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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평

무대 ‘뒤편’에도 조명을 - 한길수 교수의 “Hereditary Succession in South Korean Churches”에 대하여

어제(2025.10.18) 한국언론학회가 열렸는데, 흥미로운 연구들이 여럿 있었지만 써야할 글에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사정이라, 토론자로 초대된 '종교와 커뮤니케이션 연구회' 세션만 참가했다. 한길수(Gil-Soo Han. Monash University) 교수의 “Communicative Power and Inherited Pulpits: Media Narratives of Hereditary Succession in South Korean Churches”의 발표가 있었고, 나는 두 명이 토론자 중 하나였다. 
한길수 교수의 논문은 그가 저술하고 있는 책의 일부인데, 아직 출판되지 않았고, 논문을 저술한 시기는 작년이었다. 꼼꼼한 리서치가 돋보였지만, 외국에서 연구한 것인데다, 한국어에도 충분히 익숙한 연구자가 아닌 탓에 어려움이 많았던 듯하다. 충실한 연구에 비해서 종합적으로 읽어내는 안목은 잘 보이지 않았다. 토론 시간에 말했듯이 한국과 멀리 떨어져 고립된 환경에서 연구한 것의 어려움 탓인듯하다. 그가 사용한 이론도 좀 낡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아무튼 그의 논문은 여기서 공개할 수 없고, 급하게 쓴 나의 토론문만을 공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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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내가 논평한 글의 저자인 한길수 교수로부터 정중한 편지를 받았다. 그의 편지를 보고 위의 내 코멘트를 보니, 과한 표현이 많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떤 생각으로 이렇게 표현했는지 생각나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나의 문구로 한길수 교수를 모욕한 셈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한 교수께 정중히 사과드린다. '종합적으로 읽어내는 안목이 잘 보이지 않았다'는 표현이나 사용한 이론이 낡은 느낌'이라는 것은 표현이 과했다. '종합적으로 읽어내지 않았다'는 말은 교회 세습에 현미경을 들리대기보다는 권력 세습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 또 권력 세습 현상은 세계화 소용돌이에 휘말린 한국은 이미 파워엘리트 사회로 진입해 버렸고, 그 안에서 메리토크라시에 집착하는 한국사회 엘리트 집단의 무한경쟁체계가 교회에서 작동하는 방식을 주목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 자칫 교회세습 담론이 권력세습 현상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는 장치로 작동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말하려던 것인데, 그렇다고 교회 세습에 대한 꼼곰한 연구 자체를 비아냉대는 식으로 말한 것은 정말 잘못된 태도다. 그리고 한 교수님이 리처드 니버를 참고했다는 걸 문제시한 것 또한 부적절한 말이었다. 그의 이론 활용이 어떤 점에서 문제인지를 말하지 않고 '낡은 이론' 운운하는 것은 너무나 섣부를 말이었습니다. 역시 한 교수께 정중히 사과드린다. 
아래에 한 교수님의 정중한 문제제기를 담은 편지를 첨부한다. 

언급하신 내용과 달리, 발표 당일 말씀드렸듯이,  논문은 ‘The Church that Laid the Golden Eggs’: Catalysts for Hereditary Succession in South Korea’s Protestant Church라는 제목으로 지난 7 Asian Studies Review 출판되었습니다.  학술지는 해당 분야에서 상위 25% 드는 Q1 학술지로, 엄격한 이중 맹검 심사(double-blind peer review) 절차를 거쳐 출판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출판되었다고 해서 완성된 글은 아니기에 논평해 주신 내용은 감사히 받았습니다. 다만, 독자들이 논문을 직접 읽거나 발표를 듣지 못한 상태에서 선생님의 논평만을 접하게 되면 자칫 오해의 소지가 생기거나 균형 잡힌 이해를 방해할  있습니다. 따라서 논문이 이미 출판되었기에 블로그에 논평과 함께 올려 주시는 것이 독자들의 폭넓은 이해를 돕는  더욱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논문의 저자로서, 선생님께서 제기해주신 일부 지적 사항  논평의 내용에 대해  가지 아쉬운 점과 저의 견해를 정리하여 선생님들, 그리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합니다.

