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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동성애 반대’인가 ‘폭력적 성에 대한 반대’인가

 [맘울림] (2021년 2월)에 실린 글.

[성서와 동성애]에서 동성애 반대처럼 보이는 구절 세 개를 다루었는데,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하나는 로마서와 별 차이 없을 것이라고 보아서 다루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좀더 자세히 보니 특별히 검토할 필요가 있네요. 해서 책을 보충한다는 쓴 것을 공개합니다. 혹 책이 재판을 찍을 수 있다면, 그리고 증보판으로 찍을 수 있다면 수록하겠지만, 기약할 수 없기에 글을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글을 마무리할 때쯤 마침 [맘울림]에서 원고를 달라는 요청이 있어서, 이것을 드렸고, 책이 발간된 이후 공개합니다. 
아무튼 [성서와 동성애]에서 다룬 세 개의 성서 텍스트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고린도전서에 대해서도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성서 속에는 동성애 반대는 없습니다. 각기 텍스트마다 저마다의 이유를 찾을 수 있는데, 고린도전서의 경우에는 잘못된 번역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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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 반대인가 폭력적 성에 대한 반대인가

 

 

 

말라코이와 아르세노코이타이, 그들은 누구인가

 

불의한 사람들은 하느님나라를 상속받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 음행을 하는 사람들이나,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이나, 간음을 하는 사람들이나, 여성 노릇을 하는 사람들이나, 동성애를 하는 사람들이나, 도둑질하는 사람들이나, 탐욕을 부리는 사람들이나, 술 취하는 사람들이나, 남을 중상하는 사람들이나, 남의 것을 약탈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6,9~10[새번역성서]

 

이들 열거된 사람들이 어떤 이들인지 대충은 알 것 같은데, 하나가 걸린다. ‘여성 노릇을 하는 사람들’, 그들은 어떤 이들을 말하는 것일까. 여장남자? 혹은 트랜스젠더? 아니면 복장이나 성적 취향은 특별하지 않은데 말투나 행동거지가 여성스러운 사람을 말하는 것일까? 도대체 이들은 누구일까?

이럴 땐 우선 번역이 제대로 된 것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이 단어는 말라코이(μαλακοι)라는 헬라어를 번역한 것인데, 끝음절의 ‘-오이(-οι)가 남성 복수형 어미이므로 이 형용사는 어떤 남자들을 가리킨다. 이 단어는 제2성서(신약성서)에 네 번 나온다. 이중 위에서 인용한 구절을 제외한 세 번은 모두 복음서에서 발견된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을 두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아니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은 왕궁에 있다. ......”
―〈마태복음11,7~8[새번역성서]

 

예수께서 요한에 대하여 무리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아니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비단옷을 입은 사람이냐? 화려한 옷을 입고 호사스럽게 사는 사람은 왕궁에 있다. ......”
―〈루가복음7,24~25[새번역성서]

 

예수가 군중에게 세례자 요한에 대하여 말하는 대목이다. 여기서 밑줄 그은 부분이 말라코이를 번역한 것이다. 마태복음에선 화려한 옷으로 번역되었고, 루가복음에서는 비단옷이라고 옮겨졌다. 비단옷 바로 뒤에 나오는 화려한 옷말라코이가 아니라 엔독쏘스(ενδοξος)를 옮긴 것이다. 하지만 문맥상 두 단어는 동일한 의미로 쓰였다. 중복을 피하기 위함일 것이다.

엔독쏘스는 여기 외에 루가복음13,7고린도전서4,10 그리고 에베소서5,27에 나온다. 모두 영광스럽다는 의미의 형용사(glorious)로 쓰였다. 그렇다면 루가복음7,25엔독쏘스는 고귀한 계층의 사람이나 입을 법한 옷을 의미할 것이다. 그렇다면 말라코이도 그런 옷이라는 뜻이겠다.

