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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민중신학, 시작에 관한 하나의 내설(內說)

경기민예총의 연간지 ((다-다-)) 4호(2022.12)에 실린 글.
미술평론가인 김종길 선생이 편집장이다. 흥미롭게도  이 잡지는 '처음'이라는 주제로 특집을 구성했다

총론격인 <묶어 말함: 처음>, 그리고 네 가지 '처음'에 관한 고찰들이 들어 있다. 

(1) <어린이라는 처음>, (2) <백남준의 '첫'>, (3) <민중, 처음이 되다>, (4) <파주타이포그리피배곳 10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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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신학, 시작에 관한 하나의 내설(內說)

 

 

1975년 3월1일

 

그날 새문안교회 본당 교육관에는 많은 인파로 북적댔다. 주일엔 어린이예배가 열렸기에 시끌벅적했지만, 평일엔 결혼식이 있을 때를 빼면 거의 조용했다. 당시엔 기독교사회운동 하던 활동가들이 모임 장소로 이 교회를 애용했지만, 대개는 좀더 작은, 별관 교육관에서 모였다. 집회결사의 자유가 극도로 제한되던 시절이니 대중집회라는 게 가능하지 않았던 탓에 넓은 공간이 필요치 않았던 것이다.

197531, 그날은 태풍의 눈과 같았다. 1974년 연초부터 휘몰아치듯 포고된 긴급조치 ‘1~4로 무수한 사람들이 체포되고 고문당하고 중형을 선고받았다. 남발된 사형선고로 유명을 달리한 이들도 적잖았다. 그리고 이듬해(1975) 4월과 5월엔 이전 것보다 훨씬 악명 높은 ‘7‘9국면이 펼쳐졌다.

그 사이에 낀 몇 개월 동안은 유신체제의 살기가 조금 누그러졌다. 특히 ‘4’, 그러니까 민청학련 사건인혁당 재건위 사건이라는 희대의 간첩조작사건으로 너무나 충격적인 국가폭력이 전 세계에 속속들이 알려지게 되자, 박정희 정권이 약간의 유화책을 편 것이다. 십수 년의 중형을 선고받은 이들이 불과 1년도 못 되어서 형집행정지로 풀려났고, 무기징역이나 사형을 선고받은 이들 중 일부도 감형조치되었다.

이때 풀려난 이들 중에는 기독자교수협의회(이하 기교협) 회원이던 김동길김찬국 교수도 포함되었다. 그들은 민청학련사건의 배후조종혐의로 15년과 10년형을 선포받았다. 이들이 체포되고 군사법정에서 중형을 선고받는 일이 벌어지자 당시 지식인사회에서 가장 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던 교수 단체의 하나였던 기교협의 기조가 바뀌었다. 정치적 참여에 소극적이던 단체가 유신체제에 적극적 저항세력으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서남동안병무이문영한완상 등 참여파 회원들의 입지가 강화된 것이다. 그 첫 행보가 두 교수의 출소를 환영하는 강연회 개최였다.

197531, 그날은 토요일이었다. 오후 2시 강연회장으로 무려 7백 명의 인파가 몰려들었다. 긴급조치국면에 들어선 이후 이런 규모의 정치적 집회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게다가 잘 조직되어 있던 기독교계 사회운동 기구들이 기민하게 움직여서 행사 참여를 독려했다. 하여 인파들 속에는 이른바 불온한 이들이 넘쳐났다. 이 정도라면 아무리 유화국면이라고 해도 경찰당국이 집회를 공공연히 방해하는 데 적극 나섰을 법하다. 하지만 국내외적으로 빅스피커기교협이 주관하는 행사였기에 원천봉쇄까지는 어려웠던 모양이다. 아니, 말했듯이, 당시의 관점으로는 놀라울 정도로 많은 이들이 모였다.

