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 연속 포럼 - ‘내란 이후’, 저항과 연대의 문화정치 1차 포럼(2025 02 11. 성균관대 국제관 B217) 발표글.
현장 참석자가 150명쯤 되어 보이고, 줌으로 참석한 자가 6백 명에 달했다.
그만큼 관심이 집중된 행사였다. 이 1차 포럼의 구성은 아래와 같다.
21세기 극우주의의 출현
글로벌가치사슬(global value chain)이 전례 없이 조밀하게 구축된 21세기 ‘첫 십여 년’ 동안 자본의 역동성은 비약적으로 증대되었다. 그러나 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에 따르면 ‘21세기 자본주의’는 ‘19세기 자본주의’처럼 ‘세습자본주의’(patrimonial capitalism)적 성격이 강화되고 있는 추세다. 세습된 부의 증가가 생산과 노동을 통한 부의 증가보다 훨씬 크기 때문이다. 즉 21세기에는 점점 더 ‘불평등’이 심화되었다.
그럼에도 이 ‘첫 십여 년’에는 불평등의 위기가 어느 정도 관리되고 있었다. ‘더 많은’ 사람들은 자본의 역동성이 주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고, 자기계발에 열렬히 매진했다. 그러나 ‘2012년, 그 어간’을 분기점으로 불안과 절망이 빠르게 확산되었다. 자기계발 담론의 자리를 힐링 담론이 빠르게 대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좌절과 불안으로 인한 신경증적 증후는 힐링 프로그램으로 충분히 관리되지 못했다. 오히려 이 무렵 혐오범죄의 비율이 급증했다. 또한 혐오를 정치화하는 극우주의 정치세력이 약진하였다.
왜 하필 ‘2012년, 그 어간’인가. 그 무렵에는 ‘난민의 급증’ 현상이 두드러졌다. 특히 아프간, 소말리아, 이라크, 시리아 등에서 발생한 전쟁으로 난민이 엄청나게 증가했다. 이들이 유럽을 향해 밀려들었다. 바로 그 어간 유럽에서는 이슬람계 난민에 대한 혐오주의가 삐르게 확산되었고, 혐오범죄율이 급증했다. 나아가 극우주의 정치도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이 유럽발 혐오주의 현상이 온・오프라인 미디어를 통해 전 세계를 휘젓고 다녔다. 그 어간 미국에서는 ‘(유색인) 이민자 혐오’가 위험수위를 넘었다. 그 해에 일본에선 혐한・혐중의 정서를 부추기며 집권한 아베 신조의 시대가 도래했다. 한국에서도 제19대 총선(2012)에서 새누리당이 국회 과반의석을 차지하여 박근혜 권위주의 체제가 성립하는 전조증상을 보였다. 그 해에 시민사회와 비판적 학계에선 ‘극우주의’를 다루는 논의들이 속속 제기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최근 전 지구적인 극우주의의 발흥과 21세기 자본주의가 초래한 양극화 위기가 깊은 연관성이 있다는 추정을 할 수 있다. 또 당면한 정치・사회・문화적 상황이 극우주의적 혐오의 표현양식을 구체화하는 데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음도 추론할 수 있다.
그러나 계층적 양극화만은 아닌 ...
아르놀트 하우저(Arnold Hauser)는 20세기 전후 ‘짝퉁’ 귀족예술인 통속예술이 새롭게 부상한 매스미디어와 만나 대중예술로 승화되면서 소비자라는 새롭게 주체화된 대중이 탄생했음을 이야기한다. 한데 21세기 세계화는 ‘짝퉁’ 프리미엄(fake premium) 상품을 ‘대중적’ 프리미엄(popular premium) 상품으로 변모시켰다. 그것은 21세기형의 ‘새로운 소비자 대중 주체의 탄생’을 가능하게 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소비자인 대중은 무엇보다도 ‘욕망하는 주체’라는 사실이다. 그이는 거시적으로 글로벌하게 욕망하는 자이고, 미시적으로 신체 구석구석까지, 심지어 무의식까지 욕망하는 자다. 이렇게 욕망하는 존재는 끝없이 ‘고립화’되며 끝없이 ‘연결’되어 있다. 21세기형 대중은 그러했다.
이 대중은 전례 없이 확장되고 세밀해진 ‘욕망의 인플레이션’을 체감하며 산다. 한데 이런 욕망은 결코 충족될 수 없다. 해서 이 새로운 대중은 ‘욕망하는 주체’인 동시에 ‘절망하는 주체’다. 하여 대중은 분열증에 걸려 있다. 끝없이 욕망을 향해 질주하면서도, 실패한 욕망으로 인한 절망을 어떤 식으로든 관리해야 한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그 시대 자본주의적 질서에 편입되어 있으면서도 ‘배회하는 자’로 남아야 하는 분열증적 신경증세의 대중을 발견했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분열증적 대중이 왜 파시즘에 열광했는지를 동시대 정치・사회・문화 현실을 분석하면서 비판적으로 조명하고자 했다.
