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맘울림](2021 7)에 수록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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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함에 반대하다
너희는 또, 너희와 함께 사는 외국인 거주자의 자손 가운데서나, 너희의 땅에서 태어나서 너희와 함께 사는 그들의 가족 가운데서 종을 사서, 너희의 소유로 삼을 수 있다. (〈레위기〉 25,45)
이 구절에서 ‘외국인 거주자’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토사브’(toshab)다. 제1성서에 14번 등장하는 단어인데, 그중 8번이 〈레위기〉에 나오고, 특히 7번이 25장에 집중되어 있다. 즉 위의 인용 구절이 속한 〈레위기〉 25장에서 ‘토사브’는 핵심어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 장은 7년마다 돌아오는 안식년, 50년마다 오는 희년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후반부에선 길게 부채에 관한 얘기를 하고 있다. 이런 구성은 안식년과 희년이라는 야훼신앙 특유의 의례 속에 담긴 함의가 ‘부채’와 연결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열악한 조건의 사람들은 부채를 지게 되고 땅을 빼앗기며, 궁극에는 인신이 구속되는 노예가 되기까지 하는데, 안식년은 빼앗긴 땅을 되돌려받는 해이고, 희년은 빼앗긴 몸을 되찾는 해다. 그런데 그렇게 부채를 지고 땅과 몸을 빼앗기는 가장 취약한 계층의 사람들이 바로 토사브다.
35절과 45절에는 ‘토사브’와 함께 ‘게르’(ger)가 병렬로 연결되어 등장한다. 이렇게 말이다. “너희는 그를, 나그네(토사브)나 임시 거주자(게르)처럼, 너희와 함께 살도록 하여야 한다.”(35절) 이 두 단어를 한글새번역성서는 각각 ‘외국인 거주자/나그네’와 ‘임시거주자’로 번역했고, 원문을 가장 잘 살려낸 영어번역본의 하나인 MEV(Modern English Version)는 각각 ‘서저너’(sojourner)와 ‘포리너’(foreigner)로 옮겼다.
이 번역어들을 통해 ‘토사브’와 ‘게르’를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대략 그 땅에서 태어나서 자란 사람이 아닌, 다른 씨족 혹은 종족 출신의 사람이 자기 고향에서 어떤 이유로든 이탈해서 다른 마을에 들어와 사는 자들로, 가장 비참한 계층에 속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용어들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25,45의 의미는 이렇게 해석할 수 있겠다. 안식년이나 희년에 유대 동족은 땅을 되찾고 자신의 몸도 되찾을 수 있지만, 토사브나 게르는 계속 노예로 삼아도 된다는 얘기다.
2014년 한 변호사가 쓴 글 〈보호가 필요한 아동의 국적부터 따지는 나라〉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아동복지법은 복지혜택을 줄 때 외국 국적의 아동과 내국인 아동을 구별하는 명문화된 규정이 없지만 실제로는 외국 국적의 아동에게 복지수혜가 제한되고 있다고 한다. 며칠 전 뉴스에서도 그런 비슷한 문제가 고발되고 있는 걸 보니, 2021년에도 별 차이가 없는 듯하다. 그러니까 〈레위기〉 시대 유대사회나 오늘 한국은 이런 면에서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이런 반인권적 유사성 자체가 아니라, 그런 부조리한 문화가 어떻게 자리잡게 되었는지, 그 과정에 관한 것에 있다. 그런 점에서 〈레위기〉는 오늘 한국의 양상과 병렬로 비교할 대상이라기보다는 한국의 이런 양상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그 뿌리를 살펴볼 때 참고할 만한 텍스트다.