 

민족・민중・교회

 

출소한 교수들을 환영하는 순서가 끝나고, 행사의 하이라이트인 강연이 이어졌다. 강연자는 당대 최고 스타지식인으로 주가를 올리고 있던 안병무였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아직 서른 살도 안 된 안병무는 피난 중에 1인 잡지라고 할 수 있는 야성을 발행했고, 전쟁 중임에도 구독자가 거의 2천 명에 달했다. 이후 유학 길에 올랐다가 귀국하고 몇 년 뒤 또 다시 잡지 현존을 창간했다.(1969) 장준하의 사상계, 함석헌의 씨ᄋᆞᆯ의 소리, 김재준의 3, 백낙청의 창작과비평, 그리고 안병무의 현존등은 동시대를 대표하는 비판적 잡지였다. 당시는 잡지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오늘의 유튜브에 견줄만한 시대의 대표적 공론장이었다. 해서 박정희, 전두환 등 독재자들은 예외 없이 이들 잡지들을 강제폐간케 함으로써 시대의 눈과 귀와 입을 봉쇄하려 했다.

 

당대의 대표적인 비판적 저널리스트들이 모두 촌철살인의 저술가였던 것처럼 안병무도 발군의 저술가로서 대중의 정신적 멘토였다. 또한 다른 이들처럼 그는 유신체제에 저항하는 지식인 앙가주망의 상징이기도 했다. 그 이듬해인 19763.1절 미사가 명동성당에서 열렸는데, 이때 가톨릭, 개신교, 정치인, 재야민주화운동가 등이 함께 명동성당에서 선언서를 낭독하고 가두행진을 벌였다. ‘3.1민주구국선언이라고 알려진 이 문서에는 윤보선, 김대중, 함석헌, 문익환, 함세웅, 이우정, 안병무 등 정치계, 종교계, 학계, 재야지도자 등 16명이 대표자로 서명을 했고, 이우정 안병무 함석헌 이해동 등은 선두에서 가두행진을 이끌었다.

19753.1절 강연회 얘기로 돌아가 보자. 이 행사의 주인공은 출소한 두 교수였다. 하지만 강연자가 안병무라는 사실도 그곳에 참석한 대중에게는 설레고 기대되는 일이었다. 그는 강연자로서도 명성이 자자했다. 청중을 웃겼다가, 어느 순간 심장이 길다란 바늘에 찔린 것 같은 통증에 몸서리치게 했다. 긴급조치 국면에서 그런 그의 육성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은 대중에게 퍽 설레는 일이었다. 게다가 그의 강연은 말의 기술 이상의 것을 갖고 있었다. 생각도 못했던 새로운 지평으로 대중의 상상력을 이끌었다.

그의 강연 제목은 민족과 교회였다. ‘민족과 국가민족과 교회니 하는 용어는 그 무렵 비판적 지식인들이 자주 쓰던 표현이다. 해서 사람들은 이 표현에서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충분히 연상할 수 있었다.

이때 민족국민과 동의어라고 해도 무방하다. 국가나 교회가 민족/국민의 주권을 박탈하고 인권을 유린할 때 민족/국민은 그 불의한 권력에 대항하여 국가를 바로 잡아야 하는 존재다. 그런 점에서 민족/국민은 역사의 주체다. 한데 이런 논리에 종종 민중이라는 용어가 끼어든다.

여기서 민중의 개념사를 잠깐 살펴보자. 일제강점기에서 1960년대까지 민중은 정치적 함의가 낮은 용어였다. 반면 인민혹은 대중은 사회주의적 함의가 강했고, ‘민족은 사회주의에 비판적인 이들이 선호하는 정치적 용어였다. 해서 인민/대중(vs) 민족은 각기 다른 세계관을 반영하는 언어들과 연계되어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반면 민중은 다분히 무정형의 군중 같은 존재였다. 한데 1970년 어간부터 일부 진보적 인사들 사이에서 민중이 정치적 대중을 가리키는 용어로 부상했다. 그때는, 알다시피, ‘인민이라는 용어가 금지어가 된 시기였다. ‘대중은 여전히 많이 사용되고 있었지만, 정치적 성격이 탈각된, 무정형의 군중이라는 의미로 쓰였다. 그런 상황에서 과거 인민대중이 함축하고 있었던 진보 정치적 늬앙스가 민중용례 속에 덧입혀지기 시작한 것이다.(1)