21세기의 대중도 욕망과 절망 사이에서 분열증을 앓고 있고, 그런 대중의 일부가 극우주의적 행동을 하고 있다. 그들은 민주주의적이고 공화주의적인 합의를 신뢰하지 않으며, 그 배후에 거대한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고 믿는다. 하여 그런 음모론적 진실을 은폐하는 세력과 은폐의 배후에 있는 존재를 향한 망상적 증오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이러한 증오는 종종 물리적인 응징 행위로 이어진다. 때로는 개별적 테러로, 때로는 응징의 제도를 구축하려는 정치적 행동으로 말이다.
그러니까 21세기 대중의 극우주의 현상은 양극화로 인한 경제적 절망계층의 증오행위로 국한하여 설명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욕망을 향해 질주하면서도, 매 순간 좌절된 욕망으로 인한 절망을 체감하는 대중, 그런 분열된 존재의 주체화 과정에서 극우주의에 몰입하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21세기 ‘K-극우’, 20세기와는 같거나 다른
한국사회에서 극우주의는 대한민국 건국의 한 주역이었다. 그러한 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던 세력은 혐오와 응징의 정치를 구사했다. 한데 독재에 반대하는 민의 저항으로 극우주의적 정권은 역사의 무대에서 퇴출되었다. 하지만 실현되지 못한 체제에 대한 극우적 열망은 ‘1948년체제’라는 이름의 이데올로기적 개념으로 잔존하고 있다.
적잖은 이들은 현재까지도 이 이데올로기적 개념을 중심으로 보수대연합을 구축하려는 열망을 품고 있다. 특히 개신교 다수파 사이에서는 그런 열망이 하나의 문화적 유전자처럼 신앙 속에 강한 기조로 잔류하고 있다. 하지만 1970~80년대 성장지상주의가 물결칠 때는 증오에 기반을 둔 극우주의 신앙보다는 축복에 기반을 둔 은사주의 신앙의 강세가 돋보였고, 1990년대 민주화의 열망이 물결칠 때는 화해와 공존의 담론이 확산되면서 증오의 정치는 퇴물로 간주되었다. 그런 시대정신이 한창이던 1989년 극우주의적 개신교의 토대를 만든 한경직이 중심이 된 한국기독교총연합(이하 ‘한기총’)이 창립했다. 그런데 한기총이 개신교 보수대연합의 주역으로 부상한 것은 그로부터 십여 년이 지난 2003년 이후였다. 노무현 정부가 출범한 지 불과 5일 후에 열린 ‘3.1절 구국집회’가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열렸다. 주최 추산 30만 명이 운집했다. 그리고 이를 기점으로 두 번의 대선의 실패로 지리멸렬했던 보수대연합이 재구축되었다. 하여 한국의 21세기는 시작부터 민주화의 열망과 극우주의의 열망이 충돌하는 격전의 시간이었다.
이후 십년 남짓 한기총의 시대는 계속되었다. 이 기구의 영향력으로 극우주의는 보수대연합의 중심이 되거나 가장 강력한 세력의 하나가 되었다. 여기서 주지할 것은 이 시기 한기총, 그러니까 ‘전성시대 한기총’은 개신교의 대형교회 혹은 거대교단이 주축이 된 극우주의적 교회연합기구였다.
공교롭게도 한기총의 위상이 결정적으로 꺾이기 시작한 해는 2012년이었다. 그해 많은 개신교 교단들의 탈퇴 러시가 줄을 이었고, 그에 대립하는 교회연합기구인 한국교회연합(‘한교연’)이 창립했다. 이후 몇 개의 연합기구가 새로 만들어졌다가 사라졌고, 2017년 거의 모든 보수파 개신교 교단들이 가입한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이 창립되면서 교회연합 경합의 시대는 일단락되었다.
이들 보수파 교회연합기구들의 창립 명분에는 이념적 논점이 부각되지 않았다. 하지만 한기총을 제외한 다른 보수파 기구들은 중도보수의 정치적 색깔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정치적 갈등에 적극 참여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극우주의에 대한 부담 내지는 거부감이 한기총 시대를 마감하는 데 일정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한기총이 극우주의적 개신교 시대를 활짝 열고 있을 때 이와는 색깔이 다르다고 주장하는 또 다른 극우주의가 대두했다. 그들은 스스로를 ‘뉴라이트’(new-right)라고 불렀다. 이 명칭에 따르면 한기총 등은 ‘올드라이트’(old-right)가 된다. 말인즉슨 이른바 ‘뉴라이트’는 21세기형 극우주의를 주장한다는 것이다. 사실 다른 점이 있기는 하다.
