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평론] (2024 가을호)에 실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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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소 선교거점이 생기기까지
필리피에서 코린트까지
테살로니키에 이르다
필리피에서 급히 빠져나온 바울 일행은 에그나티아 가도(Via Egnatia)(1)를 따라 무려 160km나 떨어진 도시 테살로니키에까지 다달았다. 그 사이 암피폴리스와 아폴로니아를 지났다. 그 먼 거리를 쉬지 않고 갔을 리는 없을 테니 아마도 이 두 도시에서 하루쯤 묵었을 법하다. 필리피에서 암피폴리스까지, 암피폴리스에서 아폴로니아까지 거리가 각각 53km와 48km이고, 아폴로니아에서 테살로니키는 60km니 하루거리를 꽉 채운 곳에 이 도시들이 있다. 아무튼 바울 일행의 숨 가쁜 행보는 추적자들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그들을 충분히 따돌렸겠다 싶은 곳이 테살로니키였을까. 바울은 이 도시에서 3주간 머물렀다.
테살로니키는 알렉산드로스가 사망한 뒤 마케도니아 본토의 통치자가 된 카산드로스가 그의 아내이자 알렉산드로스의 이복누이인 테살로니키의 이름을 따서 기원전 315년 건립한 도시다. 동서로 이어지는, 저 유명한 에그나티아 가도에 위치한 덕에 이탈리아로 가려는 자 혹은 소아시아로 가려는 자들은 이곳을 거치게 마련이다. 또 북쪽의 다뉴브강 너머의 족속들이 남으로 와서 에게해로 가려면 이 항구도시에서 배를 타게 된다. 그러니 도시로 건립된 헬레니즘 시대에도 테살로니키는 빠르게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로마제국 시대에 오면 이 도시의 위상은 에게해 최고도시의 하나로 발돋음한다. 로마제국이 등장함으로써 이탈리아와 그리스 사이의 아드리아해와 그리스와 소아시아 사이의 에게해에는 한층 긴밀한 정치경제적 네트워크가 작동되었다. 또 유럽 본토를 남북으로 가르는 다뉴브강(도나우강)을 관통하는 교류도 로마제국 시대에 매우 활발해졌다.(2) 그것이 지중해를 거쳐 아프리카와 연결되는 허브항들이 여러 곳 생겨났는데, 그중 대표적인 항구의 하나가 테살로니키였다. 즉 이 도시는 이러한 동서와 남북의 연결망이 교차하는 곳에 있었다.
이것은 이 도시로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유입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도시에는 여러 종족들의 자치조직이 발달하게 된다. 로마는 그런 자치조직을 ‘콜레기아’(collegia)라고 불렀다. 이스라엘계 회당공동체는 로마시대 많은 도시들에서 가장 유력한 자치조직의 하나였다. 물론 테살로니키에도 잘 짜인 이스라엘계 회당이 존재했다. 주지할 것은 회당사회는 이스라엘 사람들로만 구성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가나안 지역의 여러 족속들, 그러니까 남쪽의 시나이 족속들, 북쪽의 페니키아와 시리아 족속들, 그리고 동쪽의 모압, 암몬, 길르앗 족속들도 지중해 지역의 이스라엘계 회당으로 모여들었다. 심지어 비가나안 출신의 사람들도 다수 있었다. 여기서 아이러니한 사실 하나는 가나안 지역에서 이스라엘이 가장 강력한 패권세력이 아닌데도, 로마제국내 디아스포라 회당사회에서 최고신은 야훼였다는 점이다. 더욱이 로마 당국은 이 회당공동체를 ‘유대아인의 공동체’로 이해하고 있었다. 이런 아이러니를 역사적으로 개연성 있게 설명할 여지는 제법 있지만, 여기서 그 지리한 논의는 생략하고, 가나안의 다양한 족속들의 공동체를 결속시키는 중심 논리로 야훼종교가 작동하고 있었다는 점만을 지적하고자 한다.
