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 6일(금) <기독교인 죄책고백세미나: 국가폭력과 한국기독교> 에서 기조강연으로 발표된 글.
장소는 오전(10:00~12:00)에는 기독교연합회관 3층 그레이스홀에서, 오후(13:00~18:00)에는 기독교회관 2층 조에홀에서 열렸다. 이날 한동훈이 기독교회관을 방문했다고, 조에홀의 오전 행사가 불가능하게 되어 부득이하게 오전에는 한국기독교연합회관에서 해야 했다고 한다. 그이들은 여러모로 시민에게 불편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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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에서 ‘사과’하고자 하는 우리 개신교 신자들에게
필요한 물음들에 대하여
사과해야 하는 종교
이 포럼에서 발표되는 글들은 한국의 근대국가 형성과정에서 한국정부와 개신교가 가해자로 관여된 폭력적 사태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런 구도는 한국현대사를 잘 모르는 이라면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혹 개신교 신자 중에는 불공평하다는 생각을 갖는 이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한국사회는 다종교사회인데, 심지어 당시 개신교는 군소종교에 지나지 않았는데 왜 개신교만이 국가폭력에 연루된 핵심용의자인 것처럼 말하느냐고 말입니다. 그러나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은 개신교가 당시 다른 어떤 종교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심각한 폭력의 가해자였다는 것입니다. 해서 지금 개신교신자인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개신교의 역사적 과오들을 들추어내고 피해자들 앞에서 그리고 역사 앞에서 통렬히 사과하는 것입니다. 이 심포지엄의 문제의식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하지만 그 이상의 논의가 필요할 것입니다. 한도 끝이 없이 많은 주제들과 논점들이 다루어져야 합니다. 희생자들과 피해자들에 대한 보다 깊은 접근들, 가해자들에 대한 깊은 연구들, 가해의 사회정치적이고 국제정치적인 구조적 메커니즘에 대한 분석들, 그리고 그 사건이 일으킨 사회적 효과들, 그 효과들의 원인이자 과정이며 결과로서 부상한 역사화의 흔적들을 다루는 깊이 있는 포럼들이 필요합니다. 또한 그것에 관한 국가의 공적 기억으로 발명된 ‘공적 역사’가 어떻게 만들어졌고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는지 등도 살펴야 합니다. 이 모든 논의들이 개신교와 관련해서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빈약한 수준입니다. 이 심포지엄이 향후에 짊어져야 할 과제이겠지요.
아무튼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일부 공격적 개신교 신자들이 적극 가담한 폭력 행위는 개신교의 성공에 적잖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입니다. 무엇보다도 그 덕에 개신교는 현대 한국사회 형성 과정에서 자원의 과점세력으로 안착할 수 있었습니다. 개신교는 군소종교일 때도 그랬지만, 자원 과점세력이 된 이후에 더욱 강력한 사회형성의 행위자(social construction agents)가 될 수 있었습니다.(1)
그런 점에서 2010년대 중반 이후 한국사회를 풍미하고 있는 가장 강력한 사회정치적 이슈의 하나인 ‘적폐청산’ 담론이 개신교를 주요 과녁으로 삼고 있는 것은 결코 과장되거나 오인된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한국개신교는 자신의 과오에 대해 통렬히 사과하거나 자기성찰하려는 노력을 너무나 게을리 했습니다. 그렇기에 이런 포럼은, 비록 한국개신교 내의 작은 몸짓에 지나지 않지만, 너무나 필요한 일이며 또 도처에서 계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공적 기억과 사적 기억의 문제들에서 사과과 청산의 정치학을 논할 수 있을까