다시 고린도전서6,9를 보자. 귀족 같은 화려한 옷을 입은 남자들이 누구이길래 바울은 그들이 하느님나라를 상속받을 수 없는 자라고 혹평하고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해 새번역성서는 화려한 옷을 입은 자를 여자 노릇을 하는 남자들이라고 옮겼다. 하지만 위의 복음서들의 경우에도 그랬던 것처럼 그런 옷을 여성들만이 입었다는 용례는 어디에도 없다. 말라코이를 여성스러운 자태의 남자라고 번역하는 것은 근거가 약하다. 그러므로 말라코이를 여장남자나 MTF(male to female) 트랜스젠더라고 번역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한데 많은 성서 번역본들은 여기서 더 나아가서 좀더 구체적으로 해석한다. 가령 MEV(Modern English Version)NRSV(New Revised Standard Version) 등은 매춘남(male prostitutes)으로 옮겼다. 그러나 화려한 옷을 입은 자들을 매춘남으로 특정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비약으로 보인다.

한편 일부 성서들은 좀더 흥미로운 시도를 한다. ‘말라코이를 바로 뒤에 나오는 단어와 연결시켜 해석하는 것이다. 그 뒤의 단어란 아르세노코이타이(αρσενοκοιται)를 말한다. 이 단어는 사람(남성)이라는 뜻의 아르센(αρσην)침대라는 뜻의 코이토스(κοιτος)가 합성된 것으로, ‘잠자리하는 남자라는 뉘앙스가 들어있는 표현이다. 가령 NIV(New International Version)는 이 두 단어를 동성끼리 성관계하는 남자들(men who have sex with men)이라고 옮기면서, 여기에 (각주)를 다음과 같이 넣었다. “‘동성끼리 성관계하는 남자들이라는 어구는 동성 간의 성관계에서 소극적 역할의 행위자와 적극적 역할의 행위자를 가리키는 두 단어를 번역한 것이다.”(The words men who have sex with men translate two Greek words that refer to the passive and active participants in homosexual acts.) 두 단어란 말라코이아르세노코이타이를 말한다. 이것은 소년애관계에 있는 ()소년을 가리키는 에로메노스(ερωμενος)말라코이, 성인남성을 가리키는 에라스테스(εραστης)아르세노코이타이로 간주하는 해석이다. 물론 그렇게 사용된 용례는 어디에도 없다. 즉 성서 번역자들의 자의적인 해석의 결과다.

유사하지만 조금 다른 해석을 독일어성서인 루터성서1984(Lutherbibel 1984)도 하고 있다. 여기에는 NIV처럼 의역하고 주에서 설명하기보다는 “Lustknabe, Knabenschänder”라고 번역했다. 말라코이의 번역어인 Lustknabe소년 매춘남을 뜻한다면, ‘아르세노코이타이를 옮긴 Knabenschänder는 소년 매춘남을 탐욕하는 자를 말한다.

NIV와 루터번역의 차이는 전자는 두 단어를 소년애 관계를 맺고 있는 당사자로 보는 반면, 후자는 당시 시민들의 이상적 성관계로 해석된 소년애의 변형된 양식으로서 소년 매매춘의 두 당사자로 해석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 두 성서는 공히 이들을 동성 간의 성관계를 하는 자로 해석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동성애자라고 단정하는 것이 아님을 주지해야 한다. 소년애는 고대 그리스를 포함한 당시 지중해 사회의 이상적 성관계라는 이데올로기로 포장되고 있었는데, 소년애의 당사자는 동성하고만 성관계를 하는 이들이 아니었다. 그들 대부분은 여성과 거리낌없이 결혼하였고 자녀를 두었다. 그리고 매춘업은 소년도 성적 대상으로 소비하고 있지만, 구매자든 성노동자든 대부분 동성애자들이 아니었다.

 

동성애자?

 

그런데 한국의 한 기독교윤리학자는 이런 해석들에 의거해서 이 두 단어를 바텀(bottom)(top)이라고 주장한다.(1) 이성애적 편견으로 동성애자를 규정하는 현대적 용어로 그것을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NIV가 고대 그리스의 소년애 풍조에 빗대어서 이 텍스트를 해석하고 있고, ‘루터성서1984’가 변형된 소년애 풍조로서의 매춘현상에 기대면서 이 단어들을 번역하고 있다면, 그 기독교윤리학자는 동성애에 대한 현대적인 비판적 시각에 기대어서 이런 주장을 펴고 있는 것이다.

