자 할 때 그것의 국제적인 지성사적 계보를 밝혀내는 것만으로 충분한가? 물론 그리스도교는 서양에서 유입되어 들어온 종교이고, 신학 또한 서양 신학전통의 막대한 영향력 아래 구속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서양의 신학이 한국에서 담론화되는 것은 일종의 번역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번역이란 원천언어(Source Language)가 대상언어(Target Language)로 전이되는 과정이다. 서양 신학 전통의 막강한 영향력 아래 구속되어 있는 신학자들이 그렇듯이 번역가는 원천언어의 의미를 최대한 정확하게 옮기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하지만 어떤 번역도 의미를 완벽하게 재현하지 못한다. 언어가 다르고, 언어를 둘러싼 문화가 다르며, 번역가의 경험이 저자의 경험과 다르고, 번역된 텍스트를 읽는 독자의 경험이 다르기 때문에 의미의 변용은 불가피하다. 하여 번역 과정은 외견상 의미의 복제 과정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의미의 재창조 과정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민중신학과 토착화신학이 서양의 정치신학과 문화신학의 한국적 번역과정이라고 하더라도, 그 국제적인 지성사적 계보만을 주목하는 것은 결코 충분한 해석이 될 수 없다. 오히려 국지적인(한국적인) 지역학적 계보를 탐색하는 과정이 훨씬 더 중요하다. 가장 충실하게 번역하고자 해도 의미는 재현(representation)되는 것이 아니라 재창조(recreation)되기 때문이다. 한데 서양신학의 한국 대리인들의 민중신학과 토착화신학에 대한 해석은 한국적 문화맥락에 대한 치밀한 읽기가 빈약하다.

이 글은 민중신학이 한국적 문화맥락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에 대해 좀더 집중해 보려 한다. 토착화신학을 그런 관점에서 읽는 것도 필요한 일이겠지만 그것은 나의 능력을 벗어난 과제다. 아무튼 나는 민중신학을 이런 관점에서 살펴봄으로써, 민중신학은 몰트만 류의 정치신학과는 달리 정치와 문화가 깊게 얽혀 있는 신학담론임을 말하려 한다. 그것을 나의 용어로 다시 표현하면 민중신학은 정치신학이 아니라 문화정치학적 신학이다.

이 논점을 나는 민중신학 담론의 출현을 둘러싼 두 가지 해석을 중심으로 이야기해보려 한다. 민중신학자들은 민중신학 담론의 출현 시기를 두 가지로 이야기한다. 1975년과 1979년이 그것이다. 1979년은 아시아기독교협의회(Christian Conference of Asia, CCA) 서울대회가 열렸을 때 민중신학이라는 용어가 공식적으로 처음 천명된 해다. 그리고 1975년은 민중신학’, 이 두 단어의 조합이 공적으로 처음 표명된 해다. 해서, 나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민중신학자들이 흔히 이야기하는 바에 의하면, 민중신학이라는 용어는 1979년에 처음 공식적으로 쓰였지만, 사실상의 민중신학은 그보다 4년 전에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한데 이런 해석은 민중신학의 출현시기를 좀더 이르게 잡았다는 것 외에는 특별한 의미가 없다. 1975년이든 1979년이든 민중개념에는 유의미한 차이가 없다는 가정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데 나는 이런 가정에 대해 반론을 펴고자 한다. 그것은 깊게 생각하지 않고 말해왔던 나 자신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1974년 전국을 거의 계엄상황의 공포정치로 몰아넣었던 거대한 조작사건인 인혁당재건위사건과 민청학련사건 주범에 대한 사형선고와 집행이 이듬해인 19754월 초에 있었다. 영장 없이 무려 1024명을 검거했고 그중 8명에게 사형을 집행한 것이다. 기독자교수협의회 소속 교수인 김동길김찬국도 배후혐의로 구속되어 각각 15년과 10년을 선고받았는데, 이듬해 2월 집행정지로 출소하였다. 그 직후인 3.1절 기념예배는 이들의 출소를 반기면서 정부의 강압통치를 비판하는 예배였는데, 이때 안병무의 설교 민족민중교회(3)민중을 신학의 내생적 요소로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민중신학이라는 용어가 사용된 것은 아님에도, 사실상 민중신학의 출범 선언으로 받아들여진다.

여기서 민중은 불의에 항거하는 신의 그림자다. 신은 거기에 있었고 거기에서 죽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부활했다. 하여 민중은 우리가 신을 만나는 이정표다. 이렇게 민중’+‘신학의 조합을 통해서 안병무는 박정희 독재체제를 지지하고 있거나 방관하고 있는 대부분의 교회와 신학자들의 정치신학과는 다른, 새로운 정치신학을 제기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안병무의 민중신학적 문제제기 속에는 몰트만의 그림자가 넘실거린다.