이렇게 정치적 대중으로 해석된 민중1970년 무렵부터 민족과 연결되어 사용되는 일이 잦았다. 그것은 보수정치적 늬앙스가 강한 민족을 진보 정치의 관점으로 재활용하기 위한 하나의 담론 전략이었다. 한데 두 단어에는 일정한 긴장이 내포되어 있다. ‘민족이라는 말에는 국가공동체의 구성원이자 주체가 연상되지만, ‘민중에선 국가공동체에서 배제된, 국가의 주체가 되지 못한 자들이 떠오른다. 하여 이 긴장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의 문제가 중요했다. 여기에는 하나의 기원의 신화가 작동한다. 즉 우리는 원래 같은 민족이었지만, 잘못된 정치가 민족을 분절시켜 버렸다는 것이다. 해서 민족에서 잘려나간 민중을 다시 민족의 일원으로 회복시키는 것이 국가 회복의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그리고 이런 회복의 프로젝트는 1970년 무렵에는 강권통치를 극복하는 민주화 운동으로 구현되어야 했다. 바로 이런 논리 아래서 민족과 민중은 하나로 연결될 수 있다. 이와 같은 논법을 펴는 민족-민중론을 우리는 흔히 저항적 민족주의라고 부른다.

안병무가 민족과 교회라는 제목의 강연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이런 식의 정형화된 논법이 특유의 맛깔나는 화술과 성서에 대한 절묘한 해석을 곁들인 이야기로 제시되려니 했다. 그런데, 우리 민족사에서 그리스도교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살펴보겠다는 짧고 평이한 두 문장짜리 있으나마나 한 서론을 편 직후, 본론을 시작하는 첫 문장부터 그는 그런 기대를 산산이 부수어버렸다. “우리 역사에서 민족은 있어도 민중은 없었다.”

민족의 역사는, 민중과 함께 한 역사가 아니라 민중을 배척하거나 이용했던 역사라는 얘기다. 거꾸로 말하면 민중은 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imagined communities)에서 잘려 나간 존재다. 저항적 민족주의는 이렇게 민족공동체에서 뿌리 뽑힌 자들인 민중이 분연히 들고 일어나 자주적 민족국가의 회복을 추구하며 벌인 근대적 민중운동을 계보화하였다. 동학농민항쟁에서 3.1운동, 4.19의거로 이어지는 민중운동의 역사가 그것이다. 한데 청년 김지하는 이러한 저항적 민족주의역사의 기념비에 민중 자신의 이야기는 기입(inscription)되지 못했다고 비판한 바 있다.(2) 안병무는 바로 김지하의 비판과 유사한 논법을 이 강연에서 제기하고 있다. 이것은 민족의 규범적 틀을 넘어서는 변혁의 지평에서 민중의 상상력을 펼쳐야 한다는 주장과 연결된다. 즉 그의 강연은 민중민족과는 다른 범주에서 사유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바야흐로 새로운 민중론이 발화되고 있었다.

기교협의 총무였던 한완상은 안병무의 논점이 갖는 독특함을 제일 먼저 읽어낸 이였다. 그의 진술에 의하면 민족과 교회라는 안병무가 준비한 제목을 민족민중교회라는 제목으로 바꾼 홍보자료를 배포했다.(3) 훗날 이러한 안병무의 새로운 민중론을 민중신학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날 강연 원고인 민족민중교회는 민중신학의 출범을 선언하는 글로 해석되었다.(4)

 

오클로스

 

이 글에서 안병무가 불쑥 꺼내어놓은 용어가 성서 속 그리스 단어인 오클로스(οχλος). 영어성서 대부분은 이를 crowd로 옮겼고, ‘multitude of people로 번역한 경우도 있다. 모든 한글 성서들은 예외 없이 무리라고 썼다. 어느 경우든 번역본들은 이 단어가 가리키는 이들이 누구인가에 주목하지 않았다. 단지 그들은 주로 예수 주위에 모여든 아무개들일 뿐이었다.

