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쩌날리즘] (2025 02)에 실린 글.
이 잡지에는 <누가 전광훈을 따르는가 - 전광훈현상과 극우적 상상력의 위험함에 대하여>로 나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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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광훈 현상’과 극우의 상상력, 그 위험함에 대하여
전광훈, 그 현상의 모호함
이상한 일이다. 건국이래 개신교는 한국사회 보수대연합의 핵심세력이었다. 때로는 노골적으로, 때로는 암묵적으로. 한데 윤석렬 정권기엔 놀라울 정도로 역할이 미미하다. 심지어 지난해 3월의 제22대 총선 때는 이렇다 할 지지선언조차 거의 없었다. 물론 곳곳에서 선거연합을 만들어보려는 시도가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실효성 있는 행동으로 조직화하는 데 이르지 못했다.
그런데 시민사회가 보는 개신교는 전혀 그렇지 않다. 여전히 교회는 지나친 정치과잉의 장이다. 그리고 그 상징적 인물로 사람들은 전광훈을 떠올린다. 실제로 전광훈 주위에는 대단히 많은 이들이 함께 하고 있었고, 그들과 더불어 그는 요란스럽게 사회를 뒤흔들고 있었다. 해서 시민사회는 그를 통해 개신교의 정치적 풍경을 읽곤 했다.
그렇지만 여기서 대체로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있다. 전광훈 주위에 운집한 대중, 그들 중 다수를 차지하는 개신교 신자들은 대체로 ‘개별자들’이었다. (초)대형교회 혹은 거대교단 혹은 교회연합기구 차원의 참여는 별로 보이지 않는다. 혹여 아무개가 특정 단체의 대표자격으로 전광훈을, 혹은 전광훈의 노선을 지지하면, 거의 예외 없이 그 단체는 후폭풍에 휘말리곤 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전광훈이라는 존재’는 교회를 거대한 정치연합으로 결속시키는 데 용의하게 작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는 끊임없이 통합과 연대의 상징이 되고자 했지만, 바로 그 자신으로 인해 봉합되어 있던 분열과 갈등이 표면화되곤 했다. 해서 전광훈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을 해독하려면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좀더 복잡한 해석이 필요하다.
극우개신교의 정치적 계보, 한경직과 전광훈
1940~50년대 한국사회는 강한 좌편향 사회에서 극우사회로 급격한 전환을 했다. 이때 개신교는 이러한 전환의 중추 역할을 했다. 여기서 주목할 두 인물이 있다. 이승만과 한경직이다. 이들은 한국개신교 특유의 정치신학적 개념인 ‘기독교국가론’을 대표한다. 기독교국가론은 기독교정신이 관철되는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윤리신학적 논제다. 한데 그들의 기독교정신의 축은 ‘극우’다. ‘극우’라는 신앙적 이데올로기는 1920년대 이후부터 1950년대를 거치면서 형성된 보수개신교 주류집단의 ‘종교적 발명품’이다. 아니 그 발명품의 형성 과정에서 개신교 주류세력이 형성되었다고 하는 게 적절하다. 그런데 이렇게 극우라는 공통된 신앙에도 불구하고, 이 두 인물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도 있다.
이승만의 기독교국가론은 시종일관 공포정치에 의존했다. ‘빨갱이’를 색출하고 응징하여 괴멸시키는 통치행위에 집착하는 것이 이식만식 정치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경직의 신앙도 ‘적’을 향한 맹렬한 분노에 기반을 두고 있다. 하지만 개신교 최고지도자로서 그는 수많은 학교, 언론사, 출판사, 병원, 양로원, 고아원 등을 세웠다. 즉 그에게서 증오라는 신앙은 적을 향한 가혹한 응징으로만 표출된 것이 아니라, 적을 압도하는 이데올로기적 합리성과 돌봄의 장치를 구축하는 것으로도 나타났다. 한편으로는 독한 잔인함이, 다른 한편으로는 따뜻한 관용이 뒤섞인 것이 그의 극우적 기독교국가론이었다. 해서 그의 극우적 신앙에 많은 대중은 공감과 지지를 표했다.
이후 오랫동안 한국의 수많은 개신교 신자들은 극우적 보수주의 신앙에 깊게 물들어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한국개신교 신앙적 밈(meme, 문화적 유전자)’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한경직의 막대한 영향력이 중요한 이유의 하나임을 의심의 여지없다.
같은 시기 한국사회도 보수주의적 헤게모니가 강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대중은 국가로부터 보수대연합의 일원으로 부름받았고, 그 물음에 응답하는 대중은 ‘국민’이 되었다. 이 시기 한국은 이러한 ‘국민만들기’ 장치가 비교적 잘 작동하는 사회가 된 것이다. 한데 한경직의 기독교국가론에 따르면 신자들은 하느님으로부터 ‘극우의 사도’가 되라는 소명을 받으며, 이에 응답한 이들은 ‘성도’(saints)가 된다. 당연히 ‘성도’들은 ‘국민’의 일원이 된다. 아니 그들은 보수대연합을 극우적 연대로 추동하는 국민이다.