1979, CCA에서 민중신학이라는 명칭이 공식적으로 사용되던 무렵, 한국에는 각 학문 분야에서 민중론을 펴는 학자들이 속속 박정희 정권에 대한 비판적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그들을 통칭해서 민중론이라고 부르는데, 이들 민중론자들은 공히 민중을 민족이나 국민과 연결시키고 있었다. 민중은 저항하는 주체다. 민족이나 국민은 저항함으로써 민중의 대열에 서게 되고, 그럼으로써 배제된 비민족 혹은 비국민인 민중은 민족 혹은 국민의 일원으로 복귀할 수 있다. 여기에 국민/민족의 자리에 교회나 신학을 넣으면 민중신학이 된다. 이렇게 민중신학을 포함한 각 분야의 민중론들은 민중을 정치적 주체로 해석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 연결되는 관점을 갖고 있었다.

한데 1979년 무렵, 민중신학을 포함한 민중론들이 서로 유사한 해석체계를 갖고 있었던 즈음, 민중신학자들의 독특한 행보가 주목을 끈다. 다른 민중론자들에게서도 그런 점이 보이기는 하지만 민중신학자들은 좀 예외적이다 싶을 정도로 거의 모두가 민중을 읽기 위해 문화적 독해를 시도하고 있었다. 민중언어를 찾아 도시빈민과 농촌 민중의 언어에 관심을 기울였다. 또 설화나 가면극 속에서 민중을 발견하려 했고, 심지어 무속을 통해서 민중을 읽으려 했다.(4)

여기서 그들은 한국의 여러 현장과 담론장을 두루 뒤지면서 발전시킨 민중 해석학으로 성서의 민중을 해독하는 데 활용했다. 그리고 민중신학적 성서 해석을 통해 한국의 민중현실에 개입하는 신학적 논리를 발전시켰다.

이렇게 민중신학자들은 민중을 정치적 인식이나 실천의 관점에서 볼 뿐 아니라 문화적 현상과 실천의 관점에서 읽어내기 시작했다. 그때가 1979년 어간이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민중신학은, 적어도 그 일부는, 새로운 독특한 문제의식에 도달했다. 민중은 민족의 일원도 국민의 일원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 바깥에서 민중을 보았다. 안병무는 그 바깥의 민중마가복음오클로스(οχλος)와 유사한 존재들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마가복음에는 오클로스와 대비되는 존재로 라오스(λαος)가 나오는데, 그들은 그리스 문헌에서 민중을 뜻하는 단어로 널리 사용되는 데모스(δημος)와 거의 같은 이들을 지칭한다. 여기서 라오스 혹은 데모스는 영역 안의 민중을 가리킨다. 그들을 번안하면 백성 혹은 국민 혹은 민족에 가깝다. 그렇다면 오클로스는 백성/국민/민족의 바깥 민중을 뜻한다고 할 수 있겠다. 안병무는 바로 그 대립을 염두에 두면서 마가복음이 오클로스가 기억하는 예수론이라고 주장한다.

서남동은 바깥 민중의 언어를 상징하는 것으로 을 주목한다. 그것은 언어가 되지 못한 소리다. 고통의 소리이지만, 언어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소통될 수 없는 소리다. 해서 민중의 고통은 감추어져 있다. 그리고 서남동과 안병무는 그 바깥의 민중을 읽기 위해 에 주목한다. 그들에게서 낙인 효과에 다름 아니다. 즉 그들은 악인처럼 재현된다. 여기에는 영역 안의 민중은 배제의 체험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피박탈 대중이지만 자신들이 악인이 아니라는 것에 만족하면서, 나아가 악인을 증오하면서 체제에 자발적으로 귀속된다. 이렇게 안병무와 서남동은 정치와 문화를 조합하여 민중신학적 사유를 폄으로써 정치신학적 물음에서는 전혀 볼 수 없었던 보다 깊은 성서와 현실 속의 민중배제의 현상을 해독해낸다. 이것을 나는 정치신학과 대비되는 문화정치학적 신학이라고 명명하고자 한다.

이렇게 민중신학은 정치신학과 문화신학을 이분화시켰던 20세기 후반 서양신학의 도식으로 충분히 설명할 수 없는 신학담론이다. 그것은 한국적인 지역학적 맥락에서 탄생했고 그 맥락에서 현실에 개입하는 실천적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의 결론부에서는 그러한 문화정치학적 신학으로서의 민중신학이 최근 지향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 마무리짓고자 한다.

 

오늘의 문화정치학적 어젠더로서의 고통의 신학

 

최근 민중신학이 주목하는 핵심 키워드는 고통이다. 고통은 우리 시대를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감정현상의 하나다. 민중신학은 바로 이 감정현상을 문화정치학적으로 읽어내려 한다.