안병무는, 이전까지는 서양 성서학계의 통례처럼 오클로스에 대해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었는데, 바로 이 글에서는 느닷없이 이 단어의 특별함에 주목한다. 이것은 성서에 사용된 175회 중 마가복음38회의 용법에 주목한 결과다. 다른 성서 문헌들에서는 무정형의 대중에 가깝게 쓰였지만, 이 복음서만은 특정한 범주의 사람들을 지칭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그들은 경계 밖의 사람들, 그 사회에 의해 혐오의 대상으로 낙인찍힌 자들이다.(5)

그는 이 글에서 마가복음에는 단 두 번, 그것도 제1성서의 인용구절에만 나오는 그리스 단어 라오스(λαος)를 주목하면서, 이것이 오클로스와 대조되는 용어임을 강조한다. 기원전 2세기에 만들어진 히브리어 성서의 그리스역본인 ‘70인역성서(셉투아긴타)에서 이 단어는 매우 자주 사용되었는데(1350회 이상), 히브리어 고이(ɡoy)(am)의 번역어로 쓰였다. 이 단어들은 가령 국가가 법을 반포할 때 법의 백성으로 부름받은 자들을 지칭한다. 그렇다면 오클로스는 법 밖의 대중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겠다. 마가복음에는 오클로스가 나오는 대목에는 영락없이 매춘여성, 죄인, 세리, 병자 등이 등장하고 있다. 하나 같이 그 사회가 혐오의 존재로 낙인찍은 자들로 법의 외부자들이다. 라오스들은 오클로스들을 자신과 같은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것을 수치로 여기고 심지어 부정 타게 하는 자로 여겼다

안병무는 마가복음에서 사용된 오클로스와 오늘의 민중이 유사하다고 본다. 하여 그는 우리 역사에서 민족은 있어도 민중은 없었다고 주장한다. 마찬가지로 한국의 그리스도교에서도 민족은 있지만 민중은 없었다.

하지만 이 강연에서 그는 오클로스에 대해 좀더 구체적인 논의를 펴지 못했다. 마가복음의 용법이 실제 예수의 대중을 해석하는 근거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논증하지 못했다. 이에 대한 본격적인 해명은 1979년경 이후에 저술된 그의 몇몇 에세이와 논문들에서 본격화된다. 그 논지를 간략히 소개하면 이렇다.(6)

그는 마가복음속 오클로스가 종종 실어증(aphasia)에 있다는 것에 주목했다. 이것은 일종의 사회적 은유다. 실어증에 걸린 민중은 자신의 말을 하지 못한다. 병들어서 못하고 편견 때문에 못하며 무식해서 못한다. 한데 사람들은 민중이 그렇게 말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는 이유를 그이의 조상이 지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는 말 못하게 하는 사회적 장치인 셈이다.

민중은 죄의 감옥에 갇혀 있다. 감옥은 그들을 말 못하게 하는 사회적 장치. 그것을 안병무는 죄의 체계라고 규정했다. 이것은 실어증 걸린 민중의 ()에 대한 성찰로 이어지게 한다. 이는 동료 민중신학자인 서남동의 에 대한 해석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서남동의 해석은 김지하의 에 관한 해석에 기반을 두고 있다. 김지하는 당시 민족주의적 민속학자들의 의 해석에 반기를 들면서 의 자리는 민족이 아니라 감옥이라고 말했고, 서남동은 그것을 신학적으로 재해석하면서 의 자리는 라고 주장했다. 안병무는 서남동의 죄를 죄의 체제(regime of sin)라고 재규정했다.

죄의 체제는 민중의 한의 소리를 사람들이 혐오하게 만든다. 해서 그 소리를 듣고자 하지 않고 편견을 쌓게 한다. 그뿐이 아니다. 죄의 체제는 민중 자신도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고백하게 하고, 자기 자신을 혐오하게 만든다. 하여 민중에게 허용된 유일한 가능성은 죽은 듯이 사는 것이다. 해서 안병무는 죄의 체제가 곧 민중 죽임의 체제라고 본다.

민중신학자는 신으로부터, 세상이 된 신으로부터, 아니 신이 된 세상으로부터 이러한 민중 죽임의 체제에 맞서라는 호명에 응답한 자다. ‘신이 된 세상을 성서는 하느님나라라고 부른다. 그 나라는 이 세계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 안에, 이 세계와 겹쳐서 존재한다. ‘성령이라는 신에 관한 레토릭은 바로 세상이 된 신을 가리키는 은유적 표상이다. 세상이 된 신인 성령은 존재하는 모든 것 사이에서, 모든 것들이 서로 통하게 하는 존재다. 해서 사람들에게 불통의 존재로 낙인 찍인 민중의 소리가 되어서 그 소리를 헤아리라고 민중신학자를 향하여 속삭인다. 즉 민중신학자는 이 세계의 언어 질서에서는 들을 수 없는 그 소리를, 말이 되지 못한 한의 소리를 해독하라는 부름에 응답한 자다.