1980년대가 되었다. 민주주의를 향한 거대한 파도가 물결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시간이 더 흘러, 2천년대 어간에 이르면 세계화라는 격랑이 휘몰아쳤다. 이 두 변화의 물결은 오랫동안 사회를 지탱해온 이데올로기적 보수주의의 헤게모니에 심대한 균열을 내버렸다. 그 와중에 보수적 국민/성도들 중에 ‘증오’ 대신 ‘상생’을 강조하는 이들이 대거 등장했고, 또 치열한 생존경쟁을 돌파하기 위해 완고한 원리보다는 자기계발적 쇄신을 추구하는 이들도 무수히 생겨났다.
바야흐로 보수대연합의 압도적 헤게모니가 작동하는 시대는 종말을 고했다. 이제 사회는 세 개의 범주로 나뉘었다. ‘상생적 보수주의+진보’, ‘전통적 보수주의’, ‘자기계발적 쇄신파 보수주의’로. 이 세 범주의 변두리는 이른바 ‘중도’의 영역이 되었다. 하여 어느 범주의 권력연합이 중도의 영역을 포용할 있는지가 따라 정권의 색깔이 바뀌곤 했다.
한데 이러한 변화에 전통적 보수주의자들은 잘 적응하지 못했다. 특히 극우 편향의 보수주의자들의 위기의식은 가장 심각했다. 개신교가 대표적이다. 1989년 한국기독교총연합(한기총)의 탄생은 이런 위기의식의 발로였다. 하지만 그후 한참동안 한기총의 존재감은 미미했다. 그러다 2003년 참여정부가 집권하자마자 산산이 무너지고 있던 보수주의가 갑자기 부활한다. 그해 열린 3.1절 구국집회가 그 계기가 되었다. 한데 이 집회를 주도한 것이 바로 한기총이다.
전광훈이라는 인물이 극우 신앙의 계보에서 부상하기 시작한 직접적 계기는 바로 이때였다. 그 이전, 그러니까 1997년 외환위기로 많은 중소형교회들이 생존의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전광훈은 이른바 ‘재테크신앙’의 전도사로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한데 3.1절 구국집회에서 그는 ‘극우의 전사’로 재탄생했다. 하지만 그의 활약을 개신교 주류세력은 평가절하했다.
한기총의 위상이 급격하게 꺾이던 2010년대 중반에 와서야 그의 존재감은 격상하기 시작했다. 한기총의 몰락은 직접적으로는 부패와 부도덕으로 인한 것이지만, 구조적으로는 주류세력의 사회적 변화가 일으킨 의도하지 않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른바 ‘강남권’의 대칭적 발전으로 자산능력과 학력이 높고 더 많은 상징자본을 가진 계층이 이 지역에 밀집되어 살게 되었다.
그리고 이 지역에서 크게 성장한 교회들이 속출했다. 반면 다른 지역에는 성장이 거의 정체되거나 역성장을 했다. 이것은 교회가 사회적 변화의 축소판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사회를 이끌어가던 극우 중심의 보수대연합에 균열이 발생한 것처럼 교회도 보수주의적 통합의 기조가 현저히 약화되었다. 많은 개신교 신자들과 목회자들은 한기총의 깃발 아래 결속하는 것에 반발심을 갖게 되었다. 이 무렵 다른 교회연합체들이 대두하였는데, 이들 신흥 단체들은 한기총에 비해 극우적 정치에 집착하는 행위가 현저히 줄었다. 이는 교회연합체만의 현상이 아니었다. 개체 교회들도 극우적 색깔이 약해졌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도 전광훈은 한기총 활동에 적극 나섰고, 그 결과 2019년에는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이때는 교단이나 교회의 기부금이 크게 줄어든 탓에 활동력이 매우 약화되었다. 그럼에도 전광훈 개인은 드디어 교계 지도자의 반열에 서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몰락하는 한기총의 위상을 되살리는 계기가 될 수는 없었다.
그때 사회에는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을 둘러싼 갈등이 고조되고 있었다. 한기총이 무력해졌던 것처럼, 이데올로기적 보수파는 박근혜의 탄핵과 함께 몰락의 위기에 놓였다. 하지만 도심 곳곳에서 이에 반대하는 극우파 사람들의 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사회는 이것을 ‘태극기집회’라고 불렀다. 수십에서 백여명 정도의 소규모 집회였지만, 수십차례 계속되는 과정에서 점점 규모가 부풀고 있었다. 이때 전광훈이 급부상한다. 많은 극우보수주의적 엘리트들이 전광훈 띄우기에 열을 올렸고, 수많은 대중도 전광훈을 보수의 상징으로 떠받들게 되었다. 전광훈 자신은 자기에게 쏠리기 시작한 대중적 환호를 증폭시키는 데 놀라운 능력을 발휘했다. 바야흐로 그는 극우보수의 상징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한경직의 계보를 잇는 이들 중 가장 큰 주목을 받는 주역이 되었다.
