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평론] 2024년 봄호에 실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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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피의 바울(1)
아나톨리아의 밖으로
바울은 갈라티아 지방의 도시들에서 이스라엘계 회당들을 방문했다. 아직 그리스도운동은 이스라엘 종교권 내에서 일어난 하나의 분파였다. 회당 안에는 이스라엘계 신앙운동들이 무수히 등장했고 때로 치열한 경합을 벌이면서 공존했다. 그리스도파도 그중 하나였다. 특히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서 만개한 이 분파는 여러 예수운동 중 가장 활발했고 가장 견고한 지역 기반을 구축했다. 그리고 바르나바 선교팀의 아나톨리아(소아시아) 선교는 이 분파의 운동이 본격적인 확산을 모색하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바울은 바르나바가 이끄는 선교팀의 일원이었다. 여기에는 예루살렘계 예수파 인사도 동행했다. ‘마가라고 불리는 요한’(이하 마가)이 그런 이였다. 그는 예루살렘의 예수공동체에서 안티오키아로 파견된 베드로의 수행자였다. 안티오키아 교회는 이방인 선교에 적극적인 입장이었지만, 그런 선교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던 예루살렘계의 우려를 고려해서 마가를 이 선교팀에 포함시킨 것이겠다.
바르나바 선교팀은 꽤나 성공적이었다. 한데 이 과정에서 급부상한 인물은 바르나바가 아니라 바울이었다. 바울식 선교가 대중의 큰 반향을 일으켰던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 회당에는 무수한 개종자들이 있었다. 해서 로마제국 내에서 가장 크게 확장된 공동체에 속했다. 이스라엘뿐 아니라 가나안의 여타 지역 출신 이민자 상당수가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 회당에 유입된 결과다. 또한 로마제국의 각 지역과 페르시아 각 지역 출신의 개종자들이 다수 출현한 결과였다. 이러한 갑작스런 팽창 때문에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 회당에 대한 토착세력의 공격이 빈번해졌다. 또 회당사회 내부에서도 개종자에 대한 반대 여론이 비등해졌다. 특히 이방인에 대해 가장 적대적인 유대아 원리주의 운동이 크게 고조되었다.
한때 바울도 유대아 원리주의 운동에 열성적으로 가담한 경력이 있었다. 하지만 그리스도파로 전향한 이후 그는 이방인 선교에 가장 적극적인 사람이 되었다. 〈갈라디아서〉는 그의 이방인 선교가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는 이방인과 노예, 그리고 여자도 구원의 대열에서 차별받거나 배제될 어떤 이유도 없음을 강변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방인’은 하층에 속하는 이방인에 방점이 찍혀 있다. 이런 바울의 메시지에 이방인, 노예, 여성만 열광했던 것이 아니다. 루스드라(Λυστρα. 뤼스트라)(1)의 디모데 같은 회당 내의 민중파 엘리트도 포함되었다.
하지만 바울에 적대하는 이들도 나타났다. 유대아 원리주의 극단파들이 가장 격렬한 바울의 적대자였다. 또 회당사회 안에서 벌어지는 분쟁을 봉합하고자 하는 회당 엘리트들도 바울이 회당공동체의 평화를 깨뜨리는 자라고 생각했다. 이런 상황은 바울의 동료여야 했을 예루살렘계 예수파 선교사들과 안티오키아계 그리스도파 인사들을 난처하게 했다. 특히 예루살렘계 예수파는 바울의 선교를 복음의 심각한 왜곡으로 여겼던 것 같다. 그 상징적 사건이 마가의 선교팀 이탈 사건이다. 그렇게 되자 안티오키아계 인사들도 바울보다는 예루살렘계를 더 의식하게 되었다.
