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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안병무의 〈요한복음〉해석에 기대어 ‘오늘의 사릌스가 누구인지’를 묻다

[공동선] 2021년 3+4월호에 실린 글

강의 요청이 있어 적합한 자료를 찾다가 이 글을 다시 읽어보았다. 요즘 내가 얼마나 헤매고 있는지 여실히 보이는 글이었다. 무엇보다도 교정이 제대로 안 된 글이었다. 이걸 원고라고 보내다니. 창피하다. 게다가 같은 글을 두 번이나 여기에 올렸다. 그것을 지우고, 이 글을 다시 다듬어서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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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길목에서 문뜩

 

오늘의 사릌스를 묻다

안병무의 요한복음해석에 기대어서

 

 

호 로고스 사릌스 에케네토 ...’.( ὁ Λογος σαρξ εγενετο ...)

안병무 선생이 한신대학교 교수이던 시절, 수유리 캠퍼스의 도서관 현관 입구에 새겨진 문구다. ‘호 로고스(ὁ Λογος) 말씀이, ‘사릌스(σαρξ) 육신이, ‘에게네토(εγενετο) 되었다, 그리고 여기에 대등접속사 카이(και)로 이어진 구문이 딸려 있다. ‘카이 에스케노센 엔 휘민.’(και εσκηνωσεν ν μιν)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 저 유명한 요한복음1,14의 말씀이다.

1986, 내가 한신대 신학대학원에 입할할 당시, 수유리 캠퍼스에는 건물들이 많지 않았다. 캠퍼스 중앙에 잔디가 덮인 제법 넓찍한 광장이 있었고, 그 양편에 강의실과 행정실이 있는 본관 건물과 도서관, 각각 2층으로 된 건물 두 채가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어쩌면 기억하는 이도 있을 텐데, 1994122, 꽤나 춥던 겨울날 문익환 목사님의 장례식이 열렸던 그 잔디다. 백두산 천지를 배경으로 문 목사님이 두 팔을 활짝 벌리고 포효하듯 말씀하는 걸개그림이 본관 건물에 걸려 있었다.

그밖에는 이렇다 할 건물이 없었다. 본관 바로 왼편에 식당이기도 했다가 강당이기도 했다가 체육관이기도 했던 작은 건물 하나, 그리고 그 대각선 방향으로 조금 떨어져서 교수님들의 사택 몇 채와 학생 기숙사가 있었다. 그러니 당시 한신대 수유리 캠퍼스는 본관과 도서관, 이 두 채가 거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서 도서관 현관에 새겨진 짧은 헬라어 문구는 모든 학생이 아무리 무심해도 적어도 하루에 몇 번씩은 마주쳤던 가장 친숙한 학교 풍경의 하나였다. 그곳에서 공부하던 학생들은 신학대학원생 120명이 전부다. 그나마 20~30%는 휴학 중이니 전교생이 백 명도 안 되는 작고 한적한 교정이었다. 그중 절반쯤은 나처럼 다른 대학에서 다른 전공을 하다 대학원에 입학한 학생들이었다.

그런데 이 헬라어 문구가 언제 누구에 의해 새겨지게 된 것인지 유례를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나와 비슷한 시기에 그곳에서 공부했던 학생들 대다수는 이 문구를 안병무 선생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었다.

당시 안병무 선생은 은퇴한 명예교수였다. 1975년 박정희 정권에 의해 강제해직되었다가 19802월 복직되었는데, 그해 8월 다시 강제해직되었다. 이번에는 전두환 정권에 의해 교정에서 쫓겨났다. 그리고 복직된 것이 1984년 여름이었다. 그해 갈릴리의 예수라는 제목의 수업이 개설되었다. ‘안병무하면 떠올리는 것이 역사의 예수라고 할 만큼 예수에 대한 역사적 물음은 선생의 신학 인생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선생의 예수 탐구가 절정에 이른 시기가 1984년이었다. 해서 선생의 학문적 여정을 평가할 때 나는 1984이라는 관점을 제시한 바 있었다. 안병무 신학의 절정기가 1984년이었기에, 그 시기에 저작된 글, 특히 자타가 공인하는 선생의 원톱 대표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예수사건의 전승모체를 먼저 읽고 그 전후로 가면서 선생의 글을 읽으면 선생의 생각의 전개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건강이었다. 두 번에 걸쳐 무려 9년간 계속된 강제해직에서 풀려나서 강의를 시작한 그 다음 해인 1985년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었다. 언제부터 이상 증상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1976‘3.1민주구국선언사건으로 투옥되어 그해 12월 끝자락에 출소하게 된 10개월 간의 수감기간 동안 심장질환이 빠르게 진행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1985년에는 글을 쓸 수도 읽을 수도 없을 만큼 상황이 안 좋아졌다. 해서 이번에는 불의한 정권 때문이 아니라 부실한 육체 때문에 펜을 들 수 없었다. 당연히 그해 수업은 개설되지 못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86년부터는 한 해에 한 과목씩만 개설되었다.

