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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포스트종교개혁 시대 종교국경을 해체하라

이 글은 [한겨레신문] 2016.12.30자 토요판 특집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 ... 2017년이 기억해야 할 기억들>에 게재된 것입니다.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77680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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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종교개혁 시대 종교국경을 해체하라

 

 

15171031, 마르틴 루터가 로마교황청의 면제부 지침에 대한 95개 항목으로 된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대학 성당 정문에 게시했다. 실제 있었던 일은 아닌 것 같지만 이 극적인 묘사는 종교개혁운동의 상징적 사건으로 널리 기억되었다. 그리고 전 세계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은 이 날을 종교개혁기념일로 자축해왔다.

2017년은 종교개혁 5백주년이 되는 해다. 하여 돌아올 1031일은 어느 해보다도 성대한 기념 행사가 치러질 것이다. 한국의 개신교회들도 이 날을 기념하기 위해 많은 준비를 해왔다. 그런데 500주년이라는 의미심장한 숫자만큼이나 특별한 의의는 무엇일까? 지금까지 여러 단체들이 준비해온 500주년의 의의들은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성경의 권위를 회복하고 세계 복음화에 나서는 계기로 삼자는 보수주의적 관점, 부패하고 타락한 교회를 쇄신하자는 리버럴한 도덕 재무장론의 관점, 그리고 교회와 사회의 민주화와 신앙의 공공성 확대를 모색하자는 진보주의적 관점 등이다.

이런 주장들은 그 논지의 이념적 편차가 크지만, 생각의 방식은 유사하다. 오늘의 한국 교회와 사회가 종교개혁의 가르침으로부터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종교개혁은 보편사적 사건이다라는 믿음이 전제되어 있다. 성경이 무시간적 진리의 책이라는 주장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종교개혁과 우리의 과제를 치밀하게 묻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그 결과 종교개혁의 의의에 관한 무수한 말을 늘어놓지만 실천될 수 없는 뜬 구름 잡는 얘기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1031일의 기념식은 말만 무성한 내실 없는 일회성 잔치로 그쳐버릴 우려가 농후하다.

하여 한국개신교는 어느 것도 철저히 쇄신하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다른, 불온한 의도와 결합될 수 있다는 음모론이 제기되었다. 종교개혁을 기념하는 일련의 프로그램들이 절정에 이르는 시점인 1031일은 대통령선거가 막바지에 있을 무렵이라는 점에서, 지난 2007년의 대선정국처럼 개신교도가 총동원된 보수주의적 선거연합을 위해 종교개혁 담론이 이용될 것이라는 의혹이다. 다행히도 이런 음모론은 기우에 그칠 것 같다. 대통령 탄핵 국면으로 대선일이 상당히 앞당겨질 것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한데 입에 발린 말만 넘치는 행사에 그칠 것이라는 문제제기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종교개혁을 보편사적 사건으로 보는 한 불가피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종교개혁이 16세기 유럽 역사의 일부라는 점을 종종 간과한다. 하여 보편사로서의 유럽 역사의 변두리로 우리를 편입시켜 종교개혁의 의미망 안에서 우리를 해석하는 우를 범한다. 그럴 경우 우리의 종교개혁 담론은, 의도하지는 않았더라도, 식민지적 백성의 자의식을 구성하는 또 하나의 말의 장치에 그치게 된다. 또한 쇄신을 이야기하면서도 쇄신할 수 없는, 현장성이 결핍된 이야기가 되고 만다.

거시정치학적 관점에서 유럽의 역사와 종교개혁의 만나는 지점에 제국종교에서 국가종교로의 이행이라는 종교체제의 변동이 있다. 서기 313년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가 그리스도교를 제국의 공인종교로 인준한 이후, 그리스도교 신앙 속에는 제국의 상상력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 이후 교황은 제국적 통합체로서의 유럽정치의 중심이 되었다. 즉 유럽은 제국적 통합체이고 교황과 교회는 그러한 제국적 체제로서의 유럽 정치의 중심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제국적 체제로서의 유럽이 국민국가적 체제로서의 유럽으로 이행하고, 제국교회의 이상이 국가교회의 이상으로 이동하는 일련의 근대적 역사의 출발점에 종교개혁이 있다. ‘근대적 국민국가국경(border)의 탄생과 맞물려 있다. 그 이전에는 변경(frontier zone)이 있었다. 변경은 이편과 저편의 명료한 경계 대신 이편이기도 하고 저편이기도 하는 두 가지 성격이 공존하고 교류하는 장이다. 반명 국경은 이편과 저편을 나누는 명료한 선이다. 국민국가란 이런 명료한 선으로 구획된 국가체제다.