내가 이 포럼의 문을 여는 강연을 요청받은 뒤에 계속 생각해왔던 것은 ‘기억의 역사화’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선택적인 기억과 망각’을 통한 공적 역사(public History)가 우리의 모든 역사적 행위와 상상력을 주도해 왔습니다. 해서 권위주의 시대의 ‘공적 역사’에 대해 민주화 시대의 ‘역사 수정주의’(historical revisionism)의 도전이 강력히 제기되었고, 후자가 공적 역사의 지위를 얻어갈 무렵 이른바 뉴라이트 역사주의자들에 의해 ‘반수정주의’(anti-revisionism) 역사론이 제기되면서 역사적 서사의 헤게모니를 장악하여 공적 역사를 재구축하려는 운동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나는 역사 수정주의적 진영에 공감하면서 개신교의 역사적 책임에 대해 논의를 펴왔지만, 동시에 공적 역사만을 역사적 행위와 상상력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해온 (국가 중심적 역사론) 관행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요컨대 공적 역사가 어떻게 형성되든 그 역사는 ‘다른 무엇을 망각하는 방식’으로 서사를 만들어낼 것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해서 이 망각된 다른 무엇은 역사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런 것을 흔히 공적 역사에 대립하는 ‘사적 역사들’(private histories)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아예 ‘공적’, ‘사적’이라는 용어도 제거한 ‘대문자 역사’(Historie) 대 ‘소문자 이야기들’(geschichten)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공적 역사는 사료를 통해 구성됩니다. 가령 제주4.3사건의 희생자가 몇명인지 이야기할 때 ‘공적 역사’ 영역에서는 사료에 의거해서 두 가지 설이 제기되었습니다.(14,822명과 2만5천에서 3만 명) 이것은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희생자(피해자) 명예회복과 보상 논의와 직결됩니다. 반면 ‘사적 역사들’은 그런 공적 역사에 의해 가려진 이야기들을 발견하려 합니다. 이 논의에는 ‘기억’(memories)이 사료로서 새롭게 주목됩니다. ‘기억’이라는 것에 대해 이제까지 역사학은 사료로 사용하는 걸 주저했거나 사용할 때조차도 다른 사료들과 크로스체킹 과정을 거치고서야 참고할 수 있는 사료로 취급되었습니다. 기억이 원초적 기억을 고스란히 담기보다는 이후의 요소들과 결합되면서 변용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입니다. 한데 사적 역사는 기억을 역사적 사료로서 활용하려는 데 훨씬 적극적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구성된 역사를 ‘기억의 역사화’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논할 것이 있습니다. 기억 중에서 가장 불안전한, 즉 사건의 원초성 자체가 거의 확인 불가능한 기억이 있습니다. 한데 이런 기억은 폭력적 체험이 가장 극적으로 남겨놓은 파손된 존재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트라우마’가 바로 그것입니다. 수많은 기억들은 정신 속에서 이미 어느 정도 언어적 요소를 갖추고 있지만, 병증이 되어 심하게 뒤틀린 기억인 트라우마는 아예 언어적 형식조차 유실된 채 정신 속에 잔류하고 있다가 예상되지 않는 상황에서 몸으로 표출되어 나타납니다. 그것이 역사가 될 수 있을까요? 트라우마를 다루는 대표적 역사학자인 도미니크 라카프라는 자신의 역사학이 추구하는 것이 ‘치유의 역사학’임을 주장합니다. 진상규명도, 책임자처벌도, 보상도 명예회복도 아닌, 치유가 목적인 역사입니다.
나는 바로 이 트라우마와 치유의 역사의 논점을 강조하고자 했습니다. 속죄든 청산이든, 이 과제를 공적 역사의 논의에서만 다루면 그것이 트라우마로 시달리는 이들의 고통과는 무관한 것이 될 수 있겠기에 그 문제를 이 심포지엄의 기조강연에서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승만, 역사전쟁의 키워드
지난주 수요일까지 나는 이런 생각에 골똘히 빠져 있었습니다. 한데 그 이튿날 새벽 이제까지의 모든 논의를 다 지워버렸습니다. ‘역사전쟁’에 초점을 두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해서 그날 새벽부터 나는 글을 새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윤석렬 정부가 출범한 지 2년 남짓 지나면서 이 정부가 뉴라이트 역사주의자들의 얘기로 역사전쟁을 도발한 일은 수없이 많았습니다. 한데 전혀 새로울 것 없는 최근의 인사청문회를 보면서 새삼스레 마음이 불끈해졌다고 말하려니 나의 안이함에 스스로 부끄러워집니다. 아무튼 나는 다시 역사적 서술의 헤게모니를 두고 벌어지는 역사전쟁 속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낡은, 권위주의적 역사학이나 뉴라이트 역사학은 한국정부와 한국개신교가 자행해온 역사적 과오를 은폐하고 있고, 그것을 들추어내는 일의 필요성을 강변하는 것이 새로 쓴 나의 글의 요체입니다.