한데 바울이 옹호하는 민중 이방인들은 회당사회에서만 불편한 존재가 아니다. 지역사회 일반도 그들을 혐오의 대상으로 낚인찍고 있었다. 당시 많은 지식인들은 이들을 ‘오클로스’(οχλος)라고 부르면서, 도시 부랑자로서 치안을 어지럽게 하고 때로 나쁜 정치인들과 거래하여 도시의 정치를 난장판으로 만든 자들이라고 비판했다. 흥미롭게도 이 단어는 〈마가복음〉에서 예수 주위에 몰려든 이들을 지칭하는 용어로도 쓰였다. 한데 그 기조는, 규범적 지식인들의 용법과는 달리, 오클로스에게 우호적이다.
한데 바울이 그런 이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그들과 더불어 집회를 열였다. 이것은 당국자들의 눈에는 도시 부랑자를 조직하고 선동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었다. 해서 그는 지역사회 통치자들에게 고소되어 처벌받곤 했다.
사면초가의 상황이다. 그는 가는 곳마다 민중과 민중파의 열광을 한 몸에 받았지만, 동시에 강한 자들의 비판과 공격에 직면했다. 때로는 도시 당국자들에 의해 혹세무민하는 자라는 혐의로 실형에 처해졌다. 그 몇 년 후 바울은 자신이 겪은 고초에 대해 이렇게 넋두리했다.
나야말로 ...... 힘든 일도 더 많이 했고, 감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했고, 매도 훨씬 더 심하게 맞았고, 죽을 뻔한 일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유대아 사람들에게서 40에서 하나 빠지는 매를 맞은 것이 다섯 번입니다. 채찍질을 당한 것이 세 번이고, 돌로 침을 당한 것이 한 번 ...... 있었습니다. 동족들한테서 오는 위험, 다른 민족들한테서 오는 위험 ...... 거짓 형제자매들 가운데서 얻는 위험도 있었습니다. ...... 배고픔과 목마름에 시달렸으며, 굶주린 것도 여러 번입니다. 추위와 헐벗음에 내버려졌습니다. (〈고린도후서〉 11,23~27)
이 서신의 수신자는 코린트의 그리스도파 공동체였지만, 그 속에는 갈라티아 지역에서 겪었던 고초가 생생히 담겨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막 부상하던, 아직 존재감 없는 선교사 바울을 보호하는 이들은 미미했고 그를 적대하는 이들은 강력했다. 갈라티아 지역만이 아니라, 아나톨리아 어디에서도 그의 활동 여건은 너무나 열악했다. 그는 누구보다도 열정적이었지만, 나서서 그를 적극 지원하려 드는 이는 거의 없었다.해서 바울은 낯선 곳으로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미지의 곳으로
〈사도행전〉에 의하면 바울은 멀리 아나톨리아 북서부 끝에 있는 도시 트로아스(Τρωας)로 갔다.(16,6~12) 갈라티아의 이고니움에서 트로아스까지 거리는 640km쯤 된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거리의 두 배나 되는 거리다. 그 먼 곳까지 갔던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당연히 마케도니아로 가려는 것이다.
트로아스에서 배를 타고 사모트라케 섬을 거쳐 네아폴리스로 가는 경로는 아나톨리아에서 마케도니아 속주의 수도인 필리피로 가는 전형적 경로다. 드디어 바울은 목적지에 당도했다.
어떤 연고도 없는 곳이다. 시리아와 아나톨리아에서 공격하는 자들로 들끓긴 했어도, 몸을 부빌 곳은 그래도 회당이었다. 근데 필리피에는 그런 회당이 없다.