논평 관련 저자의 견해

1. 발표 당일에는 청중들과의 대화가 기다리고 있었고, 논평에 대한 반론을 상세히 제기할  있는 시간적 여유가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초대받은 손님으로서 저의 부족한 부분을 겸허히 수용하는 방식으로 답변을 대신했음을 밝힙니다. 이것이 발표 당일날 저자와의 깊은 대화에 초대해 주셨지만 그렇게   없었던 현실적인 배경이었습니다.

2. 연구의  평가 기준에 대하여: 해외 거주 학자가 한국 사회를 연구했다는 사실이 연구의 질과 관계있는 것으로 이해되거나 평가되어서는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울러, 저는 한국에서 고등교육을 받았으며 한국어로 출판된 관련 논문들을 충분히 이해하고 소통할  있고, 한국어 논문 출판  월간지, 한국어/영어 방송 등을 통하여 대중들과도 소통할  있는 학자임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3. 연구 환경  학문적 교류: 제가 비교적 한국에 있는 학자들과 긴밀하게 교류하고 있음에도, 지리적 환경 때문에 고립되어 연구하는 측면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저는 다양한 연구 서적  학문적 성과물들과 깊이 대화하며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또한, 기회 있는 대로 한국학  국제 학회에서 연구를 발표하며 적극적으로 피드백을 수렴하여 논문에 반영하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4. 이론의 선택과 고전의 가치에 관련하여: 선생님께서 제가 사용한 이론이 '낡은' 느낌을 준다고 언급하셨으나, 저는 최신 이론만이 사회현상을 훌륭하게 설명할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저에게는 고전적 이론이 지닌 가치와 현재 사회현상을 깊이 있게 설명하는 능력 또한 매우 중요하며, 이를 쉽게 버리지 않는 것이 저의 연구 철학입니다. Richard Niebuhr (1951) “Christ and Culture” 이제 고전으로서의 가치가 있으며  논문의 얼굴과 같은 역할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연구 이론의 근간으로 사용된 것은 비판적 사실주의(Critical Realism)”입니다. 이는 현재 사회과학에서 가장 각광받는 이론 중의 하나로서,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장면들뿐만 아니라 무대 백그라운드에서 벌어지는 더욱 복잡하고 세심한 메커니즘, 그리고  사이의 상호작용을 통해  사회 현상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가장 심도 있게 밝혀줄  있는 이론 중의 하나입니다.

5. 평가자의 관심과 저자의 의도의 충돌: 저는 오랜 기간 동안 나름 저명한 학술지에 논문을 출판해 왔으며, 다수의 학술지에서 논문 심사위원으로 활동하며 학술 연구의 평가 기준에 대한 경험적 이해를 쌓아왔습니다.  논문은 참고 문헌 목록을 포함하여 1 자로 엄격히 제한된 소논문의 형식으로 기획되었기에, 이러한 형식적 제약은  논문이 다룰  있는 연구 범위와 깊이를 사전에 한정하고 있음을 밝힙니다.

저의 경험에 비추어  , 논문을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저자의 관점 연구 의도 중심으로 다음과 같은 논리적 구성의 일관성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 저자가 의도하는 바에 따라 이론적, 방법론적으로 얼마나 논리적으로 작성되었는가.
  • 설정된 연구 과제들을 한정된 지면 내에서 충실히 다루었는가.

 논문은 명확하게 설정된  개의 연구 과제를 다루는 것을 목표로 하였습니다. 저자는   가지 과제를 제한된 분량 내에서 집중적으로 논하기 위해 연구의 범위를 의도적으로 좁혔습니다.