최근 역사전쟁의 화두는 ‘이승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인물에 대해 아무런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나만의 독특한 감정만은 아닙니다. 2012년 이후 국내의 여러 미디어들은 매년 전・현직 대통령에 대한 호감도 조사를 해왔는데, 모든 조사들을 간략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전・현직 대통령들의 호감도는 크게 네 부류로 나뉩니다. 첫 번째 부류는 노무현과 박정희인데, 이 두 인물은 가장 압도적 다수의 사람들에게 호감도 높은 인물로 평가되었습니다. 이 두 인물은 조사 시기나 기관에 따라 엎치락뒤치락 하면서 순위가 바뀌곤 했지만, 다른 후보들과는 오차범위를 훨씬 상회하는 수준으로 거리를 두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김대중인데, 그이는 대체로 3위를 고수했습니다. 이명박과 박근혜가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잠깐 순위가 바뀌기도 했지만 거의 언제나 김대중은 확고한 3위를 고수하고 있습니다. (문재인은 노무현 박정희에 필적할 만큼 높은 호감도를 나타내기도 했지만, 퇴임 이후 지속적으로 추락 중이어서 분석은 좀더 시간이 흐른 뒤에 가능할 것 같습니다.) 세 번째 부류는 박근혜인데 집권 초기를 제외하고는 김대중을 앞선 적은 없지만, 탄핵의 시기에도 최하위권 후보들보다는 높은 지지를 받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은 이명박, 전두환, 노태우, 그리고 이승만인데, 이들은 거의 모든 조사에서 한결같이 최하위권을 형성하고 있는데, 그 호감도의 수준이 1~3%로 모두 오차범위(대부분 ±3.1%) 안에 모여 있습니다.
한데 최근 역사전쟁을 스캐치한 한 미디어는 보수가 추앙하는 이가 박정희에서 이승만으로 이동하는 양상을 보인다고 정리한 바 있습니다.(2) 여러 미디어들이 ‘이승만 재평가론’이라고 명명한 이승만 추앙론은 이렇게 최근 들어 강력한 흐름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이승만 재평가론이 처음 제기된 것은 1995년 《조선일보》에서 였습니다. 그 특집기획을 주도한 허문도에 의하면 ‘이승만의 부활’이 요청되는 때가 도래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시작된 이승만 재평가론이 미디어를 통해, 서적을 통해, 대중강좌와 학술토론회를 통해, 그리고 영화 같은 영상물 등을 통해 꽤 활발하게 회자되었는데, 그런 의미에서 추앙의 대상이 이승만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얘기였을 텐데, ‘그런 부활’이 요청되는 시대에도 시민사회는 2012년부터 현재까지 거의 변함없이 가장 매력 없는 지도자의 하나로 그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어떤 조사에 따르면 청년층과 청소년층 사이에서 이승만은 김일성보다도 더 비호감의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이승만, 누구?
그럼에도 얘기를 다시 원점으로 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매력 없는, 역대대통령 가운데 단연 최악이라고 평해도 과언이 아닐 그를 왜 보수파 미디어들과 엘리트 인사들은 추앙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고 있을까요? 이 대목에서 느닷없이 개신교가 호출되고 있다는 점도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승만은 대통령으로서 한국사회를 기독교국가로 만들려는 꿈을 꾸었던 인물입니다. ‘기독교국가론’은 한국개신교의 보수파 사이에서 강조되어온 가장 대표적인 정치신학이라고 할 수 있는데, 두 인물이 이 담론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한경직과 이승만입니다. 둘 다, 하느님의 뜻이 관철되는 국가를 만들자는 것이 근본 취지라는 점에서 일치하고, 이데올로기적 관점에서 극우반공주의와 친미주의가 강력하게 링크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둘은 거의 차이가 없습니다. 하지만 양자 사이에는 차이점도 발견됩니다. 이승만은 친미주의적이면서도 파시즘적 요소가 좀더 강하다는 점에서 한경직과는 다소 차이가 엿보입니다. 해서 그의 파시즘적 집착은 미국 당국자들을 당혹스럽게 했고, 종종 외교적 문제로까지 비화되곤 했습니다. 이에 미국은 최소한 4회 이상의 이승만 제거계획을 기획한 바 있습니다.