고통은 사적 감정이다. 물론 많은 사람들은 그런 고통 감정에서 삶이 뿌리째 흔들리는 것을 체감하기도 한다. 그것은 죽음 같은, 극한적 절망의 체험이기도 하다. 문제는 그 고통들이 언어화되어 표현될 때는 사회적인 담론의 채에 걸려 사라지거나 혹은 특정한 것이 증폭되곤 한다는 데 있다. 가령 신천지 종파의 신자들은, 그가 신천지 신자가 되기 이전에 가정폭력의 피해자였을 수도 있고 학교나 일터 등에서 집단따돌림의 피해자일 수도 있으며 혹은 이른바 영향력 없는 신자여서 교회에서 이렇다 할 관심과 배려도 받지 못했기에 힘들어 했을 수 있지만, 그 모든 고통들은 그가 신천지 신자라는 사실 앞에 모조리 망각되어 버린다. 위에서 가상으로 열거한 것들은 신천지 신자가 아닌 이들도 흔히 겪을 수 있는 고통의 사유들이다. 그런데 그가 신천지 신자라는 점이 드러나면서 그이의 고통을 묘사하는 언어가 다르게 부여되고 새로운 서사가 덧입혀진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은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집단적인 실천의 기획들에 참여하곤 한다. 그중에서 우리를 주목하게 하는 것은 많은 이들이 종교적 실천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제도종교의 하나에 귀의하는 것도 들어가지만, 또 많은 이들은 포스트모던적 신종교에 몰입하기도 하고 혹은 유사종교에 빠지기도 한다. 연예인이나 스포츠스타에 대한 팬덤현상 같은 문화적 유사종교행위, 정치인에 대한 팬덤현상과 촛불혹은 태극기를 상징적 결속의 키워드로 하는 집단행위로 표출되는 이념적 유사종교행위에 많은 사람들이 몰입하고 있다.

이렇게 개개인의 감정현상이 집단화되고 종교적 행위로 표출되곤 하는 가운데, 종종 폭력이 발생하고 때로는 소외가 일어난다. 민중신학은 바로 이런 현상에 개입하고 문제를 제기하여 모든 사람들이 겪는 고통의 감정현상의 퇴행성, 그리고 그 배후에서 퇴행성의 요소로 작동하는 종교현상을 읽어내고자 한다. 오늘의 민중신학은 이러한 방식으로 문화정치학적 신학을 수행하고 있다.

그런데 고통을 문화정치학적으로 읽는 것은 민중신학만의 역할이 아니다. 실제로 섹슈얼리티, 젠더, 도시성, 포스트식민성, 생태계 등에 주목하는 여러 문화적신학 담론들이 각기 다른 강조점으로 사람들의 고통을 읽고 해석해왔다. 이렇게 다르지만 유의미한 해석들이 만나고 공유하며 대안을 찾는 실천의 공론장이 필요하다. 민중신학이 그런 공론장의 중요한 행위자로 참여하고 기여할 수 있을 때 민중신학은 진정한 문화정치학적 신학이 될 수 있다.

 

[후주]

(1) 김명룡, 몰트만(J. Moltmann) 신학의 공헌과 논쟁점, 장신논단20(2003.12), 117. 실제로 안병무는 민중신학자로 활동하기 이전인 1972년에 정치신학을 소개하는 글을 3회에 걸쳐 연재한 바 있고, 또 김정준, 서광선 등 여러 민중신학자들도 정치신학을 소개하는 글을 썼다.

(2) 이때 그가 한 강연 제목은 문화와 신학에 대한 한 논제에 대하여(Über die Idee einer Theologie der Kultur)이다.

(3) 안병무의 이 글이 실린 기독교사상(1975.04)에는 서남동의 민중의 신학도 게재되었다. 일반적으로 이 두 글은 민중을 신학과 불가분리적 요소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민중신학의 출범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받아들여진다.

(4) 그 무렵 저작된 민중신학자들의 글들은 다음과 같다. 서남동은 ()의 사제(1979), ()의 형상화와 그 신학적 성찰(1979), 소리의 내력(1979), 민담에 관한 탈신학적 고찰(1982), 민담의 신학반신학(1983), 문화신학, 정치신학, 민중신학(1983) 등 민중의 구술적 언어에 주목하여 그것을 신학적으로 사유한 일련의 서남동의 글들이 쏟아져 나온 것은 1979년 이후 몇 년간이었다. 이 글들은 모두 그의 글 모음집인 민중신학의 탐구(한길사 1983)에 수록되어 있다. 그밖에 현영학의 글들인 한국 가면극 해석의 한 시도(1980), 한국 탈춤의 신학적 이해(1982), 민중신학과 한의 종교(1984), 병신춤(1986) 등도 이 무렵에 집중적으로 쓰였다. 이 글들은 그의 글 모음집인 예수의 탈춤한국그리스도교의 사회윤리(한국신학연구소 1997)에 수록되었다. 그밖에 서광선, 해방의 탈춤(1986)[이 글은 한국신학연구소 엮음, 1980년대 한국 민중신학의 전개(한국신학연구소 1990)에 수록]; 김용복, 민중의 사회전기와 신학(1984)[이 글은 그의 글 모음집인 지구화시대 민중의 사회전기(한국신학연구소 1998)에 수록] 서인석, 민담의 구조분석과 믿음의 이해〉 《기독교사상298(1983.4) 등도 이 무렵에 나온 민중의 이야기에 주목한 글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