뉴라이트는 일본 극우에 대해 매우 친화적이다. 어쩌면 조직적 연결망을 갖고 있을 수도 있다. 혹은 일본 극우파가 통일교와 연계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들 중 적어도 일부는 통일교와 연계되어 있을 수도 있다. 아무튼 한국의 뉴라이트도, 일본 극우도, 통일교도 동아시아 냉전적 안보동맹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사성을 갖는다.
뉴라이트의 또 다른 특징은, 개신교 교단 혹은 교회와의 연관성보다는, 학계와 종교계, 그리고 정치계의 극우 성향 엘리트 사이에서 수정주의 노선으로 확산된 측면이 강하다는 점이다. 해서 한기총이 대규모 대중활동으로 주목을 받았다면, 뉴라이트는 강좌와 강연, 저술, 칼럼 등을 통해서 계몽주의적으로 대중과 조우해 왔다. 해서 정통파 보수주의가 서민층과 좀더 친화적인 극우주의 운동이라면, 뉴라이트는 지식인 운동의 성격을 갖는다. 그러나 양자 사이에는 차이보다는 유사한 것이 더 많다. 그것은 뉴라이트를 표방하는 이들이, 이름의 강한 차별성에 걸맞는 새로운 극우의 담론을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것을 뜻한다.
전광훈과 메타교회(meta-church) 현상, 그리고 K-극우의 재구성
한데 전광훈은, 아니 전광훈 현상은 좀 달르다. 그가 처음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외환위기가 절정이던 1990년대 말이다. 그때까지는 이념적 색깔이 그를 상징하는 주요 표상(core representation)은 아니었다. 그는 이른바 ‘재테크목회’라는 새로운 장르의 목회 테크닉을 통해 외환위기로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고 있던 중소형교회 목회자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게다가 그는 탁월한 조직가였다. 그런 그가 한기총이 주도한 2003년의 시국집회에 참여했고, 당연히 조직가로서의 역량이 빛을 발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시기를 기점으로 그는 극우 이념의 전사로 스스로를 주체화시켰다는 점이다.
그가 능력을 보여준 또 한 번의 사례는 이명박 대통령 만들기 운동이었다. 당시 개신교는 전대미문의 보수대연합을 구축했다. 극우가 중심이 된 연합은 아니었지만, 극우도 강력한 지분을 갖는 선거연합이었다. 이때 전광훈은 더 이상 떠오르는 교회지도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능력에도 불구하고 개신교 주류파 사이에서 그는 변방의 천민 영웅에 불과했다. 교단 배경도, 가문도, 학력도 ‘듣보잡’에 불과한 자가, 연고주의가 가장 강력하게 작동하는 영역의 하나인 개신교에서 추앙받는 자가 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가 대표회장으로 선출된 2019년의 한기총은 이미 존재감이 없는 기구에 불과했다. 그런 그가 2020년 어간 극우의 영웅이 되었다. 교회가 아니라 ‘아스팔트 위’에서 말이다.
여기서 21세기 한국개신교의 전개에 관한 간략한 소개가 필요하다. 1990년대 중반 이후 개신교의 사회적 위상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추락했다. 이것은 선교가 더 이상 녹록치 않은 상황이 되었음을 의미했다. 한데 그 무렵 개신교 내에서 급성장하여 거대교회(메가처치 & 기가처치) 반열에 들어선 교회들이 속출했다. 이런 현상은 1980년대를 전후로 한 시기에도 있었다. 나는 이를 ‘선발대형교회’(이하 ‘선발’)와 ‘후발대형교회’(이하 ‘후발’) 현상으로 명명한 바 있다. ‘선발’ 현상이 전국의 대도시에서 일어난 것이라면, ‘후발’은 압도적으로 강남권(강남, 강동, 분당)에 집중된 현상이다. 그리고 ‘선발’이 시골에서 도시로 이주한 ‘새신자의 대대적인 유입’의 결과라면, ‘후발’은 강남권으로 이주한 ‘신자들의 수평이동’의 결과였다. 하나 더, ‘선발’의 경우 가난한 저학력 층의 신자화 현상이 두드러졌다면, ‘후발’은 고학력의 자산가층 중심의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후발’이 성장의 불꽃을 활활 태운 시기는 21세기 처음 십여 년 동안이었다. 그리고 이들 교회에는 수만 명의 신자들이 모였고, 다른 지역보다 신자들의 귀속의식이 매우 높았다. 그런데 이들 교회의 주된 이념성향은 ‘극우보수’가 아니라 ‘글로벌보수’ 경향에 더 경도되어 있었다. 이에 성장이 지체되거나 신자 이탈에 시달리고 있던 ‘선발’과 중소형교회에선 ‘후발’ 따라하기 붐이 일었다. 하지만 대부분 실패했다. 그리고 이 좌절감 위에서 ‘선발’과 중소형교회 목회자들은 교단정치에 적극 참여했고, 그 시기에 많은 이들이 ‘한기총’의 극우주의에 경도되었다. 한기총의 전성시대는 이렇게 실현된 것이다.