이승만의 기독교국가론 속에 함축된 파시즘적 측면은 집권 초기부터 나타납니다. 입법부나 사법부에 대한 장악력이 약한 상황에서, 자신에 대한 충성심이 상대적으로 높았던 군부나 경찰, 행정직 공무원들도 충분히 장악되지 않자 그는 우익계 청년단체들을 민병대로 재편하여, 준군사조직으로 전환시키고자 했습니다. 이때 청년단체의 지도자들 가운데는 아돌프 히틀러의 자서전인 《나의 투쟁》에 심취했던 이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들 청년단체들이 대한청년단으로 통합되고, 그들 가운데서 청년방위대가 조직되며 국민방위군으로 확대개편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나치의 SS친위대(Schutzstaffel)와 이승만의 대한청년당이 어느 정도 유사성을 띄고 있다는 점입니다. 국가의 지원을 받으면서 군대의 규율에서 자유로운 군사조직은, SS부대가 그랬던 것처럼, 세계 각처에서 무자비한 민간인 학살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캄보디아의 폴 포트,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트 등은 정권을 장악하고 유지하는 중에 무수한 인명을 살상한 인물들인데, 그들에 의해 희생당한 이들 중에는 자국민도 수백만 명이나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데 이승만에 의해 학살된 자국민의 숫자도 그에 못지 않습니다. 그런 살상의 가장 중요한 파트너가 바로 민병조직입니다.
그 과정에서 이승만은 군과 경찰, 공무원에 대한 장악력이 확고해지고, 정당도 좌지우지하는 절대권력을 갖게 됩니다. 브루스 커밍스가 이승만을 ‘마키아벨리적 지도자’라고 평했는데, 이는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통치자의 모습을 비판적으로 평가한 결과입니다. 특히 그는 국가가 창건되는 최초 헌법에 의해 추대된 대통령임에도 그 추대문서에 서명한 잉크도 마르기 전에 법의 효력을 정지시키는 계엄을 포고한 인물입니다. 나아가 법의 효력을 정지시키는 예외적 상태(state of exception)의 공간으로 가장 원초적 폭력성(originary violence)의 존재인 민병대(militia)를 파견합니다. 요컨대 저 치명적 학살사태는 바로 이승만이 만들어 놓은 ‘예고된 폭력’에 다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수록 그에게는 전체주의적 권력의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여기서 특별히 언급할 것은 서북청년단과 서청특수부대입니다. 그들의 만행은 사실 어느 정도 과장되어 있습니다. 이승만을 추종하는 청년조직의 범죄 모두를 사람들은 서북청년단이 저지른 것으로 오인하고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서북청년단의 존재를 과소평가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이들의 충성스런 폭력성은 이승만이 개신교에 베풀어준 지나친 특혜의 필요조건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승만 정권 당시 개신교는 그 특혜에 비해 그다지 큰 성장을 이룩하지 못하였습니다. 본격적인 성장은 1970~90년 사이에 일어납니다. 무엇보다도 그 성공은 조용기 같은 한국적 부흥사들과 빌리 그레이엄 같은 아메리칸 스타일의 부흥사들이 중요한 감정의 기폭제 역할을 한 결과입니다. 이들은 ‘적과의 영적 전투’라는 전형적 부흥사의 서사를 활용하지만, 그 적과 적이 하수인들을 철저히 파괴하고 괴멸시키는 것이 도처에서 일어나던 ‘이승만의 시대’(1940・50년대)와는 다른, 병이 낫고 궁핍이 극복되고 영혼이 구원받는 축복의 복음, 이른바 ‘생산적 증오’의 복음을 부르짖습니다. 이것은 파괴보다는 생산의 시대인 1970・80년대 대중의 욕망과 뒤엉키면서 가공할 감정동학을 발생시킵니다. 그렇게 ‘기적의 시간’이 휘몰아치는 교회와 산기도원으로 대중이 밀려들어 오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은 풍요로운 개신교에 대한 평판이 그런 성공주의 복음이 말뿐이 아님을 실감하게 하는 데 중요했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개신교의 잘 형성된 사회적 인프라는 성공주의를 뒷받침하기에 충분했다는 것입니다. 한데 교회의 이런 사회적 인프라는 바로 이승만 시대에 정부로부터 받은 온갖 특혜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이가 왜?