동성애자를 바텀으로 이분화하는 이런 현대의 비판은 불온하기 그지없다. ‘동성애자를 성행위로만 규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3의 성이 아니라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성애적 논법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말하면 이성애자도 바텀으로 나누어서 말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만약 그 기독교 윤리학자에게 당신이 바텀이요 탑이요 라고 묻는다면 그는 어떨까. 나라면 그런 물음을 심히 불쾌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사람의 섹슈얼리티는 성행위로만 규정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 앞에서 말한 것처럼, ‘말라코이가 수동적 역할의 남자라고, 나아가 그래서 그는 여자 같은 남자라고 단정하는 것은 무리한 추정이다. 또 아르세노코이타이가 당연히 동성애자를 가리키는 표현이라고 보는 어떤 용례도 없다.

, 이제 우리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이 두 단어가 가리키는 이들이 누구인지를 단어의 용례를 통해서 읽어내는 것은 여의치 않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 두 단어를 포함하고 있는 텍스트의 문맥과 사회적 맥락을 통해 해석 가능성을 시도해보려 한다.

 

문맥 속의 두 단어

 

이 구절에서 말라코이앞에 음행하는 자’, ‘우상숭배하는 자’, ‘간음을 하는 자들이 열거되고 있다. 성서의 수많은 곳에서 우상숭배는 일종의 종교적 간음으로 묘사되고 있다.(2) 그렇게 본다면 이 세 단어는 모두 성관계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그 성관계들은 사랑에 기반을 두기보다는 다분히 폭력적이다.

말라코이뒤에 나오는 아르세노코이타이도 그가 어떤 이를 가리키는지 명료하지 않지만 침대의 남자라는 함의는, 그이를 성행위 하는 자로만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폭력적 성의 느낌을 지울 수 없게 한다. 많은 성서들이 그들을 적극적 역할의 성행위를 하는 자로 그려내고 있는데, 그렇다면 여기에는 수동적 성행위를 하는 자와의 비대칭적 권력관계가 전제되어 있다. 또 만약 침대의 남자가 어떤 매춘업에 종사하는 이를 가리킨다면 그것 역시 폭력적인 성이 내포되어 있는 표현이다. 요컨대 말라코이앞과 뒤에 열거된 이들이 폭력적 성과 관련된 이들이라면, ‘말라코이도 그런 범주 안에서 해석하는 것이 좀더 그걸 듯하다.

그런데 말라코이아르세노코이타이가 일반적인 매춘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면 이 목록의 첫 번째인 음행하는 자들포르노이(πορνοι)를 번역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단어와 짝을 이루는 포르나이(πορναι)는 제2성서를 포함한 헬라어 문헌들에서 수없이 많이 사용되는데, 거리나 매춘업소에서 일하는 하급 매춘여성을 가리킨다. 하여 그것의 남성형인 포르노이는 하급의 매춘남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말라코이아르세노코이타이가 폭력적인 성과 관련이 있기는 하지만, 포르노이와 같은 뜻의 단어는 아닐 것이다.

여기서 말라코이가 화려한 옷을 입은 남자들, 즉 궁중에서나 볼 수 있는 고귀한 이들의 옷을 입은 남자들이라는 점을 상기해보자. 상류층 인사들을 상대하는 매춘여성을 가리키는 헬라어인 헤타이라(ἑταιρα)화려한 옷을 입고서 이른바 고귀한 이들을 접대하는 여성 성노동자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문맥상 말라코이는 상류층을 접대하는 매춘남성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나는 이런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 목록에 열거된 이들의 면면을 보면, 그들은 가장 밑바닥 사람들의 모습이다. 그러니 상류층을 상대하는 매춘남성이 등장하는 것은 좀 뜬금없어 보인다.

앞에 나오는 이들에 대해서는 이미 말했으니 뒤에 나오는 이들을 보자. 도둑질하는 자, 탐욕을 부리는 자, 술 취한 자, 타인에게 욕설을 퍼붓는 자, 강탈하는 자들. 그런데 이런 이들을 앞에 나오는 이들과 연결해서 살펴보면 어떨까? ‘포르노이가 언급된 것을 보아 바울은 선술집과 매춘업소들을 바라보면서 이 구절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우상숭배하는 자들(ειδωλολατραι)이 언급된 것을 보니 신전들도 꽤 많았던 것이 아닐까. 신전과 술집-매춘업소,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장소가 한 곳에 있는 것은 좀 이상해보인다. 하지만 실은 그런 현상은 그리 낯설지 않다.