1986년 개설된 과목은 공관복음에 관한 것이었다. 오랫동안 탐구해온 역사의 예수를 다루는 과목이다. 그리고 1987년 드디어 요한복음을 소재로 하는 과목이 개설되었다. 그때부터 3년간 같은 과목이 매년 봄학기에 개설된다. 그 이후에는 더 이상 학교 강의를 하지 못했으니, 이것이 선생의 마지막 수업이다.

공적인 글을 쓰기 시작한 1953년 이후 돌아가시는 1996년까지 선생이 쓴 글 편수는 1천 편이 넘는다. 다작의 작가다. 그 글 중 다수는 설교에서 시작한다. 간략한 노트로 설교를 한다. 선생의 설교는 압도적인 액션이 수반되지도 않았고 목소리의 톤이 필요 이상으로 고조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청중을 압도하는 설교였다. 선생을 존경해마지 않았던 어떤 이는 선생의 설교를 평하기를 뽀족한 바늘로 제일 아픈 곳을 찌르고 계속 후벼파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런데 그 설교를 마치고 나면 너무나 통쾌해졌다고 했다. 그런 마력의 설교자가 안병무다.

하지만 선생의 설교는 그 평만 가지고는 충분치 않다. 내가 보기엔 그 이상으로 중요한 요소가 있다. 적어도 1980년대 중후반 이후 선생의 설교는 굉장히 대화적이다. 끊임없이 대중에게 말하도록 요구한다. 설교 중에 말이다. 해서 설교는 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이야기하는 식으로 펼쳐졌다. 요컨대 설교에서 말하는 이와 듣는 이가 따로 없다. 그리고 설교 이후 듣는 이는 또 말하는 이가 되어 누군가에게 말을 한다. 그리고 그이가 말을 할 때 종종 선생 자신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해서 선생은 그렇게 다른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야기가 전해질 때, 비록 자기 자신은 그곳에 없더라도, 그 말을 하는 이와 뒤얽힌 존재가 되어 그곳에 함께 하는 셈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선생의 논지와 꼭 부합한다. 앞에서 말한 선생의 예수 탐구의 최고 역작인 예수사건의 전승모체는 바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 예수와 민중은 말하는 이와 듣는 이로 이분화되지 않는다. 예수는 그들에게 말을 할 때 허공을 향해 무시간적인 말을 한 것이 아니다. 늘 구체적인 사건과 얽혀 있다. 해서 그 사건은 늘 대화적이다. 사건과 대화하고 시대와 대화한다. 이때 선생이 종종 드는 예는 하혈하는 여성과 티매오의 아들을 치유하는 이야기다. 여기서 그들이 먼저 예수에게 다가가서 구원을 요청한다. 그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이들이 예수에게 다가가는 것을 막는 이들이 있었다. 심지어 예수의 제자들이 막아서기까지 했다. 한데 그들은 그 장벽을 뚫고 다가와 갈구한다. 고통에서 해방시켜 달라고. 예수는 그들을 치유하면서 구원을 선포한다. 한데 그 말이 의미심장하다.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낫게 했소.” 여기서 예수는 일방적으로 구원을 설파한 카리스마적 예언자가 아니다. 그분은 민중의 요구에 응답했고, 그들과 대화를 나누며 그이들의 적극적 행동이 그 사건을 가능하게 했다고 해석한다.