며칠을 막막하게 지내다 도시 외곽을 흐르는 지각티스(Zygaktis) 강가 모처에서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모임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사도행전〉은 이 모임을 쉬나고게(συναγωγη)가 아니라 프로슈케(προσευχη)라고 표기한다.(16,13) ‘쉬나고게’는 회당으로 번역되는 헬라어 단어다. 이스라엘계 교포사회가 형성된 곳에 그들의 종족적・종교적 결사체 혹은 그런 이들의 공회당을 가리키는 용어다. 그곳에는 유대아계뿐 아니라, 사마리아계 이민자, 심지어 유대아 남쪽의 이두메아계, 서쪽의 블레셋계, 심지어 페니키아나 트랜스요르단 출신의 이민자들도 무수히 많았다. 그렇게 보면 쉬나고게는 종족적으로 이스라엘계 이민자 결사체라기보다는 가나안 이민자결사체라고 하는 게 더 적절하다. 하지만 종교적 관점에서 보면 가나안의 여러 신들 중 이스라엘계 신인 야훼를 주신으로 모시는 공동체라는 점에서 이스라엘계 공동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만큼 지중해 지역에서는 가나안 출신의 이민자들을 야훼종교 공동체가 과잉대표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한데 모든 곳에 이스라엘계 이민자 결사체가 존재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곳에도 야훼를 숭배하는 이들이 있곤 했다. 그렇게 이민자 사회가 형성되지 않은 곳에서 만들어진 야훼공동체의 모임 혹은 그 장소를 ‘프로슈케’라고 불렀다. 필리피는 프로슈케가 있는 도시였다. 새한글성서는 이를 ‘기도하는 곳’으로 옮겼다.
지각티스 강가의 프르슈케에 몇 명의 여성이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을 〈사도행전〉은 ‘티스 귀네 오노마티 뤼디아’(τις γυνη ονοματι Λυδια)라고 명시하고 있다. 새한글성서는 “이름이 리디아(이하에서는 ‘뤼디아’를 성서표기에 따라 이렇게 쓸 것이다)인 어떤 여자”라고 옮겼다.(16,14) 한데 이어지는 문구에서 그녀는 “두아디라 지역의 자주옷감장사”라고 나온다.(16,14) ‘두아디라’(Θυατειρα, 쒸아테이라)는 아나톨리아 서부 내륙의 도시다. 한데 이 지역, 아나톨리아 서부 일대를 통칭하는 오래된 용어가 바로 ‘리디아’다. 그렇다면 그녀는 리디아 출신인데 이름도 리디아라는 얘기다. 아무리 봐도 어색하다.
안병무 선생은 자신의 어머니 이야기를 다룬 책 제목을 《선천댁》이라고 지었다. 그의 어머니는 평안북도 선천 출신으로 평안남도 안주의 한의사인 남편집으로 시집왔던 분이다. 해서 사람들은 그녀를 ‘선천댁’이라고 불렀다. ‘리디아’도 그런 용법으로 쓰인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 문구는 ‘리디아댁이라고 불리는 어떤 여자’라고 옮기는 게 자연스럽다. 여기서는 그녀를 ‘리디아 여자’라고 부르고자 한다.
그녀는 ‘리디아의 두아디라’ 출신이지만 그곳을 떠나 필리피로 와서 자주옷감장사를 하는 여성이다. 그녀가 지각티스 강가의 프로슈케에서 바울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자기 집에 머물러 달라고 부탁했다.(16,15) 이것은 그녀가 가족과 함께 필리피에 살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한 가지 더, 그녀는 ‘자주옷감장사를 하는 여성’(πορφυροπωλις. 포르퓌로폴리스)이다. 자주색 옷은 황제의 복장을 상징한다. 물론 황제만 이런 옷을 입은 것은 아니다. 자신의 고귀한 신분을 과시하려는 이들이 입고 싶어 하는 명품옷이었다. 실제로 〈루가복음〉은 세관장인 나사로를 묘사하면서 그가 ‘자주색 옷을 입고 사치스럽게 지냈다’고 말한다.(16,19) 한데 이 옷감은 소라고둥을 소금에 절여서 추출한 염료로 실이나 옷감에 색을 입히고 장시간 동안 햇볕에 말리는 작업을 수차례 반복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염료 1.4g을 채취하는 데 소라고둥 1만2천 마리가 필요하다고 한다. 또 제작 공정도 복잡하고 길게 걸린다. 그러니 이 옷감의 가격은 천정부지였을 것이다. 그것을 판매하는 업체의 CEO가 바로 그 ‘리디아 여자’다. 그리고 그런 옷감으로 유명한 곳이 두아디라였다. 그러니 그녀는 고향인 두아디아에서 명품옷을 공급받아서 필리피에서 장사하는 고위급 상인인 셈이다.
