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평론] 2025년 봄호에 실린 글. 연재글 중 '역사의 바울을 찾아서_08'로 쓴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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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린트의 바울(1)
그가 감옥에 수감된 까닭
〈사도행전〉은 바울이 코린트에서 ‘1년 반’을 체류했다고 말한다.(18,11) 바울이 자신의 색깔을 본격화하기 위해 낯선 땅인 마케도니아로 간 이후, 필리피, 테살로니키, 베뢰아, 그리고 아카이아의 아테네, 최소한 네 개의 도시에서 선교활동을 벌였다. 성과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의든 타의든, 그에겐 짧은 시간밖에 허용되지 않았다. 아직 그는 공동체와 밀도 있는 친교를 나누며 하느님나라 사역을 함께 펼쳐나갈 여건을 만들지 못했다. 그러다 방문한 곳이 코린트다.
그는 이곳에서 몇 개의 에클레시아(교회)를 만들었다. 또 유능한 동지 여러 명을 얻었다. 위에서 보았듯이 체류기간도 1년 반이나 되었다. 다른 도시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긴 시간이 그에게 주어진 것이다. 또 필리피, 테살로니키 등에서 그가 씨를 뿌린 그리스도의 에클레시아가 건재하다는 소식도 들을 수 있었다. 나아가 이곳을 거점으로 새로운 선교 계획을 세울 수도 있었다.
서기 51년
그때를 〈사도행전〉은 “갈리오가 아카이아 지방 총독으로 있을 때”였다고 말한다.(18,12) 이것이 사실일까, 아니면 이 문서 저자 혹은 그이가 참고한 자료의 가필일까. 확정지을 순 없지만,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 구절을 통해 바울의 연대기를 보다 명확하게 추정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그리고 성서의 다른 정보들과 잘 부합한다. 해서 여기서는 이를 사실로 가정하려 한다.
우선 ‘아카이아 지방’이라고 옮긴 구문을 고대로마의 공식 명칭인 ‘아카이아 속주(provincia)’로 옮기겠다. 로마는 공화정 시대 말기, 지중해 지역과 유럽 그리고 브리타니아(1)를 정복하면서 정복된 지역의 광역의 정치단위를 ‘속주’(프로빈시아)로 지정하여 분할 통치하였다. 그리고 속주에 파견된 최고통치자는 ‘프로콘술’(원로원령) 혹은 ‘레가투스’(황제령)라는 직함을 가진 인사들이었다. 갈리오는 아카이아 속주의 최고통치자를 의미하는 안쒸파토스(ανθυπατος)였다. 이 그리스어는 프로콘술과 레가투스에 해당하는 직함이다. 아카이아는 원로원령 속주다. 그러니까 본문은 “갈리오가 아카이아 속주의 프로콘술로 재직하던 때”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 중요한 비문이 20세기 초에 델피의 아폴론 신전에서 발견되었다. 델피는 코린트와 인접한 오래된 도시다. 이곳엔 대표적인 아폴론 신전이 있었는데, 아카이아 전 도시국가들의 운명이 걸린 일이 있을 때 각 도시 통치자들이 이 신전에 모여서 합의를 이끌어냈다. 그것은 이 신전이, 델피의 수호신을 모시는 곳이라기보다는, 아카이아 동맹의 신학이 발달한 곳임을 뜻한다. 해서 로마제국 시대에도 황제들이 속주에 공문을 보낼 때 수신지를 델피 신전으로 했다. 여기에 이런 문구가 새겨진 비석이 있다. “내 친구이자 (아카이아의) 프로콘술인 율리우스 갈리오가 자신의 직위를 더 유지해 달라고 청원했다.”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보낸 한 공문서의 일부다. 그는 이 청원을 받기로 했다. 해서 아카이아의 통치자들에게 그것을 명하는 서신을 보낸 것이다. 이 황제서신을 보낸 시기는 본문에 의하면 서기 52년 상반기로 추정된다. 프로콘술의 임기는 통상 1년이다. 그렇다면 갈리오는 그 전 해인 51년에 아카이아의 프로콘술로 부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2) 그리고 그는 황제서신으로 인해 임기가 끝난 52년부터 한 해 정도 더 재임했을 것이다.