해서 안병무 선생은 예수 이야기에서 주와 객을 나누는 서양 성서학자들의 예수연구는 잘못되었다고 주장한다. ‘무엇이 진정한 예수의 말인가따위를 묻는 방법으로는 역사의 예수를 읽어낼 수 없다. 예수는 민중의 요구를 접하면서 그이들의 고통에 구체적으로 마주쳤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일을 벌였다. 그것은 그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에게 기억되었고, 그들은 그것을 서로 이야기했다. 물론 그 이야기하기는 해석을 수반한다. 그 해석에는 물론 그들 자신이 얽혀 있다. 예수에게 다가와 고통에서 해방시켜 줄 것을 갈구한 이들 사이에는 갈망의 연대성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예수가 그렇게 갈구한 이를 해방시켜 준 것에서 그들은 해방의 연대를 이룬다. 그렇게 예수 이야기는 전해졌다. 해서 선생은 민중 사이에서 회자되는 예수 이야기가 글로 채록되기 이전에 존재했다고 주장한다. 글 이전에, 글을 쓴 누군가의 저작 행위 이전에, 그 사건의 전승모체인 민중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해석은 선생의 설교에 대한 이해와도 딱 부합한다. 예수를 매개로 하는 소통의 과정, 주와 객이 따로 없는 소통의 과정 속에서 예수 해석이 일어나고 그것이 글 쓰는 이를 통해 글이 되는 것이다. 즉 그 글은 저자 개인의 창조적 글쓰기의 결과만은 아닌 것이다. 대중과의 소통 과정에서 형성되는 집단적 창의성이 발현되는 과정을 수반한다. 저자의 창의성 속에는 그런 집단적 사유가 스며 있다.

아무튼 대중과의 소통 과정인 설교를 거친 뒤에 그 설교가 글이 되었다. 이렇게 선생의 많은 글들은 설교에서 시작했다. 1천 편이 넘는 글 중 이렇게 설교에서 시작한 것이 얼마나 될지 모르지만 굉장히 많은 글은 그렇게 탄생했다.

한데 그 많은 글 중 요한복음을 소재로 한 글은 거의 없다. 그만큼 복음서 중 이 텍스트는 선생의 관심에서 멀어져 있었다. 한데 느닷없이 1987년 수업에서 이 복음서를 다루었다. 그때부터 3년간 매년 봄학기에 세 번에 걸쳐 같은 과목이 개설되었다. 그리고 말했듯이 이것이 선생의 마지막 수업이었다.

이 수업 내용이 그 무렵 쓴 선생의 글들 속에 일부 반영되기는 했다. 하지만 악화된 건강 탓으로 본격적인 글을 남기지는 못했다. 해서 선생의 요한복음해석을 소개하는 게 제자인 나의 오랜 숙제였다. 요한복음에 관한 3년간의 수업에 모두 참여한 유일한 제자였기 때문이다. 한번은 학생으로, 두 번은 조교로. 해서 나는 그 수업 풍경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고 학생들의 발제글도 모두 접했다. 성적을 위해 학생들의 기말과제물을 읽고 평가 자료를 만들어드린 것도 나였다. 그러니 비워둔 안병무의 요한복음론을 채우는 과제는 나의 것이 되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것을 다루는 강의를 여러 차례 개설해서 몇 번이나 생각을 단련시킨 뒤 2009년 드디어 책으로 펴냈다. 급진적 자유자의자들. 요한복음이 그것이다. 이 책 감사의 글에서 나는 1991년에 발표한 나탈리 콜(Stephanie Natalie Maria Cole)언포겟터블(Unfogettable)을 얘기했다. 이 노래는 원래 1940~50년대 유명한 재즈가수였던 냇 킹 콜(Nat King Cole)이 부른 것이었다. 냇 킹 콜과 나탈리 콜, 이름과 활동 시기에서 짐작되듯 그들은 부녀관계다. 딸인 나탈리 콜이 그 노래를 발표한 1991년은 그녀의 아버지가 이 노래를 처음 부른 지 꼭 40년이 지난 후였다. 그리고 냇 킹 콜은 26년 전에 이미 고인이 되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음반에는 그들이 듀엣처럼 노래를 부르고 있다. 해서 당시 평단에서는 냇 킹 콜이 다시 부활했다는 말이 나왔다. 바로 이것처럼 2009년에 쓴 나의 책은 1987~89년의 수업 내용을 나의 목소리로 더빙한 것에 다름 아니었다. 그리고 그 책은 선생이 돌아가신 지 13년이 지난 뒤였으니 내가 바란 것은 이 책을 매개로 하는 선생의 부활이었다. 비록 소수의 독자만이 이 책을 읽었으니 선생의 화려한 부활을 꿈꾸었던 나의 기대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나름 최선을 다한 것이고 필시 선생은 그런 나를, 언제나처럼, 존중해주었을 것이다.