〈레위기〉는 페르시아 시대 말기에서 헬레니즘 시대 초기 유대 지역에서 일어난 어떤 운동의 산물이다. 바벨로니아 제국에 의해 유다국이 멸망하고 그 땅의 귀족 일부와 그밖의 대중들이 다수 강제이주되었다. 그 숫자를 〈예레미야서〉는 5천 명 정도로 이야기하고 있고 〈열왕기하〉는 2만 명 정도로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대략 5천에서 2만 명 정도의 사람들이 바벨로니아에 의해 강제이주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들은 지금의 이라크 남부의 유프라테스 강가의 미개간된 곳들에 분산 배치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반세기 조금 더 지나서 바벨로니아는 멸망하고 페르시아 제국의 시대가 도래했다. 그때 제국 곳곳에서 바벨로니아 시절 강제이주된 이들의 귀환운동이 벌어졌다. 유다계 이민자 공동체에서도 그랬는데, 귀환자들의 수효를 과장할 수는 없을 것이다. 수십 년간 뼈저린 고통의 시간을 감내하면서 겨우 정착할 수 있게 되었는데 다시 머나먼 땅으로 되돌아가는 건 너무나 큰 모험이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두 세기에 동안, 우리가 아는 한, 적어도 네 번의 귀환자 러시가 있었다. 그것은 머나먼 귀환 여정을 위한 페르시아 당국의 협조와 지원이 있었던 덕이겠다.
그렇게 귀환한 이들은 폐허가 되어 거의 사람들이 살지 않고 있던 예루살렘 인근 지역에서 정착촌을 형성하였다. 그들은 매우 이질적인 집단이었지만, 그 존재감이 미미했던 덕에 주변 족속들의 본격적인 견제와 배척의 대상이 되지는 않았다. 아니 실은 정착촌의 주민 다수는 그 인근의 사람들과 잘 어울려 살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귀환자 공동체가 세워진 지 한 세기 이상의 시간이 흘렀을 때, 이 공동체 내에서 독자적 국가를 세우려는 운동이 벌어졌다. 그것은 페르시아가 이 정착촌의 총독으로 느헤미야와 에스라를 임명했던 때부터 본격화된다. 이 두 인물은 유다계 유배민 공동체에서 출세하여 페르시아 제국의 관료가 된 인물들로 보이는데, 아마도 느헤미야는 정무직 관료였고 에스라는 종무직 관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느헤미야 총독은 폐허가 된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축하는 데 성공했다. 과거 군주국 시절보다는 훨씬 적은 규모의 성벽이지만 이로써 유다는 뚜렷한 정치세력으로 발돋음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또 그 후임의 총독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에스라는 그 공동체를 종교적이고 법적으로 통합하려는 사업을 편다. 그 이후 유다귀환자 공동체는 명백한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발돋음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두 인물이 주도한 재건유다국은 군주제사회로의 복귀가 아닌, 종교지도자가 최고통치권자가 되는 귀족과두체제의 성격을 갖는다. 그리고 이 체제가 추구한 것은 분리주의였다. 팔레스티나에서 형성되고 있던 유력한 정치체들의 영향력을 거세시키고 독자노선을 추구하고자 함이었다. 페르시아는 지역 정치세력과 연결망을 갖기보다는 제국 중앙과 연결망이 더 강한 정치세력이 필요했고, 제국 관료 출신의 귀환자 공동체 지도자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안정된 정치적 영향력을 구축하기 위해 인근의 정체세력들을 견제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 담합의 결과 구축된 것이 예루살렘 중심의 유대계 귀환자들이 주도한 국가였다.
느헤미야와 에스라가 기초를 놓은 분리주의적 신정국가체제는 이후 유다사회의 독특성으로 자리잡아 갔다. 물론 분리주의에 반대하는 운동이 있었다. 지혜문서들이나 묵시문서들, ‘제3이사야의 신탁집’(〈이사야서〉 55~65장) 등은, 모두 그렇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대체로 사제중심의 분리주의적 국가를 만들려는 운동에 소극적이든 적극적이든 공조하지 않는 이들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그럼에도 제사장 중심의 분리주의적 신정국가를 만들려는 세력의 입장을 대변하는 문서들이 적잖았다. 가령 오경의 최후 편찬에 관여한 이들은 분리주의적 제사장의 관점을 강하게 밀어붙이고 있다. 한편 오경 중 〈레위기〉는 이런 최후 편찬의 제사장적 시각의 주축 역할을 하고 있다. 추정이지만 이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레위기〉의 원형이 그런 오경 편찬의 주축이 되었고 그렇게 최후 편찬이 이루어지면서 최종형태의 〈레위기〉를 포함한 오경이 만들어졌을 것이라는 얘기다.