 

너희 남자들도 창녀들(a)과 함께 음행을 하고, 창녀들(b)과 함께 희생제사를 드리는데, 너희 딸들이 음행을 한다고 벌하겠느냐? 너희 며느리들이 간음을 한다고 벌하겠느냐? 깨닫지 못하는 백성은 망한다.
―〈호세아서4,14

 

여기서 창녀들이라는 단어가 두 번 사용되는데, 새번역성서는 이 둘을 같은 번역어로 옮겼지만 실은 두 단어의 원천어휘인 히브리어는 다르게 표기되어 있다. 해서 나는 임의로 두 단어에 (a)(b)를 넣어 구별했다. ‘창녀들(a)’는 히브리어 조놋트(zonoth)를 옮긴 것이고 창녀들(b)’는 히브리어 케데사(qedeshah)를 번역한 것이다. 많은 영어성서본은 창녀들(a)’harlots 혹은 whores로 옮겼고, ‘창녀들(b)’cult prostitutesshrine prostitutes로 번역하고 있다. 즉 전자는 매춘업에 종사하는 여성을 의미하고, 후자는 성전에서 제사의식 중에 거행하는 제주(祭主)와 성행위하는 여성사제를 가리킨다.

군주국 당시 이스라엘과 유다에는 사제나 예언자 중에 여성이 종종 있었다. 한데 군주국이 멸망한 뒤 식민지 시대에 만들어진 재건공동체 중 유대아 지역에 기반을 둔 재건공동체에서는 여성 사제나 예언자가 사라졌다. 그 시기는 대략 기원전 4~3세기 이후다. 우리의 성서에 포함된 문서 중 대부분의 마지막 편찬본이 만들어진 시기가 이때였고, 그 주역들이 유대아 재건공동체의 일원이었으니 우리는 여성 사제나 예언자에 대해 낯설어한다. 아무튼 호세아서4,14는 호세아 예언자가 활동하던 기원전 8세기에도 성전 주위에 매춘업소들이 적잖이 있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다시 바울에게로 돌아가 보자. 고린도전서6,9~10에 열거된 이들은 신전들과 술집-매춘업소가 한데 엉켜 있는 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들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술집과 매춘업소, 신전들이 즐비한 곳에서 매춘행위와 우상숭배행위가 연일 벌어졌고 간음, 도둑질, 탐욕, 비방과 싸움질, 강탈 등의 사건도 흔히 일어나지 않았을까. 이른바 우범지역의 풍경이 이 목록 속에 그려져 있는 것이 아닐까. 바울은 그런 풍경을 바라보면서 이 서신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런 상황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해 우리는 바울 당시 항구도시 고린도에 관해서 스캐치해 볼 필요가 있다.

 

지중해 최대의 항구도시

 

기원전 5세기 고대 페르시아 제국이 그리스를 침공하는 필로폰네소스 전쟁이 일어났을 때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제국이 지중해를 통합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알다시피 그 전쟁은 어느 쪽도 완전한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또 기원전 4세기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가 메소포타미아를 병합했을 때도 지중해 사회는 통합을 향한 뚜렷한 행보를 보이지 않았다. 알렉산드로스 사후 그의 휘하 장군들이 몇 개의 제국을 만들어 경쟁하던 기원전 3세기, 이른바 헬레니즘 시대에 와서 지중해 사회들 간에는 거대한 문화적이고 경제적인 네트워크가 구축되었다. 그리고 로마제국 시대에는 느슨하나마 정치적 통합이 실현되었다.