아무튼 선생은 요한복음1,14을 중심으로 읽었다. 이 글 서두에서 언급한 바로 그 구절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 핵심어는 육신이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사릌스. 아무도 그렇게 얘기하지 않았지만 선생은 그렇게 주장했다. 흔히 사람들이 주목하는 것은 이 구절이 포함된 요한복음서론(1,1~17)인데 그 핵심은 태초부터, 즉 창조 이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했던 그분이 사람이 되었다는 데 있다고 보았다. 한데 선생은 그것이 이렇게 해석된 것은 사릌스를 깊이 숙고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 단어는 을 뜻하는 단어로 성서에서 자주 사용된 소마(σωμα)와 대조된다. ‘소마는 다소 중립적인 의미의 몸이라고 할 수 있는데, 특기할 것은 진리를 따라 혹은 율법을 따라 몸을 수련하면 신과 같아질 수 있는 그런 몸을 뜻한다는 점이다. 반면 사릌스는 부정적 뉘앙스가 강한 어휘다. 그것은 반드시 멸절되어야 하는 몸이다. 해서 그 몸은 죄인의 몸이고 더러운 몸이며 회생 불가의 몸이다.

요즘 표현 중 사릌스와 가장 유사한 함의를 가진 단어는, 내가 보기엔, 영화, 소설, 웹툰 등에서 전 세계적인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워킹대드(walking dead), 좀비일 것이다. 오직 식욕 하나밖에 없는 존재, 정신이니 영혼이니, 지성이니 윤리니 성찰이니 하는 말과는 일도 만날 수 없는 존재, 흉물스럽게 몸을 비틀고 허우적대면서 오직 욕구만을 위해 움직이는 존재, 그것이 좀비다. 한데 1세기 지중해 사회에서 사릌스를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해서 그 존재는 혐오스러운 존재, 멸절시켜야 할 존재였다.

문제는 그런 극혐의 존재를 요한복음은 그리스도와 연결시키고 있다는 점에 있다. ‘로고스가 사릌스가 되었다’, 곧 가장 숭고한 존재인 신이 가장 혐오스런 존재의 몸을 입었다는 얘기다. 인간이 된 것이 아니라 인간 같지 않은 인간, 가장 혐오스런 비인간의 몸으로 왔다는 것이다.

도대체 요한복음은 왜 이런 극한적 표현을 쓰고 있을까. 선생은 이 복음서가 당시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내에서 강하게 불고 있는 제도화의 흐름에 반항하고 있는 한 소종파적 운동을 반영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요한복음의 소종파설은 1960년대 중반경부터 서양 성서학계 일각에서 불고 있는 수정가설의 핵심이었다. 한국에는 잘 소개되지 않았지만 서양 학계에서는 그 가설이 무시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요컨대 제도화되고 있던 주류 그룹에 대한 안티로서 이 복음서 공동체가 활동했다는 것이다. 해서 이 복음서를 가장 먼저 수용한 이들은 주류파가 아니라 비주류적이고 신비주의적이며 급진적인 소종파였다. 그러다 요한계 공동체 내에 분화가 일어나고 그중 요한계 서신들 쓴 그룹이 주류 그리스도파와 요한계공동체 사이의 가교 역할을 했고, 그 결과 이 복음서가 주류 그룹들에게 읽히게 되었다. , 그 과정에서 잃어버린 것은 이 복음서의 급진적 메시지였고, 요한계 서신의 시각이 그 자리를 대체했다는 것이다.