극우정치의 상징이 되다. 하지만 그것은 고립된 섬이었다
2천년대는 세계화가 절정에 이른 시기였다. 하지만 2010년대에 오면 세계화의 부정적 효과가 더 두드러지게 되었다. 이에 세계 곳곳에서 ‘포스트세계화’를 구상하는 탐구와 운동이 속속 펼쳐졌다. 이때 가장 치명적인 현상은 ‘극우파시즘’의 부활이었다. 이와 함께 극우 활동가들의 공격성이 빠르게 확산되었다. 세계화로 인해 몰락한 자들, 몰락의 불길한 예감에 시달리는 자들, 생존경쟁에 지쳐 심신에 병증이 생긴 이들 등은 이유 모를 분노에 차 있게 되었다. 이때 그들에게 분노할 대상이 지목되면 그들은 그 대상을 향해 집중적인 공격을 가했다. 이때 분노할 대상을 지목하고 그이들이 왜 ‘적’인지에 관한 증오의 서사를 만들어내는 선동꾼이 대중의 공격성 분출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그것은 그들 선동꾼들에겐 정치적 성공의 기회가 된다. 통상 이런 자들을 극우포퓰리스트라고 부르며, 그들이 정권을 장악하여 만들어낸 체제를 ‘극우파시즘체제’라고 부른다. 윤석렬 정부의 탄생은 바로 이 극우포퓰리즘 정치의 산물이었다. 한데 그런 정치가 반대세력의 강력한 저항에 맞닥뜨리게 되자, 윤석렬정권은 친위쿠데타를 도모하였다. 그렇게 해서라도 극우파시즘체제를 구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의아하게도 윤석렬 개인은 극우적 이데올로기로 자신의 경력을 채워나간 이가 아니었다. 그는 공공성을 상실한 이익집단이 되어버린 검참카르텔의 수장이었다. 그런데 그가 집권하면서 극우파시스즘의 화신으로 돌변하게 된다. 여기에는 극우포퓰리즘 선동가들이 만들어놓은 세계에 대한 해석이 한몫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의 담론은 주로 뉴미디어를 통해서 확산된다. 오늘날 모든 매체 가운데 확산속도에서 최고의 매체인 뉴미디어에서 활동하는 이들은 그 속도만큼의 발랄한 담론화 양식을 발전시켰다. 한데 이 매체를 통해 이데올로기적으로 가장 성공한 이들 중 하나가 극우주의자들이다. 증오를 빛의 속도로 신념화하고 행동으로 옮기기에 뉴미디어만큼 적합한 것은 없기 때문이겠다.
물론 증오만이 그런 것은 아니다. 팬덤현상은 누군가를 사랑하고 모방하는 담론현상에 속한다. 그런데 대중스타는 대체로 증오보다는 상생을 뉴미디어를 통해 표현한다. 대중은 이런 대중적 스타를 추앙하면서 ‘사회적 착함’(social goodness)을 실행하는 이들이 되곤 한다. 그밖에도 뉴미디어는 다양한 사회적 효과를 일으킨다. 극우파시즘은 그중 하나일 뿐이다.
아무튼 윤석렬은 그렇게 극우파시스트로 자기를 주체화했다. 한데 뉴미디어의 극우포퓰리즘 선동가들은 넓게 보면 전광훈 현상의 일부에 속한다. 한국사회에서 극우는 다양한 방식으로 활동하고 있는데, 그들 모두를 결속시키는 상징적 키워드는 ‘전광훈이라는 기호’다. 극우주의자들 중에는 전광훈을 존경하지도 추종하지도 않는 이들이 적잖다. 그럼에도 전광훈이라는 상징적 존재가 그들 각각의 활동을 더욱 증폭시켜 더 큰 정치적 효과를 만들어낸다. 그런 점에서 극우는 전광훈으로 인해 잘 결속되었고, 충분히 정치적 사건의 주역이 될 수 있었다.
한데 전광훈이라는 키워드는 극우적 보수연합에 외부자들을 포용하는 데 적합하지 않다. 그는 한경직과는 달리 보편적 얼굴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해석이나 활동, 그리고 애티튜드는 중도를 설득할 수 없다. 그러니까 보수대연합은, 현재로선, 가능하지 않다. 아마도 그것이 가능하려면 집권하기 직전의 윤석렬처럼 ‘권력에 굴하지 않는 검사’ 같은 허구적 이미지로라도 포장되어야 한다. 그런데 전광훈에게는 그런 요소가 거의 없다. 해서 전광훈이라는 상징성이 극우를 결속시키는 장치로 작용하는 한, 극우는 보수대연합을 구현하지 못한다.
하지만 전광훈이 극우의 상징이라는 점은 여전히 위험하다. 그에게는 무수히 많은 분노하는 이들을 폭력적 아노미의 세계로 이끌 만한 자질이 넘치기 때문이다. 해서 오늘 우리는 전광훈 현상을 주시해야 한다. 그리고 분노하는 대중과 전광훈을 디커플링시키기 위해 어떤 것이 필요할지 알아내고자 최선을 다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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