이러한 문화적, 경제적, 정치적 네트워크로 엮임으로써 지중해 사회는 활발한 인적, 물적 자원의 교류가 일어나는데 그 교류의 중심에는 활성화된 해양교통이 있었다. 물론 그것은 항구도시의 급속한 발전과 병행한다. 그중 가장 괄목할 발전을 이룩한 도시는 고린도다. 기원전 2세기 중반, 4차 마케도니아 전쟁이라고도 불리고 아카이아 전쟁이라고도 불리는 로마와 아카이아 동맹 간의 전쟁에서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로마의 완전한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이때 유독 고린도는 도시 전체가 거의 잿더미가 될 만큼 처절한 응징을 당했는데, 그 백년쯤 후인 기원전 44년 카이사르에 의해 이 도시는 완전히 새롭게 재건되었다. 이때 고린도는 새로운 도시로 부상하였다. 한데 이후 고린도는 초고속 성장을 거듭해서 서기 1세기 중후반에는 지중해 최대 항구도시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이런 빠른 발전의 결정적인 요인은 무엇보다도 이 도시의 지리적 특성 때문이다. 그리스 반도의 잘룩한, 그 길이가 6km도 채 안 되는 개미허리 부분에 위치한 도시인 것이다. 해서 서쪽으로는 이탈리아로 가는 이오니아해가 있고 동쪽으로는 소아시아로 가는 에게해가 있다. 풍랑과 해적의 위협 때문에 당시의 많은 상선들과 여객선들은 해안선에서 멀리 않은 근해를 따라 항해하였다. 그러니 고린도의 한쪽 항구에서 하적한 후 반대쪽 항구에서 선적하는 방식의 시스템을 활용하지 않으면 필로폰네소스 반도를 빙 돌아서 가야 했다. 그런 점에서 고린도는 에게해와 이오니아해를 연결하는 최적의 항구인 것이다.

해서 항구도시 고린도에는 무수한 이들이 들어오고 나갔다. 물론 이 도시를 드나드는 이들 중 뱃사람들이 가장 핵심이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고린도는 성장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뱃사람들이 항구에서 가장 많이 하는 일은 무엇일까? 그 첫 번째는 단연 제사일 것이다. 안전을 위해서 어떤 신의 노여움도 받아서는 안 되었기에 그들은 모든 신들에게 제사를 드렸다. 드나드는 배마다 제사가 필요했고 그중에는 대규모 상단도 많았으니 고린도에서 신전 산업은 대단히 활성화될 수밖에 없었다. 연일 벌어지는 제사의 제주(祭主)들 대부분은 물론 뱃사람들이다. 그들은 아낌없이 희생제물을 바쳤고, 그 제물들의 일부는 신전 주위 사람들에게도 배포되었다. 평소 좋은 식사를 할 기회가 없는 이들에게 무상으로 제공되는 제사제물이야말로 좋은 음식을 배터지게 먹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해서 그 주위에 멀지 않은 곳에 빈민거주지들이 세워졌을 것이고 그들은 날마다 신전 주위로 몰려들어왔을 것이다. 또 신전 주위에는 신전에서 사용되는 제물이나 기타 물품을 대는 업체들도 그 근처에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다. 그곳에서 일하는 이들 중 숙련노동자를 제외한 하급 노동자들은 거기에서 노동할 뿐 아니라 생활도 했을 것이다. 한편 뱃사람들이 항구에 정박한 뒤 가장 많이 찾는 곳은 단연 술집과 매춘업소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 업체에서 일하는 이들도 이곳에서 무수히 많이 살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항구도시의 환경은 어땠을까. 술에 취한 사람들, 싸움하는 사람들, 도박하는 사람들, 강탈하거나 강간하는 사람들, 속이고 속는 사람들, 이런 이들이 넘쳐나지 않았을까. 그래서 이런 범죄도시에는 고귀한 계층의 사람들이 별로 발견되지 않는다. 그들이 사는 지역은 이오니아해와 연결된 항구 지역에서 남쪽으로 2.5킬로 거리의 시내에 있었다. 고린도 시내는 그 지역 일대에서 가장 높은 아크로고린도 산(Ακροκορινθος) 주위에 둘러싸인 성채의 안을 말한다. 거기에는 고린도의 수호신인 아폴론(Απολλων) 신전을 비롯해서 아프로디테 신전, 옥타비아 신전 등, 귀족들과 시민들이 참여하는 신전들이 있었고, 귀족회의 건물인 부울류테리온(βουλευτηριον), 관공서 건물인 바실리카, 시민들의 공론장인 아고라, 극장인 오다이온(Ωδειον) 등등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 인근에 귀족들의 저택과 시민들의 빌라들이 모여 있는 주택가가 있었다. 그들은 여간해선 항만지역으로 오지 않았고, 항만지역의 사람들은 여간해선 성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바울의 에클레시아의 대중