선생님께서 한국 교회 세습에 관한 깊은 지식이나 파워 엘리트 등의 특정 관심 이론을 바탕으로  논문을 바라보시는 것은,  연구에 새로운 국면을 제시해 주실  있는 귀중한 측면이   있음을 인지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점은, 저의 짧은 논문에서 다루고자 하는 연구 의도를 대부분 밀어두시고 평가자의 개인적인 관심이나 기존 지식이 작용한 듯한 인상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 범위 확장 요구: 마치 "교회 세습에 관하여 최소한  1 분량으로 쓰는  옳지 않았겠느냐" 식의 물음을 하시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이는  논문의 형식적 제약을 벗어난 요구입니다.)

 논문을 '한편의 연극'이라는 메타포를 사용해 평가하신 점은 흥미롭습니다.  소견으로는, 논문 평가자가 저자의 의도와 논문의 형식적 제약을 존중하며 평가를 진행해 주시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연극의 연출 기획 의도와 관중의 평가는 다를  있지만, 선생님의 전문적인 비평이 해당 연구의 내재적 논리와 의도를 얼마나 객관적으로 파악했는지에 따라  가치가 부여된다고 판단합니다.

6. 교회 세습 문제의 연구 가치에 관하여, 일부에서는 교회 세습 비율이 아주 작은 비율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수백 개의 교회가 세습을 단행했으며,  세습 문제가 한국 기독교의 전반적인 이미지를 형성하는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개의 교회가 세습을 했을지라도 그것이 한국 교회에 미친 영향력이 지대하다면, 이는 충분히 연구할 가치를 제공한다고 생각하며,  부분에 대한 학문적 논의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다시 한번 귀한 논평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한길수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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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뒤편에도 조명을

한길수 교수의 Hereditary Succession in South Korean Churches”에 대하여

 

 

 

교회의 목사직 세습은 한국의 시민사회가 교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주요 항목의 하나다. 그럼에도 이에 대한 신학자들의 비판적 연구는 많지 않다. 그것은 교단신학교 외에는 이렇다 할 신학연구기관이 부재한 탓이다. 또한 분과학문체계가 여전히 견고한 학문제도로 자리잡고 있는 현실에서 신학적 논점은 비신학 영역에서는 거의 다뤄지지 않는다. 이는 신학자가 아닌, 개신교 전문가가 생존할 가능성이 매우 제한적임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종교와 커뮤니케이션 연구회의 존재는 높이 평가할 가치가 충분하다. 또 이런 꼼꼼한 논문을 제출한 저자의 노고에 신학연구자로 깊은 감사를 표한다.

이 글은 한 편의 연극이다. 치밀하고 냉철하다. 장르는 사회극. 극이 펼치는 신랄한 비평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그 스토리라인에 완전히 공감하는 것은 아니다. 곳곳에 틈이 엿보인다. 곳곳에 작가의 의도에 균열을 내고 싶은 욕구를 느낀다. 수없이 많은 빈틈을 비집고 들어간 나의 대사로 작가와 논쟁, 아니 대화하고 싶다.

아차, 정신을 차리자. 포럼이고, 논평자다. 주어진 시간은 10. 말을 줄여야 한다. 내가 제일 하고 싶은 논점에만 집중하자. 내가 제일 아쉬웠던 것만 말해보자.

이 연극은, 내가 보기엔, 대사 속에, 동작 속에, 무대 셋트 속에, 무대 뒤편을 연상하게 하는, 그러니까 오프 스테이지(Off-stage) 기법을 담아내야, 그 비평이 진가를 발휘한다. 한데 나의 판단으로는, 아쉽게도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다.