이 점에선 종교도 마찬가지다. 제국종교 시대에는 종교간 경계가 불명료했다. 해서 지배세력들은 끊임없이 이단을 척결하는 정책을 발효했지만, 대부분의 대중은 경계 위에 있었다. 특히 변경 지대의 대중사회에선 이웃 간에 이질적인 종교가 공존했고 종교간 혼합 현상도 빈번했다. 그런데 근대종교로서의 개신교에는 국경이 가설되었다. 교회 대중의 가슴 속에 이질적인 것에 대한 공포와 분노, 적대감이 체화되어 종교 갈등이 엘리트만이 아니라 대중 사이에서도 두드러지게 되었다. 종교개혁은 그러한 종교성을 낳은 역사의 출발점이었다.

한데 18~20세기에 그러한 종교성을 지닌 그리스도교가 유럽 외부의 수많은 피식민지로 유입되었다. 물론 한반도도 예외가 아니다. 한반도에서 그리스도교를 수용한 세력은 다양했지만 주도권을 쥔 것은 제국주의 종교로서의 그리스도교였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그리스도교적 진리가, 유럽적 진리가 아니라, 보편적 진리라는 관점을 기반으로 한다. 그것이 한반도 역사에서 그리스도교가 늘 서구를 대변하며 존속한 이유다. 특히 미국교회의 압도적 영향 아래 있던 개신교는 항상 친미 세력의 앞잡이가 되었다.

그런데 1990년대 이후 한국의 종교 지형에 의미심장한 변화가 일고 있다. 많은 종교인들, 심지어 종교국경에 가장 민감했던 개신교 신자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종교의 국경에서 이탈하기 시작했다. 하여 많은 개신교도들은 가톨릭과 불교, 심지어 무속 등의 종교적 진리들을 존중하며 그런 행동을 가시화하기 시작했다. 또한 비종교적 진리에 대해서도 열린 태도를 갖게 된 개신교도들이 늘었다. 나는 이런 이들을 멀티신자라고 불렀는데, 이러한 멀티신자 현상은 한국에서뿐 아니라 전 지구적이다. 그것은 지구화 현상의 일부인 것이다.

지구화 시대, 바야흐로 세계에는 국민국가의 국경을 넘는 이들이 넘쳐나고 있다. 그리고 그런 현상에 직면하여 국경을 더 높이 쌓고자 하는 자들과 새로운 변경을 만들려는 이들이 대립하고 있다. 후자는 타자에 대한 환대를 제도화하고자 한다. 국민국가체제로서의 유럽도 유럽연합체제로 변동하면서 환대의 범위를 확장한 바 있다. 물론 그 환대의 제도화는 여전히 유럽 중심주의적이지만 말이다.

아무튼 유럽연합의 등장은 국민국가의 국경을 전제로 발전해왔던 주권과 인권 개념의 수정을 불가피하게 했다. 마찬가지로 종교도 국경의 해체를 도모하는 종교성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멀티신자를 포함해서, ‘익명의 그리스도인’, ‘종교적이지 않지만 영적인’, ‘귀속성 없는 종교성등의 개념이 공통으로 담고 있는 취지는 종교국경 너머를 향해 열린 종교성의 모색에 있다.

하여 우리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왜, 어떻게 기념해야 하는지를 다르게 고민해야 한다. 바야흐로 포스트종교개혁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종교개혁의 시대는 국가종교, 그러한 종교성을 향한 제도화가 추구되었다. 하지만 포스트종교개혁의 시대는 종교국경의 해체, 경계 너머 타자에 대한 환대의 종교성을 도모해야 하는 시대다. 교회는 그렇게 이웃을 대하고 섬기며 존경하는 방향으로의 쇄신에 직면해 있다.