 

고린도에서 바울계 그리스도파 사람들은 성안에 사는 중산층 인사들의 빌라에서 모여 예배와 식탁나눔을 가졌을 것이다. 그 모임을 바울은 에클레시아라고 불렀다. 회당장 소스데네(Σωσθενης)와 그리스보(Κρισπος), (아마도 마케도니아 출신의) 지도자 가이오(Γαιος), 귀부인 글로에(Χλοη), 로마 출신의 사업가 부부인 브리스가(Πρισκα)와 아굴라(Ακυλας) 등은 모두 고린도 성안 빌라에서 살았을 것이다. 바울의 에클레시아에 참여했던 성밖의 사람들, 특히 항만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예배 때에만 성안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바울은 에클레시아에서 이스라엘인들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 자유인과 노예, 그들 간의 혈통과 성과 신분에 차별을 두지 않는 복음의 메시지를 전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누구도 차별받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것을 함께 식사하는 행위로서 상징화하려 했다. 그런 점에서 바울은 천대받는 이들과 함께 하는 복음의 사역자였다.

 

바울은 그곳에서 살았다

 

그런 바울은 자신의 활동의 핵심지역인 이 도시에서 1년 반 정도 지냈다. 그의 끊임없는 떠돌이 활동에서 이 기간은 굉장히 긴 체류시간이었다. 이 시간 동안 바울은 어디에서 어떤 생활을 하였을까. 사도행전18,3에 의하면 그는 천막노동자였다. 브리스가와 아굴라도 그런 일을 하는 이였다. 한데 브리스가 부부는 천막사업자였고, 바울은 비숙련노동자였으니 그 신분의 차이는 하늘과 땅 같았다. 하지만 그들은 그리스도 사역의 동역자였고, 바울은 그 집단의 최고지도자였다. 해서 바울이 빌립보에서 거상 루디아 여자의 집에 기거했던 것처럼 브리스가-아굴라 부부의 집에서 기거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바울이 여기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빌립보가 바울의 초기 활동지였다면, 고린도는 그의 활동이 절정기에 이르던 시기의 두 장소의 하나였다. 고린도와 에베소는 바울의 지중해 사역의 절정기의 거점도시다. 고린도가 지중해 활동 전기의 핵심공간이었다면, 에베소는 후기의 핵심공간이었다. 절정기의 바울은 한마디로 빈민사역가였다. 빈민사역자로서 그는 성안 빌라의 따뜻한 방이 아니라 성밖 비천한 노동자들의 비루한 방에서 기거했을 것이다.

당시 지중해 사회는 무수한 노예들의 노동으로 지탱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서기 1세기 노예노동은 빠르게 쇠락하고 있었다. 아우구스투스가 팍스로마나를 선포한 이후 정복전쟁이 거의 벌어지지 않게 되자 노예의 공급시스템이 붕괴된 것이다. 노예 가격은 빠르게 상승했고, 노예노동에 기초해서 운영되던 대농장들은 노예들을 방출하기 시작했다.

무수한 노예들이 난민처럼 떠돌게 되었고 그들이 속속 대도시들로 유입되어 들어왔다. 대도시들에는 많은 유민들이 들어왔는데, 방출노예도 그들 중의 하나였다. 이들은 도시의 하급노동시장에서 초저임금의 노동자로 생계를 유지하였는데, 그 때문에 도시의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빼앗기곤 했다. 게다가 그런 사정은 하급 노동자들의 전반적인 임금의 하락을 초래했을 것이다. 이에 대도시들에서는 이들 난민에 대해 적대적인 여론이 형성되었고, 그런 사정은 이 도시들에 오래 전에 유입되어 들어와 이미 주민의 일원이 된 이민자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바울과 적대관계 있던 유대인들’, 바울이 그렇게 부른 이들은 이스라엘계 이민자사회에서 그런 난민 혐오담론을 유포하던 종파였다. 그런데 이 시기에 이스라엘계 이민자 사회의 기조는 당시 일반적인 여론에 발맞추어 난민 혐오담론에 기울어지고 있었다. 그런 시기에 바울은 빈민들을 포용하는 선교사역을 가장 적극적으로 벌인 그리스도파 지도자였다.