그녀는 굉장한 부유층이었고, 그녀의 인맥 또한 최상위급의 귀족층이었을 것이다. 바울은 어떤 연고도 없는 곳에 와서 막막해하던 중에 이런 이를 만났다. 바울은 이제 남부럽지 않은 든든한 인맥이 생겼다.
그녀 덕분에
루디아 여자로 인해 바울은 많은 것을 해결할 수 있었다. 묵을 집도 생겼고 생계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부유한 상인인 그녀는 바울 일행을 위해 아낌없이 조력했다. 특히 그녀의 인적 네트워크 덕에 다른 데서는 좀처럼 만날 수 없었던 유력인사들도 후견인으로 삼게 되었던 것 같다.
모든 성도들에게 ...... 특히 카이사르 집에 딸린 사람들이 안부를 전합니다.(〈빌립보서〉 4,22)
카이사르는 기원전 49년부터 로마의 종신 독재관이 되었던 인물이다. 독재관이던 시절 그가 정적을 포섭하는 수단의 하나가 자기 집안의 성씨(family name)인 ‘율리우스’를 부여하는 것이다. 해서 율리우스라는 이름은 로마공화정 말기 이후 제국 전체에 두루 퍼져 있었다. 이런 이유로 이 이름은 카이사르를 정치적으로 지지했던 제국내 각 세력의 통치자이거나 유력인사들의 이름이 되었다. 그밖에도 카이사르의 은혜를 입은 가내노예나 병사들도 있었다. 해방된 가내노예였건 퇴임한 베테랑 병사였건 아니면 지역 통치자였건, 카이사르의 집에 엮인 사람이라고 불리던 이들은 누구든 지역사회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자였다.
그런데 위의 인용한 본문에서 보듯 바울은 ‘카이사르의 집에 딸린 사람들’이 필리피의 성도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고 전한다. 필시 그들은 바울이 필리피에서 활동할 당시 자신의 후원자가 된 인물일 것이다. 한데 〈빌립보서〉에 의하면 그들은 그곳을 떠났고 이 서신을 쓸 당시에는 바울과 같은 지역에 있었다. 어쩌면 바울과 함께 떠났거나 직무상 한 곳에 오래 머물 수 없는 이들이었을 것이다. 후자였다면 바울은 그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그이들의 후원을 받으며 활동을 벌였다는 것이다.
아무튼 루디아 여자 덕에 바울 일행의 활동은 낯선 도시 필리피에서 순조로웠다. 한데 다음 연재글에서 얘기하겠지만 바울은 이 도시에서 얼마 안 되어 급히 도주했다. 그럼에도 이 도시의 그리스도 공동체는 바울과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었고 빠르게 성장하여, 3년쯤 후 바울이 〈빌립보서〉를 쓸 때에는 제법 잘 조직된 공동체 중의 하나였다.(〈빌립보서〉 1,1)(2)
이것은 그가 떠난 이후 이 공동체를 이끈 지도자들의 활약이 빛을 발한 결과였을 것이다. 추측하자면 루디아 여자가 큰 역할을 했다고 보는 게 당연한 것 같다. 왜냐면 바울이 부재한 상황에서 이 공동체를 이끌 만한 다른 지도자가 금새 나왔을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아래 본문에는 그녀의 그림자가 실루엣처럼 어른거리고 있다.