그런 이가 도대체 왜 추앙의 대상이 될까요. 어떤 이들이 그런 담론을 만들려고 노력할까요.
일단 그를 지지했던 잔존세력은 자유당의 몰락과 함께 거의 궤멸되었습니다. 파시즘적 청년단체의 지도자 이범석도, 그를 이어서 대한청년단을 준군사조직에서 정치조직으로 전환시켜 신성동지회를 만들고 그것에 기반을 둔 자유당이 탄생하도록 셋팅한 일등공신인 ‘마도로스’ 출신 신성모도, 자유당을 이끌면서 후기 이승만의 신봉자인 이기붕도 사라졌습니다. 이승만의 잔존세력이 활동하던 조직들이 모두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이승만의 망명과 그의 잔존세력이 궤멸되는 과정에서 이승만의 사회적 표상들도 빠르게 철거되었습니다. 이승만 후반기에 전국 곳곳에 세워진 동상들이 해체되고, 관공서에서 그리고 정치적 행사나 스포츠행사가 있는 곳이면 늘 설치되었던 초상화도 사라졌습니다. 교과서에도 이승만에 관한 얘기는 최소한의 정보만을 남겨두고 삭제되었습니다. 한마디로 1960~1990년의 시간은 이승만에 대한 ‘기억처벌’(memory punishment)의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1990년대 중반 《조선일보》가 앞장서고, 2천년대 중반경 개신교 내의 올드라이트 성향의 분파(대한민국사랑회, 건국대통령 이승만 영화제작 추진위원회 인사들 등)가 뛰어들어 이승만 재평가 운동에 열을 올렸습니다. 그 무렵 뉴라이트 계열의 활동가들과 이론가들도 이승만 추앙론에 뛰어들었습니다. 도대체 왜, 어떤 이유가 그를 다시 역사의 무대로 불러내는 이유가 되었을까요?
반공주의는 당연히 이승만 기억하기의 중요한 요소이지만 핵심적인 것은 아닙니다. 왜냐면 그것은 지금까지 박정희만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이승만이 박정희보다 훨씬 강경한 반공주의자임은 분명하지만, 전쟁에서 사실상 패배한 이승만에 비해, 체제경쟁에서 불리한 상황을 절대 유리한 상황으로 역전시킨 박정희는 반공주의의 절대적 화신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경제성장 이미지도 이승만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의 집권기 내내 한국은 세계 최빈국이었고, 성공으로의 도약을 지향하는 어떤 흔적도 찾을 수 없습니다. 민주주의는 더더욱 그와 인연이 없습니다. 비록 그가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일민주의’(一民主義)를 주창하였지만, 시민혁명에 의해 실각한 통치자의 이미지를 전환시킬 어떤 근거도 될 수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일민주의는 자신만의 권력을 위해 불법, 탈법을 서슴치 않고 자행했고 무수한 인명 살상을 벌인 정부의 이념적 근거로 작용했다고 보는 게 적절합니다. 요컨대 그는 민주주의자가 아니라 민주주의 파괴자의 이미지에 훨씬 더 부합합니다.