그런 바울의 활동이 절정기에 이를 무렵인 고린도 체류 시기에 바울은 어디에서 살았을까. 위에서 말했듯이 그는 천막제조공장의 비숙련노동자로 일했다. 고용주인 브리스가 부부는 바울에게 최고의 예우를 하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빈민사역자인 노동자는 어디에서 살기를 고집했을까. 당연히 자신이 일하는 천막제조공장 내의 숙소였을 것이다. 그곳에는 많은 방출노예출신의 사람들을 포함해서 도시의 최하층 노동자들이 기거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 중 가족이 있는 이들은 공장 밖에서 집을 구해 살았겠지만, 가족이 없는, 그럴 만한 사정이 못되는 못되는 이들은 공장 내 숙소에서 생활하였을 것이다. 필경 바울도 그곳에 살지 않았을까. 그래야 그들 빈민들이 바울을 동료로 받아들였을 것이고, 또 그이를 존경해마지 않았을 것이겠다.

그곳, 바울이 노동자로 일하고 숙식하던 공장은 어디에 있었을까. 가장 가능성이 높은 곳은 항만지역이었을 것이다. 이 구절에 반영된 광경이 일상으로 벌어지는 곳, 그런 곳에서 바울은 살았고 그곳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했을 것이라는 얘기다.

 

‘말라코이’와 ‘아르세노코이타이’는 누구인가

 

여전히 확답할 수 없지만 이쯤 되면 말라코이에 대해 모호하나마 개연성 있는 추정을 할 수 있을 법하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그들은 폭력적인 성관계를 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은 화려한 옷을 입고 있다. 그들은 누구인가?

여기서 나는 신전의 제사에 주목한다. 고린도 옆의 도시인 아테네의 기록에 따르면 노예인 소년과 소녀를 대규모로 신전에 기부하는 일이 흔히 벌어졌다. 왜 이들 신전들에서 소년과 소녀가 필요했을까. 그 하나의 가능성은 신전들에서 인신제물로 소년과 소녀들이 사용되곤 했다는 점과 관련된다. 그리스 남쪽의 섬인 크레타를 배경으로 하는 미노스 신화는 소년과 소녀를 제물로 바치는 전승을 담고 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신전에서 벌어지는 제사에서 제주와 성관계하는 사제로 소년들과 소녀들이 필요했다. ‘히에로스 가모스(ἱερος γαμος), 거룩한 결혼이라는 이름의 제사에서 제주(祭主)와 성관계하는 사제가 필요했는데, 이때 소년과 소녀가 그런 일에 동원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인신제사 전통은 광범위하게 벌어지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미노스 신화에서 보듯 특별한 상황에서 그런 제사가 수행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고대 유다국에서는 아하스 왕이 외적이 침범하여 국가가 멸망할지도 모르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자신의 아들을 인신제사 제물로 바쳤다. 반면 히에로스 가모스 예식은 그리스뿐 아니라 시리아와 팔레스티나, 그리고 메소포타미아까지 광범위하게 확산된 풍요제의 전통이기에 굉장히 흔한 사례였다. 그리스의 아프로디테, 로마의 베누스, 시리아-팔레스티나의 아세라와 아스다롯, 바벨로니아의 이슈타르, 아시리아의 아낫 등, 금성(金星)을 상징하는 여신들을 모시는 신전들이 이런 거룩한 결혼예식이 가장 활성화된 장소였다. 이곳에서는 이들 여신들을 상징하는 사제가 제주와 결혼의례를 벌이고 그 절정에서 성관계를 한다. 이 신들이 여신이었기에 여성사제가 그 일을 수행하는 이로 선택되었다. 하지만 변수가 있다. 남성 중심의 제도가 견고해지면서 여성사제직 자체가 거의 사라지게 되자 남성사제가 거룩한 결혼 예식에 동원하는 경우가 종종 일어났다. 게다가 그리스를 중심으로 소년애 이데올로기가 확산되면서 이상적인 성관계는 성인남성과 소년 간에 벌어져야 한다는 믿음이 확산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소녀뿐 아니라 소년도 히에로스 가모스 의례에 활용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되었다.