〈사도행전〉은 갈리오가 주재하는 법정에 기소되어 재판을 받았다고 한다. 고발자들은 “유대아인”들이다. 본문에는 율법을 거스르는 언행 때문에 고발되었다고 하고, 갈리오는 그것이 기소 요건을 충족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반려했다고 한다.(18,13~14) 하지만 바울의 친서인 〈빌립보서〉 1,13에 의하면 그는 이 서신을 쓸 당시 감옥에 갇혀 있었다. 즉 기소가 각하되었다는 것은 〈사도행전〉의 가필이다.
바울이 테살로니키에서 급히 떠날 때 실루아노와 디모데를 남겨두고 마케도니아 지역에서 바울이 선교한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를 돕게 하였는데, 그들이 코린토에 있는 바울에게 합류하면서 필리피와 테살로니키의 그리스도 공동체가 건재하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 이에 바울은 이들 공동체 사람들에게 감사와 격려, 그리고 권면의 편지를 보냈다. 〈빌립보서〉와 〈데살로니가전서〉는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한데 〈빌립보서〉를 쓸 당시 바울은 수감 상태였다.(3) 해서, 지난 연재글(2024년 가을호)에서 보았듯이, 필리피의 그리스도파 사람들은 에바브로디도를 보내서 그를 돌보게 했다. 그러니 바울은 갈리오에 의해 석방된 것이 아니라 유죄로 확정되어 수감되었다.
이쯤 되면 이런 추정이 가능하다. 갈리오가 프로콘술로 부임할 무렵 ‘유대아인’들이 바울을 새 통치자에게 고발했다. ‘부임할 때’라고 한 것은 나의 해석이다. 그것은 통상 프로콘술이 막 부임하여 아직 현지 사정에 밝지 않을 때 지역의 민원이 폭증했기 때문이다. 한데 새로 부임한 프로콘술은 이 민원들을 로마의 시선에 의존해서 처리하곤 했다. 그것은 그들이, 부임지 출신이 아닌 탓에 현지 사정에 밝지 않기도 했거니와, 로마 황제나 유력인사를 후견인 삼아 출세한 자이기 때문이다. 새 통치자에게 소를 제기하는 자들도 그것은 잘 알고 있었다. 바울을 고발한 ‘유대아인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 소송에서 바울은 패소하여 구속되었다. 그것은 유대아인들의 기소가 디아스포라 회당 내부의 명분으로만 구성된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 로마의 관점에서도 문제로 여겨질 만한 논리가 가이오에게 더 솔깃하게 들렸을 것이라는 얘기다.
‘유대아인들’의 논지가 뭐였기에 가이오를 설득해냈을까. 이에 대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단서는 〈고린도전서〉와 〈고린도후서〉, 그리고 〈사도행전〉밖에는 없다. 해서 이 성서 텍스트들을 통해 그 사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러면 고발자인 ‘유대아인들’의 정체도 어느 정도 드러날 수 있을지 모른다.
아무튼 바울은 갈리오가 부임할 무렵인 서기 51년, 그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았다. 그렇다면 바울은 그해 혹은 그 전 해에 코린트에 왔을 것이다. ‘1년 반’이라는 체류기간은 ‘소송과 구속의 시간 + 그 직전의 활동의 시간’을 포함하는 기간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이 이 도시로 온 시기는 대략 50년 하반기부터 51년 상반기쯤이었을 것이다.
프리스카와 아퀼라
바울이 코린트에서 만난 사람들 중 프리스카(Πρισκα)와 아퀼라(Ακυλας. 아퀼라스) 부부가 있다.(4) 프리스카가 아내이고 아퀼라는 남편이다. 그들은 성서에서 7회 등장하는데, 모두 나란히 표기되어 있다. 아내가 언급되는 경우는 이례적이다. 그럼에도 아내가 항상 같이 나온다는 것, 더구나 먼저 언급되는 경우는 그녀가 남편 이상으로 중요한 인사임을 시사한다. 게다가 아퀼라는 이스라엘계인데(5) 프리스카는 비이스라엘계 사람이다.