그럼에도 나는 이승만을 호출해낸 이들의 욕망 몇 가지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첫째로, ‘부성적 권위주의’에 대한 갈망이 이승만을 불러낸 하나의 이유가 될 것 같습니다. 1990년대는 권위의 붕괴가 본격화된 시기였습니다. 그 무렵 소설 《아버지》(김정현, 1996)가 엄청난 신드롬을 일으켰지요. 지치고 무능력한 아버지, 하지만 그의 온기는 따뜻했다고 평가해주는 작가의 위로의 메시지는 권위의 상징인 아버지가 몰락한 시대에 아버지가 있을 자리가 어떤 것일지, 그 단면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민주주의는 그렇게 ‘권위의 아버지를 추방’함으로써 실현되는 제도적 상상력의 시대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권위적 아버지의 복권을 꿈꾸는 이들의 갈망이 이승만을 불러낸 것입니다. 그것은 기억처벌의 대상이 된 이승만에게 남겨진 몇 안 되는 표상의 하나가 ‘국부’(國父)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전도된 역사(reversed history) 만들기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로, ‘종족적 민족주의’(ethnic nationalism)에 대한 갈망이 그를 소환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1987년 형식적 민주주의로의 행로가 시작된 이후 그 제도적 발전은, 절룩거렸고 역진하기도 했지만, 점점 심화되고 있었습니다. 그 하나의 양상은 포용성의 확대로 나타났습니다. 여성이 길에서 담배를 피워도 낙인 찍히지 않는 사회가 되었고, 혼혈인이 공적 활동을 해도 편견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을 수 있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이중국적의 한국인도 많아졌고, 다국적 가족 혹은 이혼가족도 포용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물론 이런 변화를 과장하는 것은 금물입니다. 사회 곳곳에서 성이나 인종주의, 그리고 가족주의적 편견과 차별은 여전히 심각합니다. 그럼에도 제도는 일상보다 앞서서 (형식으로나마) ‘포용’이라는 이름의 집을 건설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세계화는 국경을 포함한 삶의 경계들을 훨씬 융통성 있게 바꾸어 놓고 있습니다. 그런 변화에 맞추어서 민족주의도 다민족성을 포용하는 ‘시민적 민족주의’(civic nationalism)로 변신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 ‘포용’(inclusivism)은 문화적 식민주의라고 할 수 있는 ‘동화’(Assimilation)의 냄새가 풀풀 나는 것이었지만, 대놓고 적대하는 ‘배타’(exclusivism)보다는 훨씬 ‘부드러운 민족주의’(soft nationalism)의 성격을 지니는 것이지요.
한데 이런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들 사이에서 순혈주의적인 ‘종족적 민족주의’가 소리 높게 외쳐지고 있습니다. 일반화시키는 것은 금물이지만, 사회적으로 ‘절망계층’(despair-class)에서 그런 편견의 장벽 쌓기가 더 활발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 이들은 종종적, 성적 순혈주의를 부르짖고, 그런 생각을 일상에서뿐 아니라 정치적으로 제도화하려는 데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종족주의적인 성적 순혈주의를 행동화하는 일은 종종 법적 위반이라는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타인의 인권을 유린하는 자가 되어야 하고, 심지어 국민의 일원이 된 시민에게 배타적 행동을 하는, 기본권을 침탈하는 범죄자가 되는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해서 그런 위험을 완충하는 성적, 종족적 순혈주의를 고취시키는 민족주의 페스티벌이 도처에서 벌어집니다. 가령 스포츠내셔널리즘은 성적이고 종족적인 민족주의를 갈망하는 이들에게 꽤 유용한 대체물이 됩니다. 즐기면서 공격적 욕망을 실현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성적, 종족적 순혈주의적 민족주의를 갈망하는 이들이 이승만을 호출하는 것은 꽤 이승만에게 부합하는 이미지이긴 하지만 대중적 호소력이라는 관점에선 그리 효과적이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종족적 민족주의자들을 흡수하는 문화적 페스티벌이 그들의 욕구를 정치화하는 행보에 훼방을 놓고 있고, 성적 민족주의는 점점 금단의 열매처럼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규범으로 그들을 압박하고 있습니다.
셋째, ‘공격적 반공주의’에 대한 갈망은 이승만과 꽤 잘 부합합니다. 이승만 시대에 빨갱이 사냥꾼들은 빨갱이를 색출하는 자라기보다는 빨갱이를 발명하는 자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다짜고짜 ‘네 죄를 알렸다’라고 호령하고 온갖 고문을 가하면 실토하고 마는 그런 빨갱이 발명 말입니다. 마치 서양의 ‘마녀 사냥’처럼 빨갱이 사냥은 색출의 명분으로 타자를 낙인찍고 공격하는 것에서 짜릿한 집단적 가학성의 쾌감에 중독되곤 합니다.