그런데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실패와 함께 극우의 사회적이고 종교적인 구심력은 급격히 와해되었다. 같은 시기 유럽과 미국, 일본에서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었는데, 한국에선, 최소한 절차적 민주주의가 약진했다. 그것은 극우의 실패가 초래한 반대급부적 현상과도 맞물린다. 보수대연합은 붕괴되었고, 심지어 박근혜 탄핵과 더불어 보수라는 것 자체가 ‘적폐’의 원흉으로 간주되었다.
전광훈의 메타교회 현상은 바로 이 시기에 등장한다. 앨런 허쉬(Alan Hirsch) 등 탈근대론적 교회의 관점에서 메타교회를 논한 이들은 이상주의적 관점에서 특성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탈근대적 특성을 갖춘 새로운 교회 유형의 한 사례를 나는 전광훈 현상에서 본 것이다.
그가 담임하는 교회는 매우 시끄러운 공동체이지만 전광훈 현상을 상징하기엔 평범하다. 하지만 그의 아스팔트 집회는 교회이면서도 교회 같지 않은 새로운 양식의 교회다. 열린 공간인 광장이 예배당을 대체했고(탈교회), 그가 쏟아놓는 종교적 발언은 수없이 이단시비가 붙었다. 그만큼 ‘탈교리’이기 때문이다. 또 ‘특임전도사’라는 명칭에서 보듯 성직의 분리주의적 특권성도 해체되었다.(탈성직) 사람들은 그를 목사라고 부르면서도 끊임없이 목사임을 의심한다. 요컨대 그의 집회는 매우 파격적인 탈근대 혹은 전근대적 메타성을 갖는 교회였다. 물론 그 메타성의 중심에는 극우주의가 있다.
수십 명에 불과했던 집회였는데, 점점 많은 이들이 몰려들었다. 많은 극우적 명망가들이 그를 지지했고, 자신의 교회에서 목사의 모호한 태도에 불만을 품은 극우 성향의 신자들 다수도 전광훈의 집회에 참여하거나 기부금을 냈다. 심지어 그 집회에는 타종교인과 비종교인들도 모였다.
종교와 세속을 가르는 근대적 이분법도 그의 집회에선 여지없이 해체되었다. 윤리와 비윤리도, 준법과 불법, 탈법의 경계도 해체되었다. 그는 공론으로 자리잡은 많은 것들을 불신의 영역으로 내몰았고, 아무리 보아도 ‘빌런’ 같은 이미지의 통치자, 그의 독재자다운 민주주의 파괴적 언행에 깊은 신뢰를 표했다.
해서 그는 다수 대중의 지지를 받는 인물일 수 없다. 하지만 탈진실 담론의 신봉자들에게는 매우 매력적이다. 또 이념적 극우주의자들은 그가 일으키는 소란스런 극우적 퍼포먼스에 열광했다. 하여 그는 더 이상 소통되지 않는 담론의 장에서 서로 다른 극우를 결속시켰다. 열광과 흥분은 그가 일으킨 결속의 비결이다. 그리고 전광훈 현상과 함께 K-극우는 변모 중이다.
온라인 극우, 광장과 접속하다
또 다시 2012년, 그 어간으로 가보자. 그때 ‘악동적 극우’가 온라인을 무대로 등장했다. ‘일베’가 그 현상을 대표한다. 개신교에도 ‘미디어선교’ 바람이 불었다. 시민사회에서 가짜뉴스 공급자로 낙인찍힌 미디어 활동가들이 조직적으로 활동하는 단체들이 속속 출현했다. 하지만 얼마 후 그 단체들의 활동은 미미해졌고, 새로운 활동이 개신교 내에서 유행했다. 그것은 ‘플랫폼선교’라고 불리웠다. 플랫폼은 조직적으로 양성된 활동가들의 공간이 아니다. 여기에 들어온 이들은 각자 하나의 독립적 개체로서 담론 생산자로 활동한다.