한데 선생은 바로 이 점에 주목했다. 잃어버린 그 급진성의 핵심에 사릌스론이 있었다는 것이다. 사실 학계의 누구도 사릌스의 적나라함에 주목한 이는 없었다. 요한복음에서 사릌스와 대조되는 존재는 유대인들(Ιουδαιοι)이다. 그들은 하느님의 가치를 가장 철저히 체현하고자 하는 몸, 소마의 표상이다. 이 표상이 규범으로 작동하여 질서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선생은 그것을 제도화’, ‘직제화’, 정전화라고 요약했다. 1세기 말의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지배적 흐름이 그러했다. 다소 과장된 해석이지만 그런 조짐이 있었음은 분명했고, 요한복음공동체가 그것에 저항하고 있음도 의심할 수 없다.

선생의 요한복음을 다루는 수업에서 학생들은 사릌스론의 시각에서 이 복음서 곳곳을 읽으려는 시도를 했다. 때로는 매우 흥미로운 것도 있었고 진부한 것도 있었지만, 학생들 대부분은 이제까지 상상도 못해 본 요한복음과의 낯선 여행에 동참했다.

잘 알고 있듯이 루이스 캐럴의 가족동화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를 팀 버튼은 전혀 새로운 기조의 영화로 각색해냈다. 이 영화에서 우리는 엘리스가 여행하는 이상한 나라, 그 그로테스크한 나라가 실은 낯선 나라가 아니라 우리가 익숙하게 보아온 우리의 일상의 나라와 너무 닯은 곳임을 직감하게 된다. 한데 이 영화의 핵심은 그 나라를 그로테스크한 이들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질서의 시선에서 그 나라를, 아니 현실을 해석했기 때문이다. 반면 팀 버튼은 그로테스크한 이들의 시선에서 그 나라를, 아니 우리 세계를 읽고 있는 것이다.

안병무의 요한복음해석은 마치 이와 같다.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기 이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했던 그분이 우리에게 와서 우리를 구원했다, 이런 해석은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그리스도론의 서사다. 그런 서사가 한창 만들어지고 규범으로 자리잡고 있던 시절에 요한복음공동체는 그것을 규범의 시선이 아니라 그로테스크한 현실로 바라보면서 그 허구를 꿰뚫어보는 문서를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요한복음이고, 그 압축본 서론이다. 우리가 그로테스크한 존재로 밀쳐버리고 생각하기조차 싫어했던 사릌스의 시선에서 복음을 해석하고 있었던 것이다. 많이 낯설지만, 날카로운 시각에 우리 모두는 전율했고 날선 눈초리로 세계를, 교회를 보기 시작했다. 안병무의 수업은 그렇게 우리의 일상의 생각을 전복시켰다. 해서 이 여행은 (익숙한 세계로의) 낯선 여행이었다.

1980년대 후반, 전두환 정권이 최후의 발악을 하는 호헌 선언에서부터 박종철, 이한열 열사의 죽음, 그리고 직선제개헌으로 이어지는 민주화의 열기가 넘쳐나던 시절 한신대 수유리 캠퍼스에서 학창시절을 보내고 있던 우리는 도서관 현관에 새겨진 구절을 이렇게 안병무의 문제 제기와 분리해서 읽을 수 없었다. 낡은 권력과 새로운 권력이 공존하고 있었고 그 두 권력은 서로 다르게, 하지만 서로 닮아가면서 사회를 구성하고 있었다. 그때 안병무 선생은 사릌스라는 화두를 우리에게 던졌다. 그로테스크한 이들의 시선에서 그 시대를 보라는 문제 제기가 아니었을까.

한데 낡은 권력과 새로운 권력의 경합은 21세기가 한참 지난 지금까지도 반복되며, 그렇게 지속되고 있다. 그 안에서 규범이 만들어지고 질서가 만들어졌다. 공교롭게도 한 해를 시작하는 날, 문뜩 나는 반복되고 지속되는 이 진부한 세계를 느끼며 오래전 안병무를 떠올린다. 선생은 세상과의 이별이 별로 남지 않음을, 시시각각 조여오는 심장의 고통을 체감하고 있었다. 그때 선생은 불연듯 요한복음을 읽었고 사릌스를 주목했다. 그것을 회상하는 나는 선생의 생각에 끼어들어보려 한다. 오늘의 사릌스는 누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