하여 오경의 다른 문서들에는 이런 최후 편찬자들의 시각에 억지로 맞춘 것 같은 대목이 적잖지만, 적어도 〈레위기〉는 전체가 이런 시각을 철저히 반영하고 있다. 즉 〈레위기〉는 제사장 귀족 중심의 분리주의적 신정국가를 디자인하고자 하는 문서인 셈이다. 이 문서는 오랫동안 비워둔 땅에 실제 주인인 자신들이 돌아왔으니 이 땅은 자신들의 것이라는 것을 주장하는 데 초점이 있다. 한데 그 주장을 펴는 방식이 가히 제사장스럽다. 그 땅에서 살아온 이들이나 그 땅에 대한 막대한 영향력을 갖는 이웃족속들은 하느님의 순결에 위배된 삶을 살아온 자들이다. 해서 그들은 땅을 차지할 권한이 없다는 것이다. 오직 자신들만이, 진정한 순결로 무장한 존재다. 해서 이 체제에 속한 많은 이들은 이방인이나 다름 없이 사는 외부 족속들의 부정한 태도를 따라가며 살고 있기도 한데, 제사장 중심의 신정체제는 그런 이들을 결코 좌시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런 단호한 배척의 질서를 구축하기 위해 종교적이면서도 법률의 형식을 띤 문서가 중요했다. 〈레위기〉가 바로 그러하다.
이 문서는 대중에게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 순결의 법에 따를 것인가 아닌가, 따르는 자는 희년과 안식년의 수혜자가 될 수 있지만, 따르지 않는 자는 ‘토사브’로 간주되어 그 혜택에서 제외된다는 것이다.
유대 지역은 원래 단순한 곳이었다. 지형적으로 고산지대이고 기후적으로는 거의 준사막이라고 할 수 있는 스텝지역이다. 자연 인구가 희박하고 족속도 많지 않다. 그런데 군주국이 발달하면서 영토도 넓어지고 인구도 족속도 늘어났다. 또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지중해를 연결하는 국제무역에 편입되면서 스텝지역에 맞는 농경도 발전하고 이웃족속과 국제분업질서 속에 편입된다. 해서 다종족, 다계층 연결망을 담고 있는 법제가 발전하게 되었다. 우리는 군주국 시대 절정기에 그 최초 형태가 만들어진 〈신명기〉 속에서 그런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한데 국가가 멸망하고 지배층 다수가 유배되어 갔다. 물론 훨씬 많은 이들은 남았다. 한데 아시리아와 바벨로니아 시대를 겪으면서 이 지역의 국가들은 거의 사라졌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인구가 흩어졌다 재정착하게 된다. 그러면서 많은 종족의 사람들이 뒤섞이게 되고, 그런 혼종사회적 양상은 마을 차원을 넘어서 광역의 지역으로 이어지게 된다. 해서 페르시아 시대 이후 시리아-팔레스티나 지역은 전반적으로 과거 국가 시대와는 다른 방식으로 혼종사회로 발전하게 된다. 남은 이들은 정착해 서로 광역으로 뒤섞이며 연결되었던 것이다. 시리아-팔레스티나 전역이 시리아 중심 족속의 언어인 아람어를 사용하는 언어공동체가 된 것은, 시리아-팔레스티나의 연결망이 좀더 깊어졌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런데 제사장 중심의 유다계 귀환자 공동체가 그리는 국가는 그 혼종성을 순결의 계율을 배신한 결과로 간주한다. 하여 혼종사회(heterotopic society)를 단종사회(homotopic society)로 전환시키는 데 복잡한 기획이 필요하지 않았다. 혼종성은 우상숭배요 간음이다. 해서 내부의 그런 자들을 철처히 척결하는 것이 해답이다. 사회를 디자인하는 이런 단순논리에는 선과 악의 이분법이 자리잡고 있다. 중간 지대는 없다. 선의 편에 있는 이는 축복을 받지만 악의 편은 심판의 대상이다. 당연히 이런 사회를 기획하는 자들에게 토론은 허용되지 않는다. 단지 신에게 순응할지 아닐지 여부만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런 류의 지배담화와 비슷한 현대적 담론을 주목한 이들이 있었다. 