로마시 근교에서 발견된 ‘프리스킬라 카타콤베’(Catacombe di Priscilla)라는 지하무덤이 있다. 묘지명에서 시사되듯 프리스킬라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 그리스도인의 무덤이다. 프리스킬라는 프리스카의 애칭이다. 그녀는 로마의 최고위층 가문의 여성인데, 그리스도인이 되어 처참하게 순교한 이다. 거의 동시대에 로마 출신의 같은 이름의 여성이 그리스도파 인사라면, 그들은 동일인이거나 가족일 가능성이 크다. 만약 그렇다면 아퀼라의 아내 프리스카는 로마 귀족 가문 출신일 수 있다. 그렇다면 소아시아 북부 변두리 지방 폰토스 출신의 이스라엘계 사람(〈사도행전〉 18,2)인 아퀼라보다 프리스카가 먼저 언급되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그런 경우 공적 활동에서도 아내가 더 주도권을 쥐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 그리스도파 활동가로서도 아내가 더 중심적 역할을 했을 수 있다.
한데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클라우디우스 황제에 의해 로마에서 추방되었다는 사실이다.(〈사도행전〉 18,2) 본문에선 유대아인들이 추방되었다는 얘기만 나오고, 그 내막은 가려져 있다. 제국의 유력인사에게 그리스도 신앙이 양식 있는 이들의 종교운동임을 강변하려 했던 〈사도행전〉 저자는 이 추방사건을 그리스도파와 무관한 것처럼 말하고 있다.
그 사건에 대해 좀더 구체적 정보를 주는 것은 로마의 역사가 수에토니우스가 1세기 말 혹은 2세기 초에 저술한 《황제열전》(De vita Caesarum)의 〈클라우디우스 편〉이다. 서기 49년경 로마에서 ‘크레스투스(Chrestus)의 선동’으로 야기된 소요사태가 벌어졌다. 당시 로마사회에서 크리스투스(Chritus)를 크‘레’스투스(Chretus)로, 크리스티아누스(그리스도인, Christianus)를 크‘레’스티아누스(Chrestianus)로 발음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고 한다.(6) 그렇다면 로마의 그리스도파 사람들이 도성에서 모종의 정치적 선동행위를 벌였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십여 년 전, 그러니까 서기 30년대 초쯤, 팔레스티나에서 그리스도라고 자처했던 예수라는 자가 극단의 정치범에게 가해진 극형법인 십자가형으로 처형되었다. 클라우디우스가 그 사실을 알았을 가능성은 별로 없지만, 로마시의 서편 외곽 지대, 곧 테레베 강 건너편의 ‘트라베스테레’(Travestere)의 이스라엘계 이민자들이 많이 모여사는 지역에서 그리스도를 추종하는 일단의 급진파 인사들이 황제에 거스르는 소요를 주도했을 것이라는 얘기다. 클라우디우스는 사태를 진압한 이후 사태의 전말을 조사했을 것이다. 주모자는 처형되었을 것이고, 징역형을 받거나 석방된 이들도 있었겠다. 그리고 추방된 자들도 있었다. 클라우디우스는 귀족친화적인 보수적 인사로서 강압적 통치를 자제한 편이고, 가혹한 처벌을 남발하지 않았다. 게다가 처벌 대상자가 귀족이라면 처형보다는 추방령이 내려졌을 가능성이 크다. 프리스카가 이 사건과 관련되어 추방된 것이라면 그녀가 귀족 출신일 가능성은 좀더 개성성을 갖는다.
그렇다면 이 부부는 1세기 중반의 그리스도파 가운데 정치적 급진주의 성향의 인사들이었을 것이다. 나중에 〈로마서〉를 다룰 때 더 논하겠지만, 바울을 만났을 당시 그들은 로마의 그리스도계 급진파와 입장을 달리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예수나 바울처럼 반민중적 제국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한데 그것을 구현하는 실천 방식에서 정치적 급진파의 방식에 이견을 갖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지만, 바울을 적대하여 당국에 고발하려는 이들은, 이 부부의 성향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여부와는 상관없이, 로마에서 추방된 저 급진파들과 바울이 가깝게 지낸다는 것을 고발 내용에 용이주도하게 활용하였을 수 있다. 갈리오가 혹할 만큼 말이다.