바울 일행은 테살로니키의 회당사회로 들어가서 3주간 활동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여기서도 그는 많은 이들의 이목을 끌었다. 어디서든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된다는 것은 대단한 능력이다. 한데 그이의 특별한 개인적 자질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건 별로 없다. 반대로 불리한 조건 하나를 알고 있는데, 그는 언변이 많이 부족했다.(〈고린도후서〉 10,10) 그럼에도 그의 주장은, 전달만 잘 된다면, 상당히 매력적이다. 그는 하느님의 복음의 수혜가 누구에게든 차별이 없다고 강변했다. 회당사회의 혈통적, 신분적, 성적인 타자들, 그리고 이스라엘 중심주의를 해체해야 한다는 헬레니스트 혁신파들은 바울의 이런 주장에 눈이 번쩍 뜨였다.(〈사도행전〉 17,4) 바울의 보조동역자들도 바울의 성공적 사역에 중요한 역할을 했음직하다. 실루아노(3)와 디모데는 이 시기 바울의 가장 중요한 동료였는데, 실루아노는 사회 말단으로 떠밀린 이들에 대한 진심 어린 사역자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던 것으로 보이며,(4) 디모데는 엘리트층에게 설득력이 있는 인물로 보인다.(5) 이들의 활동은 분명 바울의 사역을 보완해주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한데 여기서도 영락없이 반대파가 등장했다. 그들의 활동에 관한 〈사도행전〉 17,5~7의 묘사는 흥미롭다. 우선 그의 반대파를 ‘유대아 극렬분자들(ζηλωσαντες, 젤로산테스)’이라고 묘사한다. 바울도 그리스도파로 전향하기 전에 그런 이였다. 주목할 것은 이들 극렬분자들이 바울에 적대하는 방식이다. 바울은 극렬분자였을 때 다마스쿠스의 회당들을 두루 다니면서 그리스도파에 대한 테러행위를 벌였다. 반면 테살로니키의 유대아 극렬파는 저자거리에서 ‘불량배들’(ανδρας τινας πονηρους. 안드라스 티나스 포네루스. some bad characters)을 선동했다. 이들 불량배들은 도시를 휘젓고 다니면서 소란을 피웠는데, 그 이유는 바울과 실루아노를 찾아내 당국에 고소하려는 것이었다. 고소의 내용은 저들이 카이사르에 반하는 활동을 벌이면서 예수라는 다른 왕을 주장하고 다닌다는 것이다.
얼핏 보면 이 묘사는 모순돼 보인다. 불량배들이 도시를 소란스럽게 했다고 하는데, 그들이 한 행동을 보면 오히려 위험분자를 당국에 제소하는 일종의 ‘모범시민’(law abiding citizen) 같지 않은가. 하지만 유대아 극렬분자들에게 선동된 이들의 양태를 표현하는 ‘오클로포이에산테스’(οχλοποιησαντες)라는 단어의 함의를 살피면 그런 의심은 부질없는 것이 된다. 새한글성서는 ‘무리를 지어 (도시를) 소란스럽게 하다’는 뜻으로 번역했다. 영어성서는 대체로 이를 ‘formed a mob’, 즉 ‘폭도가 되다’로 옮겼다. 둘 다 적합한 번역인데, 영어성서가 뉘앙스를 더 잘 살렸다. 이 단어를 분석하면, ‘오클로스 + 포이에오 + 산테스’가 결합된 형태다. 오클로스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무리를 가리킨다. 이민자나 지역사회에서 축출된 자, 현대적 의미로 옮기면 노숙자나 신용불량자, 주민등록말소자, 떠돌이 같은 언더클래스 부류와 비슷하다. ‘포이에오’(ποιεω)는 형태의 변화를 가리키는 동사다. 그리고 ‘산테스’는 과거분사형 어미다. 즉 불량배들이 오클로스처럼 되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이 합성어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것은 ‘오클로스’의 함의다. 고대지중해 사회에서 오클로스는 대체로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헬레니즘 문화권의 엘리트 사이에서 오클로스의 행동을 ‘오클로크라티아’(οχλοκρατια)라는 단어로 묘사하곤 했다. 이는 포퓰리즘 정치가들에게 선동된 대중이 도시의 민주주의를 마비시키면서 인민재판 하듯 특정한 이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가하는 대중정치 현상을 가리킨다. 해서 현대의 나치 현상 같은 대중독재를 지칭하는 데 이 용어가 사용되곤 했다.
그렇다면 〈사도행전〉의 본문에 시사된 테살로니키에서 바울 일행이 겪은 상황은 이렇게 요약될 수 있다. 바울을 적대하는 이들은 이유 모를 분노심을 갖고 있던 대중을 선동했다. 당신들이 고통스러운 건 바로 저자들 때문이라고. 증오심으로 자극된 대중은 저 낯선 예언자들을 처벌하라고 당국에 강짜를 부렸다. 테살로니키처럼 외부에서 유입된 이들이 많은 도시의 부랑자 중에는 이런 집단행동을 벌일 만큼 선동에 취약한, 위험한 이들이 많았다.