박건일은 그 무렵 온라인 미디어 기반의 극우활동가들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제시했다. 미국에서 ‘대안우파’(alternative right)라는 명칭이 이런 극우 운동을 대표하는 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한 때가 바로 그 어간이다. 박건일은 이들이 미디어 공간에서 극우적 공격성을 표출하는 직접적 동기를 ‘주목경쟁’(attention struggle)이라고 표현했다. 더 주목받기 위해 자극적인 공격성을 표출한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이데올로기는 ‘가짜 진실’의 불과했다. 그러니까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주목경쟁이 극우 활동의 구체성을 만들어낸다는 얘기다.
그런데 온라인 미디어는 주목경쟁의 승자에게 일종의 성공보수를 주는 매체환경을 갖고 있다. 즉 극우주의적 미디어 활동가들은 주목경쟁을 통해 혐오경제의 수혜자가 된다는 것이다. 물론 온라인 미디어가 혐오경제와 특별히 친화적인 것은 아니다. 가령 팬덤 현상은 이와는 다른 효과를 만들곤 한다. 팬덤은 기본적으로 혐오가 아니라 ‘사랑’을 기반으로 한다. 그들이 추앙하는 스타는 공론장에서 ‘착한 언행’을 과시한다. 그리고 그이를 추앙하는 팬들은 그에 못지 않게 착함을 과시적으로 실천한다. 자신들이 추앙하는 스타를 더 착하게 포장하기 위함이다. 나는 이것을 ‘사회적 착함’(social goodness)이라고 명명한 바 있다. 온라인 플랫폼은 그런 ‘사회적 참함’이 대중에게 환호를 받을 때도 일종의 성공보수를 준다. 그것은 일종의 ‘호혜경제’다. 요컨대 혐오경제와 호혜경제가, 마치 흑백요리사의 경합처럼, 미디어 공론장에서 경쟁을 벌이는 시대가 21세기다.
2025년, 팬덤 대중과 온라인극우 대중의 일부가 정치적 주체로 부상했다. 팬덤 대중은 이미 스타 홍보 활동을 적극 펴왔기에 사회성이 잘 발달되어 있다. 또 설득적이고 대화적이다. 반면 온라인극우 대중은 사회성이 약하다. 또 그들의 주목경쟁은 설득력보다는 자극적인 퍼포먼스와 친화적이다. 해서 그들은 오프라인과 접속하기 위해 전광훈 현상이 작동하는 광장의 플랫폼 속으로 결집했다. 2025년 전광훈은 광장에서 극우를 재활성화시키는 구심체였다.
그리고 광장으로 나온 온라인극우 행동가들은 매우 창의적으로 정치성을 표현했다. 너무나 그들답게 전례없이 자극적인 퍼포먼스였다. 법원에 대한 테러가 그것이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들은 이제까지 겪어보지 못한 짜릿한 쾌감을 체험했을 것이다. 또 사회 전체, 아니 전 세계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팬덤 대중이 정치적 주체로 변모하면서 벌인 행동은, 너무나 그들스럽게, 노동자와 농민과 장애인과 연결되는 공조의 확장성이 돋보였다. 이때 이들의 ‘사회적 참함’은 순기능이 빛을 발했다. 반면 온라인극우 활동가들의 ‘사회적으로 위악’적 행동은 그들을 고립시켰다. 또 그들에게는 자신이 상상한 것 이상으로 엄밀한 책임이 부가될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2025년에 K-극우는 일단 실패했다. 그만큼 민주주의는 기회를 얻었고, 극우주의는 기회를 상실했다.
물론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정치적 주체가 된 이들은 온라인뿐 아니라 오프라인 공간에서도 더 많이 정치적 행동을 펼 것이다. K-극우는 고립되었지만, 그들끼리는 좀더 긴밀해졌다. 또 그들의 테러리즘은 계속될 가능성이 크다. 유럽과 미국에서 극우범죄가 급증한 것처럼. 어쩌면 이것은 상상하기 싫은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찰머스 존슨(Chalmers Johnson)이 테러리즘은 그것에만 집중하여 체계적 응징에만 집착할 때 ‘역풍’(blowback)이 불어 파국적 현실을 더 강화할 수 있다.
해서 시민사회는 테러리즘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에 대해 숙고하지 않을 수 없다. 테러리즘의 효과가 사회를 더 폭력적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광기에 휩싸인 대중을, 그 행위만이 아니라, 그 소리를 진지하게 해석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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