교회의 담임목사 세습(이하 교회세습’)1990년대 이후 한국의 시민사회가 개신교를 비판적으로 보는 가장 강렬한 의제의 하나다. 뿐만 아니라 개신교 내부의 자정운동도 가장 집중적으로 다룬 의제의 하나였다. 한데, 저자가 제시하는 교회세습현황은 전체 교회의 0.4%를 넘지 않는다. 나의 조사에 의하면, 2011년 당시 0.5% 이하였다. 대형교회는 그보다 훨씬 높은 빈도를 보여, 6% 정도로 추산되었다. 2004년 당시 1.7%의 교회가 대형교회로 추정되는데, 2011년으로 환산하면 그 비율은 더 낮아졌을 것이다. 그러니 1.7% 이하의 대형교회가 12배나 높은 교회세습을 단행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낮은 비율의 교회세습으로 개신교 전체를 읽는 것은 지나친 과대평가가 아닐까. 그렇다면 이 글의 비평은 극소수의 교회만 단행한 교회세습이 왜 개신교 전체를 향한 비판적 논점이 될 수 있는지를 해명해야 한다. 내가 보기엔, 바로 그렇기 때문에 교회세습에 집중한 탓에, 보지 못했던, 아니 볼 수 없었던 것들을 조명하고 그것과 교회세습이 연관되어 있는 구조적 맥락을 해독해내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은, 커뮤니케이션학의 이론을 끌어오면, ‘프레이밍(framing)에 관한 것이다. 나는 프레이밍의 그림자 효과(은폐효과, overshadowing)에 관한 주목할 만한 연구를 남긴 샨토 이옌가(Shanto Iyengar)에피소드적 프레이밍(episodic framing) 개념을 빌려서 나의 문제제기를 간략히 논해보려 한다.

저자는 그렇게 논지를 편 것은 아니지만, 내가 보기엔 이 글의 교회세습에 관한 비평도 에피소드적 프레이밍의 위험을 내포한다. 그 현상이 포함된 구조적 양상을 포괄적으로 살피는 데 충분히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개신교의 대성장기 이전과 이후를 비교하는 한 연구에 의하면 1970년대 이전과 이후 개신교 목사의 담임목사 재임기간이 뚜렷히 변화했다. 이전에는 순회목회 현상이 보다 일반적인 관행이었다면 이후에는 한 교회에 장기간 재임하는 현상이 두드러지게 많아졌다. 한데 다른 연구에 의하면 목사의 장기간 재직 현상은 대형교회로 성장하는 교회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그 외에도 교회의 가용자원에 대한 독점 현상과 가용자원을 성장에 투여하는 능력이 겹쳐지면서 대형교회가 탄생하게 되었다는 얘기다. 그렇게 대대적인 성장을 구가한 교회들이 대형교회의 대열에 진입하는 러시 현상이 일어난 시기는 대략 1980년 어간으로 보인다.

한데 대형교회 혹은 성장형 중형교회 목사들도 시간이 흐르면 은퇴하지 않을 수 없다. 교회법상 대략 70세가 되면 은퇴해야 한다. 그러면 당연히 세대교체가 이뤄지지 않을 수 없다. 한데 실은 그게 그리 단순하지 않다. 재임기간 동안 가용자원을 독점한 이가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일은 그리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해서 건강만 허락한다면 은퇴했음에도 사실상의 권력을 유지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때 은퇴목사제도가 권력 연장의 장치로 작동한다.

한편, 교회의 가용자원을 독점한 목사는 매우 높은 임금을 받는다. 뿐만 아니라 임금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기타소득을 받는다. 자녀의 학비와 사교육비, 유학비도 기타수입으로 책정되는 것은 관례다. 만약 자녀 중에 목회자의 길을 가는 이가 있다면, 그는 다른 이들보다 학벌이나 인맥의 후광을 톡톡히 누린다. 그런 이들 중 매우 소수가 교회세습의 수혜를 받는다. 하지만 목회자가 되든 다른 길을 가든 그는 사회의 파워엘리트의 대열에 진입하기에 매우 유리한 위치에 있다. 그러니까 교회세습만이 아니라, 다양한 특권적 기회를 공정하지 않은 과정을 통해 세습되는 현상을 가리키는 권력세습현상을 함께 살피는 것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극소수의 목사에게 한정된 교회세습에 대한 비판적 의제에 집착하는 에피소드적 프레이밍은 이런 구조적 요인을 살피지 못하고, 다분히 도덕적인 논의로 빠져들 수 있다.