그때 바울은 이아손(Ιασων)의 집에서 집회를 주도하고 있었다. ‘이아손’이라는 이름은 아마도 여호수아 같은 이스라엘식 이름을 헬라식으로 표기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은 이 사람이 헬라주의적 성향의 이스라엘계 사람임을 시사한다.(6) 그렇다면 그는 이스라엘계 사람이지만 헬라적 문화에 친화적인 성향을 가진 이일 가능성이 높다. 한데 바울의 집회가 그의 집에서 벌어졌다. 즉 그의 집이 바울공동체의 엘클레시아(교회)의 하나였다. 이는 그가 수십 명 안팎의 사람이 모일 만큼의 공간을 갖춘 집의 소유자였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필시 중상위계층의 이스라엘계 인물이다. 한데 노예나 가난한 이들, 여자, 이방인에게도 복음은 차별이 없다는 바울의 파격적 주장을 받아들이는 혁신파 인사였다.
폭도들이 그의 집에 들이닥쳤다. 바울을 잡으려 한 것이겠다. 중상위계층의 집을 함부로 들쑤셔버릴 만큼 그들의 무뢰함은 거침이 없었다. 하지만 바울일행은 무사히 탈출했다. 허탕 친 폭도는 대신 이아손을 끌고가 당국에 고소했다. 당국은 폭도들의 말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다. 단지 그들의 우악스러움이 신경 쓰였다. 그런데 폭도가 기소한 것은 그런 위험한 언행을 했다는 그 자가 아니라 그가 집회를 열었다는 집의 주인이다. 당국은 폭도의 주장을 별로 믿지 않았는데, 더구나 용의자는 없고 증거도 불충분했다. 게다가 격조 있는 시민에게 실형을 내리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하여 보석금을 받고 방면하는 것으로 사태를 마무리했다.
베뢰아는 데살로니키와는 달랐다
또 다시 급하게 길을 떠났다. 에그나티아 가도를 따라가다 남쪽으로 난 곁길로 빠져 한참 내려가면 베뢰아라는 도시가 나온다. 테살로니키에서 73km 거리이니 하루에 가기엔 좀 멀다. 하지만 도망자의 걸음이니 하루 끝날 즈음, 기진맥진한 몸으로 당도했음직하다. 수많은 곁길 중 하나로 빠져나가 도착한 도시니 어느 정도는 추격자들을 따돌렸을 것 같다.
이 도시에도 이스라엘계 회당이 있었다. 그런데 이곳의 분위기는 테살로니키와 사뭇 달랐다. 이곳 사람들은 ‘고상했고 낯선 예언자의 말을 진지하게 경청’했다.(〈사도행전〉 17,11~12) 당연히 여기도 바울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는 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낯선 유랑예언자라는 사실만으로 배척의 이유가 됐던 테살로니키와는 달리, 혐오주의적인 격한 반응을 하는 이는 별로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국제적인 무역도시로 빠르게 성장하면서 부작용 또한 심각했던 테살로니키와는 달리, 이 도시는 이민자도 많지 않았고 그런 이들을 환대하는 전통이 여전히 견고하게 작동하고 있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사도행전〉 20,4에는 ‘부로의 아들 소바더’(Σωπατρος Πυρρου. 소파트로스 퓌루)라는 이가 베레아 출신자로 바울을 따라나섰다고 한다. 이 사람이 누구였는지 더 이상의 정보를 얻을 수 없는데, 〈로마서〉 16,21에 나오는 소시바더(Σωσιπατρος. 소시파트로스)와 동일인일 가능성이 있다. 그것은 이 구절에서 바울이 그를 이아손과 함께 자신의 ‘친척들’이라고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아손은, 말했듯이, 테살로니키에서 바울의 추종자가 된 인물이다. 테살로니키에서 급히 떠나서 간 곳이 베뢰아이니, 〈로마서〉의 소시바더가 베뢰아의 소바더와 동일인이라면, 둘은 한 쌍으로 거론하기에 적합하다. 실제로 바울은 이 둘을 자신의 ‘친척들’이라고 표현했다. 친척들이라는 표현은 그들이 혈연상의 연고자라는 뜻이라기보다는 친밀한 관계임을 강조하는 표현일 것이다.
여기서도 바울의 사역에 동조하는 이들이 생겼다. 하지만 이곳도 자신의 선교사역의 거점으로 삼을 상황은 아니었다. 따돌렸다고 생각했던 테살로니키의 추격자들이 여기까지 따라온 것이다. 바울은 다시 도시를 빠져나갔다. 한데 테살로니키에서처럼 경황없는 도주는 아니었다. 측근 인사들인 실루아노와 디모데를 남겨두었다. 그들은 이 도시뿐 아니라 마케도니아의 다른 지역들을 두루 살피다 나중에 바울과 합류한다.
