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과 목회](2023 겨울)에 실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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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의 공론장’에서 민중신학을 하기
디지털미디어 시대 민중신학에 관한 하나의 실험적 보고문
예언자가 된 학자들
1976년 3월1일 오후 7시, 명동성당에서 3.1절 미사와 기도회가 열렸다. 4백여 명의 종교계과 학계, 그리고 정치계 민주인사들이 참여한 집회였다. 이 집회의 끝자락에 ‘민주구국선언문’이 낭독되었다..
검찰은 발 빠르게 움직여서 선언문 연명자와 기타 가담자 전원을 당일 밤부터 연행하여 불과 10일 만에 사건을 종료했다. 검찰은 이 사건을 ‘명동사건’이라고 명명했고, 국가변란을 도모하고자 했던 반국가 사범으로 18명을 기소했다. 사법부는 검찰의 기소대로 전원 실형을 선고했다. 매머드급 변호인단이 구성되었지만 대법원 판결까지 재판은 전광석화처럼 끝났다. 아마도 검찰과 당국은 정치계와 학계, 종교계의 반정부적 인사들이 향후 감옥에 수감되어 있을 3~5년 동안은 아무 짓도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음직하다. 하지만 그 판단은 완전히 빗나갔다.
당시 전 세계적으로 가장 강력한 ‘의제형성 네트워크’(agenda setting network)를 갖고 있던 가톨릭과 개신교의 국제기구들이 신속하게 이 사실을 세계 곳곳에 알리면서 한국 정부의 인권탄압 현황을 이슈화했다. 이에 유수의 국제적 언론들에서 한국에 대한 비판적 기사들이 쏟아져나왔다. 세계 여론이 들썩였고 이른바 선진국들의 정치권이 예민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한국은 이 사건으로 단번에 문제국가로 낙인찍혀 버렸다. 무엇보다도 한국 정부를 난감하게 했던 것은 미국의 태도였다. 그 당시는 이란, 필리핀, 니카라과, 아르헨티나, 칠레 등에서 미국 정부의 지원에 힘입어 집권한 정권들이 자국민에 대한 가혹한 인권탄압을 자행하고 있다는 뉴스가 연일 보도되고 있던 차였다. 이에 미국의 국제외교가 도덕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비판여론이 들끓었다. 한데 한국도 예외가 아니었음이 알려지게 된 것이다. 미국 국회의 몇몇 위원회에서 한국을 다루는 청문회들이 연이어 열렸다. 언론은 대대적으로 이 사실을 중계했고 한국의 국격은 더 떨어질 수 없을 만큼 추락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서 ‘인권외교’가 대선 이슈로 부상했고, 그것을 어젠더로 제기한 지미 카터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결국 박정희 정권은 ‘3.1민주구국선언 사건’을 계기로 급전직하 와해되고 있었고, 결국 자멸했다.
목숨을 건 민중의 가열찬 투쟁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대대적인 국민저항이 일어난 것도 아닌데, 정치계와 종교계, 학계의 비판적 인사들 20여 명이 선언문 하나 만들어 낸 것이 전부인데, 왜 이렇게 강력한 파급력을 가졌던 것일까.
여러 면에서 정교한 분석이 필요한 일이겠다. 국제정치적 우연도 한몫 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분명한 사실의 하나는 그리스도교의 잘 짜인 국제적 네트워크가 활발히 작동할 때 그 영향력은 대단히 막강하다는 사실이다. 여기에는 단서가 필요하다. 1970년대 WCC 관련 그리스도교 네트워크는 세계의 여러 국제기구들 가운데 가장 활발히 작동하고 있었다. 특히 진보적인 사회정치적 담론의 형성과 유통에서 굉장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1975년 케냐의 나이로비(Nyirobi)에서 열린 제5차 WCC 세계대회에서는 해방신학, 흑인해방신학, 여성신학, 그리고 민중신학이 주요하게 다뤄졌으니, 그 이듬해에 민중신학자 안병무 서남동 문익환 문동환 등을 구속한 것은 세계 그리스도교 네트워크가 문제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졌음을 의미했다.
한편 가톨릭에서도 진보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요한 23세(1958~1963)가 소집한, 가톨릭의 개혁과 사회참여를 강조한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1~1963)가 열렸고, 그 기운이 요한 23세가 승하한 이후 더욱 개혁적인 교황 바오로 6세(1963~1978)에 의해 활력 있게 전개되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데 한국에서 사제들 몇 명이 독재정부에 의해 구속된 것이다. 이에 로마교황청도 이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게 되었다.