노동자인 예언자, 선창가의 민중을 만나다
바울을 당국이 위험인물로 보았을 또 다른 이유도 있다. 그것은 그가 코린트의 선창가에세 예언자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바울이 만난 프리스카와 아퀼라는 코린트에서 천막공장을 운영하는 사업가다.(〈사도행전〉 18,3) 햇볕이 강한 지중해 사회에서 해를 가리는 천막의 수요는 제법 많았을 것이다. 프리스카 부부가 경영하는 공장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의 집이 바울의 그리스도 공동체의 집회 장소로 사용되었다는 사실(〈고린도전서〉 18,2)로 보아 그들의 공장 규모도 영세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런데 집회 장소로 쓰였던 집은 성안의 시내에 있었겠지만, 공장은 성밖 선창가에 있었을 것이다. 그곳에서 천막의 수요가 더 많았을 것이고 공장 운영 비용도 절감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고린도전서〉 6,9~11의 하느님나라를 물려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대한 바울이 묘사는 성밖 선창가의 풍경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고대의 도시들이 거의 그렇듯이, 고린트도 성의 안과 밖으로 명확히 구별되어 있었다. 성안은 귀족과 시민, 그들에 딸린 이들, 그리고 신분적으로는 낮을지라도 어느 정도 부를 축적한 이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지켜야 할 자산이 있으므로 ‘성’이라는 안보의 장벽이 필요했다. 반면 바깥은 무수한 이들이 오가는 열린 공간이다. 해서 매우 상업적이면서도 진취적인 곳이다. 가진 건 없지만 무수한 기회가 널려 있는 공간인 것이다.
고린트는 도시의 이런 일반적 풍경의 극한적 양상을 담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 도시의 지리적 특성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그리스 본토와 필로폰네소스 반도를 연결하는 병목지대(bottleneck)에 세워진 도시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상대적으로 잔잔한 바다인 지중해가 하나의 경제・군사・문화적 네트워크 형성의 중심으로 부상하게 된 헬레니즘 시대에 항구도시들의 위상은 격상했다. 특히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소아시아, 그리스를 연결하는 지중해 동부에 큰 항구들이 집중적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헬레니즘 시대 말기 카르타고와 로마가 급부상하면서 지중해는 동서를 잇는 거대한 해양교통망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바로 이때 코린트가 지중해 최대의 전략적 요충지로 부상한다. 코린트는 지중해 동부와 연결되는 에게해로도, 서부와 연결되는 이오니아해로도 항구를 갖는 특이한 도시이기 때문이다.
코린트의 동쪽과 서쪽의 항구 사이의 직선거리는 불과 6km였다. 그러니까 한쪽의 선박에서 하적한 물품을 다른 쪽 항구의 선박으로 선적해서 출항하면 비용과 시간이 크게 절감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둘레가 300km나 되는 필로폰네소스 반도를 따라 돌아가야 했다. 해서 코린트는 지중해 교통망에서 허브 역할을 하는 최고의 도시로 발전할 수 있었다.
해서 코린트의 선창가에는 다른 항구도시들보다 더 많은 유동인구가 있었다. 상인들과 군인들, 순례자들, 방출노예들, 탈병영과 퇴역병들 등, 무수한 이들이 이곳을 거쳐갔다. 그들은 이 도시에서 많은 것을 소비했다. 뱃사람들을 위한 신전들이 대표적이다. 뱃사람들에게 신의 노여움은 가장 무서운 것이었기에 그들은 가는 곳마다 모든 신에게 제를 올렸다. 선술집들도 발달했다. 물론 선술집 근처에는 예외없이 매춘업소들이 성행했다. 그밖에 선박제조와 수리를 전문으로 하는 공장들, 항해에 필요한 물품을 판매하는 업소들, 그리고 프리스카 부부가 운영하는 천막제조공장 등도 이곳에 있었다.