바울은 마테도니아를 떠나 멀리 남쪽 아카이아 지역의 아테네로 갔다. 그리고 다시 이웃도시 코린트로 갔다. 베뢰아에서 아테네까지는 무려 227km나 된다. 아테네와 코린트는 96km다. 코린트는 테살로니키처럼 빠르게 발전한 무역도시로 무수히 많은 이민자들이 유입되어 들어온 도시다. 복음의 수혜는 타자들에게도 아무런 차별이 없이 베풀어지는 신의 선물이라는 바울식 메시지에 적합한 곳이다. 바울은 이곳에서 1년 반을 체류했다. 적잖은 추종자들이 생겼고 그와 함께 하는 공동체가 견고히 세워졌다. 필시 여기도 바울의 적대자들이 있었겠지만 그럼에도 그의 사역은 그런 이들을 방어할 만큼 성공적이었던 것 같다. (이에 대해선 다음 연재글에서 더 이야기하겠다.) 시리아의 안티오키아를 떠나 자신의 안정된 사역을 펼치는 장소를 찾아 멀리 마케도니아를 거쳐 아카이아까지 왔던 바울은 비로소 사역의 거점이 생겼다.
바울의 첫 서신들, 〈빌립보서〉와 〈데살로니가 전서〉
코린트에서 바울이 활발히 사역을 펼 때 실루아노와 디모데가 합류했다. 그들로부터 마케도니아의 그리스도 공동체가 잘 버텨 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물론 몇 가지 안 좋은 소식도 있었다. 이에 바울은 그 공동체들에게 편지를 썼다. 이 무렵 발송된 편지 중 우리는 두 편을 알고 있다. 〈빌립보서〉와 〈데살로니가전서〉가 그것이다.
이 두 서신은 필리피와 테살로니키, 이 두 도시의 다른 분위기와 각기 어울린다. 필리피에는 이스라엘계 회당이 없다. 그리고 이곳에서 만난 바울의 동료들은 중상류층의 인사들이 주류를 이룬다. 그래선지 바울은 이 교회의 후원에 대하여 여러 차례 감사를 표하고 있다. 반면 테살로니키는 이스라엘계 회당사회가 잘 발달된 곳이다. 한데 도시 전체가 갈등과 분노로 가득했다. 이민자들이 많은 탓에 거류민들의 낯선 떠돌이들에 대한 반감도 극심했다. 그만큼 바울을 지지한 이들 중에는 사회적 약자들이 많았다. 그래서 바울은 어떤 후원도 기대하지 않고 힘겹게 노동하면서 사역을 폈다.(〈데살로니가 전서〉 2,9~10)
〈빌립보서〉의 가장 빛나는 대목인 2,6~11에서 핵심 어구는 ‘자기를 비우셨다’(ἑαυτὸν εκενωσεν. 헤아우톤 에케노센)이다. 반면 〈데살로니가 전서〉에서 가장 큰 주목을 받은 대목은 ‘주님이 다시 올 때 죽임당한 이들이 제일 먼저 부활할 것’임을 시청각적으로 묘사하는 구절이다.(〈데살로니가 전서〉 4,13~18. 특히 4,16) 유대아 극렬주의자들이 선동한 폭도들의 난동 과정에서 죽임당한 이들이 있었다는 것을 시사하는 구절이다. 그럼에도 그 고난의 현실을 잘 감내하는 이들에게 감사와 위로와 축복의 말을 전하고자 쓴 편지인 것이다.