문제는 민주주의가 발전할수록 빨갱이 사냥의 권리는 공권력에 독점되기 마련입니다. 또 공권력은 매우 엄중한 감시 아래서 사냥을 수행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빨갱이 사냥의 쾌감은 반감됩니다. 해서, 여전히 충분하지는 않지만,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적’의 색출과 처벌은 신중해야만 하는 사회가 되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적 변화에 불만을 갖는 이들에게 이승만처럼 ‘적’에 대한 거침없는 공격성을 분출시켰던 지도자는 너무나 매력적으로 느껴졌을 것입니다. 물론, 말했던 것처럼, 개개인은 그런 권한이 없습니다. 한데 개개인이 그것을 할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집단적이고 익명적인 공격이 가능한 장소가 존재한다면, ‘적’을 색출하고 낙인찍고 테러를 가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그런 점에서 극우주의자에게 온라인공간은 꽤나 안성맞춤의 장소입니다. 아직 국가기구가 영토 전반에 대한 통제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고 있던 상황에서 이승만은 고립된 특정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민병대로 하여금 공격성을 발휘하도록 했습니다. 그럼으로써 그는 전제적 권력을 쟁취해낼 수 있었고, 공격적 행동주의자들은 생존의 기회와 복수의 만족감을 동시에 누릴 수 있었습니다. 한데 최근 우리사회에서 온라인공간은 과거의 계엄령 하의 공간과 비슷한 조건을 만들어냈습니다. 법의 효력이 정치 혹은 반감되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말입니다. 하여 오늘날 많은 극우주의자들이 온라인공간에서 활개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경우도 레거시미디어나 뉴미디어의 많은 담론들이 극단주의적 가학성에 대해 강력한 압박을 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점점 그런 상생의 담론은 약화되고, 적대의 담론이 더 활발히 소비되고 있습니다. 바로 그런 곳에 포퓰리스트 정치가들이 있습니다. 이승만은 그런 포퓰리스트 정치가들에게 대단히 매력적인 표상입니다.
이상의 세 가지 이유가 이승만 추앙의 담론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했듯이 극우주의의 약진은 이런 이승만 추앙담론이 맹위를 떨칠 기회가 되고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나는 개신교의 죄책고백과 행동에 관한 논의를 결론 삼아 이야기하려 합니다.
개신교, 어떻게 사과할까
우선 여기서 짚어두려 하는 두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는 최근, 개신교 교회는 전체적으로 크게 위축되고 있지만 그 와중에도 성공을 구가하는 교회들이 있다는 점입니다. 대략 1990년대 후반, 그러니까 외환위기로 그때까지의 한국적 근대성의 장치들이 뿌리부터 흔들리던 격동의 시간, 그리고 그 자리에 신자유주의가 거칠게 침투하기 시작했던 시간이 도래하던 무렵 새롭게 성공가도에 오른 교회들을 나는 ‘후발대형교회’라고 명명한 바 있는데, 그 교회들은 대부분 서울의 강남권과 그곳에 인접한 수도권 지역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 지역들은 이 시기 도시의 발전 과정에서 중상위계층의 집중거주지역이 되었습니다. 또한 이 지역의 거류민들은 평균보다 학력도 높고 상징권력도 더 많이 보유하고 있습니다. 한데 이곳에서 그런 계층의 사람들의 문화공간들이 만들어지면서 이 지역에서 문화적 계급화 현상이 포착되고 있습니다. 그중 가장 주목해야 하는 장소가 바로 후발대형교회입니다. 그런 계층의 사람들 수만 명이 최소한 주 1회 이상, 수십년, 나아가 대를 이어서 함께하는 교회가 탄생한 것입니다. 특히 이들 후발대형교회들 중에는 그런 계층의 문화적 실천이 종교제도 속에 녹아 있는 곳이 많습니다. 나는 그런 후발대형교회들을 웰빙보수주의의 문화공간이라는 관점에서 논해왔습니다. 한국사회의 새로운 문화적 계급의 장소라는 관점에서 말입니다.
두 번째 사실은, 이런 후발대형교회의 성공은 실패한 다른 교회들과 신자들의 절망과 열패감을 더 심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실패의 장소들을 중심으로 소종파로의 이동 현상, 특히 신천지 현상이 강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또한 올드라이트나 뉴라이트 같은 극우주의의 바람이 거세게 불어닥치고 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소종파 현상이나 ‘올드와 뉴’ 라이트 현상이 개신교의 비주류적 담론이라는 것입니다.