주목할 사실은 이런 성밖의 사람들은 성안 사람들과는 달리 도시의 전통이나 문화, 종교에 대한 경외심이 별로 없었다. 해서 그들이 혹여 정치적으로 결속하여 집단행동을 하게 되면 그 도시들이 구축해온 전통을 무자비하게 파괴하곤 했다. 오래전부터 해양활동을 활발히 펼쳐왔던 고대그리스는 이런 현상을 좀더 일찍 겪었다. 기원전 5세기 초 펠로폰네소스 전쟁기, 즉 아카이아 지역 도시국가들의 해체기에 활동했던 극작가인 에우리피데스 등은 선창가의 민중인 오클로스(οχλος)가 정치 전면에 부상하는 현상을 ‘오클로-크라티아’(οχλοκρατια. 중우정치)라는 멸칭으로 표현하면서, 그 파괴적 위험성을 지적한 바 있다. ‘크라티아’는 ‘권력’이라는 뜻의 ‘크라토스’(κρατος)에서 유래한 것으로, ‘정치’를 함축하는 단어다. 이후 이 단어는 정치인들과 지식인들 사이에서 민중의 혐오스런 정치행위를 경계하는 표현으로 통용되었다.
한데 바울은 프리스카 부부의 천막공장에서 일했다고 한다.(〈사도행전〉 18,3) 바울이 이 공장에서 일꾼으로 일하다가 그들을 만난 것인지 회당에서 만나서 알게 된 이후 그들의 공장에서 일하게 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그들이 바울을 지도자로 추앙했고, 바울도 그들을 매우 신뢰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가 이곳에서 노동자로 계속 일하게 된 것은 그의 자의적 선택일 것이다. 그는 그곳에서 노동자들과 온몸이 땀으로 절여지듯 일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곳 숙소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살았을 것이다.
하여 그곳 선창가의 소란스런 풍경은 그가 매일 맞이하는 일상이었다. 날마다 술해 취해 휘청이는 자들을 보았을 것이고, 여자들 혹은 남자들과 매음하는 모습을 접했을 것이다. 욕설을 내뱉고 싸움을 하며 무자비한 폭력을 가하는 일은 더 이상 낯선 풍경이 아니었다. 그런 곳에서 그는 이들과 뒤얽혀 살았고, 또 그들에게 신의 복음을 전했다. 도시의 아고라에서 철학적 논변을 펴고, 디아스포라 회당에서 신학적 논쟁을 하는 모습은 이 도시에선 더 이상 바울스런 모습이 아니었다. 여기서 그는 본격적인 민중 사역자로서 살아간 것이다. 물론 에클레시아에서 예배 나눔을 할 땐, 목회자이자 신학자의 풍모가 돋보였다. 해서 성안의 많은 인사들도 바울을 따랐다. 하지만 그에게 일상은 오클로스 민중 그 자체였고, 그런 모습으로 민중에게 복음을 전한 것이다.
그런데 과연 이런 민중 사역가의 모습은 성안에 있는 디아스포라 회당의 ‘유대아인’들에겐 어떻게 보였을까. 또 도시의 치안을 담당하는 관료들에게 어떻게 보였을까. 그들의 시각에서 무지렁이 대중인 오클로스를 선동하여 도시의 전통과 질서를 마구 파괴해버린 ‘오클로-크라티아’의 원흉들이 바울에게 오버랩되지 않았을까. 해서 바울이 기소되었을 때, 신임 프로콘술인 갈리오는 그를 위험한 자로 간주하게 되었을 것이다.
다음 연재글에서는 이런 맥락에서 코린트의 바울을, 그의 서신들 속에서 좀 더 살펴보려 한다. □
[주]
(1) 그레이트 브리튼섬에서 북부의 스코틀랜드를 제외한 잉글랜드와 웨일즈 지역이 로마공화정 말기에 정복되었고, 로마는 그곳을 ‘브리타니아 속주’로 지정했다.
(2) 프로콘술로 부임하는 때는 통상 그 해의 상반기다.
(3) 〈데살로니가전서〉는 옥중에서 쓰인 것인지 본문을 통해선 확정지을 수 없다.
(4) 바울의 친서인 〈로마서〉 16,3나 〈고린도전서〉 16,19, 그리고 바울 위서인 〈디모데후서〉 4,19는 프리스카로 표기되어 있는데, 〈사도행전〉은 프리스킬라(Πρισκιλλα)로 나온다.(18,2・18)
(5) 〈사도행전〉 18,1에 의하면 그는 소아시아의 폰토스 출신의 이스라엘계 사람이다.
(6) 정승우, 《로마서의 예수와 바울》, 22쪽 주1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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