1976년 1월 말, 가톨릭 원주교구의 원동성당에서 가톨릭 사제들과 개신교 신학자들이 함께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한 공동선언문을 만든 것이 선례가 되어, 그로부터 30여 일이 지난 3월 1일에 김대중・윤보선 등이 주도하는 ‘민주회복국민회의’와 연대하여 공동선언문을 만들어냈다. WCC나 가톨릭, 어느 하나만도 감당하기 쉽지 않은데, 고강도의 정치 탄압을 당하고 있던 김대중, 평화운동가로 국제적 명성이 자자한 함석헌 등까지 구속했으니, 정부로선 너무나 버거운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눈을 국내로 돌려보자. 긴급조치 국면에서 사방 각처에서 감시의 눈이 번뜩이고 있었던 때였다. 대포집에서 술기운에 정부를 비판하는 주사(酒邪)만으로도 구속을 당한다는 소문이 자자했던 차였기에 많은 이들은 극도로 입조심하고 있었다. 한데 그런 와중에도 망설임 없이 민주주의와 인권, 나아가 민중 현실을 소리 높여 고발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주목받는 이들은 종교엘리트들과 대학교수들이었다. 소위 ‘말발’이 시민사회에 통하는 이들이었던 것이다. 계몽의 시대에, 사회엘리트가 무엇을 말하는지를 경청하던 사회 분위기 속에서 불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 쓴소리를 날리는 이들 종교계와 학계의 엘리트들은 당대 최고의 ‘빅스피커’들이었다. 1970년 당시 4년제 대학 졸업자는 전체 인구의 5% 미만이었으니, 성직자는 상위 5% 안에 드는 고학력층인 셈이다. 대학교수는 더 말할 것도 없다.
한데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그 시대의 매스미디어다. 매체학자 마샬 맥루한(Herbert Marshall McLuhan)의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명제는 하나의 말이 담론으로 널리 사회에 회자될 때 그 말의 내용보다도 그 말을 담아내는 미디어 양식이 사회적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데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18~19세기 매스미디어를 주도한 것은 신문이었다. 당시는 문맹율이 매우 높았기 때문에, 신문이 대중의 심상 속에 어떤 메시지로 자리잡게 되기까지는 몇몇 중간단계가 필요했다. 그만큼 신문과 대중 사이에는 시공간의 차이가 매우 컸다. 한데 20세기는 신문보다 훨씬 빠르고 훨씬 접근이 용이한 미디어가 대두했다. 라디오와 영화가 대표적이다. 이로써 발화자와 대중 사이의 시공간의 간격은 훨씬 더 촘촘해질 수 있었다. 그리고 20세기 중반 이후 텔레비전이 매스미디어로 폭넓게 활용되면서 그 간격은 거의 해소된 듯이 보이는 시대가 도래했다. 하지만 이러한 발전은 발화자와 대중 사이의 격차를 축소시키는 과정이었지 발화자와 대중이라는 이분법을 해체하지는 못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발화자는 말하는 자, 대중은 듣는 자였다. 계몽의 시대는 바로 이런 격차성을 통해 작동된다.
한데 1970년대 한국은 독재정부가 이러한 매스미디어의 작동을 강력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이로써 지배적인 지식은 지배권력에 오염되지 않을 수 없었다. 해서 이런 지배권력의 감시와 통제가 잘 작동할 수 없는 대안적 미디어가 활용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교의 설교나 강론은 매우 유용했다. 다른 종교에 비해 집회 횟수가 매우 많고 그 집회에서 발화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리스도교는 선교를 가장 중요한 종교활동으로 간주하는 전통을 갖고 있었기에 확장성도 상당했다. 그러니 성직자나 그리스도교계 학자들은 대안적 담론 공간에서 가장 큰 활약을 벌이는 이로써 대중에게 각인될 수 있었다. 한편 또 다른 대안적 미디어로 주목할 것은 ‘외신’이었다. 독재정권이 담론의 생산에 거의 영향을 미칠 수 없는 미디어였기에, 외신은 대안 미디어로 매우 유용했다. 다만 외국어를 활용할 줄 아는 이들이 극소수인 데다, 외신을 접하는 것도 매우 제한적이던 상황이어서, 그것을 접하고 해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엘리트는 중요한 메신저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요컨대 1970년대 한국적 계몽의 시대에 대안적 지식의 주역은 종교엘리트와 지식엘리트, 곧 성직자와 학자였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예언자처럼, 시대와 불화하며 시대의 지배적 지식에 반대하는, 저항적 메시지를 발화하는 자였다.