대표적인 사상가는 리처드 홉스태터(Richard Hobstadter)인데, 그는 1950년대 매카시즘의 폭력성을 체험한 역사학자였다. 그런 문제의식으로 자기가 속했던 미국사회를 건국시대부터 동시대까지 점검하는 책을 저술했는데, 그것이 바로 현대지성사의 거작으로 손꼽히는 《미국의 반지성주의》다. 여기서 홉스태터는 ‘지식인’이란 ‘통념을 따르거나 생산하는 자가 아니라 그것에 의문을 던지는 불편한 존재’라고 말한다. 해서 지식인은 ‘해답을 질문으로 바꾸는 자’인 것이다. 매카시즘 당시 미국사회의 무수한 대중은 혼종성을 위험한 것으로 간주한 선동가들에 휩쓸려 있었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로 1950년대 미국사회의 극심한 계층화로 인한 절망적 고통 상황도 한몫하였지만, 건국 당시부터 뿌리 깊게 잔존한 단순 이분법적 선악논리가 폭력적 양상으로 표출된 것도 중요한 이유였다. 어느 사회보다도 혼종적인 미국을 단종적 기획으로 통합하려는 편집증적 기획을 추동한 세력은 미국을 신정국가 사회로 만들려 있던 기독교 정통주의자들이었다. 홉스태터는 이런 단종화 기획을 미국의 뿌리 깊은 ‘반지성주의’와 연결시킨 첫 번째 사상가였다.
하지만 단종사회적 선동가들에게 현혹된 대중의 광기어린 배타주의만이 반지성주의 주요 양상은 아니다. 홉스태터가 지적하듯이 거기에는 수많은 지식 생산물들이 공조했다. 많은 인텔리겐차들은 그런 통념에 공조하여 혼종성에 대한 대중적 증오를 정당화했다. 해서 홉스태터는, 위에서 말했듯이, 지식인이란 통념을 따르는 자가 아니라 의문을 던지는 자라고 말했던 것이다.
다시 〈레위기〉로 돌아가보자. 내가 바라본 〈레위기〉 시대의 역사적 상상력을 홉스태터의 관점에서 보면 이 문서는 반지성주의의 교본 같은 책이다. 그것이 시선의 주축이 되어 오경이 최종 편찬된 것이라고 한다면, 이 책의 형성은 반지성주의 사회로 유대사회가 구축되는 과정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사회는 오랫동안 반공의 이분법 속에 살아왔다. 그리고 지금도 숱한 극단적 이분법들로 양분되는 틀이 도처에서 강한 파괴력으로 작동되고 있다. 이런 이분법의 틀 안에서 수많은 ‘지적 능력’이 동원되어 수많은 음모론들이 생산, 유통되고 있다. 이들 지적 능력이 동원되어 만들어내는 이분법적 음모론은 토론을 허용하지 않는다. 도리어 불편해 한다. 이견을 말하면 불이익을 당하고 따돌림을 당한다. 그런 사회로 우리는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것이다.
민주화는 이런 반지성주의 사회를 종식시키는 중요한 계기였다. 한데 과연 우리사회는 반지성주의의 악몽에서 벗어났을까?
안타깝게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사회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해졌지만, 그것을 단순화하고 응징과 보상의 이분법으로 규정지으려는 무수한 담론들로 가득하다. 보수든 진보든, 최근 청년세대를 강타하고 있는 급진주의든, 이런 단순 배타주의적 이분법이 요동치고 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실은 최근 전 세계가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 세계를 단순한 선악 이분법의 관점에서 보는 음모론은 그런 변화를 반영하는 가장 뚜렷한 지표다. 그런 점에서 ‘반지성주의’에 반대하는 지식인을 호명하면서 ‘그런 익숙함에 반대하라’는 홉스태터의 외침이 시계의 알람처럼 우리의 귀가에서 맹렬히 울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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