요컨대 개신교에서 웰빙보수주의가 주류적 그리스도교 현상이라면 극우주의는 주변화된 신앙 현상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주변화된 신앙 현상인 극우주의는 개신교의 약한 고리입니다. 즉 개신교에 대해 불쾌감을 갖고 있는 이들에게 극우주의적 개신교 현상은 공격하기 좋은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 웰빙보수주의는 사회 곳곳에서 품격 있는 문화현상처럼 모방되고 공유되곤 합니다. 요컨대 중심부의 웰빙보수주의는 수많은 개신교 교회와 성직자, 그리고 신자들에게 모방 욕구를 불러일으키고 스스로를 규율하게 하는 시선의 권력으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올해 있었던 총선을 상기해보면, 개신교는 극우적 보수도 진보도, 어느 쪽으로도 정치연합을 형성하려는 시도가 그다지 많지 않았고 거의 대부분 실패했습니다. 즉 대체로 개신교는 이번 선거에서는 정치적으로 중립화된 장소였습니다. 그것은 웰빙보수주의가 주도하고 있는 후발대형교회의 시선이기도 합니다. 웰빙‘보수주의’라는 표현에서 시사되듯, 이 교회들은 기본적으로 ‘보수주의’ 성향이 지배적입니다. 하지만 그 보수주의는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 보수라기보다는 풍요의 문화를 향유하고 그것을 신앙과 접맥시키는 것에 집중하고 있는 보수주의인 것입니다.(현실주의적 보수주의 혹은 실용적 보수주의) 한데 이 교회들의 중심 세력 중에는 한국사회의 파워엘리트로 살고 있는 이들이 많습니다. 즉 그들은 신자유주의적 질서의 중심에 가까운 이들입니다. 그들은 세계화의 무한경쟁시스템에서 상대적으로 잘 적응하고 있는 이들이라는 얘깁니다. 그들은 신자유주의적 세계의 성공적인 전사들인데, 그들이 만들어낸 교회는 그들이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는 전쟁터가 아니라, 생존경쟁의 후방지역, 풍요를 향유하고 만끽하는 신앙의 공간이라는 것입니다.
이 논의를 통해 내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웰빙보수주의가 주도하고 있는 개신교의 공간은 정치적으로는 훨씬 모호한 장소가 되었지만, 사회적으로는 권력을 독과점한 자들에게 점유되어 있고 그들의 권력세습의 제도가 작동하고 있는 신귀족주의적 보수주의가 일방향적으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해서 그들만의 신귀족사회 바깥으로 밀려난 이들에게는 절망과 열패감의 사실상의 원인 제공자인 셈입니다.(에마뉴엘 토트식으로 말하면 신자유주의 시대의 ‘귀족적 과두주의’liberal ologarchy)
한데 진입장벽이 높은, 자신들만의 폐쇄공간을 향유하고 있지만, 그런 이들의 교회는 더 많이 기부를 하고 더 호혜적인 언어가 녹아 있는 신앙문화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런 웰빙보수주의적 신자들은 교회에서 ‘당신은 축복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향긋한 복음을 선사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반대편에서는 위악적인 행동에 이끌리는 극단주의자들이 교회 안팎으로 활개치고 있고, 그런 위악적 행동 때문에 사회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나의 가설적 스캐치가 타당성이 있다면, 우리 개신교 신자들이 세상을 향해 죄책을 고백하는 자리는 이런 구조적 체계가 작동하고 있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어떤 방식의 담론을 만들어내야 할까요. 특히 세계의 고통의 피라미드 말단에서 폭력과 절망의 시간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그 절망과 폭력으로 자아가 훼손되고 관계가 치명적으로 산산조각나고 있는 이들에게 어떤 말과 행동으로 사과를 표현해야 할까요. 바로 이런 물음에 답하기 위해 더 깊게 분석하고 생각하며 실천 가능성을 탐구하는 하나의 계기가 바로 이 심포지엄이 되었으면 합니다. □
[후주]
(1) 여기서 행위자를 ‘actors’가 아니라 ‘agents’로 표기한 것을 주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actors가 그 행위에 관여되었는지 아닌지를 묻는 데 초점을 둔 낡은 행위자이론의 문제틀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agents라고 하는 개념은, 의도했든 아니든, 가해자 종교의 성과로 기회를 얻은 측면과 사회에 미친 영향력에 한 요소로 관여되어 있다는 관점을 반영하는 용어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개신교의 죄책고백은 그 사건에 가담한 이들만이 아니라 개신교 신자인 우리 모두가 해야 하는 과제인 것이지요.
(2) 김경훈, 〈이승만 재평가? 그는 정말 반공을 잘했던 걸까―연설집 《이승만 스피치 1948》를 읽어도 풀리지 않는 의문들〉, 《오마이뉴스》(2024.05.28.)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03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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