여기서 하나 더 언급할 것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그때는 그리스도교의 국제 네트워크가 왕성하게 작동하고 있던 시대라는 점이다. 이는 그리스도교계의 유학파 (신)학자들이 이 네트워크의 주인공으로 활약할 기회가 더 많다는 것을 뜻한다. 민중신학자들이 대표적이다. 그들 중 특별히 세계적 명성을 갖게 된 이들의 메시지를 담아내는 담론 양식은 학문적 텍스트보다는 강연 같은 담론 공간에 어울리는 형식의 텍스트였다. 그리스도교의 국제적 네트워크는 그들의 학문적 텍스트가 아니라 시대와 불화하는 예언자적 문서를 필요로 했다. 또 시민사회도 마찬가지로 그들의 예언자적 문서를 탐독하고자 했다. 해서 시간이 흐른 뒤에도 세계의 그리스도교 지식인들이나 한국의 시민사회는 민중신학적 텍스트에서 이런 서사적 양식을 기대했다. 가령 보다 정교한 이론체계를 추구하려 하면 민중신학이 민중으로부터 멀어졌다는 비판을 받아야 했고, 선과 악이 뒤얽힌 일상의 질서 속에서 작동하는 폭력의 현상을 들춰내려 하면 예언자가 아니라 ‘회색인’이 되었다는 비판에 직면해야 했다.
예언자의 종말
민중신학은 1970년대에 태동한 이후 몇단계의 유의미한 발전이 있었다. 가령 ‘제2세대’라고 불리던 1980년대 민중신학의 전개 양상은 1970년대 민중신학 못지 않은 대중적 영향력을 가졌고 또 가장 진취적인 대중적 주체와 조응하는 담론 양식을 발전시켰다. 하지만 그 ‘대중’이 주로 사회운동에 복무하는 청년 대중이라는 점에서 확장성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한편 민중신학의 사회적 영향력이 극도로 약화된 시기인 1990년대와 2천년대에는 ‘제3세대’라고 스스로를 규정했던 민중신학의 흐름이 등장했는데, 앞선 시대의 민중신학에 비해 존재감이 미미했다는 점에서 담론으로서 생명력을 거의 갖지 못했다. 하지만 타종교, 타문화, 타학문, 그리고 다양한 소수자성과 연결고리를 찾아내려는 교차성(Intersectionality) 담론으로 발전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민중신학의 서사적 확장성(narrative extensibility)이 매우 높은 담론 양식이라는 장점도 있다.
한데 이런 전개 과정을 이 글에서 다루는 것은 지면이 허락하지 않는다. 여기서는 ‘지금 여기’라는 시공간적 현재성에 민중신학이 얼마나 담론으로서 적절성을 갖고 있는지를 비판적으로 점검해보려 한다. 특히, 앞에서 ‘예언자적 문서’라고 말한, 1970년대 민중신학의 서사 양식(narrative form)은 이미 시대를 초월하는 민중신학적 텍스트의 전형이 되었는데, 그것이 여전히 ‘지금 여기’에서도 대중의 폭발적인 탐독의 대상이 되고 있는지, 해서 하나의 담론으로서 생명력을 가질 수 있는지를 비판적으로 점검해보려 한다. 미리 말하면, 오늘의 민중신학 텍스트들은 그 전형에서 크게 빗나가지 않고 있는데, 그것은 시민사회적 공론의 장에서 거의 읽히지 않는다. 그것은 민중신학이 이 서사적 전형성을 극복하고 새로운 서사 양식을 발견해내야 한다는 과제를 직면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1970년대는, 앞서 보았듯이 예언자의 시대였다. 한데 오늘의 시대는 ‘예언자 종말’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언’이라는 것은 세계의 파국과 구원 가능성에 관한 이야기다. 즉 예언은 거대서사(grand narratives)적 특성을 갖는다. 그런데 1990년대 초에 리오타르(J.F. Lyotard)가 말했듯이 거대서사 간의 싸움의 시대였던 이념의 시대가 가고 일상이 삶의 가장 중요한 것으로 다가오게 되자 예언은 더 이상 유의미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최근 방영됐던 드라마 〈악귀〉가 흥미롭다. 