필리피 사람 여러분, ...... 복음이 퍼저나가기 시작할 때 ......, 내가 마케도니아에서 떠날 때에, 나와 사귐을 가지며 주고받는 일에 함께한 교회는 ...... 오직 여러분뿐이었습니다. 테살로니키에 있을 때에도 필요한 것을 나에게 ...... 보내주었습니다. ...... 내가 힘써 찾는 것은 여러분의 ‘회계 장부에’ 써 넣을 열매가 더 많아지는 것입니다. ...... (〈빌립보서〉 4,15~18)
여기서 주목할 표현은 ‘여러분의 회계 장부에’라고 번역된 ‘에이스 로곤 휘몬’(εις λογον ὑμων)이라는 어구다. 직역하면 ‘여러분의 로고스에’다. ‘로고스’란 글자로 된 말을 가리킨다. 대부분의 대중은 글을 읽을 줄 몰랐다. 해서 대중에게 글자는 종종 신성한 것을 의미했다. 해서 〈요한복음〉은 첫 문장을 “처음에 로고스가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로고스가 가장 활발하게 사용된 것은 정치적 조약문이나 상인들의 거래명세서였다. 그렇다면 위의 인용문에서 가장 적절한 번역은 무엇일까. 맥락상 그 함의는 다분히 물질적 후원을 가리킨다. 해서 ‘회계 장부’라는 번역은 지극히 적절하다. 여기서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것은 후원자가 상거래에 익숙한 사람이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리디아 여자야말로 바울에게 지속적으로 후원을 해준, 필리피 교회의 지도자였다고 보는 게 적절해 보인다.
한편 바울은, 아래 인용한 구절들에서 볼 수 있듯이, 마케도니아와 그리스의 다른 곳, 예컨대 테살로니키와 코린트에서는 물질적 후원을 거의 받지 못했다.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가 참아낸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밤낮으로 알을 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누구한테도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요. (〈데살로니가전서〉 2,9)
우리 자신들의 손으로 일하면서 애씁니다. (〈고린도전서〉 4,12)
여기서 그는 자기가 아무런 물질적 도움을 받지 못한 것을 자신의 사역이 갖는 자긍심으로 해석한다. 하지만 위의 필리피의 그리스도교회 신자들에게 말하는 본문에서 시사되는 사실은 그가 자급자족의 선교를 추구한 것이라기보다는 후원받으며 선교할 여건이 안 되는 곳에서는 부득이 뼈저린 노동을 하면서 선교를 했다는 점이다. 다만 그는 그러한 노동을 자신의 선교의 강점처럼 강변하고 있다. 아무튼 이러한 자기 긍정적 해석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러 곳에서 고된 경제적 난관을 헤치며 어렵게 선교활동을 펼쳐야 했다. 바로 이런 난관에서 시시때때로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마다 필리피 교인들의 후원은 그에게 큰 힘이 되었다. 그가 경제적 어려움을 견뎌낼 수 있는 밑거름이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필리피 교우’라는 말속에 암시된 ‘루디아 여자’의 존재는 마케도니아와 그리스에서, 아니 더 나아가 그의 선교 사역 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여기서 집고 넘어갈 것은 든든한 물적 후원자가 있다고 해서 그의 복음의 성격이 달라진 것은 없다는 사실이다.(이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연재글들에서 보다 상세히 이야기할 것이다.) ‘리디아 여자’는 프로슈케에서 빈민과 노예, 여성에게도 아무런 차별이 없다고 복음을 전하는 그의 가르침에 감화를 받았다. 그리고 그에게 자기 집에 묵으면서 그런 가르침을 널리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해서 바울은 얼마 후 갈라티아의 그리스도공동체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그리고 다른 서신들에서 복음의 민중적 특성에 대해서 끊임없이 강변했다. □
[후주]
(1) 루가오니아(Λυκαονια. 뤼카오니아) 지방의 도시로, 갈라티아 영역의 바로 남쪽에 인접해 있다.
(2) 바울이 빌립보에 짧게나마 체류하며 그리스도 공동체를 만들었던 시기는 대략 49~50년 사이의 어느 때로 보인다. 그리고 바울이 〈빌립보서〉를 쓸 때는 코린트에서 구금되어 있던 시기였다. 〈사도행전〉 18,11 이하에 의하면 갈리오가 이 도시를 통치하던 때인 52년 봄에서 53년 봄 사이에 소송에 휘말려 구금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바울이 빌립보에서 처음 선교를 하던 때와 이 서신을 집필한 때 사이에는 거의 3년 정도의 시차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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