이들 소년과 소녀는 결혼식의 주인공이다. 그러니 그들의 의복은 결혼예복 다워야 한다. 성안의 신전들에서 벌어지는 히에로스 가모스 제사의 가상결혼하는 사제들은 물론이고, 성밖 신전들에서도 그런 사제들은 결혼예복으로 입고 예식에 참여했을 것이다. 하여 말라코이라고 표현된 이들, 성밖에서 화려한한 옷을 입은 이들이 있을 곳은 바로 신전의 히에로스 가모스 예식에 참여한 가상결혼하는 사제일 가능성이 크다. 만약 아르세노코이타이말라코이와 하나의 쌍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면, ‘아르세노코이타이는 이 결혼식의 제주를 가리키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나의 해석에 의하면, 바울은 고린도전서6,9에서 히에로스 가모스 예식이 노예 소년을 끌고 가서 제주와 성관계하는 일을 강제했던 그 현상을 비판적으로 보고 있다. 즉 이 구절에는 동성애 여부는 아무런 논점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바울을 넘어서기

 

바울은 고린도 항만지역에서 연일 벌어지는 폭력적 현실, 그 현실을 자명한 것처럼 받아들이고 사는 이들을 비판하면서, ‘당신들의 몸이 성령이 거하는 성전이요라고 강변한다. 이것이 바울의 복음이다. 스스로를 쓰레기 같은 존재로 생각하고 살아야 했던 이들에게 자신의 몸이 신전이 될 수 있음을 주장한 것은 빈민사역자로서 바울이 깨달은 그리스도의 진리의 핵심이었다.

한데 오늘 우리는 그의 복음에 만족할 수 없다. 바울은 분명 포르노이말라코이’, 우상숭배하는 자, 도둑질하는 자, 싸움질하는 자 등등을 비판하고 있지 그런 이들이 만들어지는 시스템에 대해 분석하지 않았다. 물론 서신이라는 게 그런 것을 분석하는 지면이 아니다. 또한 바울은 활동가이지 분석자가 아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바울의 문서들을, 그때 그곳의 그리스도파 사람들에게 보낸 서신이 아니라, 성서의 하나로 접한다. 해서 바울이 채 말하지 않은 것을 그것이 신앙의 전부인 양 받아들이려 하곤 한다. 물론 그런 독서는 우리가 극복해야 하는, 잘못된 독서다. 즉 오늘 우리는 바울을 넘어서서 그가 채 못한 말을, 그 비어있는 곳을 채워 넣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한편 바울은 이 구절에서 남자들만을 거론한다. 하급 매춘여성인 포르나이는 그에게 왜 보이지 않았을까. 신전의 말라코이를 바라본 바울의 눈에 그런 일에 동원된 소녀들은 왜 보이지 않았을까. 여기서 우리는 바울의 편견을 읽게 된다. 그런 점에서 오늘 우리는 바울을 넘어서서 그가 보지 못한 말을, 그의 편견을 교정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미주]

(1) 루와 니다는 그렇게 이 두 단어를 동성애 관계에 있는 수동적-적극적 역할의 파트너로 해석하고 있다. 그런데 이 두 단어를 동성끼리 성관계하는 파트너라고 해석하는 것이 정당하더라도 그것이 동성애적 사랑이라고 단언하는 것은 비약이다. J.P. Louw & E.A. Nid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Based on Semantic Domains (2 vols. NY: United Bible Societies, 1988~89).[Linda L. Belleville, “The Challenges of Translating Arsenokoital and Malakoi in 1Corinthians 6,9A Reassessment in Light of KOINE Greek and 1-st Cuntury Cultural Mores”, BT 62(1)(Jan 2011)의 각주20]에서 재인용]

(2) 이것은 지중해 곳곳에서 성행했고 이스라엘에서도 흔히 수행되었던 성전에서 벌어지는 거룩한 결혼’(히에로스 가모스, ἱερος γαμος) 의례를 유대주의자들은 그것은 예배가 아니라 음란한 행위로 간주했다. 히에로스 가모스 의례가 성전 예배를 일종의 신과 인간의 결혼 축제로 보고 그 절정에서 신자의 대표자가 사제와 성관계를 하는 것을 그렇게 비판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