여기에는 최소한 세 개의 다른 서사가 경합한다. 하나는 ‘염매’(厭魅)라는 나쁜 주술을 통해 악귀를 처음 출현하게 한 나병희(김혜숙)로 대표되는 서사다. 그 처음의 시공간은 1958년의 한 어촌마을이다. 그녀는 혹독한 시대에 성공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불굴의 산업전사 같은 가치로 무장하고 있다. 두 번째 서사는 그 악귀를 청산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민속학자 구강모(진선규)로 표상된다. 그는, 악귀를 전유하 자에겐 성공의 서사인 동시에 타자에겐 파괴의 서사이기도 한 나병희식 담론을 청산하고자 했다. 나병희가 악귀를 통해 거대자본가가 되어 권력을 장악하고 있으니, 그것에 저항하는 구강모는 시대와 불화하는 예언자인 셈이다. 마치 민주화 시대의 예언자처럼 말이다. 실제로 드라마에서 그는, ‘586세대’를 대표하는, 1968년생으로 악귀와 싸우다 악귀에게 살해당한 일종의 예언자적 순교자다. 그리고 세 번째 서사는 주인공 구산영으로 표상된다. 그녀는 드라마에서 1992년생으로 나온다는 점에서 ‘MZ세대’에 속한다. 한데 이른바 ‘IMF체제’가 만들어낸 신자유주의적 질서 속에서 죽지 못해 살아가고 있던 구산영은 나병희식 서사인 악귀에 씌워 있다. 구강모는 죽기 전에 자신과 닮은 염해상을, 딸을 구원할 메시아로 호출했다. 구산영은 염해상과 함께 ‘나병희-악귀’의 질서에 순응하지 않으려 사력을 다한다. 그러면서도 구산영은 나병희-악귀의 질서가 주는 기회에 유혹받곤 한다. 곧 MZ세대의 구산영은 ‘나병희-악귀’식 서사와 구강모-염해상식 서사 사이에 있다. 이것이 구산영이 겪어내고 선택해야 하는 두 질서다. 한데 실은 두 질서의 경계가 명료하지 않다. 구강모는 유전성 질환으로 실명의 위험에 빠지게 되자 나병희와 거래한다. 염해상은 나병희의 손자인 만큼 날 때부터 나병희가 구축한 막대한 자산의 제국에 의지해서 상징자본을 획득한 자였다. 곧 그들은 적폐를 청산하다 순교한/할 예언자인 동시에 적폐와 손잡은 배반자이기도 하다. 구산영은 점점 그 모호한 경계를 발견하게 된다. 해서 하나를 청산하고 다른 하나에 세례를 받고 살아가는 게 어려운 것임을 절감하게 된다. 결국 구산영이 선택한 것은 나병희도 염해상도 아니었다. 자신의 현실에서, 비루한 일상에서 소박한 행복을 상상하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드라마를 이렇게 본다면 이는 하나의 사회학적 우화인 셈이다. 세대적 차이가 경합하는 전쟁터가 된 오늘의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담론 현상을 악귀와 사람 이야기로 환치시킨 이야기라는 것이다. 예언자는 거짓이 진실이라고 스스로를 표방하면서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하는 자다. 하지만 예언자 서사는, 예수 이야기가 표면적으로 보면 그런 것처럼, 비극적 모티프를 갖고 있다. 예언자는 장렬히 맞서지만 순교할 운명에 있다. 해서 ‘고난’이라는, 다분히 숭고한 고통의 정서로 채색된 신념을 내면화하고 있다. 이 익숙한 서사는 일종의 예언자 서사 특유의 전형성이다. 그런 전형성을, 그 익숙한 장면들을 이 드라마도 공유하고 있다. 일종의 예언자적 클리셰(cliché)가 드라마 곳곳에 새겨져 있다. 한데 작가라는 이는 본능적으로 클리셰를 못 견뎌 하게 마련이다. 몸에 새겨진 클리셰들의 진부함에 견딜 수 없는 작가는 동시에 드라마 곳곳에서 그것을 해체하려 사력을 다한다. 즉 작가는 분열되어 있다. 그래야만 그의 작품은 빛난다. 이 드라마가 바로 그렇다. 해서 두 개의 거대서사 사이에서 작가는 일상에서, 그 모호함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구산영을 그려냄으로써 두 패러다임 밖으로의 탈출을 꿈꾸는 자신의 욕망을 표현한다.