의 소리는 언어가 되지 못한 소리다. 기의와 기표 체계의 조합으로 해독될 수 없는 소리다. 해서 언어처럼 그 의미를 읽어내고자 하면 들리지 않는다. 그것을 듣는 일은, 죄의 체제로 인해 봉쇄된 언어의 질서를 넘나들면서 표출되는 그이들의 한의 소리와 몸짓에 공감해야 한다. 무당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렇게 해독한 소리를 언어로 번안해서 이야기해야 한다. 안병무는 한의 소리를 해독하고 그것을 전달하는 이야기꾼 작업을 증언이라고 말했다. 하여 민중신학자는 아카데믹한 담론의 전문가로서 서양신학을 증언하는 이야기꾼도, 교회적 교리담론의 전문가로서의 교권체계의 소리를 증언하는 이야기꾼도 아니다. 민중신학자는 바로 민중의 한의 소리, 말이 되지 못한 그 소리의 해독자이자 증언자가 되고자 하는 이다. 마치 죽은 이의 억울함을 몸으로 소리로 증언하는 무당처럼, 민중신학자도 무당이 되어야 한다. 해서 서남동과 안병무는 민중신학자는 한의 사제여야 한다고 말했다.

1979년 아시아교회협의회(CCA)는 한국에서 제기된 이러한 신학을 민중신학(minjung theology)라고 불렀다. 비로소 안병무 서남동 등이 주도한 새로운 한국적 신학운동은 이름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이름으로 민중신학은 본격적으로 세계 신학계에 알려졌다. 그러나 민중신학계는 이렇게 이름이 생기기 전인, 1975년 안병무의 글에서 민중신학의 기원을 찾는다. 민족민중교회에서 시작된 오클로스적 민중의 상상력에서 민중신학은 시작을 선포한 것이다.

 

살림

 

1976, 1년도 안 되는 감옥살이 중에 안병무의 심장질환이 급격히 악화되었다. 그리고 1985년 말 이후 글을 읽기도 쓰기도 어려울 만큼 심각해졌다. 이 세상을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수없이 많은 방문객들이 한번이라도 그를 만나고자 매일 집 앞에서 진을 쳤다. 글 청탁이나 인터뷰 요청도 쇄도했다. 하지만 그는 대화 없는 일방적 가르침을 요구하는 만남에 지쳐 있었다.

그 무렵 그의 생각을 지배한 단어가 있었다. ‘살림이 그것이다. 죽임의 질서는 서슬 퍼런 독재체제로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악의라곤 일도 없는 일상의 대화에서도 작동하고 있었다. 일방향적인 가르침의 요구 같은 것도 그가 보기엔 다르지 않았다. 그게 바로 죽임의 체제의 무서움이다. 해서 그런 체제를 넘어서는 신학적 상상력이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살림이다.

198911, 그는 네 번째 잡지를 창간했다. 그 잡지의 제호가 살림이다. 표지 사진에서 보듯 왼편 상단의 살림제호 위에 작은 글씨로 죽임을 넘어서라는 문구가 들어 있다. 물론 이제는 잡지를 직접 기획할 사정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끊임없이 기획자들에게 요구했다. ‘내가 아침에 마시는 커피 한 잔 속에 죽임의 체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 속에서 살림의 상상력은 무엇인지를 이야기해 보시오.’ 당시엔, 그의 제자들인 잡지 기획자들이 이 과제를 수행할 준비가 되지 못했다. 일상을 민중신학의 담론 속에서 다루는 것에 너무나 서툴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화두는 그가 소천(1996)한 뒤 10년쯤 지나서 민중신학의 한 장르로 부상하였다.

 

21세기 민중신학

 

민중신학이 일상에서 죽임의 체제를 읽어내기 위해 주목한 키워드는 고통이었다. 최근에 출간된 한 연구서는 민중신학의 시대사적 전개를 요약하면서, 1970년대 민중신학을 증언의 신학’, 1980년대를 운동의 신학’, 21세기를 고통의 신학이라고 규정했다.(7) 고통은 가장 개체적이고 일상적인 체험이다. 하지만 어떤 고통도 고립된 개체들의 일상에서 시작되거나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끊임없이 사회와 연결되면서 집합적 기억과 행동에 연루된다.