1990년대에 교회세습이 문제로 부각된 것처럼, ‘권력세습현상도 그 시기와 깊은 연관이 있다. 특히 1997년 외환위기는 중요한 변동의 계기다. 그때를 기점으로 한국사회는 세계화의 격랑에 휘말려들었다. 세계화를 대표하는 이데올로기인 신자유주의는 무한경쟁의 인간학을 추구한다. 한데 실은 이 경쟁의 이데올로기는 철저히 불공정한 현실에 둘러싸여 있다. 출발선이 다르고 경쟁을 위한 가용자원의 형성도 차별적이다. 그런 자원경쟁은 사적 연줄망(closed social networks) 만들기 전쟁을 의미한다. 2천년대 어간부터 이런 연줄망 전쟁이 치열해졌다.

한데 바로 이 시기에 개신교는 매우 흥미로운 변화를 맞는다. 우선 초고속 성장세가 급격하게 멈추고 성장정체 내지는 역성장의 시대가 도래했다. 한데 놀랍게도 이 시기에 또 한 번의 대형교회 러시가 일어난다. 나는 1980년 어간의 러시와 2천년 어간의 러시를 구별하여, 각각을 선발대형교회(이하 선발’)와 후발대형교회(이하 후발’)라고 명명한 바 있다. ‘후발은 강남권(강남, 강동, 분당)에 집중되어 있고, 다른 교회에서 이동한 중상위계층 신자들이 대대적으로 유입되면서 탄생했다. 이것은 후발이 사적 연줄망 만들기에 더 없이 유리한 사회적 장의 성격을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 요컨대 후발현상은 파워엘리트가 되기 위한 치열한 경쟁의 시대정신과 종교성이 결합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후발과는 달리 선발은 대성장기에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한 이들이 대대적으로 개신교 신자가 됨으로서 출현했다. 하여 선발의 담임목사는 그야말로 군주적 지도력을 갖고 있다. 반면 후발의 경우엔 목사보다 훨씬 강력한 자원능력을 갖춘 이가 즐비하다. 즉 그런 영향력 있는 평신도를 유치하는 데 성공한 이가 성공한 후발의 목회자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후발의 경우엔 교회세습현상이 현저히 적을 수밖에 없다. 담임목사가 압도적인 독점적 자원을 갖추고 있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세습에만 주목하면 볼 수 없는 또 하나의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이 시기 한국사회 전반은 권력세습에 익숙해져 있다. 수많은 미디어들이 능력 있는 이들의 권력 세습을 선망하게 하는 담론을 널리 유포시켰다. 그럼에도 교회세습에 대해서는 사회 전체가 비판적인 시선을 아낌없이 퍼붓는다. 이러한 시각의 비대칭에서 그림자효과는 없을까. 혹 시민사회는 교회세습에 대한 비판을 통해 사회가 좀더 공정해지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관객이 연극의 무대 뒤편을 전혀 상상하지 못하는 것처럼 이미 만연되어 있는, 심지어 세습할 권력을 거의 갖고 있지 못한 이들조차 권력세습현상을 선망하고 있음에도, 그것이 불공정한 현상임을 눈치채지 못하게 하는 장치로 작동하는 것은 아닌가.

이 논문에서 나는 한 편의 연극을 상상했다. 나의 잘못된 관람 탓일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이 연극은 무대 뒤편을 전혀 상상하지 못하도록, 무대에만, 배우에만 집중하도록 설정되어 있는 것일 수 있다. 한데 말했듯이 이 사회극은 무대 뒤편을 연상해낼 수 있을 때 좀더 완벽한 비평이 될 수 있다. 해서 어쩌면 이 글이 보여주는 무대는 다음 극으로 이어지는, 그리고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사회극의 일부이면 좋겠다. 그렇다면 내가 말했던 무대 뒤편은 리볼빙 스테이지(revolving stage)의 다음 무대인 셈이다. 해서 현재의 무대에서 벌어지는 장면들에서 다음 무대의 이야기가 연상되고, 그 다음으로 이어지면서 보다 큰 틀의 사회극으로 완성되는 것이면 좋겠다. 그러면 나와 같은 부실한 관객은 더 완전한 사회극의 청중으로 사회를 읽어내는 기회를 얻게 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