여기서 구강모-염해상식 서사와 민중신학의 예언자적 서사는 닮았다. 이 두 서사는 독재체제가 구축하고자 했던 산업화 시대의 성공지상주의적 욕구를 청산의 대상으로 삼아 낙인찍었다. 하지만 청산 대상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왜냐면 그 대상은 지금도 세계를 지배하는 막대한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예언자는 승리하지 못할 것 같은 힘과 맞선다. 그리고 순교하게 될 거라고 스스로를 해독한다.
그런데 독재체제를 청산하고자 했던 시민의 열망에 힘입어 집권한 민주정부들은 과연 적폐로 낙인 찍은 질서를 청산했을까. 제도를 개혁할 뿐 아니라 인적 개혁도 상당수준 단행했다. 민주정부 인사들은 ‘미완의 개혁’이라는 말을 종종 한다. 이 말은 개혁이 호락호락하지 않아서 늘 부족한 수준으로만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는 얘기다.
이렇게 민주화 담론의 서사에는 여전히 선과 악의 이분법이 작동하고 있다. ‘미완’은 ‘완성’을 전제로 한다. 그것은 일종의 선형적으로 전개(linear transition)되는 과정이다. 악을 청산하고자 하지만 현재는 미완의 형태이고 궁극에는 완성될 것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실재하는 사회적 전개는 이런 거대서사적인 목적론적 전개를 보여주지 않는다. 또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의 질서가 명료하지 않다. 그보다 세계는, 시대마다 새 시대를 추동한다고 주장하는 세력이 낡은 세대의 그것을 완전히 지우기보다는, 적절히 덧씌워서(overlaid), 마치 둘 이상의 요소들이 혼합되어서 화학변화하여 전혀 새로운 물질이 만들어지듯, 새로운 체계로 재탄생하곤 했다.
그런데 이런 ‘포스트예언 시대’는 어떻게 사람들에게 감지된 것일까. 예언자들의 거대서사가 담론화되는 시대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신문 같은 매스미디어가 담론의 장을 작동하게 할 때 가장 막강한 힘을 발휘했다. 이 미디어들이 발화자의 메시지를 대중에게 가장 광범위하고 가장 동시적으로 확산시키는 최고의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발화자는 엘리트적 존재다. 왜냐면 이 매스미디어들이 일방향성을 갖기 때문이다. 발화자는 말하는 자이고, 매스미디어를 통해 대중은 발화자의 말을 경청하는 역할이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데 낡은 시대를 전복시키는 담론이 매스미디어를 통해 활력 있게 전파될 때 그 미디어적 엘리트는 예언자의 자의식을 갖고 있다.
반면 인터넷을 통한 디지털미디어가 새로운 담론적 공론장들인 여러 SNS 장치들의 플랫폼 역할을 하게 되는 시대가 도래했다. 이것은 지난 시대의 매스미디어와는 엄청난 질적인 변화를 내포한다. 무엇보다도 발화자와 대중이 이젠 명료하게 나뉘지 않게 되었다. 그것은 발화자가 더 이상 엘리트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이가 말의 권위를 갖는다는 것은 그가 엘리트이기 때문이 아니다. 쌍방향적 매스미디어가 그 말을 가장 널리 확산시키고, 그것이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미치게 될 때 그 말은 권위를 갖는다.
경계가 명료하지 않게 된 것은 발화자-대중만이 아니다. 국적도 경계가 훨씬 흐려졌고 인종도 성도 모호해졌다. 이분법의 질서는 곳곳에서 흔들리고 있다. 그런 모호함을 견딜 수 없어서 반대급부적으로 명료한 경계와 차별을 강조하는 운동 또한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수없이 많은 여기저기에서 그것을 두고 논쟁이 벌어진다. 오늘의 공론장은 이렇게 모호함을 매개로 해서 작동된다. 바야흐로 예언의 시대는 가고, 그 자리를 대체할 다른 무엇들이 춤추고 있는 시대인 것이다.