여기서 민중신학이 주목하는 것은 고통의 담론화, 그 과정에서 망각되거나 왜곡되는 이야기들이다. 안병무의 사회적 실어증의 문제의식이 여기서도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을 자기 언어로 담론화하지 못하는 존재들의 체험에서 오늘의 민중 문제를 해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 계급(class)에 관한 이론들은 자신의 체험을 계급의 관점으로 해석하고 그 해석에 의해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계급적 주체의 문제를 핵심 내용으로 다루어왔다. 한데 고통을 다루는 민중신학의 민중은 언더클래스(under-class)와 관련이 있다. 언더클래스는 계급적 주체가 될 가능성이 없을 뿐 아니라, 더 그로테스크한 존재처럼 실체화되는 부류를 지칭하는 용어다.

한편 북미의 생태주의적 정치신학자인 캐서린 켈러(Catherine Keller)는 인간 중심주의적 함의를 갖고 있는 용어인 언더클래스대신 포스트휴먼적 용어로 재해석한 언더커먼즈(undercommons)를 사용하면서 동물, 생명체, 모든 존재하는 것, 우주로까지 확장된 영역에서 비존재화된 존재의 배제와 초월을 이야기한다. 21세기 민중신학자는, 안병무의 살림의 문제의식을 캐서린 켈러의 언더커먼스론 관점에서 재해석한다. 하여 고통의 신학을 포스트휴먼 차원의 담론으로 확장하여 다루고 있다.

켈러의 언더커먼스론은 포스트휴먼적 연대를 지향하는 사회를 꿈꾼다. 휴먼 중심적 사회의 민주적 연대에 관한 이론의 하나인 참여민주주의론은 합리적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정치적 주체들이 만들어가는 공론장을 통해 사회를 만들어가는 담론이다. 한데 켈러의 언더커먼스론을 참조하는 민중신학의 살림의 문제의식은 합리적 의사 표현뿐 아니라 불협화음까지도 공론장에 포함하는 아고니즘적 공론장(agonistic space)을 추구한다. 그 속에서 고통을 언어화하지 못하는, 망각되고 왜곡된 소리와 몸짓들을 커뮤니케이션의 요소로 소환한다. 또한 비인간적 존재들, 포스트휴먼적 존재들의 비언어적 언어들도 커뮤니케이션의 장으로 초대한다. 그러한 작업을 하는 이들이 민중신학자다. 해서 오늘의 민중신학자는 교회가 아니라 전 지구의 살림에 대해 말하는 이야기꾼이다.

 

 

 

[후주]

(1) 허수, 식민지기 집합적주체에 관한 개념사적 접근―『동아일보기사제목 분석을 중심으로, 역사문제연구23(2010.04)

(2) 안지영, 김지하의 역사의식과 '민중'의 의미 양상, 한국학연구47(2017.11)

(3) 한완상 박사 인터뷰: 하나님나라운동, '원수사랑'으로 악을 이기라, 에큐메니안(2014.11.06.)[http://m.ecumenian.com/news/articleView.html?idxno=11289]

(4) 이 강연원고는 민족민중교회라는 제목으로 기독교사상(1975.04)에 실렸다.

(5) 이런 견해를 먼저 편 이는 일본의 성서학자 다가와 겐죠(田川建三)(1966). 그는 스트라스부르 대학에 제출한 박사학위 논문에서 이런 주장을 폈다. 하지만 안병무가 1970년대 중후반 비슷한 논지를 펴기 전까지 이 관점은 서양 학계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한편 여러 고대그리스 문헌연구가들(Sergei Averintsev, Richard Pevear, Larissa Volokhonsky)은 성서 밖 많은 문헌들에서 이 그리스 단어가 주로 경멸의 대상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어 왔음을 밝혀냈다.

(6) 나의 글 민중신학과 '비참의 현상학', 21세기 민중신학세계 신학자들 안병무를 말하다(삼인, 2013) 참조. 마가복음의 용법을 예수의 대중을 해석하는 방법론적 근거에 대해서는, 매우 중요하지만, 너무 학문적인 것이어서 여기서는 생략하겠다.

(7) 이상철 외, 민중신학, 고통의 시대를 읽다(분도출판사,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