바울은 두 도시에서 그리스도파가 건재하다는 것에 감사하고 있지만, 바울의 코린트 체류 여건도 녹록치 않았다. 〈빌립보서〉를 쓸 당시 바울은 갇혀 있었다.(1,3) 필리피의 그리스도파 공동체가 바울을 돕기 위해 에바브로디도(Epaphroditus. 에파프로디투스)라는 라틴식 이름을 가진 이를 파송했다. 그는 라틴식 법체계에 익숙한 이로, 바울의 법률대리인의 역할을 수행했을 수 있다. 다른 추정도 가능하다. 필리피의 교인들은 바울을 위해 그를 ‘레이투르고스’(λειτουργος)로 보냈다.(2,25) 레이투르고스는 시민이라는 뜻의 ‘라오스’(λαος)와 직무라는 뜻의 ‘에르곤’(εργον)을 합성한 단어로, 일종의 공무원의 직을 수행하는 자를 뜻한다. 그러니까 필리피의 교인들이 자신의 영향력을 발휘하여 에바브로디도를 코린트의 공무원으로 파송하여 바울을 보좌하도록 했다는 얘기다. 당시 공무원의 다수는 엘리트 노예가 담당했다는 점에서 에바브로디도는 엘리트 노예였을 수 있다. 그가 바울을 보좌했고, 바울 이후에는 그리스도운동의 중요한 지도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 누구에게나, 심지어 노예도 아무런 차별이 없이 복음의 수혜자가 될 수 있다는 바울의 메시지로, 이런 신분의 사람도 그리스도운동의 주요인사가 될 수 있었던 한 예를 그에게서 볼 수 있다. □
[후주]
(1) 에그나티아 가도는 발칸반도를 동서로 가르지르는 로마제국의 국도로 기원전 2세기에 건설되었다. 동쪽 끝의 비잔티움에서 서쪽 끝의 뒤라키움(Dyrrachium)까지 이르는 장장 1,120km, 폭 6m의 대로다. 뒤라키움에서 배를 타고 아드리아해를 건너 브린디시(Brindici)로 가서 아피아 가도(Via Appia)를 이용하면 제국의 수도인 로마에 당도하게 된다.
(2) 로마제국은 다뉴브강(도나우강)을 경계로 그 이남 지역에 한정된다. 그 경계에 로마가 쌓아놓은 방벽을 리메스(līmes)라고 하는데, 방벽 자체가 강의 줄기를 따라 북으로 남으로 이동하며 건설, 해체, 재건설을 반복했는데, 리메스 곳곳에 세워진 문은 국경을 넘나드는 공식적인 교류의 관문의 역할을 했다.
(3) 실루아노는 헬라어성서의 실루아노스(Σιλουανος)를 라틴식으로 읽은 것이다. 그것은 실루아노스라는 이름이 라틴식 이름의 느낌을 주는 헬라이름이기 때문이다. 이는 그가 원래 라틴이름을 가진 사람임을 암시한다. 근데 실루아노스의 실제 라틴식 이름은 실바누스(Silvanus)였을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바울은 그를 실루아노스라고 불렀고(〈고린도후서〉 1,19; 〈데살로니가전서〉 1,1), 후대에 그리스도파 공동체들 사이에서도 그렇게 불렀다.(〈데살로니가후서〉 1,1; 〈베드로전서〉 5,12) 그런데 〈사도행전〉은 그를 실라(Σιλας. 실라스)라고, 라틴의 뉘앙스조차 없는 이름으로 바꾸어 쓰고 있다. 우리는 그가 바울의 동료였으니, 바울의 호칭 방식을 따라 표기하려 하는데 한글 성서가 그것을 ‘실루아노’라고 표기하고 있으니, 한글 성서의 표기에 따를 것이다.
(4) 〈베드로전서〉의 저자는 수신자인 파로이코이(παροικοι)와 파레피데모이(παρεπιδημοι)에게(2,11) 신망 높은 실루아노의 명성에 기대어 편지를 쓰고 있다.(5,12) 새한글성서는 ‘파로이코이’를 ‘나그네’로, ‘파레피데모이’를 ‘체류자’로 옮겼는데, 그보다는 두 그룹 다 그 사회의 서민의 범주에서 밀려난 최말단의 민중을 가리키는데, 그 차이가 구체적으로 어떤지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다. 아무튼 실루아노가 1세기 말경 민중사역자로 신망 있는 이로 간주되었음은 분명하다. 그가가 바울과 거의 동년배라고 한다면 1세기 말에 실루아노가 생존했을 가능성은 낮다. 혹은 현장활동을 적극적으로 펴기엔 너무 노령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를 민중사역자로 기억하는 것은 〈베드로전서〉 시대 이전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 점에서 나는 바울 당대에도 그는 민중사역자로 유명하지 않았을까 추정한다
(5) 바울의 친서들인 〈고린도후서〉, 〈데살로니가전서〉, 〈빌립보서〉, 〈빌레몬서〉에서 그는 공동저자로 명시되어 있고, 바울 이후 시대 바울계 공동체의 문서들인 〈데살로니가후서〉와 〈골로새서〉에서도 공동저자로 언급되고 있다. 이는 그가 필력 있는 엘리트의 하나로 유명했음을 시사한다.
(6) 셀류쿠스 제국 식민치하에서 유대아의 대제사장 중에도 이런 이름의 인물이 있는데 그는 강성 헬라주의자였다.(〈마카베오서하권〉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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