유령의 시대에 민중신학을 말하기
자크 데리다는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된 직후인 1993년에 ‘유령론’(hantologie)을 제기한 바 있다. 그 다른 무엇을 그는 ‘유령’이라고 부른 것이다. 프랑스어 발음상 이것은 존재론(ontologie)를 연상시키는 일종의 언어유희다. 존재의 역사가 아닌 비존재의 역사를 말함으로써 변화된 세계를 더 적절히 읽어내려는 시도겠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국민의 몸, 노동자의 몸, 성적 다수자의 몸, 엘리트의 몸 등등 무수한 역사의 주체이자 사회의 주체의 시각에서 해석된 역사와 체제는 세계를 오독해왔다는 문제의식을 반영한다. 유령은 몸이 없는 존재다. 해서 국가의 각종 지표에서 생략된다. 그리고 시민사회가 계산에 넣지 않은 자다. 즉 그들은 존재가 아닌 자들이다. 바로 그런 비존재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세계가 어떻게 작동되었는지를 보아야 한다. 한데 그렇게 하려면 존재들의 체계가 작동하면서 발생하는 망각의 메커니즘을 해독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은 세계를 읽는 과정이고 세계를 변화시키는 과정이라는 것, 이것이 그의 유령론의 문제의식이다.
사실 민중신학은 1975년 태동할 때부터 이미 그 문제를 통찰하고 있었다. 민족의 주체 담론, 그 담론 경계의 밖으로 내몰린 자들을 ‘오클로스’라는 〈마가복음〉의 용어로 호명하면서, 그 망각의 역사를 들춰내는 것, 즉 오클로스의 망각된 목소리를 증언하는 것이 민중신학의 과제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 시대는, 말했듯이, 예언자의 시대였다. 하여 경계 밖을 얘기하는 것은 늘 주목받지 못했다. 그것을 재발견한 것은 제3세대 민중신학이었다. 민중신학은 처음부터 경계의 바깥에서 상상하는 세상, 그러니까 경계를 모호하게 하는 세상을 꿈꾸는 신학을 추구했다고.
한데 유령, 아니 한국적 용어로 ‘혼령’은 몸이 없다. 해서 혼령은 국민과 비국민으로 나뉘지 않는다. 한민족와 외국인으로도, 남자와 여자로도, 노동자(class)와 언더클래스(underclass)로도 나뉘지 않는다. 심지어 인간과 비인간을 가르지도 않으며, 나무도 되고 풀도 되고 비도 되고 바람도 되며, 돌도 산도 강도, 심지어 이종감염 바이러스도 되고 컴퓨터 바이러스도 된다. 그 모든 것이 존재들의 역사에서 배척되어 고통을 겪고 있다. 하지만 말할 수 없다. 아니 들리지 않는다. 존재는 언어로만 소리를 듣는 커뮤니케이션 장치를 구축해 놓았기 때문이다. 해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는 모든 혼령들은 ‘한’을 품고 있다. 하여 민중신학적 한의 담론은 그 ‘한’의 소리에 귀기울이고 공감하고 나아가 세상에 증언하는 것을 지향한다.
한데 그 증언은 선과 악으로 나뉘지 않는다. 해서 예언자의 그것과는 다르다. 또한 한은 거대서사로만 규정되지 않는다. 소소한 일상에서 일어나는 상처들이 모이고 엮이면서 한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안병무는 그것을 이념이 아닌, ‘(죽임을 넘어서는) 살림’이라는 용어로 표현한 바 있다.
그런 이야기들은 민중신학자들의 선행적 작업의 산물일 수 없다. 사람들과 대화나눔을 통해 특정한 소재가 공유되고, 그것을 두고 수다의 공론장이 벌어진다. 제한적이나마 최근 민중신학자들이 실험하고 있는 장소들로, 교회든 교회밖 모임이든, 온라인 공간이든 오프라인 공간이든, 그런 장소에서 수다의 공론장이 생기곤 했다. 한데 바로 여기에 민중신학적 문제제기가 수다 속에 스며든다. 망각된 비존재를 각자 찾아내려는 일이 그것이다. 여러 사람들이 글로, 그림으로, 몸동작으로, 혹은 아이에게 들려주는 우화로, 그밖의 여러 양식의 이야기로 만들어지는 일은 여기서 시작된다. 그중의 하나가 민중신학자다. 그이는 그것을 글로 목소리로 영상으로 신학적 이야기로 풀어낸다. 그렇게 된 것을 공론장에 공개한다. 그것이 용케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면 담론으로 살아남게 되고 아무도 돌아보지 않으면 잊혀진 텍스트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 형성 과정이 바로 민중신학이다. 민중신학은 민중신학자가 만들어낸 최종 텍스트라는 좁은 의미의 결과물이기도 하지만, 그 결과물이 만들어지는 여러 사람의 공론적 수다행위 자체가 바로 민중신학이라는 것이다. 디지털미디어 시대의 민중신학을 향한 하나의 실험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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